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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여명일 뿐-9화 (9/86)

<9화>

“권범진. 쓰는 법을 몰라서 그러는 거면 내가 알려 줄게.”

갑자기 날아온 목소리는 승운의 것이었다. 준영은 어이가 없어 실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옆에 다가온 승운이 범진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범진은 돌아보지도 않았다. 그대로 사라져 버린 복도에는 정적만이 남았다. 승운이 머쓱한 듯 중얼거렸다.

“하긴. 나라도 안 믿었을 거야.”

준영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눈치를 살피던 승운이 조심스레 물었다.

“반성문 써 본 적 있어?”

“아니.”

“나도 없는데. 도대체 뭐라고 시작해야 할지.”

들고 있는 펜으로 입술을 톡톡 튕기며 승운이 한숨을 쉰다. 준영은 비스듬히 그를 바라보았다. 늘 반듯하던 이마에 주름이 잡혀 있었다.

그가 반성문을 쓰는 것도 결국은 제 탓이다. 나서 달라고 말한 적이 없으니 억울한 면이 없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눈을 가만히 내리깔며 준영이 조용히 중얼거리듯 말했다.

“선생님께 대들 의도는 전혀 없었습니다. 평소 존경하는 선생님께 그런 마음을 품고 있다는 오해 자체가 제게는 상처입니다. 하지만 제 잘못은 깊이 인정하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너그러운 어른의 마음으로 제게 기회를 주신다면 올바른 학생의 마음가짐을 항상 잊지 않고 생활하겠습니다. 나아가 선생님의 자랑이 될 수 있는 그런 학생이 되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막힘없이 흘러나오는 말에 승운의 입술이 점차 벌어졌다. 아연한 눈으로 준영을 바라보던 그가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안 써 봤다고?”

“넌 그렇게 써. 내가 쓰면 비꼬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넌 아닐 테니까.”

그렇게 말하고 돌아서려 했지만 승운의 목소리가 그녀를 붙잡았다.

“준영아.”

앞을 가로막고 선 그는 피할 여유를 주지 않고 이어서 말했다.

“혹시 내가, 너한테 무슨 실수 한 게 있니?”

뒤통수에 느껴지는 시선 중 하나는 오혜수일 것이다. 하지만 그걸 떠올리기 이전에 이미 기분은 뒤틀렸다.

화사하고 맑기만 한 승운의 얼굴에는 걱정과 조심스러움이 가득했다. 실수한 게 있다면 사과하고 풀겠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러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 거라고.

그렇게 간단하게 마음의 불편함을 털어 버리려는 것이다.

상처받은 적이 없기에 나올 수 있는 저 단순함과 당당함이 부럽고 아름답게 느껴지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껄끄러운 모래를 삼킨 것처럼 거슬렸다. 준영의 입술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없어.”

“그럼 내가…….”

“실수하지 않아도 너를 불편해하는 사람 한 명쯤은 있을 수 있잖아.”

그가 저를 바라보면 의식하지 않았던 것들이 일제히 고개를 든다. 색이 바랜 셔츠, 해진 소매 끝, 아침에 싱크대에서 감은 머리, 혹시나 날지 모를 먼지와 땀 냄새, 그 모든 것들이.

그렇게 나승운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도 그녀를 아주 작아지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그러면서도 중독된 자가 마약을 찾듯 보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사람.

석상처럼 딱딱하게 굳어 버린 승운을 뒤로한 채 준영은 걸음을 옮겼다.

문간에 빼꼼히 얼굴을 내밀고 있던 아이들이 후다닥 흩어진다. 팔짱을 끼고 비스듬히 기대고 있던 혜수만이 웃는 얼굴로 그녀를 맞이할 뿐이었다.

눈웃음을 지은 채 혜수는 손으로 입을 가리는 척하며 속삭였다.

“권범진이랑 뭐야?”

“너 나 좋아해?”

“뭐어?”

난데없는 질문에 혜수의 눈이 펄쩍 뛴다. 지나칠 정도의 혐오감을 드러내는 그녀의 눈을 덤덤하게 바라보며 준영이 짓씹듯 내뱉었다.

“아니면 신경 꺼.”

자리로 돌아와 펜을 쥐는 준영의 머릿속은 엉망진창이었지만, 다행히 손은 저절로 움직여 주었다.

어차피 뭐라고 쓰든 다시 써 오라고 할 게 뻔하다. 형식적인 문장을 줄줄이 늘어놓으며 준영은 입술을 깨물었다. 미열에 잠식당한 머리가 다시 지끈거리고 있었다.

* * *

반성문을 제출한 뒤 준영은 잠시 고민하다가 발길을 돌려 산으로 향했다. 어두웠지만 아직은 사물을 분간할 수 있었다.

집에 가기도 싫고, 얼마 남지 않은 시험공부를 해야 한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지금 그녀가 그 집에 가려는 것은 범진 때문이었다. 실컷 도와줘 놓고는 매몰차게 내쳐 버린 그 태도를 따져 묻기 위해서.

이유를 상상할 수는 있었다. 둘 중 하나 아닌가. 학교에서 누구와도 연관되지 않는 외딴섬 같은 지금을 지키고 싶었거나, 아니면.

나와의 비밀을 지키고 싶었거나.

후자를 생각하면 괜스레 입술이 비죽 나오며 볼이 부풀려졌다. 그 무섭고 무뚝뚝한 얼굴로 저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어딘지 간지럽고 어색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뭐 그런 섬세한 생각을 할 줄이나 알겠어?”

물론 고작 그걸 확인하려고 가는 건 아니다. 가는 김에 공부도 하고 오면 좋지 않느냔 말이다. 그 집은 정말이지 집중 하나는 끝내주게 잘되니까.

없으면 어떡하지.

오르막을 헉헉대며 올라가던 준영이 뒤를 한 번 돌아보았다. 더 컴컴해지면 혼자서 빛 없이 내려가는 건 무리다. 또 하룻밤 신세를 져야 할 수도 있었다.

뭐 어때. 집보단 낫지.

집 생각을 하자 자연스레 머릿속 한구석을 종일 맴돌던 문제가 떠올랐다. 엄마, 그리고 오혜수.

오혜수의 아버지는 옆 동네에서 플라스틱 공장을 운영하고 있는 사장님이었다. 대단할 건 없지만 그래도 혜수는 이 동네에서 가장 좋은 옷을 입고, 주말에는 아버지의 큰 세단을 타고 나들이를 나갔다.

해마다 친한 친구들을 불러 여는 생일 파티에는 TV에서나 볼 법한 음식들이 차려져 있다고 했다. 그녀를 따르고 좋아하는 아이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제법 많았고, 혜수는 당연하게 저를 향한 찬사를 받아들였다.

나승운이 나타나기 전까지 말이다.

혜수가 저를 싫어하긴 하지만 일부러 나서서 짓밟을 정도는 아니었다. 아마 나승운과 필요 이상으로 가까워지지 않는다면 괜찮을 것이다.

……엄마에게 한 번은 물어봐야 할 텐데.

생각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 골치가 아파 머리를 꾹꾹 누르던 준영의 입술이 순간 피식 누그러졌다. 덩그러니 있는 창고 같은 집에는 불은 켜져 있지 않았지만 자물쇠가 걸려 있지 않았다.

또 자네, 또 자. 정말 지겹지도 않나.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세차게 문을 잡아당기려던 그녀는 눈을 굴리며 일부러 소리를 죽였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가방을 내려놓는 것까지는 좋았지만 돌아서다가 의자에 조금 부딪혔다. 깜짝 놀라 2층의 눈치를 살폈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놀래서 천장에 머리 찧는 꼴을 꼭 봐 줘야지. 내 손을 그렇게 매정하게 뿌리친 대가다.

코웃음을 삼키며 그녀는 조심조심 계단을 올랐다.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매우 천천히 올라야 했다. 마지막까지 오른 뒤 목을 길게 빼자 침대 위에 널브러져 있는 검은 형체가 보였다.

비딱한 웃음을 지은 준영은 숨을 한 번 들이쉬고는 양손으로 침대를 힘껏 내리쳤다.

“야, 권범…… 으앗!”

순식간이었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세게 잡아당겨져 침대에 등을 대고 누웠나 싶을 때쯤 커다란 손이 그녀의 목을 움켜쥐었다.

도저히 저항할 수 없을 정도의 힘이었다. 숨통이 막히고 질식의 공포가 밀려들던 찰나 순식간에 손이 풀렸다. 준영은 몸을 뒤틀며 기침을 내뱉었다. 방금 제 목을 짓누르던 손이 이제는 그녀의 어깨를 흔들고 있었다.

“윤준영, 괜찮냐?”

“너, 콜록, 뭐 하는 거야! 미친놈아!”

정말로 잠깐 목을 눌린 것 같은데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여전히 압박감이 목 언저리에 남아 있었다. 눈꼬리에 매달려 있던 눈물이 또르르 떨어졌다. 그녀를 밑에 깔고 있는 범진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렸다.

“발소리를 죽이고 들어와서 이상한 놈인 줄 알고……. 그러게 왜 안 하던 짓을 해서 사람을 긴장시켜.”

“넌 긴장하면 사람 목을 조르니? 죽을 뻔했잖아!”

당황스러움에 범진을 밀어낼 생각도 못 하고 준영은 목을 어루만졌다. 갈라진 목소리로 쏘아붙이자 범진이 낮은 한숨과 함께 말을 뱉었다.

“미안. 괜찮아?”

“물이나 좀 갖다줘.”

물이나 좀, 까지 말했을 때 이미 범진은 계단을 달려 내려가고 있었다. 준영은 반쯤 몸을 일으키며 쉰 목으로 또 소리를 질러야 했다.

“불 켜고 다니라니까!”

하여튼 사람 말을 안 들어.

이내 집이 밝아지는 것을 보자마자 준영은 침대 위에 털썩 쓰러졌다. 아직도 목이 얼얼했다. 몇 번 숨을 들이쉬고 있는데 번개같이 위로 올라온 범진이 물이 가득 든 컵을 내밀었다.

힘을 주어 노려보자 범진의 날렵한 눈매가 아래로 조금 처진다. 순간 수학에게 달려들 것처럼 기민하게 눈을 빛내던 모습이 겹쳐져 그럴 때가 아닌데도 하마터면 웃어 버릴 뻔했다.

허물어지려는 입꼬리를 단단히 문 채 준영은 컵을 낚아챘다.

“내가 계단에서 떨어질 걸 걱정할 때가 아니었네. 사인이 추락사가 아니라 질식사가 될 수도 있는 거였어.”

“미안해. 그런데 너도 그런 장난 치지 마라.”

쉰 듯한 그녀의 목소리가 마음에 걸렸는지 미간을 좁힌 범진이 엄격한 말투로 덧붙여 말했다. 준영의 눈썹이 가파르게 치켜 올라갔다.

“너는 사람 목을 졸라 놓고 내가 좀 놀라게 하는 건 안 된다고?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나는 너랑 다르잖아.”

“뭐가 다른데?”

언성을 높이는 그녀의 말을 곧장 맞받아쳐 놓고는 아차 싶은 듯한 표정을 지은 범진이 고개를 돌렸다. 날아온 반문에 어색하게 턱을 매만진 그가 눈을 굴리며 느릿하게 대답했다.

“운동 신경이 좋은 거?”

준영은 충동적으로 발로 범진의 허리를 걷어찼다. 퍽 소리가 났지만 솜뭉치에 맞은 것처럼 그는 끄떡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돌덩이를 찬 것 같은 느낌에 준영은 제 발등을 감싸야 했다.

이를 갈자 범진이 헛기침을 하며 괜스레 뒤통수를 어루만진다. 제 얼굴도 능히 가릴 정도로 큼지막하고 두툼한 손을 보자 새삼 분노가 치솟았다.

물로 목을 축이며 그 뒤통수를 뚫어져라 노려보던 준영이 퉁명스레 물었다.

“아깐 왜 그런 건데?”

“언제.”

“농구공.”

뒷덜미를 만지작거리던 범진의 손이 멈칫했다. 그는 천천히 몸을 숙여 무릎에 팔꿈치를 기대며 말했다.

“잠버릇이 좀 나빠, 내가.”

거짓말을 못하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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