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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여명일 뿐-15화 (15/86)

<15화>

온몸이 비로 푹 젖은 준영은 문손잡이를 움켜쥔 채 문간에 우뚝 서 있었다. 바닥 언저리를 노려보고 있는 어깨가 불규칙적으로 들썩인다. 영문을 알 수가 없어 범진은 이름을 부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뭘 홀딱 벗고 있어. 변태야?”

날카롭게 내뱉는 목소리 끝이 떨리고 있다. 범진은 발소리를 쿵쿵 내며 제 앞을 스쳐 지나가는 준영의 뒤통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녀는 당당하게 계단을 올라가고 있었다.

치마를 입고 있는 건 의식조차 하고 있지 않은지 위로 올라갈수록 빗물이 맺힌 하얀 허벅지가 매끈하게 드러난다. 황급히 고개를 돌린 범진은 집 안으로 들이치는 빗줄기를 보고는 손을 뻗어 문을 닫았다.

이내 침대에 뛰어들어 머리에 이불을 뒤집어쓴 준영의 괴성이 집 안을 떠돌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아악! 싫어! 너무 싫어! 짜증 나 미쳐 버리겠어! 잘사는 놈들 다 짜증 나! 가진 놈들 다 짜증 난다고! 다 망해 버려라! 으아악!”

온몸으로 발버둥을 치며 침대를 헤집고 있는 준영의 몸부림이 보인다. 땀이 맺혀 이마에 들러붙어 있는 머리칼을 쓸어 넘기던 범진은 소리 없이 웃고 말았다.

“그래. 실컷 더럽혀라. 어차피 빨 때 됐다.”

“악! 악악악!”

싱크대에서 대충 땀을 씻어 내고 티셔츠를 입은 범진은 준영의 의자에 앉았다. 고개를 들자 간혹 2층 난간 위로 준영의 팔이나 다리가 허공을 휘적대는 게 보였다. 비스듬히 턱을 괴는 그는 제 눈매가 얼마나 허물어지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저러다 목이 쉬는 건 아닐까, 싶을 때쯤 준영의 괴성이 멈췄다. 갑자기 이불을 걷어내며 벌떡 일어난 그녀가 계단을 내려오는 것을 보며 범진은 웃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어야 했다. 아무렇게나 헝클어진 머리가 엉망이었다.

무심코 준영을 바라보던 범진은 미간을 찌푸리며 일어섰다.

“못 보던 옷이네.”

그의 말에 씩씩대며 서 있던 준영이 어깨를 움찔했다. 치마 위로 다 비어져 나온 셔츠 자락을 움켜쥔 그녀가 이를 갈듯이 말했다.

“그 집에서 얻어 입은 거야.”

“……뭐?”

“옷에 주스 좀 흘렸더니 갈아입으라고 자기네 집 고용인들이 입는 셔츠를 주더라. 일부러 그런 거야. 나 무시하려고.”

가방에 넣어 다니는 수건을 꺼내려던 범진의 손이 그대로 멈췄다. 그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근데 안 벗고 뭐 해?”

시야를 다 가린 머리칼을 손으로 거칠게 쓸어 올리던 준영의 눈꼬리가 쫙 찢어졌다.

“벗으면. 맨몸으로 다닐 순 없잖아. 정신없이 나오느라 옷도 안 가져왔다고.”

그녀는 제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티셔츠를 벗어서 건네는 범진을 쏘아보았다. 범진이 손을 까닥였다.

“땀 냄새 나도 좀 참아. 어차피 그건 너무 젖었잖아.”

입술을 비죽이면서도 준영은 그의 티셔츠를 순순히 받아들었다. 원래 뭐든 한 번이 어려운 법이다.

비가 오는 밖을 흘끗 본 그녀가 눈짓을 한 번 하고는 계단을 다시 올랐다. 나가는 것 대신에 뒤로 돌아 있으라는 뜻을 알아들은 범진은 싱크대를 짚은 채 몸을 돌렸다.

사람을 기껏 초대해 놓고 하는 짓이라니. 감기 걸리면 어쩌라고 우산도 없이 손님을 내보내?

알 수 없는 화가 솟구친다. 무의식적으로 움켜쥐고 있던 주먹을 보니 손등에 시퍼런 핏줄이 불뚝 솟아 있었다.

“근데 너는 뭐 입고 있으려고? 다른 옷 있어?”

다 갈아입었는지 헐렁한 포대 자루 같은 제 티셔츠를 입은 준영이 빼꼼히 아래를 내려다본다. 범진이 턱짓을 했다.

“셔츠 던져.”

“또 빨아 주게? 너 혹시 빨래하는 거 좋아해?”

저 입 밖으로 제발 빨아 준다는 문장만은 안 나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범진은 준영이 가볍게 던진 셔츠를 받아들었다. 양쪽 소매를 잡고 그대로 잡아당기자 어렵지 않게 섬유가 뜯어지는 소리와 함께 셔츠가 찢어졌다.

아무렇게나 구겨 쓰레기통에 던져 넣는데 준영의 사자후가 들려왔다.

“야!”

“왜.”

“그걸 왜 찢어? 아깝게.”

“……아깝다고?”

“리폼해서 입으려고 했는데!”

난간을 잡고 반쯤 몸을 뺀 준영의 말간 얼굴이 구겨진 것을 본 범진은 허, 하고 한숨을 내뱉었다. 그는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넌 자존심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모르겠다.”

그의 말에 공격적인 표정을 짓고 있던 준영의 눈이 순간 힘을 잃었다. 시선을 떨어뜨린 그녀가 작게 중얼거렸다.

“실용성을 따지는 거지. 원단이 좋았단 말이야.”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흘리며 위를 올려다보자 그새 페이스를 찾은 준영이 눈을 부라렸다.

“그걸로 힘자랑이나 하고. 뭐라도 좀 입고 있을래?”

“왜. 너 내 몸 보는 거 좋아하잖아.”

“저 변태가 무슨 미친 소리를…….”

뻔뻔한 그의 대꾸에 준영은 으악, 하고 양쪽 귀를 마구 때리는 시늉을 하며 소리쳤다.

“감기 걸릴까 봐 그러는 거 아냐! 비 때문에 안쪽 공기도 쌀쌀한데. 입을 거 없으면 이불이라도 걸치고 있어.”

저건 또 예상하지 못한 말이다. 가끔 아무렇지 않게 제 속을 쿡 파고드는 윤준영이 얄미울 때가 있었다.

범진은 쓴웃음을 지으며 계단을 올라갔다. 침대에 앉은 준영이 이불을 모아 그에게 내민다. 범진은 이불 더미를 다시 그녀에게 밀었다.

“너나 둘러. 안 추워.”

“몰랐어? 네 반팔 내가 입으면 긴팔 되는 거.”

준영이 거의 손목까지 내려온 소매를 펄럭여 보인다. 저럴 때 보면 영락없는 애 같았다. 아직 누군가의 보호가 필요한, 어린아이.

범진은 그녀가 무릎을 꿇은 채 일어서서 이불을 제 어깨에 둘러 주는 동안 가만히 있었다.

아까 운동하느라 올랐던 열이 아직 식지 않은 것일까. 비에 젖은 준영의 샴푸 냄새가 코에 스칠 때마다 목덜미가 뜨끈해지는 기분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어볼까.

그 전에 엄마 이야기를 묻는 게 우선인가.

뭐라도 말을 걸지 않으면 준영은 이대로 아래로 내려가 버릴지도 모른다. 마땅한 화두를 고르던 그의 귓가에 준영의 차분한 목소리가 울렸다.

“목에 상처 아직 안 나았네.”

고개를 돌려 보자 가지런히 접어 모은 무릎에 턱을 기대고 있는 준영의 옆모습이 보였다. 하얀 얼굴을 가닥가닥 가리고 있는 머리칼은 아직도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 속눈썹이 그려 내는 그림자까지 보일 만큼 가까웠다.

어렵게 시선을 떼어 내며 범진이 한숨처럼 말을 뱉었다.

“넌 사람 때리지 마라.”

“내가 사람 때릴 일이 뭐가 있…….”

“어머니 손이 매우시던데 닮았을까 무섭다.”

뾰족하게 대꾸하던 준영이 눈을 깜빡인다. 곁눈질로 보자 그녀가 고개를 내젓고 있었다.

“네 농담 되게 이상해. 그거 알아?”

“너랑 비슷한 수준이라는 건 알지.”

“이참에 내가 엄마 닮았는지 시험해 볼까?”

“얼마나 자주 맞아?”

흉악한 표정으로 제법 옴팡지게 쥔 주먹을 흔들어 보이던 준영의 움직임이 그대로 멈췄다. 짧게 숨을 들이쉰 범진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기다란 속눈썹 아래 맑은 눈동자가 흔들린다. 그는 조용히 물었다.

“심각한 수준이냐?”

“아니.”

그의 말을 빠르게 잘라 낸 준영의 표정이 어색하게 굳었다. 범진은 그녀가 초조하게 손가락을 튕기는 것을 보았다. 이대로 입을 다물어 버리면 어떡하나 싶을 때쯤 준영이 불퉁하게 말을 던졌다.

“발작 같은 거야. 지나가길 기다리면 돼. 가끔 뭘 던질 때만 조심하면.”

우물거리는 입술을 보자 가슴 한구석이 답답해진다. 예상했던 대답이었지만 자기 잘못이 아닌데도 그 사실을 부끄럽게 여기는 듯한 준영의 표정이, 이런 얘길 듣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해 줄 게 없는 제 무력함이 그의 속을 뒤집어 놓고 있었다.

“너도 말해.”

들끓는 감정을 애써 억누르고 있던 범진은 불쑥 날아온 말에 인상을 쓴 채 고개를 돌렸다. 이제 어지간해서는 그의 표정에 위축되지 않는 준영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아무렇지 않은 저 얼굴을 보니 더 화가 치민다. 경직된 표정이 아무래도 풀어지지 않아 범진은 비딱하게 턱을 괴어 얼굴을 가렸다.

“뭘.”

“나한테 우리 엄마 같은 거. 너도 말하라고.”

의미를 묻듯 미간을 좁히는 그를 바라보며 준영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야 공평할 것 같아서.”

저절로 헛웃음이 흘러나온다. 내 치부를 알게 됐으니 너도 내놓으라는 게 그녀가 찾아낸 해결책이라니. 퍽이나 윤준영다웠다.

하지만 그냥 모른 척 외면할 수도 있을 텐데, 굳이 치부를 나눠 갖자는 제안을 하는 것은 이 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싶다는 뜻으로 보인다. 턱을 가린 손으로 입술을 매만지던 범진이 나직하게 말했다.

“아버지가 깡패였어. 몇 년 전에 돌아가셨고.”

일부러 준영을 바라보지 않았지만 시야의 끝에 조금씩 벌어지는 그녀의 입술이 걸렸다.

괜한 짓을 했나. 금세 후회가 됐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그래도 한편으로는 마음 한 귀퉁이가 조금 가벼워지는 것 같기도 했다.

준영에게 ‘엄마’가 있다면 제게는 ‘아버지’가 있다. 원치는 않았으나 삶에 막대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

그것을 입 밖에 낸 것은 준영의 제안 때문만은 아니었다. 누군가는 이런 처지의 자신을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필연적으로 준영이어야만 했다.

아버지 생전에도 그의 학교생활은 순탄하지 않았지만 돌아가신 다음에는 그야말로 전쟁통이었다. 복수라는 이름의 폭력이 집요하게 그를 쫓아다녔다. 피하고 또 숨다가 겨우 머물게 된 곳이 여기였다. 물론 그런 것까지 이야기할 생각은 없었지만 말이다.

침묵이 꽤 길게 이어진다. 차마 준영을 바라볼 자신이 없었다. 그 커다란 눈동자가 겁을 먹고 있을까 봐. 그는 비딱하게 입술을 기울였다.

“억지 부려 대답 들어 놓고 왜, 괜한 거 물었다 싶어?”

“그렇다기보다…….”

잠시 머뭇거리던 준영의 목소리가 빠르게 이어졌다.

“그래도 가셨다니까 나보다 나은 거 아닌가 싶어서.”

의외의 대답에 범진의 시선이 저절로 그녀에게 돌아갔다. 이야기를 막 들었을 때야 어땠을지 몰라도, 지금 준영의 표정에 두려움은 없었다.

그녀의 무덤덤함에 오히려 당황한 것은 범진이었다. 그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낮게 깔린 목소리로 덧붙였다.

“동네 건달 같은 수준을 말하는 거 아닌데.”

“어쨌든 돌아가셨다며. 죽은 나라님이 무섭겠어? 살아 있는 탐관오리가 무섭지.”

뭐라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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