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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여명일 뿐-7화 (7/86)

<7화>

짧은 한숨 소리와 함께 눈살을 찌푸린 범진의 시선이 날아왔다. 머리에 까치집이 생긴 그는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네 농담도 썩.’

‘아무렴 생리통보다야.’

마지막 계단에서 경쾌하게 뛰어내리며 준영이 씩 웃었다. 그녀에게는 무적의 방패가 있었던 것이다.

날렵한 턱을 팽팽하게 당긴 범진의 눈매에 살벌한 기운이 맴돈다. 천천히 젓가락을 고쳐 쥐는 그를 조금 긴장한 눈으로 바라보던 준영이 불길한 움직임을 포착하고 다급하게 외쳤다.

‘안 돼!’

한걸음에 달려갔지만 이미 터진 노른자가 멀겋게 라면 국물을 흐리고 있었다. 준영이 눈을 부라렸다.

‘야!’

‘너 안 씻어도 되겠냐? 땀 냄새 난다.’

‘먹고 씻을 거야.’

일부러 고개를 뒤로 젖히면서까지 코를 막는 시늉을 하는 범진을 쏘아보며 준영은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제 몫의 젓가락을 집었다.

픽 웃으며 슬금슬금 들어오는 범진의 젓가락을 매섭게 쳐 내면서 준영은 허겁지겁 라면을 밀어 넣었다. 늘 그렇듯 범진이 끓인 라면은 맛이 있었다.

라면을 순식간에 해치운 그녀의 다음 타깃은 범진의 수건이었다.

뒤엉킨 머리카락은 보지 않아도 상태를 알 것 같았다. 머리야 싱크대에서 비누로 어떻게든 감을 수 있겠지만 말릴 수건은 오직 그가 가지고 온 것뿐이었다.

범진이 깨끗하게 비운 냄비를 싱크대에 넣는 틈을 타 눈치를 살피던 그녀는 먹이를 낚아채는 날짐승처럼 잽싸게 그의 가방 위에 놓여 있던 수건을 집었다.

범진이 고개를 돌렸을 때 이미 준영은 목에 수건을 두르고 그 끝을 셔츠 안으로 완벽하게 밀어 넣은 뒤였다.

‘좀 빌리자.’

아연한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범진에게 그녀는 최대한 태연하게 말했다. 경험상 권범진 앞에서는 겁먹거나 긴장한 모습을 보이는 것보다 당당하게 나가는 게 더 먹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범진의 눈이 그녀의 목덜미에서 불룩해진 가슴으로 향했다. 반듯한 미간을 일시에 찌푸린 그가 고개를 돌리며 낮게 한숨을 내뱉었다.

‘넌 무슨 여자애가…….’

‘넌 오늘 머리 안 감아도 되게 생겼어. 어차피 네 머리에 참견할 만큼 간 큰 애들도 없을 거고.’

한결 또렷해진 목소리를 내뱉는 준영의 말에 범진이 천천히 그녀를 돌아보았다.

‘네 머리엔 누가 신경 쓰는데. 나승운?’

순간 반쯤 웃고 있던 준영의 눈이 둥그레졌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나승운이 왜, 내 머리에 신경을 써?’

‘정말 집에 안 들렀다 갈 거냐?’

짧게 한숨을 내쉬며 갑자기 범진이 말을 돌렸다. 그가 거품을 낸 스펀지로 냄비를 닦는 것을 보며 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물 차가워. 끓여서 써.’

순식간에 설거지를 끝낸 범진은 깨끗해진 냄비에 물을 가득 담아 다시 불 위에 올렸다.

번번이 느끼는 거지만 권범진은 정말이지 생긴 것과 다르게 세심하고 친절하다. 겸연쩍게 눈을 굴리던 준영은 의자를 끌어당기다 말고 작게 하품을 하는 그를 향해 말했다.

‘올라가서 잠깐이라도 자. 내가 씻고 깨워 줄게.’

범진은 멈칫했지만 곧 길게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털썩 앉았다.

‘저기서 어떻게 자냐. 땀내 풀풀 날 텐데.’

‘그렇게까지 안 흘렸거든!’

‘됐어. 잘 거니까 말 시키지 마.’

팔짱을 낀 범진이 벽에 머리를 기댄 채 눈을 감았다. 입술을 비죽이며 준영은 싱크대 앞에 섰다. 허리를 굽히고 낑낑대며 머리를 다 감고 수건으로 그 머리를 말리는 동안 범진은 한 번도 눈을 뜨지 않았다.

……잘 때의 집중력으로 공부를 한다면 내 위치가 위험할 수도 있겠어.

그러고 보니 권범진 성적이 어느 정도더라?

쓸데없는 생각이 들어 다시 실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들던 준영이 쳇, 하고 혀를 찼다. 옆쪽 길에서 혜수와 그녀의 친구 무리들이 걸어오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눈꼬리를 사납게 치켜올린 혜수가 손을 흔들었다.

“윤준영. 몸은 괜찮니?”

저게 왜 남의 안부를 물어. 불안하게.

“덕분에.”

짤막하게 대답하며 지나치려 했지만 혜수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찰랑거리는 머리칼에 꽂힌 리본 핀이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고 있었다.

“너무 멀쩡해 보이네, 서운하게. 근데 좀 실망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네가 그런 유치한 수법을 쓸 줄은 몰랐거든.”

“무슨 수법?”

대체로 혜수의 말은 귀담아듣지 않는 편이지만 묘하게 걸리는 말에 준영이 반문했다. 혜수는 코웃음을 치며 흘러내린 머리칼을 넘겼다.

“아무리 그래도 승운이 관심 받으려고 그 앞에서 쓰러지기까지 하다니. 너 어제 너무 웃겼어.”

옅게 한숨이 흘러나온다. 준영은 무덤덤하게 혜수를 바라보았다.

“내가 왜 나승운 관심을 받고 싶어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걸 나한테 왜 물어? 설마 우리가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기가 막히다는 듯 헛웃음을 흘린 혜수가 언성을 높이고는 말을 퍼부었다.

“너 승운이 좋아하잖아. 맨날 그렇게 뚫어져라 보고 있으면서. 왜, 관심 없는 척 구는 게 안 먹힌다고 생각해서 노선 바꾼 거 아니었어? 그게 들통나니까 새삼 부끄럽니?”

얼굴이 한 꺼풀 벗겨진 것처럼 화끈거린다. 웃어넘기고 싶었지만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진 채였다.

내가? 나승운을 좋아한다고? 그럴 리가. 내가 걔를 보는 건 그냥 뭔가 달라서, 다른데 그게 너무 거슬려서…….

순간 머릿속에 범진의 낮고 결이 거친 목소리가 울렸다.

‘네 머리엔 누가 신경 쓰는데. 나승운?’

즉각 비웃으며 맞받아쳤어도 혜수는 물러서지 않았을 것이다. 더군다나 시선을 떨구며 망설이기까지 하는 것을 놓칠 그녀가 아니었다.

“너 정말 성격 한번 음침하구나. 좋으면 좋다고 말로 할 것이지. 하긴, 그렇게 솔직하기 힘든 네 사정도 이해는 해.”

혜수의 새치름한 눈매가 잔인하게 번뜩인다. 바짝 다가선 그녀가 준영의 귓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네 엄마가 그런 사람인 게 네 잘못인 건 아니잖아.”

“……뭐?”

어깨가 바짝 굳었다. 굳은 것은 어깨만이 아니었다. 발에서 뿌리라도 내린 것처럼 온몸을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새파래진 준영의 얼굴을 만족스럽게 바라보던 혜수가 손가락으로 그녀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걱정 마. 난 입이 무겁거든. 안 그럴 때도 있지만.”

“너 도대체 그게 무슨 소리…….”

“준영아.”

돌처럼 딱딱해진 입술을 겨우 움직이던 준영은 등 뒤에서 날아오는 목소리에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어깨 너머를 본 혜수의 얼굴에서 먹구름이 물러가듯 순식간에 악의가 사라지고 새침한 기색만이 남았다.

옆에서 자전거가 멈추는 소리가 들렸지만 준영은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얼음장처럼 차게 식은 손끝이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좋은 아침. 몸은 좀 괜찮아?”

봄바람처럼 부드러운 목소리였지만 조금도 따뜻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혜수가 보이지 않는 독침을 물고 있는 듯한 얼굴로 그녀를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침묵하고 있자 갑자기 시야로 멀끔한 얼굴이 쑥 들어왔다.

“준영아, 괜찮은 거야?”

흠칫 놀라 그녀는 뒤로 물러섰다. 고개를 들자 비로소 제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있는 승운과 눈이 마주쳤다. 평소와 다름없이 호의를 품은 진한 밤색의 눈동자에 금세 걱정이 어렸다.

“혹시 병원에 가는 게 좋을 것 같다면…….”

“나한테.”

입술이 저절로 움직인다. 혜수의 시선이 그렇게 이끌고 있었다.

“신경 쓰지 말랬잖아.”

제 것이 아닌 듯한 서늘한 목소리를 내뱉고는 준영은 그대로 삐걱삐걱 움직였다. 혜수를 스쳐 지나갈 때 그녀가 작게 코웃음을 치는 듯한 소리가 환영처럼 들렸다.

다리를 움직이며 걷던 준영은 멀거니 서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범진과 마주쳤다. 길쭉한 가방을 비딱하게 어깨에 멘 그의 머리에는 여전히 까치집이 지어져 있었다.

그걸 보자 이상하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하지만 그 웃음과 함께 경직되어 있던 얼굴도 무너져 내렸다.

한쪽 눈을 가늘게 찌푸린 범진이 가까워진 그녀를 보며 무어라 말을 걸려 했지만 준영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지나쳐 걷자 뒤통수에 집요하게 그의 시선이 따라붙는 것이 느껴진다. 주먹을 으스러져라 쥔 준영의 가느다란 어깨가 흔들리고 있었다.

* * *

엄마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사실 엄마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한다. 단지 그녀가 지독하게 아프고, 그 아픔을 견디기 위해 때로는 딸에게 발작하듯 폭력을 쏟아 내야 살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만은 알고 있었다.

엄마가 언제부터 제대로 된 ‘말’을 하지 못했을까. 기억을 더듬어 보면 아주 어릴 때에는 그래도 대화라는 것을 해 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

썩 정다운 풍경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엄마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며 무어라 열심히 말을 걸고 열 번에 한 번쯤은 대답을 듣고 뿌듯해하던 제 모습이 머릿속 한쪽 구석에 남아 있었다.

지금도 엄마가 고통에 시달리지 않을 때에는 짧은 단어로나마 의사소통이 가능하긴 했다. 하지만 누구도 그것을 대화라고 부르지는 않을 것이다. 준영도 이제 와 대단한 대화 같은 걸 기대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엄마는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 것일까.

아픈 몸으로 불규칙하게나마 일을 하러 나간다는 엄마를 걱정하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 걱정은 술에 취해 밤에 돌아온 엄마에게 이유 없이 걷어차이고 한참을 짓밟힌 뒤 그녀가 지린 소변을 닦아 내는 동안 서서히 사라졌다.

엄마는 말라비틀어졌지만 그럴 때의 엄마는 도저히 힘으로 이길 수가 없었다. 요령껏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들은 가난했다. 하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모두가 그런 식으로 망가지지는 않는다. 엄마에게는 오래된, 아주 깊은 상처가 있고, 그 상처가 몸과 마음을 갉아먹고 있는 것이라 준영은 추측했다.

물론 그렇다고 그 추측이 그녀에게 위로가 되어 주진 않았지만 말이다.

엄마는.

무슨 일을 하는 거지.

엄마는 얼마 전부터 때때로 좁아터지고 퀴퀴한 방구석에 천 원 한 장, 만 원 한 장을 놓아두곤 했다. 몇 날 며칠이 지나도 그대로 있어서 하루는 가져가도 되냐고 물어보았다. 오래된 담요 하나를 덮고 모로 누운 엄마는 대답하지 않았고, 준영은 그 돈으로 헌책을 샀다.

그 돈에 대해 엄마가 보복을 하는 일은 없었다. 그래서 엄마가 놓아두는 돈은 암묵적으로 준영의 용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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