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그 나쁜 잠버릇을 왜 나는 한 번도 못 봤을까? 요즘 거의 매일 네 자는 모습을 본 것 같은데.”
따져 묻는 그녀가 성가신지 범진은 뒤를 한 번 돌아보았지만 도리어 흰자위를 드러내며 눈을 부라리는 준영의 모습에 순순히 고개를 돌렸다.
“악몽을 꾸면 가끔 그래.”
“허. 천하의 권범진도 악몽을 꾸셔? 네가 세상에 무서운 게 있기나 해?”
“있지.”
생각보다 빨리 튀어나온 대답에 눈알이 빠져라 그를 쏘아보고 있던 준영이 눈을 깜빡였다. 범진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게 내가 여기 있는 이유고.”
준영은 귀를 쫑긋 세웠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범진은 좀처럼 자기 얘기를 하지 않았다. 물론 그것은 저도 마찬가지였지만 말이다.
서로에 대해 자세한 건 묻지 않는 것이 불문율처럼 정해진 느낌이었지만 궁금했다. 범진에 대해 알고 싶은 것들이 하나둘씩 늘어 가고 있었다.
막 입을 열려던 준영은 저를 흘끔 돌아보는 범진에게 말이 막혔다.
“넌 외박한 주제에 집에나 가지 여길 또 왜 왔어? 공부가 그렇게 좋냐?”
그러게. 뭐가 그렇게 궁금하다고 여길 기어들어 왔을까?
속으로 중얼거린 준영은 코웃음을 치고는 입을 열었다.
“좋지. 좋아할 수밖에 없잖아.”
외계 생명체라도 보는 듯한 범진의 시선을 외면하며 그녀는 작게 덧붙였다.
“내 마음대로 되는 건 그거 하나니까.”
부산하던 공기가 순식간에 가라앉고 고요한 침묵이 찾아왔다. 뺨에 와닿는 범진의 날카로운 눈길이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괜히 민망해진 준영은 침대에서 엉거주춤 일어났다.
“반성문이나 써. 수학이 얼마나 집요한지 알아? 그냥 넘어가지 않을걸.”
계단을 내려가니 바통 터치라도 한 것처럼 범진이 침대에 드러눕는 소리가 들린다. 책상 앞으로 다가간 준영이 의자에 앉자 나직한 목소리가 날아왔다.
“그래서 나승운이랑 사이좋게 나란히 쓰고 왔냐?”
간질거리던 마음에 순간 삐죽 가시가 돋는 느낌이었다. 준영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위를 올려다보았다.
“헛소리 좀 하지 마. 걔랑 사이좋을 게 뭐가 있어?”
흠, 하고 비웃음과 무시, 그 중간쯤에 있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입술을 비죽이며 가방에서 책을 꺼내던 준영이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너 자꾸 내 앞에서 나승운 얘기 꺼내지 마.”
엄포를 놓듯 기껏 목소리를 낮게 깔고 말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정적뿐이었다. 준영의 이마에 잡힌 주름이 깊어졌다.
“잘 거야?”
“이미 잔다.”
이불에 입술을 파묻은 목소리가 불퉁하게 돌아왔다. 코웃음을 친 준영은 책을 펼쳤다.
권범진이 하도 정신없게 해 놓은 탓인지 오혜수도, 엄마 생각도 하지 않고 그녀는 그대로 책 속으로 빨려 들어갈 수 있었다.
* * *
오늘도 몽둥이는 딱 잡기 좋을 만큼 매끄러웠다. 하품을 하며 앞서 내려가는 범진을 따라가던 준영도 길게 하품을 했다.
밀린 영어 단어를 외우느라 평소보다 조금 더 늦었다. 머릿속으로 알파벳을 띄워 놓고 있던 준영은 어, 하고 멈춰 서는 범진을 졸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왜?”
“가로등 꺼졌네.”
그의 말에 고개를 들자 길게 이어지는 길이 평소보다 어둑한 것이 보였다. 그 길에는 아주 넓은 간격으로 가로등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꺼져 있었다.
“집까지 얼마나 들어가야 돼?”
평평한 길에 발을 디디며 범진이 물었다. 준영이 피식 웃었다.
“필요 없어. 혼자 갈 수 있어. 아, 목 조른 게 미안해서 걱정하는 척하는 거야?”
어둠이 다소 가려 주긴 했지만 충분히 흉기 같은 몽둥이를 들고 무표정하게 사람을 돌아보는 범진은 조금 위협적이긴 했다. 준영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안 멀어. 어차피 길도 텅 비어 있고, 무서울 것도 없잖아.”
“그 길에 지금 사람이 한 명 있거든.”
“뭐? 어디?”
범진의 말에 그의 뒤에 있던 준영은 길게 목을 뺐다. 주의 깊게 보니 가로등과 가로등 사이, 어둠에 잠긴 부분에 더 짙은 무언가가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가만히 서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 사람이 차라리 어느 방향으로든 걸어가고 있었다면 크게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람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아마 범진처럼 밤눈이 밝지 않았다면 상당히 가까워진 다음에야 그 사람이 거기 있다는 걸 눈치챘을 터였다.
이 길은 밤 10시만 넘어도 지나는 사람이 없다. 하물며 새벽 1시가 넘은 시간에는 마치 다른 세상처럼 적막했다. 준영은 창고 집에 드나든 뒤부터 보통 이 시간대에 집에 들어가곤 했지만 가는 길에 누군가와 마주쳐 본 적이 없었다.
“뭐, 정 걱정되면 저기 다음 가로등까지만 같이 가든가.”
움직임이 없는 그림자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중얼거리자 픽 웃은 범진이 몽둥이를 잡아끌었다. 유달리 듬직하게 느껴지는 그의 뒤를 따르며 준영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들이 점차 가까워지는데도 그림자는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묘하게 신경이 곤두서 어깨를 움츠리고 있던 준영의 손이 순간 몽둥이에서 떨어졌다.
“……엄마?”
준영을 돌아보던 범진이 놀란 눈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림자는 마치 긴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비척비척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로등의 불빛이 미치는 곳까지 나온 그림자를 본 준영이 달려갔다.
“엄마!”
그녀의 부름이 단순히 놀랐거나 반가워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앙칼진 부름은 질책에 가까웠다. 범진은 들고 있던 몽둥이를 슬쩍 제 몸 뒤로 숨기며 눈앞에 나타난 여자를 응시했다.
헝클어진 머리를 성기게 묶은 그녀는 검은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삐쩍 마른 얼굴에는 두 눈이 퀭하게 박혀 있었다.
이목구비가 선명한 편에 키가 커서 미인이라 불렸을 법도 했다. 온몸에 흐르는 피폐한 분위기와 커다란 눈동자에서 느껴지는 알 수 없는 섬뜩함을 무시한다면 말이다.
“여기서 뭐 해? 집에 가요. 얼른 집에…….”
당황한 듯한 준영이 여자의 팔을 잡아끌자마자 그녀의 긴 팔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휘둘러졌다. 그 팔이 할퀴듯이 준영의 뺨을 후려치는 것을 본 범진의 손에서 몽둥이가 떨어져 굴렀다.
여자는 으으, 하고 이상한 소리를 내며 또 한 번 준영의 얼굴을 사정없이 때렸다. 비명도 못 지르고 바닥에 나동그라진 준영과 눈을 희번덕거리며 그녀의 귀를 노리고 손을 날리는 여자를 본 범진이 그대로 튀어 나갔다.
여자의 손길은 무자비했다. 어디를 노리고 휘두르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알 수 없는 소리를 질러 대며 광기에 찬 손으로 눈앞에 있는 것을 완전히 짓이겨 버리겠다는 듯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그것을 등과 어깨로 받아 내며 범진은 미간을 찌푸렸다. 품 안에서 준영이 바들바들 떨고 있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는 이런 식의 폭력에는 익숙하지 않았다. 그가 아는 사람들은 대체로 어딜 어떻게 공격해야 사람을 쓰러뜨릴 수 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고, 그런 사람들이 휘두르는 폭력에는 군더더기가 없었다. 몇 번 맞지 않아 기절하거나, 상대를 기절시키거나, 둘 중 하나였다.
몸을 제대로 쓸 줄도 모르는 열여섯 살 먹은 동급생 무리의 싸움에 휘말렸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이것은 오히려 약한 자의 발악에 가까웠다.
얼마나 더 맞고 있어야 하나를 가늠하던 순간 철썩, 하고 여자의 손이 범진의 귀와 목덜미를 갈겼다. 요란한 소리에 놀란 듯 고개를 들어 올린 준영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순간 그녀의 눈매가 바짝 치켜 올라갔다.
“비켜.”
“뭐?”
“비켜, 권범진.”
범진을 떠밀며 준영이 벌떡 일어섰다. 여자의 손이 또 한 번 날아왔지만 이번에는 맞지 않았다. 부러질 것처럼 가느다란 여자의 손목을 작정한 듯 낚아챈 준영이 빨갛게 물든 얼굴로 서슬 퍼런 목소리를 내뱉었다.
“말해 봐. 혹시 내가 집에 안 들어왔다고 이러는 거야?”
여자가 뭉그러진 소리를 내며 몸을 뒤틀었지만 준영은 그녀의 손목을 부러뜨리기라도 할 것처럼 우악스럽게 쥐고 흔들었다. 냉소가 묻어나는 목소리가 얼음장처럼 찼다.
“설마 지금 외박한 딸한테 다른 집 엄마들이 하는 가정 교육 흉내 내는 건 아니지? 언제부터 우리 집에 가정 교육이라는 게 있었어? 난 나 혼자 큰 기억밖에 없는데. 내가 정한 규칙만 규칙이고, 내가 따르기로 한 윤리만 윤리였는데.”
“누! 누!”
“차라리 이유 대지 말고 때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정상적인 엄마인 척하지 말라고. 신경 쓰는 척하는 거 역겨워!”
거칠게 소리치는 준영의 턱 끝에 맺혀 있던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붙들고 있던 여자의 손목을 뿌리친 준영은 그대로 달려가 버렸다.
따끔거리는 목덜미를 어루만지던 범진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어둠 속으로 멀어지는 준영이 비틀거리는 것을 보고 한숨을 내뱉은 그의 눈이 여자에게로 향했다. 방금까지 악다구니를 쓰던 여자의 시커먼 눈도 그를 보고 있었다.
여자는 한겨울의 나뭇가지처럼 말라 손만 대도 바스러져 검은 먼지가 되어 버릴 것 같았다.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그를 응시하고 있는 여자는 적어도 준영에게 했던 것처럼 주먹을 휘두를 것 같지는 않았지만, 눈에는 충분한 적의가 넘실대고 있었다.
저를 때리지도, 준영을 따라가지도 않으면서 이렇게 눈앞에 서 있는 것은 다른 걸 원한다는 뜻이다. 범진은 동물적인 언어에 강했다. 여자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그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권범진이라고 합니다. 윤준영과 같은 반입니다.”
여자는 처음 봤을 때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아직 고르지 못한 숨만이 짐승의 그것처럼 씩씩대고 있을 뿐이었다. 범진은 나직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안 믿으시면 어쩔 수 없지만, 걱정하실 만한 일 없었어요. 윤준영은 그런 짓 안 합니다. 머리통에 공부 생각뿐이니까요.”
이해를 구하는 듯한 그의 말투가 통했는지 잠시의 대치 끝에 여자가 한 발 물러섰다. 느릿하게 몸을 돌린 그녀가 준영이 달려간 길을 따라 걸어가는 것을 본 범진의 잇새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은근히 긴장하고 있었는지 어깨가 축 늘어지고 있었다.
아무렇게나 후려 맞은 몸 이곳저곳이 화끈거렸지만 그의 머리는 지금 통증을 감지하고 다스릴 여유가 없었다.
온통 정신이 없었다. 마치 폭풍에 휘말린 듯한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