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돈의 출처에 대해 그녀는 알려 하지 않았다. 알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뭘 하든 이 이상은 해 줘야지. 멋대로 낳았으면 적어도 이것보다는 잘해 줘야지. 재주가 없으면 몸을 팔든 장기를 팔든 무슨 짓을 해서라도, 지금보다는 덜 비참하게 키워 줘야지!
준영이 하는 생각은 그 정도였다.
깨끗한 피부에 윤기 흐르는 새카만 머리칼, 시기와 선망을 받을 만큼 눈에 띄는 이목구비와 촌구석에서나마 전교 1등을 할 수 있는 머리를 물려줄 거였다면 적어도 이따위 환경은 아니었어야 했다.
차라리 태생적으로 욕망을 거세당한 것도 모를 만큼 무지했다면.
그럼 아무 생각 없이 하루를 흘려보내던 중 눈이 맞은 철물점집 아들과 뒹굴다 임신해서 스물한 살에 결혼하는 동네 언니와 같은 삶에 만족하며 살았을지도 모르니까.
그런데 그렇게 외면하며 지내 오던 일을, 오혜수가 건드렸다.
‘네 엄마가 그런 사람인 게 네 잘못인 건 아니잖아.’
……오혜수는 엄마에 대해 뭘 알고 있는 걸까.
펜을 쥐고 생각에 잠겨 있던 준영은 순간 머리를 탁, 하고 내리치는 손길에 입술을 깨물었다. 빨간 선이 책에 직, 그어졌다.
“인마, 적당히 해. 성적 좀 좋다고 오냐오냐해 주니까 아주 대놓고 딴생각이야.”
얼굴은 붉어지는 것 같았지만 머리는 차갑게 식는다. 수학은 오후가 되었는데도 아직 어제 마신 술 냄새를 역하게 풍기고 있었다.
홀아비인 수학은 저를 오냐오냐해 준 적이 없다. 오히려 눈엣가시로 생각하고 있음을 준영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수학을 유달리 잘하고 좋아하는 준영에게 수학 동아리에 들어오라고 제안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늘 술 냄새를 풍겼고, 탁한 눈으로 여자아이들의 다리를 훑어보곤 했다.
이유 없이 여자아이들의 팔이나 허리를 건드렸고, 가끔은 ‘사랑의 매’라고 적혀 있는 긴 막대기로 아이들의 치마를 슬쩍 걷어 올리기도 했다.
허벅지가 훤히 드러날 정도는 아니었기에 매번 질 나쁜 농담과 함께 장난으로 넘기곤 했지만 이 학교의 여자아이들은 누구나 그를 피했다.
공부를 가르쳐 준답시고 무릎에 앉혀 놨다가 여차하면 술 한잔 먹여 자빠트릴 생각이나 하고 있을 미친놈의 제안에 응할 리가 없지 않은가.
세 번 제안했고 세 번 거절했다. 그 후로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수학은 그녀에게 시비를 걸어 왔다.
입술을 잘못 씹었는지 비린 맛이 느껴진다. 몇몇이 킥킥대는 소리가 들려 준영은 가만히 주먹을 쥐었다.
차라리 문제를 풀라고 시킨다면 기꺼이 콧대를 눌러 줄 자신이 있었지만, 수학은 그걸 알 만큼의 눈치는 있는 자였다. 그는 결코 준영이 우위에 설 기회를 주지 않았다.
“네 눈엔 선생이 우습냐? 공부 좀 할 줄 아니까 선생들 말은 들을 가치도 없어 보여? 왜, 어차피 대학 서울로 가면 이 동네 사람들 마주칠 일 없을 거니까 그렇게 무시하는 거야? 에라이, 이 녀석아. 사람이 인성이 되어야지.”
주먹이 또 한 번 그녀의 머리에 꿀밤을 먹인다. 옆으로 밀린 준영의 눈썹이 가파르게 치솟았다. 그것을 본 수학이 기다렸다는 듯이 사랑의 매를 들어 그녀의 머리를 콕콕 밀었다.
“인상 쓰는 것 좀 보게. 이러니 어디 무서워서 학생들을 지도할 수가 있나. 다 너 잘되라고 하는 말 아냐, 인마. 어른들이 말을 하면 다 뜻이 있겠거니 하고 고분고분 듣는 맛이 있어야지.”
누가 지금 이 순간 이 작자를 죽여 줄 테니 생명의 절반을 내놓으라고 한다면 기꺼이 무릎이라도 꿇었을 것이다.
때때로 준영은 지나치게 발달한 제 이성을 저주하곤 했다. 앞뒤 안 가리고 일어나 무슨 짓이든 저지르는 성격이었다면 어땠을까. 그럼 아무도 날 건드리지 못했을까.
“어어, 끝까지 인상 쓰고 있네. 야, 윤준…….”
“선생님.”
준영의 손이 또 한 번 제 머리를 꾹 누르며 밀어 대는 막대기를 잡으려 움직이는 순간 다급한 목소리가 날아왔다.
아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승운에게로 몰려들었다. 손을 들고 일어선 승운이 어색한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어제 저 때문에 준영이가 많이 아파서 쓰러졌거든요. 그러니까 준영이가 수업에 집중하지 못하는 건 아무래도 제 탓인 것 같아요. 죄송합니다.”
허리를 꾸벅 접어 인사하는 승운을 멀뚱히 바라보며 수학이 팔짱을 꼈다. 승운이 왕자님으로 여겨지는 것은, 무슨 패를 쥐고 있는 건지 교장 앞에서도 당당하게 술 냄새를 풍기며 대거리를 하는 수학도 그에게는 너그럽기 때문이기도 했다.
“왜 너 때문에 많이 아파? 윤준영이 너 좋다고 상사병이라도 걸렸대냐? 밤에 잠이 안 온대?”
그의 매가 콕 저를 짚어 가리키자 승운의 귓가가 붉어졌다. 그는 꼿꼿한 자세로 눈을 내리깔고 있는 준영을 곁눈질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저, 그런 게 아니라…….”
갑자기 팡, 하는 요란한 소리에 교실 안의 전부가 깜짝 놀라 펄쩍 뛰었다. 가장 놀란 것은 수학이었다. 무언가 그의 바로 옆을 위협적으로 스쳐 지나가 칠판에 세게 부딪치며 낸 소리였기 때문이다.
바닥에 통통 튀고 있는 농구공은 점심시간 때마다 아이들이 들고 나가는 공용 물건이었다. 그것을 확인한 수학이 눈을 부라리며 고개를 돌렸다.
범인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막 잠에서 깼는지 부스스한 얼굴을 한 범진이 한쪽 어깨를 돌리며 서 있었던 것이다. 그는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걸걸한 목소리를 뱉었다.
“저 새끼가 공을 이렇게 던지더라고요. 사람한테 그러면 안 되는 건데.”
“너, 너…….”
“나도 안 그러거든요. 사람한테는.”
범진의 까맣고 성긴 머리엔 여전히 까치집이 있었지만 그걸 보고 비웃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몽롱하게 풀어져 있던 그의 눈매는 어느새 날카로운 선을 그리며 수학을 향해 있었다. 그가 금방이라도 몸을 낮췄다 높이 도약해 수학을 덮치기라도 할 것 같은 느낌을 받은 것은 당사자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순식간에 교실에 서 있는 세 사람이 만들어 낸 삼각형 사이로 긴장감이 흘렀다. 장신인 두 사람 사이에 낀 셈이 된 수학이 들고 있는 사랑의 매가 가늘게 떨렸다.
때맞춰 종소리가 나자 수학은 지원군을 얻은 것처럼 목청을 높여 소리쳤다.
“셋 다 오늘 내로 반성문 제출해!”
도망치듯 빠른 보폭으로 그가 교실을 나가고 나자 아이들은 웅성거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혜수가 제 앞에 서 있는 승운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왜 나섰어? 가만있었으면 결국 그냥 넘어갔을 텐데.”
“내 잘못이 있으니까.”
가볍게 웃으며 승운은 준영과 범진을 바라보았다.
범진은 뒷머리를 헤집으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크게 하품을 한 뒤 산책을 가는 맹수처럼 어슬렁어슬렁 교실을 나갔다. 아이들의 시선 속에 남은 준영은 무표정한 얼굴로 한숨을 한 번 쉬고는 다시 펜을 잡았다.
냉랭해 보이는 그 옆모습에는 피곤함 외에는 어떤 감정도 찾아볼 수 없었다.
“혹시 권범진이랑…….”
“응?”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혜수가 되물었지만 승운은 얼른 입을 다물고는 웃었다.
“아니야. 아무것도.”
그는 준영에게 다가가 말을 걸려다 말고 제자리에 앉았다. 그녀가 아침에 했던 말이 떠올랐던 것이다.
이것도 반작용의 효과일까. 신경 쓰지 말라니까 더 신경이 쓰이는 것은.
아니.
처음부터 신경이 쓰였는걸.
겸연쩍은 얼굴로 목덜미를 긁적이며 승운은 준영을 따라 펜을 쥐었다. 혜수와 다른 아이들이 곁에서 재잘거렸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온통 다른 생각뿐이었다.
* * *
보통 자율 학습 시간의 교실은 시시덕대는 아이들 몇 명이 점령하곤 했지만 오늘은 달랐다. 평소보다 많이 남은 아이들이 흥미진진한 눈으로 세 사람을 훔쳐보는 중이었다.
어렵지 않게 판에 박힌 말들로 반성문을 슥슥 적어 나가던 준영은 드르륵, 하고 의자가 밀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보통은 그러지 않았지만 무언가에 대한 예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예감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가방을 어깨에 둘러멘 범진이 교실을 나가려 하고 있었다.
반성문을 썼을 리가 없다. 준영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수학은 물론 범진을 매로 다스릴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럴 배짱은 없었다. 대신 더 집요하고 음흉한 수법으로 괴롭힐 것이다.
물론 범진은 그런 걸 신경 쓰지 않겠지만 이런 학교라도 규칙은 있다. 그리고 수학은 그 규칙을 십분 활용할 수 있는 선생이었다.
그녀는 범진이 이 일로 어떤 피해도 입는 걸 원하지 않았다.
딱히 수학에게 개인적인 원한이 있는 게 아니라면, 자다 깨서 그렇게나 과격하게 농구공을 내던진 건 저 때문일 테니까.
남의 편을 대놓고 들어 줄 성격일 줄은 몰랐다.
성가시기는 했지만 한편으로는 어깨가 으쓱하기도 했다. 그러니 더더욱 두고 볼 수 없었다.
조용히 일어섰으나 그녀가 일어서자마자 아이들은 일제히 뒤를 돌아보았다. 말은 안 했어도 다들 같은 의문을 품고 있었을 것이다.
학교에서는 자는 것 말고는 하는 일이 없는 권범진이 그녀의 일에 참견한 것이 두 번째였다. 첫 번째야 화장실 때문이라고 쳐도, 이번에는 조금 더 직접적이었으니 사정을 궁금해하는 것도 당연하다. 준영은 혀를 찼다.
범진과는 지금 이 상태가 좋았다. 아무와도 엮이지 않은 둘만의 친분이. 사람들의 시선이 있다면 권범진은 절대로 생리통 같은 말을 입에 담지 않을 테니까.
……그게 깨지면 다 네 탓이야.
입술을 비죽이며 그녀는 조용히 복도로 나갔다. 범진이 성큼성큼 걷고 있었다.
“권범진.”
어디로 조용히 끌고 갈까, 생각도 했지만 그랬다가는 아이들의 호기심만 부풀리게 될 것이다. 준영은 저를 돌아보고는 미간을 치켜세우는 그에게 한 발 다가갔다. 뒤통수에 따가울 정도의 시선이 꽂히는 것이 느껴졌다.
“반성문 주고 가.”
안 그러면 수학이 정말로 널 피곤하게 만들 거야.
눈으로 하는 말이 전해지기를 바라면서 준영은 손을 내밀었다. 그녀를 흘끗 본 범진은 무표정한 얼굴 그대로 돌아섰다.
“야.”
얼른 손목을 붙잡긴 했으나 아주 찰나였다. 범진이 매서울 정도로 세게 그녀의 손을 뿌리쳤기 때문이다.
당황한 준영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뒤에서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창피함보다 놀라움이 더 컸다. 범진이 그녀를 정말 성가시다는 듯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네가 뭔데?”
울린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낮은 목소리는 차갑게 느껴질 정도로 냉정했다. 할 말을 찾지 못한 준영이 입술을 벙긋거리는 사이 돌아선 범진이 그대로 걸어갔다.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머리가 얼얼해 그녀는 멍하니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