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이 왕자님은 어디까지 왕자님인 거지. 짝을 구하지 못할 나를 구원이라도 해 주고 싶다고 생각하는 건가?
한숨을 삼키며 아니, 하고 고개를 저으려 했지만 준영은 그러지 못했다. 저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는 승운의 시선이 평소와 다르게 느껴졌던 것이다.
늘 그렇듯 승운은 화사하게 미소 짓고 있었지만 밤색의 눈동자는 웃음기 하나 없이 차분했다. 섣불리 대답을 하지 못하는 그녀를 응시하며 승운이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같이 하고 싶은 사람 있어?”
있다고도, 없다고도 말할 수 없다.
특히나 범진을 염두에 두고 있을 나승운 앞에서는.
……어쩌면 그 여자를 아주 안 닮은 건 아닐 수도 있겠어.
신경을 곤두세우며 준영은 승운을 바라보았다. 막 입을 열려던 순간 의외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나랑 하자, 윤준영.”
이번에는 거리낌 없이 얼굴을 구긴 준영이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다가온 혜수가 팔짱을 낀 채 도도하게 서 있었다. 향수라도 뿌리고 다니는지 그녀가 다가오면 금세 주변에 달콤한 냄새가 퍼졌다.
산 넘어 산이다. 길게 한숨을 내쉬며 준영이 혀를 찼다.
“너랑 나는 좀 아니라고 생각하지 않니?”
“뭐야, 내 호의 무시하는 거야? 너한테 꼭 해 주고 싶은 얘기가 있어서 그래. 안 그럼 입이 너무 간지러울 것 같아서 말이야.”
엄마.
의미심장하게 웃어 보이는 혜수의 눈이 초롱초롱 빛난다. 장난으로 개미를 밟아 죽이는 전형적인 타입이라고 할 수 있었다.
어느 쪽도 고르고 싶지 않았지만 굳이 하나를 선택하라면 오혜수다. 저 입을 어떤 식으로든 틀어막아야 할 때가 온 것 같으니까.
준영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 내가 그렇게 좋아 죽겠다면야.”
혜수는 흥, 하고 코웃음을 치고 돌아서면서도 옆에 우뚝 서 있는 승운의 눈치를 살피는 것을 잊지 않았다.
행여나 제가 나승운과 같은 조가 될까 봐 나선 거라면 귀여울 지경이다. 고개를 내저으며 준영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화장실에 갈 생각이었지만 승운이 길을 막고 있었다.
“비켜 줄래?”
“넌.”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그대로 지나가려던 준영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승운의 목소리를 들었다.
“친구를 특이한 방식으로 사귀는구나.”
무슨 말인가 싶어 고개를 돌렸지만 승운은 말없이 그대로 교실을 나가 버렸다. 멍하니 서서 그의 말뜻을 헤아리던 준영의 시야 끝에 여전히 책상 위에 한가하게 엎드려 있는 너른 등짝이 들어왔다.
……잠 많은 거 아니라더니. 이럴 때 처자고 있으면서!
어쩐지 울컥하는 기분에 정강이라도 걷어차고 싶었지만 보는 눈이 많았다. 준영은 범진의 뒤통수를 뚫어져라 노려보며 그를 지나쳤지만 팔 사이에 묻은 그의 눈이 감겨 있는지 아닌지를 알 수는 없었다.
* * *
옥상에 올라오는 것은 오랜만이다. 초등학교 때는 학교 옥상에 자주 올라갔었다.
그때는 난 입양되었거나 엄마가 어디서 납치해 온 아이인 게 분명하니까 언젠가 친부모가 찾으러 올 거라는 상상으로 하루를 살았다. 고학년이 될수록 그 가능성을 매일 버리게 됐지만.
중학교 때는 옥상이 잠겨 있었다. 올라갈 생각도 하지 않았다. 제 암담한 현실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은 공부밖에 없다고 생각해서 미친 듯이 책을 보기 시작했을 때였으니까.
고등학교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당연히 잠겨 있을 거라 생각했던 옥상 문을 아무렇지 않게 열고 들어가는 혜수의 뒤를 따르며 준영은 눈을 깜빡였다.
“굳이 여기까지 올라와서 얘기해야 돼?”
“배려를 해 주면 고맙다고 해. 내가 동네방네 떠들었으면 좋겠니?”
눈을 흘긴 혜수가 터벅터벅 걸어간다. 준영은 사방에서 불어 드는 바람에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딱히 높은 곳에 올라갈 일이 없어서 잊고 있었는데, 탁 트인 풍경이 제법 기분이 좋았다.
“고마워.”
흔쾌히 말하자 기가 막히다는 듯 눈살을 찌푸린 혜수가 팔짱을 끼고 돌아선다. 준영은 고개를 들어 오렌지빛으로 물들어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한참 동안 보고 있고 싶을 만큼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너 제정신이야? 내가 지금 무슨 말 하려는지 몰라?”
“알면 안 따라왔겠지.”
관심을 갈구하니 별수 없네. 하늘에서 눈을 뗀 준영이 똑바로 혜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말해 봐.”
기회를 주겠다는 듯한 그녀의 말투가 거슬렸는지 뾰족하게 눈을 치뜬 혜수가 앙칼진 목소리를 뱉었다.
“승운이네 집에 왜 간 거야?”
“걔 어머니가 초대하셔서.”
“왜 초대했는데?”
“전교 1등이 궁금하셨대.”
덤덤한 준영의 대답에 혜수가 아, 하고 눈을 굴렸다. 그 집에 있는 마녀를 생각하면 오혜수는 정말이지 눈 감고도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바람이 제 몸을 스치는 것을 느끼며 준영은 다음 공격을 기다렸다. 혜수가 흐트러진 마음을 가다듬듯 턱을 치켜들었다.
“승운이 포기해.”
“네가 우리 엄마에 대해 아는 게 뭐야.”
난데없이 안쪽을 파고드는 준영의 질문에 놀랐는지 혜수의 눈이 크게 부풀었다. 준영은 한 발 다가서며 목소리를 낮췄다.
“그거면 날 좌지우지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이유가 뭐냐고.”
이건 제가 생각했던 그림과 다르다. 그런 빛을 고스란히 내비치며 입을 벙긋거리던 혜수가 애써 입꼬리를 비딱하게 올렸다.
“알고 있었던 거 아냐? 네가 너희 엄마를 부끄럽게 생각하는 이유겠지.”
“요점을 말해, 오혜수. 빙빙 돌리는 말이나 할 거면 다신 불러내지 말고. 시간 아까워.”
뒤로 돌아서는 척을 하자 혜수가 다급하게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바짝 힘이 들어간 눈을 부라리며 혜수가 윽박지르듯 말했다.
“너희 엄마 대낮부터 시내에 있는 모텔 골목에 드나드는 거 몰라?”
심장이 그대로 멎어 버리는 것 같았다. 차갑게 식은 피가 모조리 발끝으로 쏠린다. 혜수의 말투에 배어 있는 혐오와 멸시가 그 말이 무슨 뜻인지를 적나라하게 보여 주고 있었다.
설마. 그럴 리가.
엄마는 제정신이 아니다. 즉 제대로 된 일을 할 수 없다. 아주 오래전에는 그래도 종종 했던 요리나 청소도 지금은 할 수 없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아주 조금이지만 돈을 가져왔다. 술을 마시고 올 때도 많았다. 그런 날에는 대부분 한바탕 푸닥거리가 일어났고 그 후에는 기절한 것처럼 잠들었다.
어떻게.
무슨 일을 해서.
……돈을 벌고 술을 마신 걸까.
“그런 돈으로 먹고살면서 뻔뻔하게 어딜 넘봐. 공부 좀 잘하니까 네가 뭐라도 된 거 같아? 승운이가 성격이 좋아서 그렇지, 너한테 정말 관심이 있는 게 아니…….”
“누가 그래. 우리 엄마가 거길 드나든다고.”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는 순간 진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목소리가 떨리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코웃음을 친 혜수가 냉랭하게 대꾸했다.
“우리 아빠가. 두 번이나 보셨다던데. 너희 엄마 키도 크고 옷도 특이하고 걸음걸이도 이상해서 눈에 띄잖아.”
머릿속이 아득하다.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제가 죄를 지은 것처럼 수치스러웠다.
준영의 기세가 꺾인 걸 눈치챈 혜수의 얼굴에 느긋한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준영의 어깨를 콕 찌르며 말했다.
“난 네가 주제를 알았으면 좋겠어. 제일 밑바닥에 있으면서 다른 사람들을 발밑에 두고 있는 것처럼 건방지게 구는 게 짜증 나서 말이야. 사실 우리 부모님이 걱정이 많거든. 그런 일 하는 집 딸이 우리 반에 있다니까 학교에 알려야 하는 거 아닌가, 하시더라구. 그런 더러운 일 하면 병도 많이 걸린다며? 너도 옮을 수 있는 거 아냐? 생각만 해도 징그러워.”
일부러 과장된 몸서리를 치는 혜수의 눈가에 잔인한 웃음이 흘렀다. 줄이 끊어진 인형처럼 가만히 서 있던 준영의 눈꺼풀이 천천히 깜빡였다. 그녀의 입술이 슬며시 벌어졌다.
“너희 아빠는 거길 왜 가셨는데?”
“사업차 미팅이 있으셔서 지나가던 길이었지.”
너 같은 건 상상도 못 할 테지만, 하는 듯한 말투를 던지며 혜수가 의기양양하게 웃는다. 아래로 떨어져 있던 준영의 눈이 혜수의 몸을 느리게 훑으며 위로 올라왔다. 새카만 유리알처럼 반들거리는 그녀의 눈동자에 혜수가 본능적으로 움찔했다.
순간 바짝 다가선 준영의 입에서 기계적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모텔 골목 주변엔 술집밖에 없어. 낮에는 문 안 열고. 큰길로 그냥 걸어 다니면 모텔을 드나드는 사람이 안 보이지. 그런 곳의 출입구는 남의 눈을 피하게끔 설계되어 있으니까.”
빠르게 귀를 두드리는 말이 무슨 뜻인지 쫓아가기에도 바빴다. 혜수가 마른침을 꿀꺽 삼키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며 준영이 비딱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너희 아빠 같은 사람이 병을 옮기는 건 아니고?”
혜수의 눈에서 불꽃이 튐과 동시에 철썩, 하는 소리가 허공에 울려 퍼졌다. 준영은 얻어맞은 뺨을 감싸며 미간을 찌푸렸다. 입 안이 찢어지기라도 했는지 비릿한 냄새가 번지고 있었다.
“더러운 소리 하지 마! 너희 엄마야말로 그런 데서 몸이나 파는 창…….”
준영은 버럭 언성을 높이던 혜수를 향해 번개처럼 손을 뻗었다. 한 손으로는 그녀의 뒤통수를, 다른 손으로는 혜수의 입을 짓누른 준영이 눈을 부라리며 빠르게 속삭였다.
“마음껏 떠들어 봐. 그 소문의 끝이 어떻게 될지 궁금하면. 우리 엄마한테 돈을 낸 사람이 너희 아빠라는 소문이 퍼지면, 누가 더 시궁창일까? 나? 너? 아니.”
공포로 크게 뜨인 혜수의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준영의 목소리가 음산하게 그녀의 목을 조이고 있었다.
“지옥에 떨어지는 건 너희 엄마야. 가장 많은 걸 잃는 사람은 너고. 넌 가족을 잃게 될 거거든. 그 입을 아무 생각 없이 가볍게 놀린 대가로.”
“이거 놔!”
버둥거리며 혜수가 준영의 손을 떨쳐 냈다. 하얗게 질린 그녀는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죽일 듯이 노려보는 혜수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준영은 그저 주먹만 으스러져라 쥔 채 냉랭한 표정으로 꼿꼿하게 버텼다. 혜수와 같은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 무너져서는 안 된다. 그랬다가는 제 협박이 단순한 발버둥임을 들킬지도 모르니까. 오직 그 생각뿐이었다.
치열한 대치를 깨뜨린 것은 의외의 박수 소리였다. 화들짝 놀란 혜수가 고개를 돌렸다.
“야, 다 끝났냐? 계집애들이 뭐 이렇게 살벌하게 싸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