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저 여명일 뿐-12화 (12/86)

<12화>

“저는…… 나승운이랑 그렇게 친하지 않은데요.”

이런 일은 처음인 데다 승운이 제 타령을 했다는 말까지 들은 준영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실망한 듯 시선을 떨군 승운이 무어라 말하기 전에 여자가 나섰다.

“뭐 좋아하니? 아줌마가 손재주는 없는데, 다행히 손재주 있는 사람이 집에 있어서 네 입맛은 맞춰 줄 수 있을 것 같구나.”

“아니, 저는.”

“12시 반이 좋겠다. 믿음교회 근처까지 오면 집이 보일 거야. 혹시 멀면 차를 보내 줄까?”

보내 준다는 차가 마시는 차는 아닐 것이다. 준영이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뇨. 괜찮습니다.”

“그럼 토요일 12시 반에 보자.”

부드럽게 웃은 여자는 입술을 벙긋거리고 있는 제 아들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린 뒤 또각또각 걸어갔다. 준영은 짧게 한숨을 내쉬고는 승운을 바라보았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승운이 경직된 얼굴로 웃어 보였다.

“미안해. 우리 엄마가 좀, 마이 페이스라서.”

아니, 저건 마이 페이스라고 할 수 없다. 마이 페이스는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사람을 뜻하는 말이지, 원하는 대로 상황을 만드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니까.

준영은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목소리를 낮춘 채 조용히 속삭였다.

“아무 이유도 없이 너희 집에 갈 순 없어. 어머니께 나 대신 죄송하다고…….”

“초대를 받았잖아.”

승운이 다급하게 그녀를 붙잡듯이 말했다. 조금 놀란 얼굴로 바라보자 그는 헛기침을 하며 목덜미를 긁적였다.

“이유가 없는 건 아니지.”

쑥스러워하는 듯한 표정을 보자 여자의 말이 떠올랐다. 윤준영 타령을 했다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승운이 제 얘기를 집에서 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왜인지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 같았다.

“그럼 토요일에 보자. 내가 교회 앞에 나가 있을게.”

그녀가 망설이는 사이 얼른 말을 던진 승운이 그대로 돌아서서 가 버렸다. 어, 하고 고개를 든 준영은 그제야 비로소 주변에서 저를 보며 수군대는 몇몇 아이들을 발견했다.

망했다.

벌써부터 그들이 신나게 친구들에게 달려가 떠들어 대는 풍경이 그려지는 것 같았다. 소문은 삽시간에 퍼질 것이다. 오혜수도 물론 알게 될 것이고, 또 아무리 잠만 자고 있대도 귀는 열려 있으니까…….

아니, 권범진이 알든 말든 그건 내가 신경 쓸 일이 아니지. 원래대로라면 주말에도 그 집에 가서 공부나 할까 생각했었는데, 권범진도 그곳에 올 게 뻔하니 차라리 안 가는 게 낫긴 할 것이었다.

아직은 마주치고 싶지 않으니까.

복잡한 생각이 얽혀 준영은 땅이 꺼져라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여자가 저를 초대한 이유가 괜히 제가 나불댄 체육관 때문인가 싶기도 했다. 두통이 몰려오고 있었다.

* * *

“들었어? 승운이네 엄마가 윤준영을 집에 초대했대.”

“경희가 직접 들었다며? 웬일이야.”

“왜? 왜 초대한 건데?”

“자세히는 못 들었다는데 경희 말로는…….”

자기들 딴에는 조용히 얘기한다고 하는 것 같았지만 범진은 원래 귀가 좋았다. 아니, 아버지가 타고났다고 감탄할 만큼 그는 어릴 때부터 시력도 청력도 특히나 뛰어난 편이었다.

정말로 잠들어 있었다고 해도 깰 만큼의 소란스러움이었으니, 눈만 감고 있는 그의 귀에는 서라운드 스피커라도 틀어 놓은 것 못지않게 잘 들렸다.

짧게 혀를 차며 부스스 몸을 일으키자 순식간에 그를 중심으로 침묵이 퍼져 나간다. 헝클어진 머리칼을 털어 내던 범진의 짙은 눈썹이 찌푸려졌다. 손이 어제 난 상처를 건드렸던 것이다.

엄마 손이 매운 걸 보면 되도록 윤준영이 손을 휘두를 일은 만들지 말아야겠다. 은근히 욱하는 성질이 있으니까.

멍한 머리로 그런 생각을 하던 범진은 막 제 자리를 스쳐 지나가는 뒷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얼굴을 보지 않아도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어차피 잘 다려진 하늘색의 폴로 셔츠를 입을 사람은 이 반에, 아니, 이 학교에 한 명뿐이다.

나승운 엄마가 집에 윤준영을 초대했다고? 왜지? 애초에 그 엄마는 학교에 왜 온 건데?

누구든 한 명 붙잡고 무슨 일이냐 운만 떼도 줄줄이 소식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범진은 그러지 않았다. 괜한 주목을 끌고 싶지는 않았다.

조금 기다리자 익숙한 발소리가 들렸다. 일어나 있는 제 뒤에서 잠깐 머뭇거리는 것 같았지만 발소리는 그대로 그를 지나쳤다. 시야에 하나로 묶은 긴 머리칼이 찰랑거리는 것이 들어왔다. 자리에 앉은 준영은 그 자세 그대로 펜을 쥐었다.

범진은 그녀가 공부에 몰입하는 순간을 좋아했다. 그 순간의 공기에는 무언가 특별함이 있었다.

순식간에 주변이 고요해지고 허공에 떠다니는 모든 것들이 아래로 차분하게 가라앉는 느낌. 그 사이에서 눈을 빛내며 불규칙적으로 펜을 움직이는 윤준영. 그 펜이 그려 내는 소리들.

그래서 범진은 그녀가 지금 정신이 산만하다는 걸 어렵지 않게 알아챘다. 마른 어깨가 조금 움츠러들어 있었고, 쓸데없는 움직임이 많았다.

쥐고 있던 펜으로는 이마와 귓가를 자꾸 긁적였고, 다른 손은 괜스레 책상 끝과 옷자락을 매만지고 있다.

범진은 속으로 웃으며 느긋하게 턱을 괴었다. 그가 즐겨 보는 영화가 시작되고 있었다.

윤준영은 특별하다. 나를 외롭지 않게 해 주는 유일한 존재니까.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숨어 있는 것밖에 없는 생활은 상상 이상으로 답답했다. 그 끝이 언제가 될지 모른다는 점에서 더더욱 그랬다. 잔인할 만큼의 무료함 속에서 윤준영은 그가 발견한 유일한 흥밋거리였다.

준영은 이 동네에서 그녀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유명인사였다. 다들 옆집 사정에 훤할 만큼의 시골은 아니지만 사람 사는 곳이니 어느 정도의 교류는 있다. 하지만 이곳에 오래 살고 있으면서도 늘 이방인처럼 누구와도 섞이지 않는 동네 사람은 윤준영네가 유일했다.

그거야 어른들 사이의 일이고, 학교는 훨씬 단순하다. 예쁘고 공부를 잘하니 눈에 띈다. 그런데 어울리는 친구라고는 한 명도 없다. 호기심에 다가갔던 몇 명은 단칼에 튕겨져 나왔다. 그녀는 고립된 섬처럼 홀로 있기를 바라는 사람 같았다.

준영에게 책임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그녀의 눈빛과 태도를 보고 무시당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니까. 고의든 아니든 말이다.

조금만 요령이 있었다면 적이 아닌 추종자를 끌고 다닐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준영은 수학이 말했던 것처럼 정말로 이곳에서의 인간관계에는 아무런 미련도 없는 것 같았다.

어차피 시간만 지나면 다시 볼 일 없는 사람들. 결국 저와는 다른 세계에 살게 될 사람들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처럼.

그녀가 이 동네의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조금 가난한 것 외의 문제를 안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전혀 드러낸 적이 없으니까.

준영은 그와 비슷한 정도로 아이들의 입에 오르내렸지만 그녀에게 평균 이상의 호기심을 가진 적은 없었다. 같은 반이 되고 제 앞쪽에 앉으면서 아무 생각 없이 그 자그마한 뒤통수를 바라보는 시간이 많아졌지만, 그것은 신기해서였다.

몇 번을 자고 깨도 늘 똑바른 자세로 앉아 펜을 움직이고 있는 꼿꼿한 뒷모습이 신기해서.

공부가 그렇게 좋나. 설마 재밌는 걸까? 놀 거리가 없는 동네에서 오래 살다 보니 머리 어딘가가 해까닥해서 문제 푸는 게 놀이처럼 느껴진다든가.

아니면.

그것만이 동아줄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준영의 뒷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알게 된 것들이 제법 있었다. 그중 하나가 나승운이 있는 방향에 자주 머무는 그녀의 시선이었다.

어쩐지 실망스럽기도 했다. 꺅꺅거리는 다른 여자애들과 마찬가지로 허우대 멀쩡한 왕자님에게 반했나 싶어서. 그래서 승운에게도 차별 없이 냉랭한 그녀의 태도를 확인하면 이상하게 웃음이 나기도 했다.

그것뿐이었다.

어느 날 잠에서 깨어 고개를 들었을 때, 제 아지트에 있는 낯익은 뒤통수를 보기 전까지는.

자신을 처음 발견했을 때의 윤준영의 얼굴을 떠올리면 언제고 웃게 된다. 늘 그렇게나 반듯하고 평온하던 이목구비가 금방이라도 앞으로 쏟아져 나올 것처럼 놀란 표정이라니.

잔뜩 긴장해서 몸은 움츠리고 있으면서도 눈빛만은 물러서지 않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금세 침착을 되찾고 당당하게 대거리를 하는 하얀 얼굴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원래 그의 성격대로라면 상대가 침대를 노리고 있건 아니건 당장 내쫓았을 것이다.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았던 탓인지 범진은 영역 동물 같은 특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타인과 공간을 공유하는 것이 불편하고 거슬렸다.

하지만 준영에게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그는 준영을 보는 것이 좋았고, 그 시간이 늘어날 기회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준영과의 관계는 비밀스럽다는 점에서 더욱 재미있었다. 그 집에서 그녀와 함께 있을 때만큼은 편하게 행동할 수 있었다. 마치 평범한 고등학생이 된 것처럼.

……그런데 이걸 어떻게 풀어야 하나.

턱을 괸 범진의 고개가 비딱하게 기울었다.

제 쪽에 잘못이 있다면 차라리 쉽다. 정말 어려운 건 아무도 잘못한 사람이 없을 때다. 지금처럼.

다른 사람도 아닌 그녀가 저렇게 저를 피하는 것은 영 거슬렸다. 하지만 그 이유가 보이고 싶지 않은 것을 보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니 섣불리 나설 수도 없었다.

몸에 열이 나 쓰러졌는데도 집에 가지 않으려던 윤준영.

그 자그마한 머리통에 쏟아지는 폭력을 익숙한 몸짓으로 감싸던 윤준영.

엄마에게 악다구니를 쓰고는 이를 악물며 달려가 버리던 윤준영.

그 대단한 자존심에,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겠지.

“그걸 왜 하필 내가 봐서.”

이를 문 채 중얼거리자 앞에 앉아 있던 아이가 흠칫 놀라 뒤를 돌아본다. 그는 범진이 자고 있지 않으면 늘 불안에 시달리곤 했다. 하지만 범진은 그러거나 말거나 조금 더 훤히 보이는 준영의 등만 바라보았다.

그런 건 창피한 것 축에도 못 끼는 일인데.

애초에 이상한 부모를 가진 것은 모르고 태어난 우리 잘못이 아니니까.

날렵하게 뻗은 그의 눈매가 가늘어지자 앞자리의 아이가 울상을 지으며 의자를 바짝 당겨 앉았다.

책상에 배가 짓눌려 몸이 납작해질 지경이었지만 그에게는 험악한 표정을 짓고 있는 범진에게서 1mm라도 떨어지는 것이 중요했다.

범진의 손가락이 불규칙하게 책상을 두드리는 소리가 천둥처럼 울린다. 등을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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