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저 여명일 뿐-11화 (11/86)

<1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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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학 가고 싶다.

준영은 펜을 내려놓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아니, 사실은 어디로든 사라져 버리고 싶었다.

하필 그 타이밍에 그 꼴을 보일 건 뭐란 말인가.

학교에서 마주친 범진은 늘 그렇듯 그녀에게 알은체를 하지 않았다. 물론 그녀가 멀찌감치에서부터 범진을 발견하고는 피해 다녔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수업 시간에는 그가 뒷자리에 앉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대로 바닥으로 꺼져 버리고 싶었다.

그날 집으로 돌아간 준영은 가방을 내팽개치고 엄마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2차전을 대비해야 했지만 오늘은 순순히 당하지만은 않을 작정이었다. 제 가장 약한 부분을 누군가에게 들켰다는 생각에 제정신이 아니었다. 창피함과 모멸감에 눈물이 그치질 않았다.

하지만 돌아온 엄마는 우뚝 서 있는 그녀를 제대로 보지도 않고 그대로 자리에 드러누웠다. 낡은 담요를 끌어당겨 몸을 덮는 엄마를 어이없는 눈으로 바라보았지만 곧이어 코를 드릉드릉 고는 소리가 들렸다. 두어 시간 긴장 상태로 버텼으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런 식의 소강상태에는 익숙하다. 엄마는 늘 갑자기 발작하고 갑자기 얌전해졌으니까. 그 뒤에 남은 범진에 대한 민망함만이 그녀를 괴롭히고 있을 뿐이었다.

이러면 공부하러 그 집에 갈 수도 없잖아. 시험도 얼마 안 남았는데. 그럼 난 어디서 공부하지? 언제까지 권범진을 피해야 하나?

여지없이 다시 써 오라고 돌려받아 고쳐 쓰고 있던 반성문의 마지막 한 줄 글씨가 엉망이 되었다. 이래서야 유려한 내용과는 상관없이 글씨로 반항하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지만 고쳐 쓸 마음은 들지 않았다.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나던 준영이 멈칫했다. 엎드려 누워 있는 범진이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깨끗하던 턱과 목덜미에 울긋불긋한 상처가 남아 있었다. 입술은 또 언제 터졌는지 학교에 온 그를 본 아이들은 어제 한바탕했나 보다며 수군거렸다.

우리 엄마한테 맞아서 그런 거라고 말할 수도 없고.

반성문을 든 채 준영은 입술을 질근거렸다. 한순간에 달려와 방패처럼 저를 감싸 주던 품이 떠올랐다.

얼굴을 얻어맞은 얼얼함이 남아 있는 와중에도 제 등을 단단하게 끌어안고 있는 범진의 손의 감촉이나 흔들릴 때마다 코끝에 스치던 그의 가슴, 열을 품고 흘러나오던 그 특유의 체취는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뭘 기분 나쁘게 실실 웃고 있어? 좀 비켜 줄래?”

새침한 목소리에 준영이 고개를 돌렸다. 혜수가 눈을 가늘게 뜬 채 비딱하게 서 있었다. 짧게 한숨을 내쉰 준영은 그녀에게 얼굴을 들이밀고는 한껏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실컷 봐라. 부족하면 말해. 더 웃어 줄게.”

“야!”

고개를 내저으며 준영은 혜수의 괴성을 지나쳐 교실을 나왔다. 손에 든 반성문이 팔락거렸다.

……내가 웃고 있었나?

“미쳐 가나 봐. 웃을 일이 하도 없으니 아무 때나 웃음이 새네.”

중얼거리며 교무실로 향하던 그녀는 아이들이 웅성거리며 삼삼오오 모여 있는 것을 보고는 걸음을 멈췄다. 어쩐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들어갈까 말까를 망설이던 준영은 아이들의 시선이 제게로 쏠리는 것을 느꼈다.

이럴 때면 마치 제게 신비한 능력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순식간에 침묵을 불러왔으니 말이다.

주목을 받으니 차마 등을 돌릴 수 없어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교무실 문을 두드렸다. 반쯤 문을 열자 생전 처음 들어 보는 수학의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아닙니다. 무슨 그런 말씀을.”

하하, 하고 어색하게 이어지는 웃음은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안으로 한 발 들어서던 준영은 몸을 굳혔다. 교무실 안의 풍경이 매우 이상했다.

안에는 선생님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기도 하는 기다란 소파와 책상이 있었는데, 몇몇 선생님들이 그 주변에 서 있었다.

이상한 점은 그들이 마치 벌이라도 서는 것처럼 두 손을 공손하게 앞으로 모으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이 만들어 낸 원 안에는 온몸을 공벌레처럼 둥글게 말고 있는 담임과 수학과 교감, 그리고 한 여자가 있었다.

준영은 태어나 저런 사람을 TV가 아닌 눈앞에서 본 것은 처음이었다.

어깨까지 내려온 머리칼은 윤기가 흘렀고 같은 방향으로 말아져 있었다. 깨끗한 톤의 실크 셔츠 아래 검은색에 가까운 남색의 슬랙스를 입었는데, 꼬고 있는 한쪽 발에 신겨진 구두의 굽이 가늘고 높았다. 어깨에 걸친 재킷의 소매가 가볍게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연예인 같았다. 철저하게 계산한 것처럼 밖으로 드러나는 모든 부분에 흐트러짐이 없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남의 손으로 이루어진 것 같다는 점에서.

본능적으로 그녀가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학부모가 찾아오면 상담실에서 얘기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교무실 한 가운데 당당히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근거는 충분했다.

마침 저를 돌아본 선생님과 눈이 마주친 준영이 뒤로 물러섰다.

“어, 준영아.”

“죄송해요. 다음에 다시 올게요.”

준영은 그 원 안에 있는 누구의 시선도 끌고 싶지 않았지만 이미 제 이름이 불린 후였다. 우아하게 고개를 든 여자가 입을 열었다.

“저 아이가 혹시.”

“아, 네! 야, 윤준영. 이리 좀 와 봐라. 빨리.”

꼬리를 흔드는 개처럼 담임이 벌떡 일어서서 손짓했다. 준영은 여자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천천히 걸어갔다. 담임이 그녀의 등을 툭 치며 어색하게 웃었다.

“얘가 우리 반 1등 윤준영입니다. 촌구석에서 난 계집애치고는 머리가 제법이죠.”

허리를 반듯하게 세우고 있던 준영의 미간이 저절로 치켜세워졌다. 여자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듣자 하니 우리 승운이가 던진 공에 맞아서 쓰러졌다던데.”

“아, 그런 것은 체육 시간에 흔히들 있는 일이고, 이 애가 몸이 약해 빠져서…….”

열성적으로 설명하던 담임은 여자가 제 말을 듣지 않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목소리가 작아졌다. 대답을 요구하는 시선은 준영의 몫이었다. 준영이 입을 열었다.

“별일 아니었어요.”

“어머, 그래도 사과는 하고 싶구나. 몸은 괜찮니?”

“네.”

준영은 빨리 이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그녀의 무뚝뚝한 대답에도 여자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여자는 눈앞에 놓인 찻잔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저는 사실 학교에 바라는 게 크게 없답니다. 그저 아이들 건강하게 잘 다닐 수 있기만 하면 돼요. 그게 제 아들이 잠시나마 몸담은 학교에 체육관을 지어 드리려는 이유이기도 하고요. 여긴 제 고향이기도 하니까요.”

교감이 경청하는 듯한 태도로 고개를 깊이 끄덕였다. 여자는 웃고 있었지만 매끄러운 목소리에는 보이지 않는 자잘한 칼날이 돋아 있는 것 같았다.

“그러니 선생님들도 아이들 건강에 관련된 일은 조금 너그럽게 봐주시면 좋겠어요. 제 아들이 서울에 있을 때는 반성문 같은 것을 써 본 적이 없는 애라, 고민을 많이 하는 게 너무 안쓰럽더군요. 그런 쓸데없는 고민이 공부에 방해가 되기라도 하면 곤란하잖아요?”

쓸데없는, 부분에서 정확히 여자의 시선은 수학을 향했다. 준영은 수학의 머리가 더욱 움츠러드는 것을 보았다.

여자는 저와는 다른 종류의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준영은 존재 자체로 침묵을 불러왔지만 여자는 원할 때 원하는 침묵을 불러올 수 있었다. 가장 근본적인 차이는 물론 침묵하는 자들의 태도였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을까.

준영은 여자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깨끗하고 팽팽한 피부, 흠 없이 깔끔하게 다듬어진 손톱, 우아하고 느긋한 태도와 굽힘 없는 눈빛. 마치 군신을 다스리는 왕 같았다.

순간 문이 다급하게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조아리고 있던 사람들이 뒤를 돌아보았다. 황망한 얼굴로 달려들어 온 것은 왕자님이었다.

“엄마!”

버럭 외치던 승운은 준영을 발견하고는 어색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여자가 빙긋 웃으며 일어섰다.

“선생님들 바쁘신데 제가 너무 시간을 빼앗은 것 같네요. 저녁 식사는 부담 없이 맛있게들 하고 가세요. 성의라고 생각하시고.”

“아이고, 살펴 가십시오.”

우르르 일어난 교감을 필두로 담임과 수학이 깍듯하게 예의를 차렸다. 승운은 그대로 교무실을 나가는 엄마의 뒤를 쫓았다. 여자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준영은 꿈에서 깬 것처럼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다시 털썩 소파에 주저앉는 수학에게 반성문을 내밀었다.

“선생님.”

“어, 거기 두고 가. 어휴, 정신이 없네. 뭔 여자가 저렇게 기가 세.”

“씁, 김 선생.”

교감이 눈을 부라렸다. 준영은 저를 의식하는 듯한 선생님들의 분위기에 반성문을 두고 교무실을 나왔다.

걸음을 옮기던 그녀는 복도에 서 있는 두 사람을 발견했다. 항의하듯 엄마의 재킷 소매를 좌우로 흔들고 있던 승운이 준영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여자도 그녀를 보고 있었다.

“이름이 윤준영이라고?”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는 지나치려던 준영이 멈춰 섰다. 뒤를 돌아보자 승운이 겸연쩍은 얼굴로 웃었다.

“아, 저기, 준영아. 여기는 우리 엄마. 학교에 볼일이 있어서 오셨대.”

“학부모가 학교에 볼일이 뭐가 있겠니? 자식이 사고를 치니까 온 거지.”

여자가 팔짱을 끼며 헛웃음을 흘렸다. 승운이 애처럼 입술을 비죽인다. 그들을 바라보던 준영은 저도 모르게 비딱한 말투를 내뱉었다.

“체육관 때문에 오신 건 아니고요?”

“체육관?”

승운이 눈을 껌뻑이며 엄마를 바라본다. 여자의 가느다란 눈이 천천히 휘었다.

“그것도 결국은 자식 때문이지.”

목소리가 한 톤 낮아졌다. 마냥 웃고 있는 것 같던 여자의 눈빛이 차가워지고 있었다. 준영은 닳고 닳은 제 한쪽 소매를 움켜쥐었다. 괜한 말을 했나 싶었다.

“무슨 소리야? 체육관에 무슨 일이 있어?”

“우리 아들이 말끝마다 윤준영, 윤준영 타령을 해서 어떤 애인지 궁금했는데, 예쁘네. 영리해 보이고.”

“엄마!”

드물게 눈을 험악하게 뜬 승운이 언성을 높였다. 무표정한 얼굴을 고수하고 있던 준영의 눈도 둥그레지는 것을 본 그의 귀 끝이 빨개졌다. 여자는 차분한 얼굴로 물었다.

“혹시 이번 토요일에 시간 있니? 우리 집에 놀러 오지 않을래?”

“네?”

놀란 준영의 입술이 작게 벌어졌다. 그녀는 아예 얼굴까지 다 붉어진 승운을 흘끔 보고는 말을 더듬었다. 그녀의 눈가도 발그스레 물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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