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몸은.”
“응?”
불쑥 튀어나온 말에 준영이 멍하니 되물었다. 범진이 퉁명스레 물었다.
“보건실에서 약 안 먹었어?”
“아, 내내 자느라……. 여기서까지 자고 일어났더니 좀 괜찮아진 것도 같고.”
뾰족하게 치솟아 있던 가시가 스르륵 눕는 기분이다. 눈이 어둠에 익자 범진의 뒷모습이 그려 내는 실루엣이 더욱 선명해졌다. 무릎에 팔꿈치를 기댄 채 그는 조금 구부정하게 앉아 있었다.
“어디가 아픈 건데.”
“그냥 몸살 기운이 좀 있었어. 잠도 잘 못 잤고. 열은 아직 좀 있는 것 같지만.”
제 이마를 짚어 보며 준영이 중얼거렸다. 반쯤 뒤를 돌아보던 범진이 “기다려” 하고 훌쩍 몸을 일으켰다. 성큼성큼 계단을 내려가는 그는 앞이 훤히 보이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갑자기 환한 빛이 쏟아져 준영은 얼굴을 가렸다. 그새 내려간 범진이 불을 켠 모양이었다. 쟤는 진짜 고양이 눈인가 봐, 하고 생각하던 그녀는 눈을 비비며 말했다.
“너 앞으로 계단 오르내릴 때 불 켜고 다녀. 잘못 떨어지면 죽는 거 순간이야.”
컵에 물을 받던 범진이 멈칫하고는 그녀를 흘끗 올려다보았다. 잘생긴 입술이 비딱하게 기울어지는 것이 보였다.
“비실대는 게 누군데 내 목 꺾일 걱정을 해.”
“네 걱정 하는 게 아니라 첫 발견자가 될 내 걱정을 하는 거야.”
“어련하실까.”
막힘없는 대꾸에 범진이 피식 웃었다. 아래를 내려다보자 한 손에 컵을 든 그가 뒷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는 게 보였다. 준영은 그가 보건실에서 약을 가져가던 것을 떠올렸다.
“내가 내려갈게.”
계단을 올라오려는 범진을 보고 엉거주춤 일어서자 미간을 찌푸린 그가 고개를 저었다.
“가만있어. 아직 어지럽잖아.”
확실히 범진은 사람을 압도하는 목소리를 갖고 있었다. 불이 켜져서 이제 그의 형형한 눈매가 고스란히 보이기 때문에 얌전히 앉아 있는 것만은 아니라는 소리다.
단이 꽤 높은 계단을 뛰듯이 올라온 범진이 허리를 굽힌 채 물과 약을 건넸다. 겸연쩍은 얼굴로 준영은 그것을 받아 들었다.
“너도 두통 있어? 이거 아까 보건실에서 가져온 거지?”
“생리통 있다.”
멀찌감치 옆에 앉으며 범진이 불퉁하게 말했다. 어디선가 찬바람이 불어 들어오는 것 같아 눈만 굴리던 준영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혹시 지금 그걸 농담이라고 한 거야?”
“입 다물고 약이나 먹어.”
뺨을 팽팽하게 당긴 범진이 으르렁거리듯 말했지만 오히려 역효과였다. 준영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컵을 가득 채운 물을 흘리지 않기 위해 애써야 할 정도였다.
“궈, 권범진이 생리통이 있다니! 학교에 친한 친구 한 명만 있었어도 당장 달려가 말했을 텐데! 흐흐, 으하하.”
무너지는 몸을 지탱하기 위해 준영은 팔꿈치로 침대를 짚은 채 몸을 떨었다. 눈을 낮게 내리뜬 채 이를 악물고 있던 범진이 그녀를 흘겨보았다.
“없는 게 자랑이다.”
“나 맹세코 지금처럼 친구가 아쉬웠던 적이 없었어. 한 명만 만들어 놓을걸!”
웃음은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았다. 포기한 듯 범진은 손을 짚어 뒤로 몸을 기댄 채 침묵했다. 콧물까지 흘리며 웃어 대던 준영이 약과 물을 먹기까지는 한참이 걸렸다.
“너네 집 난리 나지 않았겠냐.”
컵을 내려놓고 숨을 돌리던 준영은 불쑥 튀어나온 말에 범진을 바라보았다.
“우리 집? 왜?”
“네가 이 시간까지 집에 안 들어왔잖아.”
범진이 비스듬히 시선을 보낸다. 준영은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아마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충분히 봤을 것이다. 입술을 질겅거리며 씹던 그녀가 픽 웃었다.
“그냥 여기서 자고 갈까 봐.”
“뭐?”
“그게 나을 거야.”
미묘한 정적이 흘렀다. 그들은 서로가 무엇을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지를 알고 있었다. 입을 다물고 있던 범진이 이내 턱짓을 했다.
“내려가. 침대는 내 거야.”
“넌 잠 좀 그만 자. 학교에서도 맨날 자면서.”
“여태까지 자고 있던 네가 할 소리냐?”
“나는 일반적인 상황을 말하는 거잖아. 오늘은 특수한 상황이고.”
마치 대본이라도 들고 있는 사람처럼 준영의 대답은 막힘이 없었다. 못마땅하다는 듯 혀를 찬 범진이 손을 휘휘 저었다.
“잡소리 집어치우고 일어나서 집에 가. 바래다줄 테니까.”
“싫어. 여기 있을 거야. 네가 가.”
누우려는 시늉을 하자 범진의 짙은 눈썹이 가파르게 치솟았다.
“윤준영. 이게 고집부릴 일이야? 새벽에 여기 혼자 있겠다고?”
“너 말고 누가 오겠어?”
준영이 어깨를 으쓱이자 작게 입을 벌린 범진이 한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준영은 그가 화를 억누르고 인내심을 발휘할 때의 목소리 톤을 이제 알 것 같았다.
“여기 살던 사람이 있었잖아. 누군가는 올 수도 있어. 그게 하필 오늘일 수도 있고.”
“그럼 너도 여기 있어.”
날짐승처럼 매섭던 범진의 눈동자가 순간 흔들렸다. 그걸 보자 왜인지 준영은 어색해져 눈을 또르르 굴려야 했다. 그녀는 입술을 비죽이며 태연하게 덧붙였다.
“같이 자자는 소리는 아니고.”
“넌 그 입 좀…….”
“우리 암묵적으로 동의한 거 아니었어? 서로 이 집이 필요한 이유.”
중얼거리자 뭐라고 투덜거리려던 범진이 멈칫했다. 그는 허공 언저리를 보고 있는 준영의 옆모습을 응시했다. 조용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너한테는 공부하는 곳이잖아.”
“나 쉴 수 있는 곳이 여기뿐이야.”
이런 말을 누군가에게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필연처럼 이 말은 범진에게만 할 수 있었다.
입 밖으로 내어 말해 본 적은 없지만, 같은 것과 같은 곳을 공유하고 있는 유일한 상대.
준영은 저를 보고 있는 범진과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쐐기를 박듯 말했다.
“집에는 못 가.”
이 정도만 말해도 아마 그는 이해해 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가 이런 시간에 이곳에 온 이유와도 같을 테니까.
고요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범진은 오래지 않아 이내 훌쩍 일어섰다. 터덜터덜 계단을 내려가는 널찍한 그의 등을 바라보던 준영이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고마워.”
순간 제 말이 그의 등을 떠민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범진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깜짝 놀란 준영이 비명을 내질렀다.
“야! 잘못 떨어지면 죽는다니까? 조심 좀 해.”
“시끄러워. 잠이나 자.”
남의 걱정을 무성의하게 걷어차며 범진은 늘 그녀가 앉아 있던 의자에 털썩 앉아 그대로 엎드렸다. 빼꼼히 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준영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쟤는 정말 왜 항상 잠이 모자란 사람처럼 저러는 거야? 밤에 안 자서 낮에 내내 자는 거 아니었어? 맨날 나 집에 갈 때 같이 나갔었으면서.
……하지만 물어봐도 대답해 주지 않겠지.
“권범진.”
“왜.”
“불 좀 꺼.”
또다. 극한의 인내심을 발휘하는 듯한 한숨 소리. 하지만 이내 불이 꺼져 준영은 웃음을 흘리며 침대에 드러누웠다.
낯선 곳이지만 편안하다. 저절로 본능적인 두려움이 밀려들 만큼 불이 꺼진 새벽의 이곳은 어두웠지만 무섭지는 않았다. 아래에 권범진이 있으니까.
언제부터 그의 존재가 위협이 아닌 안심이 되었을까.
곰곰이 생각을 더듬으며 몸을 뒤척이던 준영이 눈살을 찌푸렸다. 아까는 기절하듯이 잠들어서 몰랐지만 매트리스 전체에서 익숙한 냄새가 풍겼다.
희미한 먼지 냄새와 햇빛에 잘 마른 빨래 냄새, 그리고 그 사이에 권범진의 냄새가 켜켜이 배어 있다. 건조하지만 왜인지 부드러울 것 같은 냄새가.
준영은 얇게 깔린 이불을 조용히 그러모아 조심스레 코를 묻었다.
저 성격에 향수를 쓸 리는 없지만, 꽤 좋다. 이 냄새.
하여튼 생긴 거랑 정말 다르다니까.
“생리통. 큭큭, 새, 생리통이라니…….”
“엉덩이 걷어차서 내쫓기 전에 자라.”
낮게 중얼거리며 저도 모르게 킥킥대자 정말로 인내심이 바닥나기 직전의 목소리가 허공을 울린다. 그 엄중함이 아까와는 다르다는 것을 느낀 준영은 이를 악물며 눈을 감았다.
그렇게나 잤는데 또 잠이 올까 싶었지만, 팔다리가 매트리스에 그대로 파묻히는 느낌이 들었다. 어느 때보다도 단잠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다.
고른 숨소리를 내뱉기 시작하는 준영의 입꼬리가 느슨하게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3
파란 하늘과 따뜻한 바람. 날씨가 좋았다. 준영은 아직 젖어 있는 머리칼을 툭툭 털어 내며 몇 발짝 앞서 있는 널찍한 등을 바라보았다. 저절로 웃음이 툭 튀어나올 것 같아 입꼬리를 앙다물어야 했다.
준영이 잠에서 깬 것은 냄새 때문이었다. 라면 냄새. 지긋지긋하지만 그만큼 제가 얼마나 굶주려 있었는지를 알려 주는 그 자극적인 냄새.
동이 텄는지 어느새 집 안에는 어슴푸레한 빛이 스며들어 와 있었다. 소리 없이 이불을 걷고 일어난 그녀는 슬쩍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범진의 정수리가 보였다.
젓가락으로 보글보글 끓고 있는 라면을 휘휘 젓던 그가 늘어지게 하품한다. 잠 귀신, 하고 입술로 중얼거리며 피식 웃은 준영도 그를 따라 크게 하품했다.
어제 아침에 비하면 몸이 한결 가벼웠다. 이렇게 무방비한 상태로 오랜 시간 자 본 게 얼마 만일까. 열도 내렸고 온몸을 짓누르던 몸살 기운도 깨끗하게 가셨다. 땀을 흘리며 잔 탓에 옷이 조금 찝찝하게 느껴지는 것 말고는 모든 것이 좋았다.
‘사실 예전부터 궁금했는데.’
반쯤 잠긴 목소리로 불쑥 말을 던지자 흠칫 놀란 듯 범진이 고개를 돌렸다. 갑자기 꺾은 목이 아팠는지 그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손으로 뒷덜미를 감싼다. 준영은 애써 웃음을 억누르며 냄비를 향해 손가락질을 했다.
‘너네 집 라면 공장 해?’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던 범진은 다시 몸을 돌린 채 젓가락을 움직였다. 사람 무안하게 하기는. 속으로 꿍얼거리며 준영이 한 계단 내려섰을 때 갑자기 불이 켜졌다.
‘불 꺼. 잘 보여.’
‘나도 첫 발견자 되기 싫어.’
제 말을 그대로 응용하는 범진의 말에 준영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긴, 잘못하면 발견자로 안 끝나지. 용의자로 의심받을 수도 있잖아.’
‘내가 너를? 동기가 뭔데?’
냄비를 책상으로 옮기며 범진이 코웃음을 친다. 준영은 계단을 내려가며 어깨를 으쓱였다.
‘사랑해 마지않는 침대를 종일 차지하고 있는 꼴을 도저히 봐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