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저 여명일 뿐-18화 (18/86)

<18화>

벽 뒤에서 어슬렁거리며 나오는 사람들을 본 준영의 뺨이 파르르 떨렸다. 한 손에는 담뱃갑을, 다른 손에는 너덜너덜한 잡지를 들고 있는 남학생 세 명이었다. 한 명이 준영을 보고는 넙죽 허리를 굽히는 시늉을 했다.

“어이구, 누군가 했더니 우리 학교 최고 이쁜이들이었네. 안녕.”

3학년 망나니들.

다른 학생들에게는 어지간히 관심 없는 준영도 그들의 얼굴은 알아볼 수 있었다. 워낙에 자잘한 사고를 많이 쳐서 교감이 뒷목 잡고 쓰러진 것만 열댓 번은 된다고 들었다.

“왜? 아직 안 끝났어? 오빠들이 편들어 줄까? 나는 이쪽 이쁜이 편.”

준영은 제 한쪽 어깨에 턱, 하고 올리는 손을 황급히 뿌리쳤다. 뒷걸음질을 치자 일부러 눈을 둥글게 뜬 까치 머리가 상처받은 듯한 표정을 지으며 능글맞게 말했다.

“아무리 내 얼굴이 바닥에 뭉갠 두부처럼 생겼대도 그렇지, 그렇게 벌레 보듯 보면 이 오빠 마음이 아파요.”

“징그러워, 새끼야. 말투 왜 저래?”

자기들끼리 낄낄대며 슬슬 이쪽으로 다가온다. 설마 학교에서 뭘 어쩌지는 못할 거라 생각하면서도 온몸이 긴장으로 바짝 경직되었다. 방금까지 우악스럽게 소리 지르던 혜수가 뒤에서 그녀의 옷자락을 붙잡고 있었다.

흥미로운 눈으로 저를 위아래로 훑어보는 셋과의 거리를 재던 준영은 갑자기 철컥, 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하마터면 이름을 부를 뻔했다. 그 집에서 마주칠 때도 반가웠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 반가웠던 적은 없었다. 안도의 한숨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범진의 눈이 먼저 준영을, 그리고 이상한 분위기를 풍기는 나머지 네 명을 천천히 훑었다. 바람에 이마를 가리고 있던 머리칼이 날려 헝클어지자 매섭게 쭉 뻗은 눈썹이 보였다.

심상치 않은 그의 눈빛에 금세 인상을 쓰던 까치 머리가 제 등을 툭툭 치는 친구를 바라보았다.

“뭐야?”

“저 새끼가 권범진이야.”

“아, 그…….”

뒷말을 잇지는 않았지만 조금 움찔하는 것을 보면 범진의 흉악한 소문을 떠올린 것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까치 머리는 턱을 쳐들며 제법 용감하게 외쳤다.

“뭘 봐. 새끼야. 선배 처음 봐?”

그래 봐야 범진보다 키도 작고 체구도 작다. 상대가 아니라고 판단했는지 범진의 날카롭던 눈매가 조금 누그러졌다. 준영은 픽, 흘러나오는 웃음을 머금은 채 그를 향해 걸어갔다.

“오혜수.”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준영과 혜수, 둘 다 고개를 들었다. 혜수가 옹송그리고 있던 몸으로 펄쩍 뛰었다.

“어, 어?”

“나와. 할 말 있어.”

범진의 몇 발짝 앞에서 멈춰 선 준영의 입술이 힘없이 벌어졌다.

이 상황에서 오혜수를 불러? 그리고 뭐? 할 말이 있다고?

혜수도 놀란 것 같았지만 그래도 뭉갠 두부 셋보다는 잘생긴 같은 반 깡패를 믿기로 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주춤거리며 범진에게로 다가갔다. 범진은 문을 활짝 열어 놓은 채 나가라는 듯 턱짓했다.

준영은 찰나의 순간 범진이 저를 바라봤다고 느꼈지만 확실하지 않았다.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이 상황에서 오혜수만 홀랑 빼돌리는 권범진의 등짝을 있는 힘껏 걷어차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쟤 오혜수를 좋아하나 본데?”

“씨발, 괜히 건드렸다 피 볼 뻔했네. 저 새끼 이전 학교에서 싸움 말리는 선생도 입원시켰다면서. 옆에 있던 재떨이로 뒤통수를 몇 번이나 후려갈겼대.”

“뭐래. 난 처음부터 얘 노리고 있었거든. 야, 윤준영. 너 잠깐 나랑 여기서 이야기 좀 하자.”

까치 머리가 멀어지는 범진을 흘끔거리며 준영에게 다가섰다. 준영이 천천히 돌아섰다.

“무슨 이야기요?”

“응?”

꺄악, 하고 도망가거나 아까처럼 겁에 질린 고양이 같은 표정을 지을 줄 알았지만 준영은 그러지 않았다. 까치 머리는 저도 모르게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준영의 새카만 눈동자가 튀어나올 것처럼 저를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대로 가서 영어 단어 백 개 외우고 수학 모의고사 풀고 오답 정리하고 그다음에 논술 대비한 사회적 불평등의 사례와 그 해결 방법을 정리한 자료를 읽어 볼 생각이었는데.”

위축되기는커녕 빠르게 내뱉는 말들에 머리를 연타당하는 기분이 들어 까치 머리는 눈만 끔벅였다. 조금만 움직여도 준영이 손톱으로 확 할퀼 것만 같았다. 준영의 입술이 또박또박 열렸다.

“그거보다 쓸모 있는 이야기예요?”

까치 머리는 평소에는 멀쩡하다가 한 번씩 돌아 버리는 사람의 눈을 잘 알고 있었다. 제 아버지가 딱 그런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단어 하나하나를 이를 가는 것처럼 말하고 있는 준영의 눈이 정확히 그랬다.

힘으로 하면 준영이 어떻게 자기를 이기겠냐마는 그렇다고 굳이 죽자고 덤빌 것 같은 사람을 건드릴 필요는 없다. 기가 질린 그가 멍하니 서 있는 사이 준영이 몸을 돌려 그대로 걸어 나갔다. 아무도 잡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쟤는 안 되겠다. 네 상대가 아닌 거 같아.”

“나도 그렇게까지 관심 없었어. 그냥 장난친 거지.”

헛기침을 하며 까치 머리가 고개를 돌렸다. 아직도 머리가 핑글핑글 도는 것 같았다.

* * *

“저기.”

혜수는 복도로 이어지는 벽에 등을 기댄 채 팔짱을 끼고 있는 범진을 어색하게 바라보았다. 계단을 내려와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내내 이대로다.

무표정한 얼굴의 범진은 그 자체로 사람을 짓누르는 분위기 같은 것이 있어서 혜수는 벌서는 사람처럼 그의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다시 한번 불러 볼까, 하고 눈을 들던 혜수는 빠르게 계단을 내려오는 발소리를 들었다. 준영도 빠져나온 모양이었다.

어쨌든 뭔가 일이 일어날 것 같던 분위기가 범진의 등장으로 한 번 깨졌으니 부산해진 틈을 타 나오는 것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반대쪽 복도로 방향을 틀어 걸어가 버린 준영은 이쪽을 보지 못했다. 혜수는 비스듬히 서 있던 범진이 천천히 허리를 바로 세우는 것을 보고는 움찔했다.

“저기, 권범진.”

자기가 데리고 내려온 주제에 왜 부르냐는 듯한 눈빛에 당황한 혜수가 얼굴을 붉혔다.

“나한테 할 말 있다고…….”

“아.”

한쪽 눈썹을 추켜올린 범진이 미간을 좁혔다. 혜수는 찌르는 듯한 그의 시선에 얼른 눈을 내리깔았다. 긴장한 심장이 콩닥거렸다.

“그 머리핀.”

갑자기 툭 떨어진 목소리에 혜수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범진이 눈으로 그녀의 옆머리에 꽂은 머리핀을 가리키고 있었다.

“어디서 샀냐.”

“이거? 이, 이건 엄마가 시내 나갔을 때 사다 준 건데, 왜?”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묻자 범진이 무덤덤하게 대꾸했다.

“궁금해서.”

“뭐?”

되물었지만 이미 등을 돌린 범진은 어슬렁거리며 복도를 걸어갔다. 덩그러니 남은 혜수는 얼떨떨한 얼굴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영문을 알 수가 없다. 난데없이 나타나 할 말이 있다며 사람을 불러내 놓고는 기껏 물어보는 게 생전 관심도 없어 보이는 머리핀 이야기라니.

물론 덕분에 괜히 성가신 일은 피할 수 있었지만 도대체 남의 머리핀을 어디서 샀는지가 왜 궁금…….

“헉.”

순간 떠오른 생각에 혜수가 몸서리를 쳤다. 그녀의 눈이 이미 멀어진 범진의 등을 좇았다.

설마 날 좋아하나? 그런 느낌 받은 적이 없었는데?

머릿속에 옥상 문을 열고 들어오던 범진의 모습이 생생하게 재생된다. 늘 제복처럼 입는 까만 티셔츠와 청바지는 흔한 옷차림이지만 권범진은 유난히 눈에 띄었다. 워낙 키가 크고 체구가 딱 잡혀 있으면서도 매끈하게 느껴지는 몸 때문일 것이다.

무서워서 눈여겨본 적이 없었지만 오늘 보니까 얼굴도 꽤, 아니, 제법 괜찮…….

“미쳤나 봐!”

혜수는 제 뺨을 아프지 않게 찰싹찰싹 내리치며 빠르게 복도를 걸어갔다. 심장이 쿵쿵 뛰는 게 느껴진다. 제가 저 문제아의 은근한 숭배의 대상이었다니.

뭐, 기분이 썩 나쁘지는 않았다. 보는 눈은 누구나 같은 거니까.

아까 준영과의 일은 우선순위를 빼앗긴 채 그녀의 머릿속 아래로 침잠했다. 교실에 도착할 때까지 혜수의 입꼬리는 올라갔다 내려가기를 수도 없이 반복하고 있었다.

6

늘어지는 가방을 추어올리며 준영은 고개를 들었다. 자물쇠가 있는 걸 보니 범진은 아직인 모양이다. 입술이 저절로 불퉁하게 튀어나왔다.

참 나.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되냐고. 어떻게 그 상황에 오혜수를 부르지? 그리고 자기가 혜수한테 할 말이 도대체 뭐가 있어? 생전 눈도 한 번 안 마주쳐 본 사이면서.

달그락거리며 잡아 뜯을 듯이 자물쇠를 연 준영이 안으로 들어가 가방을 내려놓았다. 기계적으로 책을 꺼내면서도 머릿속은 계속 옥상에서의 장면을 되새기는 중이었다.

오혜수. 왜 하필 오혜수야. 하긴, 걔가 좀 귀엽긴 하지. 애가 백치미가 있잖아.

그럼 뭐 해? 성질이 얼마나 더러운데. 애초에 내가 옥상에 왜 갔었는데!

그녀가 의자를 냅다 걷어차는 소리가 적막한 집 안을 울렸다. 씩씩대던 준영이 의자에 털썩 앉았다. 또 하나의 문제가 떠올랐던 것이다. 뾰족하게 일어서던 신경이 일순간에 가라앉았다.

……아니. 그럴 리가 없다. 엄마는 그럴 주제가 못 된다.

생리적인 혐오감으로 막연히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 처음 혜수에게 그 말을 들었을 때는 머릿속이 새하얘져서 그럴 가능성을 생각해 보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틀렸다. 그럴 리가 없었다.

엄마가 사지를 멀쩡히 놀릴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근본적인 이유가 있었다. 훨씬 단순하고도 강력한.

엄마에게는 그런 일을 참고 견딜 만큼 살고자 하는 의지가 없었다.

그녀는 그저 숨이 쉬어지기 때문에 살아 있다. 더 나은 내일을 기대하지도, 스스로 변화를 일으켜 볼 생각도 없다. 그 머릿속에 가득 차 있는 것은 오로지 암흑뿐이다.

게다가.

미간을 좁힌 준영의 눈이 의미 없이 영어 단어를 훑었다. 그날, 제가 외박을 하고 범진과 함께 걷다가 엄마와 마주쳤던 그날.

그땐 당황해서 차분히 생각하지 못했지만, 엄마의 반응은 분명 과민했다. 그리고 준영은 그 이유가 아마도 제 옆에 서 있던 범진 때문이었으리라 추측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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