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저 여명일 뿐-14화 (14/86)

<14화>

턱을 치켜들고 우아한 척 주스가 들어 있는 잔을 들어 올리는 준영을 가만히 지켜보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아버님은 혹시 뭐 하시니? 이렇게 똑똑한 딸이 있어서 너무 자랑스러우실 것 같은데.”

아주 잠깐의 망설임이 있었지만 준영은 들고 있던 잔을 그대로 떨어뜨렸다. 쏟아진 오렌지 주스가 그녀의 옷을 적심과 동시에 준영이 벌떡 일어섰다. 승운이 덩달아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준영아, 괜찮아? 여기 닦을 것 좀 주세요.”

“아, 괜찮아. 미안. 손이 미끄러워서. 죄송해요.”

여자를 향해 고개를 숙이자 그녀는 미묘한 표정으로 웃었다. 여자는 냅킨으로 입가를 닦고 일어났다.

“많이 젖었는데 옷을 갈아입는 게 좋겠다. 김 실장. 쓸 만한 옷 좀 꺼내 줘요.”

“괜찮습니다. 저는 그냥…….”

“내가 보기 불편해서 그래.”

여자가 딱 잘라 말하자 김 실장이 다가왔다. 준영은 저를 안심시키듯 웃어 보이는 승운에게서 고개를 돌리며 짧게 한숨을 삼켰다.

생각도 못 했다. 왜 생각도 못 했지? 제일 쉽게 나올 수 있는 질문인데!

한 번도 친구네 집에 초대되어 가 본 적이 없다고는 해도 이 정도는 예상했어야 했다. 아들 친구를 초대했으니 부모님과 가정 형편을 묻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 아닌가.

이곳에 사는 동안 누구도 그녀에게 아버지에 대해 물은 적이 없어서 면역이 없었다. 저조차도 엄마에게 물어본 적이 없었다.

뭐라고 해야 하나. 뭐라고.

“여기 앉아 있어요. 금방 가져올 테니까.”

그림이 걸린 복도를 걸어 왼쪽 방으로 안내된 준영은 김 실장이 나가자마자 눈앞에 보이는 의자에 털썩 앉았다. 작지 않은 방엔 테라스가 있었다. 언덕에 있는 집이니만큼 여름 초입의 풍경을 볼 수 있었다.

생각만큼 푸르지 않았다. 구름이 잔뜩 껴 있는 탓일까. 불어오는 바람에 탁한 색의 나뭇잎들이 힘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왜 남들은 아무렇게나 하는 얘기가 나에겐 약점이 되는 걸까.

주먹을 움켜쥔 준영은 입술을 깨물었다. 무시당하고 싶지 않았다. 저 여자 앞에서, 그리고 나승운 앞에서.

순간 문이 달칵 열렸다. 자리에서 일어서던 준영의 눈이 크게 뜨였다. 옷을 든 여자가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고 있었다.

“너한테 잘 어울릴 것 같은 옷이 생각나서 직접 가져왔다. 이걸로 입으렴. 불편하지 않을 거야.”

“고맙습니다.”

여자가 건네준 옷을 받아들고 블라우스 단추를 풀려던 준영의 손이 멈칫했다. 나가지 않을 생각인가. 여자는 태연하게 그녀를 지나쳐 테라스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이렇게 된 거 빨리 갈아입어 버리는 게 차라리.

“아깐 내가 실수한 것 같구나. 잠을 설쳤더니 머리가 좀 멍해서.”

여자가 등을 돌리고 있는 것을 보고 빠르게 단추를 풀어 헤치며 준영은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실수를 말하는 거람.

“아버지가 안 계시지? 그리고.”

젖은 블라우스를 막 벗고 여자가 준 새 셔츠를 입으려던 준영의 움직임이 멎었다. 여자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어머니는 정신이 온전치 않으신 것 같던데.”

여자가 천천히 뒤를 돌아본다. 브래지어만 입은 상태였지만 준영은 앞을 가릴 생각도 하지 못했다. 여자가 부드럽게 웃었다.

“참 장하다.”

준영은 지금까지 이 정도로 사람에게 모멸감을 주는 미소를 본 적이 없었다. 어깨가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여자가 한 발 다가왔다.

“난 너 같은 애 좋아해. 형편없는 가정환경을 딛고 일어서는 아이들은 어리지만 존경스러운 부분이 있지. 난 그런 아이들을 찾아 후원하는 걸 보람으로 생각하고 있단다. 누군가는 그걸 가진 자의 사회적 책임이라고도 말할 테지만 나는…….”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와 선 여자는 하얗게 드러난 준영의 마른 어깨를 무감하게 바라보며 덧붙였다.

“특권이라고 말하고 싶구나.”

머릿속이 어지럽다. 무슨 말을 듣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멍하니 서 있는 준영을 향해 여자가 말했다.

“옷을 입어 보겠니?”

그제야 제가 반쯤 벗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준영이 얼굴을 붉히며 황급히 새 셔츠에 팔을 꿰었다. 단추를 채우는 손이 자꾸만 미끄러졌지만 그녀는 침착하려 애썼다. 지금이 어떤 상황이든 의연하게 보이고 싶었다.

하지만 여자의 빈틈없는 얼굴에 걸린 만족스러운 미소를 보는 순간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끝까지 단추를 채우고는 제가 입은 옷을 내려다본 준영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밖에서 일하는 여자들이 입고 있는 것과 똑같은 셔츠였다.

“잘 어울리네. 입고 가렴.”

주먹을 세게 쥐자 손톱이 손바닥을 아프게 파고든다. 인자하게 웃고 있는 여자의 표정이 어깨를 짓누르는 것 같았다.

“하세요.”

압박감을 이겨 내며 준영은 입을 열었다. 혀가 뻣뻣하게 움직이는 것 같았지만 굴하지 않고 고개를 똑바로 들었다.

“저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초대하신 거잖아요.”

여자의 미간이 희미하게 들썩인다. 그녀는 조금 더 짙은 미소를 지으며 팔짱을 꼈다. 단조로운 어조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 아들에게 관심 있니?”

“없어요.”

“그런데 왜 번번이 네 얘기가 내 귀에 들리지?”

여자의 아름다운 눈매는 웃는 것처럼 휘어져 있었지만 눈동자는 돌처럼 차가웠다. 준영은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대답했다.

“아주머니 아들이 저에게 관심이 있어서요.”

하, 하고 웃은 여자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준영은 제 대답이 그녀의 심기를 대단히 건드렸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내 아들이 비 맞고 있는 강아지에게도 신문을 씌워 주는 성격이긴 하지. 그래도 지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게 상대의 기본 인성인지 저만을 향한 호감인지 구분할 수 있을 텐데?”

개새끼 수준이냐는 말을 곱게도 하시네.

“그렇죠.”

주먹 쥔 손은 긴장으로 떨리고 있었지만 준영의 입술은 막힘없이 움직였다.

“그런데 그걸 구분 못 해서 절 초대하신 거예요?”

한순간 여자의 고운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눈에서 불꽃이 튀나 싶더니 그녀의 손이 허공을 갈랐다. 준영은 반사적으로 머리를 감쌌다.

따귀를 맞고도 남았을 시간이 흘렀지만 흐르는 것은 정적뿐이었다. 슬쩍 눈을 들자 여자가 피시식 웃음을 흘리며 그녀의 어깨에서 실밥을 떼어 냈다.

“패기는 마음에 든다만, 넌 그 입을 관리하는 법을 좀 배워야겠다.”

한파 같은 냉랭함이 한풀 꺾인 말투에 준영은 눈을 깜빡였다. 여자가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

“더 높은 곳에 가고 싶다면 말이야.”

바짝 움츠리고 있던 어깨가 뻐근했다. 미간을 치켜세우며 준영은 돌아서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돈이 필요하면 돈을 주마. 옷이 필요하면 옷을 줄 거고 집이 필요하면 집을 줄 거야. 네가 우리 재단의 장학생이 된다면,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세상을 볼 수 있을 거다. 물론.”

우아한 자세로 고개를 기울이며 여자가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승운이와 너의 근본적인 차이를 잊지 않는다는 전제하에서 말이야.”

준영은 여자의 말에 담겨 있는 대부분의 뜻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여자는 저 말 한마디로 마음이 없다는 제가 혹시 승운에게 넘어가는 일이 없도록 결계를 치고 있었다.

그 안에는 달콤한 당근도 있었지만 넘어서는 안 되는 절대적인 선도 있다. 하늘을 날 수 있을 것처럼 포장했지만 처음부터 날개가 꺾인 채로 시작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저 조금 더 넓고 깨끗한 새장에서 날 수 있을 뿐.

하지만 그럼에도 그 당근이 당장 너무나 절실하다면…….

그걸 알고 내민 게 분명한 손이라는 걸 알면서도 잡아야 할까.

어떤 삶이 더 굴욕적인가.

여자가 저를 정확하게 겨냥하고 내뿜은 모욕감이 안개처럼 온몸을 촘촘하게 감싼다. 이를 악물고 있던 준영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성함을 알려 주세요.”

“뭐?”

여자가 눈썹을 들썩인다. 준영은 똑바로 고개를 들며 입을 열었다.

“승운이 어머니나 그냥 아주머니라고 기억하고 싶진 않아서요.”

그녀의 말에 가늘게 눈을 뜬 여자의 입꼬리가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는지 쏴아, 하는 소리가 테라스에서부터 날아들고 있었다.

5

비가 오네.

침대에 드러누워 있던 범진이 고개를 들었다. 후드득, 빗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오늘은 웬일인지 입맛도 없어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게다가 비까지 오니 온몸이 축 처지는 기분이다.

언젠가 준영이 침대에 함부로 눕다가 갑자기 아래로 꺼지면 어떡하냐고 잔소리하던 게 생각나 그는 피식 웃었다.

……밥은 잘 먹고 있나.

밤에 할 일 없이 어슬렁거리던 그는 어제 승운의 집을 보고 왔다.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푸른 지붕이 제법 으리으리했다.

동이 트자 어슴푸레한 햇빛이 제일 먼저 왼쪽 지붕에 닿으며 집을 밝히기 시작했다. 커튼이 쳐 있지 않은 2층 창문 안으로 손톱만큼 내부가 보였다. 모르긴 몰라도 겉모습보다 덜 화려할 것 같지는 않았다.

밤이슬을 털어 내며 그는 창고 집으로 돌아왔다. 밤새 깨어 있었으니 침대에 머리가 닿자마자 잠들 줄 알았는데 정신이 지나치게 또렷했다.

결국 지금까지도 범진은 침대에 누워 있을 뿐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혀를 차며 침대에서 일어난 그는 계단을 뛰어 내려왔다. 그러면 꼭 준영이 뒤에서 재잘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잡생각이 너무 많은 것 같으니 운동이나 하자 싶어 티셔츠를 벗어 던진 그는 바닥에 대고 푸시업을 시작했다.

어머니 미인이시더라.

이렇게 말하면 준영이 그 매운 주먹으로 저를 후려갈길 것 같고.

자주 맞는 것 같던데 사람을 쉽게 기절시키는 법 좀 알려 줄까? 물론 성공률이 백 프로는 아니야.

이렇게 말해도 결과가 달라질 것 같지는 않다.

머리를 굴리는 동안 뺨을 타고 흘러내려 턱에 맺혀 있던 땀방울이 하나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몸에 열이 오르고 있었지만 범진은 멈추지 않았다.

생각에도 끝이 없고 체력에도 끝이 없으니 이 방법으로는 안 되겠다, 싶어 그는 한숨을 쉬며 일어섰다.

비가 꽤나 오는 것 같은데 나가서 한 바퀴 뛰고 올까. 열이라도 식힐 수 있을 것 같은데.

벗어 둔 티셔츠를 집으려고 손을 뻗은 것과 문이 벌컥 열린 것은 거의 동시였다.

“……윤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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