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그를 부른 것은 승운이었다. 마치 안에 누군가 있을 것임을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한 범진의 눈동자가 천천히 움직였다.
그것이 멈춘 곳이 승운의 팔에 올려진 제 손임을 알아챈 준영이 저도 모르게 승운을 밀어냈다. 알 수 없는 민망함이 얼굴을 온통 뒤덮는 것 같았다.
“왜, 어디 아파서 왔어? 선생님 나가셨는데.”
저를 밀어내는 손길에 준영을 흘끔 바라보면서도 승운은 범진에게 말을 걸었다.
준영은 두 사람이 교실에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애초에 범진은 누구와도 ‘대화’라는 걸 하지 않았다.
학교에서는.
권범진이 이 학교에서 어떤 존재인지를 감안했을 때, 살벌하게까지 느껴지는 저 얼굴에 대고 태연하게 말을 거는 승운도 평범해 보이지는 않았다.
순진하다고 해야 할지. 남에게 해를 입은 적이 없으니 겁을 먹지 않는 것일까?
하지만 무표정한 얼굴로 범진이 성큼 이쪽으로 다가오자 승운이 슬쩍 제 앞을 가로막는 것을 보고 준영은 헛웃음을 흘릴 뻔했다. 티가 나지 않았을 뿐, 은근히 승운도 긴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권범진이 나한테 무슨 짓이라도 할 거라고 생각하나.
……그런 이미지가 아니라고는 말 못 하겠지만.
준영은 점점 다가오는 범진을 어색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나한테 알은체를 할까? 설마 내가 걱정돼서 온 건 아닐 테고.
하지만 이내 범진은 방향을 틀어 아무렇지 않게 서랍장을 열었다. 그가 약통을 뒤적이는 소리만이 고요한 보건실에 울려 퍼졌다.
원하던 걸 찾았는지 무언가를 꺼낸 범진은 말없이 그대로 보건실을 나갔다. 두 사람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그저 들어왔다가 나갔을 뿐인데도 묘하게 느껴지는 압박감에 준영은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그래 봐야 내가 째려보면 빨래도 해 주면서.
긴장을 떨쳐 내듯 짧게 한숨을 내쉰 승운이 겸연쩍은 얼굴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범진이랑은 아직 좀 어색해서.”
그런 사람이 이 학교에 어디 너뿐일까.
덤덤한 얼굴로 준영은 되도록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이따가 만나면 어디 아프냐고 물어봐야지, 생각하는 그녀의 곁에 승운이 따라붙었다.
“집까지 바래다줄게. 같이…….”
“아니, 됐어.”
생각지도 못한 말에 대답이 매몰차게 나갔다. 그 집에 들어가는 모습을 승운이 본다는 생각만 해도 온몸에 소름이 끼쳤던 것이다.
조금 놀란 듯한 승운을 외면하며 준영은 짤막하게 중얼거렸다.
“됐으니까 나한테 신경 쓰지 마.”
승운은 보건실을 나서는 그녀를 따라오지 않았다. 붉은빛으로 물든 복도를 걸어가는 준영의 뒤로 그녀가 내뱉은 긴 한숨이 그림자처럼 늘어지고 있었다.
* * *
숲속 집은 자물쇠가 걸려 있었다. 범진이 없다는 뜻이다. 홀로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은 준영은 책상 위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몸에 힘이라고는 한 톨도 없었다.
시험이 얼마 안 남았다. 쓸데없는 고집일지 모르지만 그녀는 졸업할 때까지 이 학교에서 전교 1등 자리를 내놓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온전한 제힘으로 유일하게 얻어 낸 자랑스러운 메달이고 타이틀이다. 이따위 학교에서 1등을 하지 못한다는 건 스스로 용납할 수 없었다.
하지만 눈이 자꾸만 2층으로 향했다. 점심을 제대로 먹지 못해 배도 고팠지만 그보다는 잠이 더 몰려왔다. 등줄기를 타고 다시 스멀스멀 미열이 올라오고 있었다.
언제 오려나. 오면 날 깨워 주겠지?
“설마 자기 구역에서 자고 있다고 죽이려 들진 않겠지. 쓰러지기까지 한 사람한테.”
아니, 근데 왜 하필 그 타이밍에 나타나서 사람 민망하게.
보건실에서 그와 마주쳤던 장면이 떠올라 준영은 얼굴을 구겼다.
승운에게 반쯤 안겨 있다시피 한 저를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표정만 봐서는 놀란 것 같지도, 놀리려는 것 같지도 않았는데 원래도 뭐, 그렇게 표정으로 얘기하는 타입이 아니니 알 수가 있나.
하지만 그런 것이야 어쨌든 지금은 제 피로를 해결하는 것이 먼저다. 눈을 끔벅이던 준영은 슬쩍 계단을 올랐다.
사실 범진과 마주친 그날 이후로는 2층에 가 본 적이 없었다. 침대를 쓸 일이 없었으니까.
그래서인지 한 공간인데도 마치 낯선 곳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은근히 긴장된다. 조심조심 끝까지 올라간 준영은 괜히 아무도 없는 주변을 둘러보며 눈치를 살피고는 침대에 가만히 앉았다.
왜 꼭 이런 타이밍에 들이닥칠 것 같지.
이불 끝자락을 만지작거리며 한동안 버텨 보았지만 인내심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녀는 결국 에라이, 하고 털썩 누워 버렸다.
바닥에 매트리스만 얹은 것이었지만 생각보다 편안하다. 중앙이 조금 아래로 꺼진 느낌이었으나 그래도 누웠다는 것만으로 온몸에 긴장이 풀리면서 졸음이 막을 틈 없이 쏟아졌다. 설사 차디찬 돌바닥이었다고 해도 여기가 집보다는 편할 것이었다.
아, 잠깐.
“안 오면 어떡하지…….”
반쯤 굳은 혀가 불분명한 발음을 내뱉었다. 해 있을 때 집에 가라던 범진의 무심한 목소리가 떠올랐다. 맨날 같이 가니까 요즘은 손전등도 안 가지고 다니는데, 하던 생각은 까무룩 그대로 가라앉아 버렸다.
* * *
묘한 기척을 느낀 것 같기는 했다. 완전히 수면 밑까지 가라앉아 있던 정신이 흐리게나마 부상한 것을 보면 말이다. 무언가 계단을 묵직하게 밟으며 올라오는 소리를 듣자 조금씩 감각이 예민해졌다.
힘겹게 눈을 뜬 준영은 어두운 형체가 제 위로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보고는 냅다 비명을 질렀다.
“꺄악!”
컥, 하는 소리가 나는 것도 같았다. 준영은 저를 깔아뭉개는 딱딱하고 무거운 것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쳤다. 누군가의 팔과 다리를 사정없이 후려친 것 같기도 했다.
그것은 발작에 가까웠지만 오래지 않아 양팔을 잡아채는 손길에 의해 쉽게 제압당했다.
“윤준영?”
적잖이 당황했는지 거친 숨을 내뱉는 목소리가 어쩐지 귀에 익었다. 어두워서 상대의 생김새를 분간할 수는 없었지만 저절로 손에서 힘이 빠졌다. 입어 본 적 있는 범진의 티셔츠에서 나던 부드럽고 건조한 나무 냄새가 풍겼던 것이다.
그래, 물론 여기 올 사람은 권범진뿐이다. 달리 누가 있겠는가.
그런 쪽으로 긴장이 풀리자 준영은 그제야 제가 범진의 몸 아래 깔려 있다시피 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덩달아 힘이 풀린 듯한 그에게서 빼낸 손으로 준영은 범진의 가슴팍을 마구잡이로 때렸다.
“으악, 저리 가! 저리 가라고!”
“야, 잠깐, 여기…….”
그녀의 주먹을 피해 황급히 몸을 물리는 범진을 성급하게 밀쳐 내며 일어나던 준영의 머리가 천장에 쿵, 부딪쳤다. 엉거주춤 움직이던 범진의 머리도 마찬가지였다. 둘은 동시에 침대로 쓰러지며 머리를 부여잡았다.
“너 진짜!”
낑낑대며 신음하다가 먼저 버럭 소리를 지른 것은 범진이었다. 준영 역시 정수리를 문지르며 눈을 부라렸다.
“넌 왜 갑자기 사람을 깔아뭉개고 난리야!”
“여기 2층이잖아. 침대는 내 구역이고.”
낮게 깔린 목소리로 으르렁대 봐야 어차피 어두워서 보이지도 않는다. 준영은 지지 않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바닥이라도 좀 짚으면서 천천히 누워야지, 2층인데 밑이라도 꺼져서 떨어지면 어떡하려고 그래?”
“너 그게 지금 말이 된다고……. 됐고, 도대체 뭐 하는 건데? 여기서 뭐 하고 있냐고. 지금이 몇 시인지 알아?”
“몇 시인지 내가 어떻게 알아. 지금 깼는데.”
“새벽 2시가 넘었어.”
쏘아붙이듯 던진 범진의 말에 준영이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그렇게나 잤단 말인가?
놀란 기색을 눈치챈 범진은 침대에 걸터앉은 채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뒤통수를 문지르는 손길을 보며 눈을 끔벅이던 준영도 주춤주춤 자세를 고쳐 앉았다.
“어쨌든 내가 있을 걸 예상하고 들어왔어야지. 자물쇠가 열려 있었을 거 아냐.”
“이런 시간인데 네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겠냐? 당연히 까먹었을 거라고 생각했지.”
“내가 언제 자물쇠 잠그는 거 까먹은 적 있…….”
“그보다 너 제정신이야? 이런 시간까지 여기 있으면 어떡해? 있을 거면 문이라도 잠그고 있었어야지, 겁도 없이 여기서 잠이 들어? 미쳤냐?”
정말이지 혼비백산이 따로 없었다. 그렇게 잠이 깬 것도 억울한데 말문을 가로막고 대뜸 사람을 윽박지르는 범진의 말에 짜증이 치솟는다. 준영은 코웃음을 치며 냉소적으로 말을 뱉었다.
“바보냐? 안에 있는데 문을 어떻게 잠가?”
이, 하고 뭔가 튀어나오려던 험한 말을 집어삼킨 범진이 낮게 신음하다가 그녀를 휙 돌아보며 버럭 소리쳤다.
“그럼 집에 가서 자든가!”
“너나 집에 가서 자. 왜 이 시간에 여길 기어들어 오고 난리야. 새벽 2시 넘었다며?”
지는 법이 없는 준영의 말에 기가 막혔는지 헛웃음을 흘린 범진이 매트리스를 묵직하게 두어 번 두드리며 험악하게 말했다.
“애초에 2층은 네 구역이 아니잖아.”
만약 불빛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준영은 이렇게까지 그에게 맞서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표정이 안 보이는 어둠 속에서 그녀는 무적이었다.
“네 구역 내 구역이 어딨어? 필요하면 쓰는 거지. 머리는 아파 죽겠고 몸은 멍석말이라도 당한 것 같은데 침대는 있고 너는 없고. 그래서 좀 누워서 잤다. 아주 죽을죄를 지었다, 내가. 몸이 아파서 제정신이 아니었어, 내가. 됐어?”
숨도 안 쉬고 쏘아붙이던 준영은 갑자기 머리가 핑 돌아 끙, 하고 양쪽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신음을 토해 내는 그녀를 보던 범진이 혀를 차며 다시 고개를 돌렸다. 찰나의 침묵이 찾아왔다.
억울하지만 이쯤에서 봐준다.
입술을 비죽인 준영은 천장을 의식하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간다, 가. 갈 테니까 침대 마음껏 써. 천년만년 쓰라고.”
범진이 계단 쪽에 다리를 내리고 앉아 있었기 때문에 빠져나가려면 그쪽으로 가야 했다. 비켜 주기를 기다리며 뒤에서 쏘아보고 있자 범진의 널찍한 어깨가 들썩이며 한숨 소리가 들렸다.
“늦었어. 같이 가.”
흥분이 사라진 그의 목소리는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준영은 팔짱을 끼며 콧방귀를 뀌었다.
“됐어. 방금까지 잡아먹으려고 했으면서 뭘 걱정하는 척이야.”
“그럼 공에 한 번 스쳤다고 그딴 식으로 픽 쓰러지는데……!”
또 사람을 몰아치는 말투를 뱉어 내던 범진이 순간 입을 다물었다. 준영은 제 머리를 문지르는 게 아니라 헝클이는 듯한 그의 큼지막한 손을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걱정이라니, 아직 잠이 덜 깼냐고 비웃을 줄 알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