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저주받아라, 내 입아. 아니, 저주는 수학이 받아야지. 모든 악의 근원.
일 보고 바지 지퍼 올리다 거시기나 껴 버려라!
악담을 속으로 퍼부으며 준영은 걸음을 멈췄다. 구름이 몰린 하늘이 어둑했다. 정말이지 가고 싶지 않았다.
고를 만한 옷이 없는데도 잠을 거의 자지 못했다. 가진 옷 중 그나마 제일 멀쩡한 블라우스와 무릎을 덮는 면 치마를 입었지만 다 집어치우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문제집을 사려고 모아 놓은 돈으로 시장에서 새 옷을 사 올까 수십 번 고민했다. 하지만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그래 봐야 어차피 초라해 보일 테니까.
“아침에 일어났는데 숙취로 쓰러지다 침대 모서리에 뒤통수나 부딪쳐라.”
죽는 건 찜찜하니까 죽진 말고.
수학을 향해 더욱 구체적인 저주를 날린 준영은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간밤에 또 어디선가 술을 마시고 들어온 엄마는 잠잠했다. 덕분에 그녀는 생각이라는 걸 조금 할 수 있었다.
왜 나를 초대했을까.
체육관을 입에 담은 저를 건방지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아니면 여자의 말대로 승운의 이야기 속에 나오는 제가 궁금해서일 수도 있다. 어쨌든 승운이 던진 공을 맞고 쓰러졌다고 하니 신경이 쓰일 수도 있겠지.
얌전히 밥을 먹고 집안일이나 공부를 핑계로 얼른 나오면 될 것이다. 긴장할 필요는 하나도 없다.
“준영아.”
스스로를 다독이던 준영은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승운이 웃는 얼굴로 그녀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맑은 하늘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색깔의 셔츠와 그에 맞춰 입은 하얀 바지가 눈이 부실 지경이다. 뒤돌아 도망가고 싶은 충동을 꾹꾹 누르며 준영은 어정쩡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왜 여기 있어? 교회는 저쪽이잖아.”
“아, 기다리다 네가 보여서.”
겸연쩍은 듯 말꼬리를 내린 승운이 얼른 앞장서며 말을 걸었다.
“배 안 고파? 아침 먹었어? 오느라 힘들었지? 그래도 비는 안 와서 다행이다.”
“너희 어머니.”
“응?”
“원래 사람 초대하는 거 좋아하시니?”
불시에 묻자 눈을 굴린 승운이 더듬더듬 대답했다.
“어……, 가끔?”
아니란 뜻이군.
조금 더 가중된 부담을 외면하며 준영은 입을 꾹 다물었다. 옆에 선 승운이 빙긋 웃으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래도 이곳에서 내 친구를 초대하신 건 처음이라 많이 들뜨셨나 봐. 특히 뭘 좋아하는지 모르겠다면서 음식에 신경을 많이 쓰셨어.”
“좋아하는 거 없어. 싫어하는 것도 없고.”
그런 건 가릴 여유 있는 사람들이나 따지는 거 아닌가. 범진이랑 나만 봐도 매일같이 라면만 먹는데, 뭐.
불퉁하게 대꾸하던 준영은 결국 한숨을 뱉어 내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내가 왜 가고 있는지 모르겠다.”
“나 때문일 거야.”
그녀의 중얼거림에 승운이 머쓱한 얼굴로 말했다.
“엄마는 내 성적이랑 학교생활에 관심이 많으시거든. 우리 반에서 제일 공부 잘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무슨 특별한 일은 없었는지 그런 걸 물으셔서 얘기하다 보니까.”
슬쩍 준영의 얼굴을 살핀 승운의 눈꼬리가 부드럽게 처졌다.
“네 얘기가 가장 많이 나와서, 궁금해지신 것 같아.”
역시 어른이네. 교감 앞에서는 학교에 바라는 거 없고 건강하게 다니기만 하면 된다고 말하더니.
견제, 라는 단어가 준영의 머릿속에 새겨졌다. 그녀는 경직되어 있던 어깨에 힘을 풀었다.
“반성문 때문에 학교 오신 거지? 나랑 얽혀서 그랬다는 것도 알고 계시는 것 같던데.”
“너한테 그걸 따져 묻거나 하시진 않을 거야. 내가 집에서 얘기한 건 수학 선생님의 부당함이었거든. 그럴 만한 일이 아닌데 반성문을 쓰라고 하셨잖아. 가만히 있던 너, 나, 그리고 권범진까지.”
“권범진은 그럴 만하지. 선생님한테 농구공을 던졌잖아.”
범진의 이야기에 준영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잠버릇 핑계를 대던 뚱한 얼굴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그 말은 무슨 뜻이었을까. 무서운 게 있어서 여기에 있다는 말.
에잇, 물어볼 수도 없고. 이걸 어떻게 풀지.
생각에 잠긴 그녀는 저를 가만히 응시하는 승운의 눈길을 눈치채지 못했다. 느릿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범진이도 초대할 걸 그랬나? 같이 반성문으로 엮인 사인데.”
“걔가 올 리가 있어? 그럴 시간이 있으면 잠이나 자겠지.”
무심코 대답하던 준영은 순간 제 말투가 너무 친근했다는 걸 깨닫고는 얼른 덧붙였다.
“맨날 잠만 자잖아. 학교에서.”
잠시 이어지는 침묵이 묘하게 느껴졌지만 승운을 볼 수가 없었다. 준영은 바닥 언저리만 바라보며 뺨에 느껴지는 그의 시선을 모르는 척 버텼다.
언덕길로 방향을 틀며 승운이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이상하지? 범진이랑 너, 같이 있는 걸 본 적이 없는데 서로 잘 아는 사이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 보통은 없는 사람처럼 조용한 범진이가 어쩐지 네 일에는 나서는 것 같기도 하고.”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설마하니 승운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아니, 아니지. 저런 건 짐작일 뿐이야. 그리고 뭐, 딱히 알려진다고 큰일이 나는 건 아니잖아. 잡아떼면 그만이다.
“의외로 박애주의자인 모양이지. 수학 선생님을 싫어하거나.”
성가시다는 듯 준영은 미간을 좁혔다. 하늘이 조금 더 흐려지고 습한 바람이 불어왔다.
“그때.”
이쯤이면 웃으며 물러설 줄 알았는데 오산이었다. 승운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너 쓰러져서 보건실에 누워 있었던 날, 난로랑 창문 얘기했었지. 고맙다고.”
“그게 뭐. 갑자기 또 생색이라도 내려는 거…….”
“그거 나 아냐. 난 그냥 쉬는 시간에 가서 네 옆에 앉아 있기만 했거든. 난로 같은 건 어디 있는지도 몰랐고.”
준영은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며 승운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가 천천히 눈을 들어 올린다.
시선이 마주치자, 입꼬리를 가볍게 올린 승운이 물었다.
“지금 누구 떠올렸어?”
* * *
어떤 의미에서는 넋이 반쯤 나간 것이 다행이었다. 안 그랬다면 열등감에 질식하고 있었을 테니까.
승운의 집은 근사하다는 말로는 모자랐다. 본래 3층집이었던 건물 내부를 터서 2층으로 만들었다고 했다. 층고가 높은 데다 중세의 성을 방불케 하는 거대한 조명이 압도적이었다.
기껏해야 일을 도와주는 아주머니 한 분쯤 있을 거라 생각했던 준영은 눈앞에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대여섯 명의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다들 일부러 소속을 드러내는 것처럼 똑같이 흰 셔츠에 까만 바지나 치마를 입고 있었다.
“은근히 화려한 걸 좋아하신다니까.”
낮게 중얼거리며 승운이 앞장서서 들어갔다. 거실에 조각상처럼 서 있던 푸른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어서 오렴. 시간 맞춰 잘 왔구나.”
“안녕하세요.”
준영은 떨떠름하게 인사하며 여자를 바라보았다. 위로 틀어 올린 머리는 한 올도 삐져나와 있지 않았고, 입고 있는 옷은 원피스라기보다 드레스에 가까웠다.
몸매를 드러내는 늘씬한 드레스에는 하얀 실로 레이스 무늬가 수놓아져 있었는데 도저히 싸구려일 수가 없는 광택을 내고 있었다.
붉게 칠한 입술을 기울여 웃으며 여자는 빠르게 준영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마치 싸늘한 뱀의 혀가 몸을 핥는 것처럼 느껴져 준영은 가만히 주먹을 말아 쥐었다.
“배 많이 고프니? 앉자. 김 실장.”
“네, 사모님. 이쪽으로 안내해 드릴게요.”
안경을 끼고 검은색 슈트를 입은 여자가 다가왔다. 그녀를 따라 부엌으로 간 준영은 애써 입이 벌어지지 않도록 힘을 주어야 했다.
어림잡아 열 몇 명 정도는 앉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다란 식탁에 그야말로 갖가지 음식이 그림처럼 차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혹시 오늘 저 말고 다른 사람들이 오나요?”
“아니. 네 취향을 알 수 없어서 이것저것 차리다 보니 이렇게 됐네.”
“너무 과하잖아요, 엄마.”
“집으로 초대한 네 첫 여자 친구인데 이게 과해?”
“엄마!”
당황한 듯 눈치를 살피며 승운이 외쳤지만 여자는 느긋하게 의자에 앉았다. 준영은 그녀를 따라 섬세하게 조각된 의자를 당겼다. 뭐 하나 손에 걸리는 것 없이 매끄럽고 단단했다.
김 실장이 종을 흔드는 소리에 준영이 바라보자 여자가 눈꼬리를 휘며 웃었다.
“따뜻한 음식들은 식을까 봐 아직 내놓지 않았거든. 천천히 많이 먹으렴.”
“……잘 먹겠습니다.”
애초에 이런 곳에서 배를 채울 생각은 없었다. 준영은 젓가락으로 집기 쉬운 것들만 천천히 입에 넣었다. 처음 보는 음식들도 많았다. 도무지 어떻게 먹어야 할지 알 수 없는 것들 말이다.
“선생님들도 칭찬이 자자하고, 공부를 아주 잘한다던데. 따로 학원을 다니니? 아니면 과외?”
“혼자서 하고 있어요.”
“어머. 대단해라.”
“엄마. 이런 자리에서까지 공부 얘기 하는 건 소화불량 걸리라는 뜻이죠?”
“얘는. 이 정도로 소화불량 걸릴 위장으로 어떻게 고3 생활을 하려고 그래?”
고개를 내저은 승운이 접시 하나를 밀어 주었다. 처음 보는 갑각류 같은 것이 있었다.
“맛있어. 먹어 봐.”
“엄마를 그렇게 챙겨 봐라.”
코웃음을 치며 여자가 하는 말에 승운이 음식을 빈 접시에 던 뒤 엄마에게 내밀었다.
“여기 있습니다, 어머니.”
준영이 놀란 것은 승운의 태도였다. 승운은 준영이 뒤에 서 있는지도 몰랐던 사람에게 눈짓을 한 번 보냈고, 그에게서 건네받은 접시에 음식을 덜었다. 모든 과정이 지나치게 자연스러웠다.
“처음 먹어 보니?”
“아니요.”
그렇게 대답한 것은 무의식적인 반응이었다. 짤막한 그녀의 대답에 여자의 포크가 허공에서 멈췄다. 그녀의 입꼬리가 다 안다는 듯 웃고 있어서 준영은 굳이 덧붙였다.
“별로 안 좋아해서요.”
“그래. 그럴 수 있지. 준영이는 혹시 어떤 학교를 목표로 하고 있니? 우리 승운이랑 뜻이 같나?”
어디든 장학금을 받고 빨리 취직을 할 수 있는 곳이면 좋다.
“성적 되는 곳으로 가려고요.”
“하고 싶은 일이 딱히 없니?”
그때도 느꼈지만 여자의 말에는 톱날이 달려 있는 것 같았다. 불쾌하게 서걱서걱 피부를 긁고 지나가는 느낌.
“성적이 좋으니까 의대를 가는 것도 좋을 텐데. 유학을 가는 것도 괜찮고. 뭐, 적당히 쉬엄쉬엄 다니다 로스쿨 같은 곳에 가는 것도 괜찮겠지.”
일부러 돈이 많이 드는 곳만 언급하는 것 같은 느낌은 기분 탓일까. 준영은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네. 성적이 좋으니까 천천히 생각해 보려고요.”
눈이 마주치자 여자가 재밌다는 듯 웃었다.
내가 질 줄 알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