<19화>
새벽에 발작하는 엄마를 피해 집 밖으로 뛰쳐나와 컴컴한 동네 어귀에 지박령처럼 우두커니 서 있었던 때도 있었다. 두어 시간 후 들어가 보면 엄마는 담요 속에 파묻혀 잠들어 있곤 했다.
그런 식으로 쫓아낸 딸의 안위를 걱정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 그런데 새삼 외박을 했다고 그렇게까지 난리를 피우는 것은 이상하다. 엄마가 광분한 것은 제가 ‘남자’와 외박을 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었다.
준영은 엄마의 주민등록증을 본 적이 있었다. 언젠가부터 엄마는 무척 빠르게 늙어 그다지 위화감이 없었지만, 엄마와 제 나이 차는 사실 열일곱 살밖에 나지 않았다.
그녀가 아버지의 존재를 궁금해하지 않으려는 이유는 정상적인 인간일 리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지금의 저보다 어린 여자애를 임신시켜 놓고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았으니까.
혹시 불의의 사고로 죽은 거라면 짜증 날 정도의 불행이라고밖에 할 수 없을 테지만.
그것이 사랑이었든 다른 이유였든 열일곱에 저를 낳은 엄마는 남자와 외박하고 돌아온 딸을 보고 눈이 뒤집혀 달려들었다. 어쩌면 과거의 자신을 겹쳐 보았을지도 모른다.
그런 사람이 돈을 받고 남자에게 몸을 맡겼을 리 없었다.
오혜수, 이 똥멍청이.
쯧, 하고 혀를 찬 준영의 귀가 순간 쫑긋 섰다. 바스락거리며 풀을 밟는 발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얼른 펜을 쥐고 노트에 단어를 적기 시작했다. 오래지 않아 문이 열렸다.
“…….”
안으로 흘러들어 온 바람을 타고 범진의 냄새가 들어왔다. 준영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고개도 들지 않았다.
필기체를 휘갈기는 그녀의 손을 멀뚱히 바라보던 범진이 작게 하품을 하며 아무렇지 않게 싱크대 앞으로 다가갔다.
“라면?”
“안 먹어.”
“달걀 두 개?”
“안 먹는다고.”
이를 악물고 대꾸했지만 싱크대에서 손을 씻은 범진은 아랑곳하지 않고 부스럭거리며 라면을 꺼냈다. 그가 네 개째 꺼내는 소리를 들은 준영이 고개를 돌리며 버럭 소리쳤다.
“야, 안 먹는다니까! 너 혼자 다 먹어!”
천천히 이쪽을 돌아보는 범진의 눈매가 서늘했지만 그런 것에 기죽을 윤준영이 아니다. 어디 한번 해 보자는 눈으로 마주 보자 범진이 한쪽 눈썹을 비딱하게 치켜올렸다.
“짜증 내냐, 지금?”
“낸다. 왜. 어쩔래.”
눈에 힘을 바짝 주고 딱딱 끊어 말하자 무어라 입을 열려던 범진이 허, 하고 고개를 내저었다.
“많이 컸다. 나한테 화풀이를 다 하고.”
“화풀이?”
“옥상에서 시비 걸린 것 때문에 짜증 난 거 아냐?”
이게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지.
입을 앙다문 준영이 아예 그를 향해 몸을 돌려 앉았다.
“그것 때문인 건 아니지만 말이 나왔으니까 물어보겠는데, 대체 오혜수랑 무슨 할 말이 있었던 거야?”
“할 말?”
냄비에 물을 받으며 반문하는 태연자약한 태도가 거슬리기 짝이 없다. 준영은 그를 쏘아보며 냉랭하게 말을 던졌다.
“네가 할 말 있다고 걔만 빼돌렸잖아.”
아, 하고 눈썹을 까닥인 범진이 흘끗 그녀를 돌아본다. 눈을 부라리자 오히려 범진은 피식 웃으며 싱크대를 짚은 채 비스듬히 몸을 돌렸다.
“그래서 지금 바람난 남편 취조하듯이 묻는 거냐?”
“허, 뭐가 어째? 바람? 너 지금 그게 우리 사이에 어울리는 단어라고 생각하니?”
기가 막혀 벌떡 일어나며 외치자 범진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럼 대체 뭐……, 아.”
무언가 알아챘다는 듯한 범진의 표정에 준영은 치뜬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범진이 서랍장을 가리켰다.
“진통제 아직 남아 있다. 필요하면 먹어. 밥부터 먹고.”
“나 생리 중 아니거든?”
“넌 그 입 좀, 어떻게 안 되냐?”
“생리통 얘길 먼저 한 게 누군데? 너도 있다는 생리통 얘기를 내가 왜 못 해?”
콧잔등을 실룩이며 비아냥거리자 짧게 숨을 들이쉰 범진의 눈꼬리가 가파른 선을 그리며 올라간다. 그의 인내심이 반쯤 떨어지는 듯한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지만 준영은 물러서지 않았다.
팽팽한 시선이 양보 없이 부딪친다. 한동안 이어지던 정적을 깨뜨린 것은 범진이었다.
그는 이내 한숨을 내쉬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중얼거리는 듯한 나직한 목소리가 손 틈새로 흘러나왔다.
“거기서 널 알은척할 수는 없잖아.”
살얼음이 맺힐 기세였던 준영의 눈이 움찔했다. 순하게 동그래진 그녀가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왜 못 해?”
“몰라서 물어?”
“알면 내가 왜 물어?”
막힘없이 받아치자 눈을 가늘게 뜨고 있던 범진이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그럼 모르는 채로 있어.”
준영은 물을 마저 받은 냄비를 버너에 올리는 범진의 뒷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빙글빙글 돌아가던 머릿속의 퍼즐이 딱 들어맞는 순간 그녀의 입술이 비죽 솟았다. 목을 길게 뺀 준영이 범진에게로 슬슬 다가갔다.
“말 하다 마는 거 진짜 싫어. 뭔데? 그러니까, 거기서 날 부르면 혹시 우리 사이가 들키기라도 할까 봐 혜수를 불렀다는 거야? 연막탄처럼?”
우리 사이는 무슨, 하고 범진이 잇새로 중얼거린다. 내내 머릿속을 사로잡고 있던 짜증이 몽글거리며 녹아내리는 것 같아 준영은 실실 웃으며 그의 옆에 붙어 섰다.
“왜? 우리가 어때서? 네가 농구공 던진 순간부터 이미 애들은 우리를 엮고 있어요. 오혜수부터 너랑 무슨 사이냐고 물었었고, 또…….”
승운을 떠올린 준영이 머뭇거리며 입을 다물었다. 승운은 혜수와 다르다. 혜수가 그냥 던진 말이라면 그는 무언가 확신을 가진 것 같았으니까.
말이 끊어지자 라면을 뜯던 범진이 그녀를 바라본다. 눈을 굴린 준영이 얼른 어깨를 으쓱였다.
“그게 걱정되면 내 일에 참견하지 말았어야지.”
“잠버릇이라고 내가 말 안 했던가?”
“꿈에서라도 참견하지 말았어야지.”
눈썹을 들썩이며 말하는 그녀의 입을 묶어 주고 싶다는 듯한 눈으로 바라보던 범진이 한숨과 함께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는 늘 스프를 먼저 넣는 습관이 있었다. 봉투를 탈탈 털어 내는 범진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준영이 물었다.
“근데 왜? 왜 그렇게까지 우리가 아는 사이가 되면 안 돼?”
“몰라서 물…….”
무심코 말하던 범진은 준영이 뭐라고 받아칠지 알았는지 거기서 멈췄다. 준영은 빙글빙글 웃으며 비스듬히 몸을 기울이고 있었다.
사실 이건 말하지 않아도 안다. 그들의 친분은 이 집과 뗄 수 없는 관계였고, 누군가 그들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 이곳도 노출될 가능성이 있었다.
이 집을 잃는 것만큼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니까.
“나랑 아는 사이 돼서 너한테 좋을 거 없어.”
그런 대답을 예상하던 준영은 범진이 무덤덤한 말투로 툭 던지는 말에 눈을 치떴다. 범진의 눈은 붉게 물든 라면 물에 꽂혀 있었다.
제가 생각했던 것과 다른 방향의 말이다. 준영은 조금 더 고개를 내밀어 범진의 얼굴을 바라보려 애썼다.
“왜? 네 소문 때문에? 난 별로 신경 안 쓰는데.”
“내가 써. 사람들도 그럴 거고.”
불을 조금 더 키운 범진이 미간을 찌푸리며 손으로 준영의 머리를 감싼 채 밀었다.
“그리고 좀 비켜. 머리 탄다.”
뒤로 밀린 준영은 입술을 비죽이며 돌아섰다. 불에 가깝게 서 있었던 탓인지 얼굴이 뜨거운 기운으로 가득했다.
왜일까. 이쯤이면 서운하던 것도 풀렸고 얌전히 앉아 책을 들여다볼 법도 한데 범진에게서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가슴이 괜스레 간질거리는 느낌이다. 헛기침을 한 준영이 그의 뒤를 기웃거렸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나 혼자 남겨 두고 가면 어떡해? 그 인간들이 나 순순히 안 보내 주면 어쩌려고.”
그녀의 불퉁한 말에 헛웃음을 흘린 범진이 고개를 내저었다.
“나한테 발길질도 하는 네가 거길 못 뚫고 나올 리가 있냐?”
“너는 너고. 너는 나한테 이상한 짓 안 하잖아.”
무심코 말을 내뱉던 준영이 빠르게 범진의 눈치를 살폈다. 뉘앙스가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이상한.”
냄비를 향해 있던 범진의 눈이 천천히 그녀에게로 향했다. 잠잠하던 짙은 눈썹이 어느새 날카롭게 뻗어 있었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목구멍을 긁는 것처럼 거칠게 흘러나왔다.
“무슨 짓?”
순식간에 등골이 서늘해진다. 이런 눈을 한 범진을 보는 것은 처음인 것 같았다.
길고 또렷하게 파인 눈매와 유달리 까맣게 느껴지는 눈동자는 평소와 다른 게 없었는데도 온몸이 본능적으로 긴장했다. 차가운 공격성이 금방이라도 실체가 되어 튀어나올 것 같은 눈이었다.
방금까지 내가 어떻게 이런 애랑 티격태격 실랑이를 하고 있었지?
“그 새끼들이 너한테, 뭔가 했어?”
눈도 한 번 깜빡이지 않은 채 그녀를 응시하며 범진이 묻는다. 나른하게까지 느껴지는 말투였지만 그 말투 끝에 달린 보이지 않는 갈고리가 제 뒷덜미를 낚아챌 준비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세기의 문제아 같은 이미지와는 다르게 좀처럼 쓰지 않는 거친 말을 입에 담은 것만으로도 범진은 사람을 쉽게 긴장시키고 있었다.
마른침을 꿀꺽 삼킨 준영이 엉거주춤 뒤로 물러섰다. 달싹이던 입술이 어색하게 열렸다.
“이쁜이라고 부르던데.”
그녀의 대답에 잠시 침묵하던 범진의 반듯한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뭐?”
“나 달걀 하나만 먹을 거야. 맵게 끓여 줘.”
책을 읽듯 빠르게 말을 뱉은 준영은 그대로 척척 걸어가 제 의자에 앉았다. 저를 따라 범진의 고개가 움직이는 것 같았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책장을 넘기며 펜을 쥐자 이내 그의 시선이 다시 냄비로 돌아갔다.
심장. 내 심장이 왜 이래.
어디서 뜀박질이라도 실컷 하고 온 것처럼 심장이 쿵쾅대며 뛴다. 얼굴이 시뻘게져 있을 게 분명하다. 열기가 목덜미까지 타고 내려온 것이 느껴질 지경이었다.
왜 이래, 진짜. 진정해라, 윤준영.
범진에게 들리지 않게 조용히 심호흡을 하며 준영은 구불거리는 영어 단어를 뚫을 기세로 바라보았다. 대체로 모든 일에 빠르게 해답을 내놓는 것이 주특기이던 그녀의 머리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감감무소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