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저 여명일 뿐-4화 (4/86)

<4화>

유치해서 정말 돌아 버리겠네.

열이 오르고 있는지 입술 새로 흘러나오는 숨이 뜨겁다. 준영은 어떻게든 공 쪽으로 끼어들어 보려고 했지만 그럴 때마다 고의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아이들의 몸짓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일 뿐이었다. 그녀가 간절히 바라는 공은 그녀에게 와 주지 않았다.

차라리 쓰러질까. 다소 밟히고 걷어차일 것을 각오하고서라도.

가쁘게 숨을 내쉬던 준영이 잠시 걸음을 멈췄다. 눈앞이 흐렸다. 어지럽게 움직이고 있는 아이들 사이에 드러누울 공간을 찾는 것은 쉽지 않았다.

두리번거리며 고개를 돌리던 그녀는 문득 제 앞쪽에 서 있는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승운이 막 받은 공을 들고 그녀를 보고 있었다.

아, 하고 입을 벌리는데 승운이 팔을 휘둘렀고, 다소 빠른 속도로 날아온 공은 정확히 준영의 어깨에 부딪쳤다. 생각보다 큰 소리가 울렸다.

그렇다고는 해도 쓰러질 만큼의 힘은 아니었다. 그 순간 다리에 힘이 풀린 것은 예기치 못한 것에 대한 놀라움의 영향이 더 컸다.

준영은 몽롱함과 통증을 느끼며 기꺼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몸이 저절로 뒤로 넘어갔다.

“준영아!”

몇몇 아이들이 히익, 하고 숨을 들이켜는 소리 사이로 승운의 놀란 외침이 들렸다. 달려오는 그의 하얀 얼굴이 시야에 선명하게 박혔다.

준영이라고 부르는 소리를 들은 건 처음이다. 저렇게 당황한 얼굴을 이렇게나 가까이에서 보는 것도.

힘겹게 숨을 몰아쉬던 그녀의 눈길이 일순 승운의 어깨 너머로 날아갔다. 벌떡 일어서 있는 시커멓고 커다란 형체를 보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체육 시간에는 맨날 잠만 자더니 어쩐 일로 깨어 있네.

……오늘은 내가 2층을 좀 써야 할 것 같은데, 양보해 주려나.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준영의 눈꺼풀이 닫혔다. 주변을 둘러싼 모든 소음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 * *

꿈은 짧았다. 꿈속에서 저만치 보이는 새하얀 태양을 향해 걷고 또 걸었지만 거리는 조금도 좁혀지지 않았다. 순간순간 그 빛을 가리는 어둠이 그녀의 앞을 뒤덮었다.

태양은 너무 밝았고, 그래서 막연히 그쪽을 향해 걸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이상하게 가끔 찾아오는 어둠이 오히려 포근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주저앉을 수가 없어 걷고 또 걸었다. 정말 내가 걷고는 있는 것일까, 그런 생각이 들 때쯤 준영은 잠에서 깨어났다.

식은땀에 등이 흠뻑 젖어 있었다. 더워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보건실 안의 공기가 후끈했다.

사방으로 흩어진 정신을 그러모으며 준영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입이 바싹 말라 있었다. 부스스 몸을 일으킨 그녀는 무심코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리다가 미간을 좁혔다.

저게 뭐야.

침대는 햇빛이 잘 드는 곳에 있었는데 창문 한가운데에 널찍한 종이가 붙어 있었다. 한 장이 아니었다. 큼직한 세계지도, 인체해부도와 신문지 몇 장이 덕지덕지 창문을 가리고 있었다.

보건실에는 종종 신세를 지곤 했지만 선생님에게 저런 취미는 없었다. 선생님이 앉는 책상 자리는 창문과 떨어진 문가에 있었기 때문에, 학기 초에 커튼을 빨아 준다고 가져간 학생이 몇 달이 지나도록 가져오지 않는 것도 신경 쓰지 않을 정도였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으며 저물어 가는 햇빛을 미약하게나마 막고 있는 세계지도와 인체해부도를 바라보던 준영의 귓가에 드르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서류 더미를 한 팔에 끌어안고 들어오던 선생님이 인상을 썼다.

“어머, 뭐야. 왜 이렇게 더워? 아니, 여름 다 됐는데 누가 난로를 끌어다 놨어?”

어쩐지 덥더라니.

또르르 굴러간 준영의 눈이 제 발치에 있는 난로를 발견했다. 선생님의 2차 비명이 그녀의 귀를 세차게 때렸다.

“저건 또 뭐야? 누가 창문에 저런 걸 붙여 놨어? 준영아, 네가 그랬니?”

몽유병이 있다면 그랬을 수도 있죠.

준영은 말을 뱉지 않고 그저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며 선생님을 응시했다. 그녀는 어휴, 하고 한숨을 내뱉으며 빠른 걸음으로 창가로 다가가 종이들을 뜯어냈다.

하나씩 뜯어낼 때마다 햇빛들이 뭉치로 준영의 얼굴에 쏟아진다. 눈살을 찌푸리며 그녀는 손바닥으로 시야를 가렸다. 아직 머릿속이 어질어질했다.

“몸은 좀 괜찮니? 땀에 푹 젖었네. 어디 좀 보자.”

침대 가로 의자를 끌어온 선생님이 그녀의 이마를 짚어 보더니 투덜거렸다.

“이 열이 더워서 난 열인지 아픈 열인지를 모르겠네. 언제부터 몸이 안 좋았어? 이 정도면 체육 시간에 그냥 말하고 쉬지 그랬니.”

“괜찮을 줄 알았어요.”

말라비틀어진 흙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선생님이 쯧쯧, 혀를 찼다.

“수업 끝날 때 다 됐다. 오늘은 이대로 집에 가서 쉬어.”

집이 누구에게나 쉴 수 있는 공간은 아니라는 걸 사람들은 모른다. 대답 없는 준영을 곁눈질하며 선생님이 슬쩍 일어섰다.

“선생님은 회의 때문에 가 봐야 하니까 열날 것 같으면 해열제 먹고. 침대 잘 정리하고 가라.”

“네.”

사정을 알아도 학생들에게 필요 이상의 참견은 하지 않는 사람이다. 준영에게도 그런 쪽이 편했다. 책상에서 한동안 서류를 뒤적이다 나가려고 문을 열던 선생님이 잠시 멈춰 섰다.

“어, 무슨 일이야? 준영이 때문에 왔니? 들어가 봐.”

목덜미에 들러붙은 머리칼을 치우다가 뭉근한 통증을 느끼고 어깨를 움츠리던 준영이 고개를 퍼뜩 들었다.

누가 저를 찾아온단 말인가?

만약 그럴 만한 사람을 굳이 한 명 꼽으라면, 그건 아마…….

“깼어?”

그러나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온 것은 그녀가 떠올린 얼굴이 아니었다. 그래서 준영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 반응에 더 머쓱해졌는지 승운이 헛기침을 하며 천천히 다가왔다.

하필 이럴 때.

축축한 땀 냄새를 풍기고 있는 데다 기절한 듯이 자서 머리도 엉망이다. 이불을 당겨 앞을 가리며 준영이 날카롭게 말을 뱉었다.

“무슨 일이야?”

열기에 붉어져 있을 얼굴이 신경 쓰여 준영은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말투에 담겨 있는 거부감을 느꼈는지 다행히 승운은 몇 발자국 앞에서 멈추었다.

“괜찮은지 보려고 왔어. 쉬는 시간마다 왔는데 계속 자고 있어서. 병원에 가야 하는 거 아닐까 걱정이 됐거든. 그런 식으로 쓰러지는 사람은 처음 봐서.”

코웃음이 났다. 나도 내가 그런 식으로 쓰러질 줄은 몰랐다. 덕분에 몇 시간 푹 잤으니 고맙다고 해야 할까.

“나 때문에, 내 공에 맞아서 그런 거잖아.”

흘끗 눈을 들자 시무룩한 표정을 짓고 있는 승운의 매끄러운 얼굴이 보였다. 준영은 하마터면 소리 내어 웃을 뻔했다.

너 때문이 아니다. 굳이 비유하자면 그는 이미 차에 치여 쓰러져 있는 사람을 못 보고 지나가다 밟아 버린, 일진이 사나운 사람 정도였다.

그러니까.

다 뒤집어쓰기 좋은.

준영은 손을 들어 아직 얼얼함이 남아 있는 어깨를 감쌌다. 이 얼얼함은 그깟 고무공이 아니라 재떨이로 쓰는 묵직한 화강암 돌덩이에 맞은 후유증이었다. 아침에 봤을 때 이미 멍이 들어 있었다.

하지만 어쨌든 아픈 데를 또 때린 건 네 불운이라고 할 수 있겠지.

제 손길에 승운의 눈가에 밴 죄책감이 짙어지는 것이 보인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많이 놀랐지?”

목소리를 크게 내면 도망쳐 버릴 작은 동물을 마주하고 있는 것처럼 승운이 물었다. 눈을 낮게 내리깔며 준영은 비딱하게 입을 열었다.

“그렇게 온 힘을 다해 던져 놓고 뭘 보러 와? 얼마나 다쳤는지 확인하러? 살인자가 범행 장소에 다시 돌아오는 거랑 비슷한 심리인가?”

“아, 아니야! 살인자라니……, 오해야.”

다소 과격한 표현에 화들짝 놀란 승운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겉모습만 왕자님인 줄 알았더니 속도 온실 속 화초였나 보다.

하긴. 네 세상은 따뜻하기만 하겠지. 너를 괴롭히는 해충 같은 것도 없을 테고.

“오늘 너, 학교에 왔을 때부터 몸 상태가 안 좋아 보였어. 피구 할 때도 불안했는데 네가 공 쫓아다니는 모습이 꼭 일부러 맞으려는 것 같더라고. 차라리 빨리 죽고 쉴 생각인가 보다 싶어서 그런 거야. 내 딴엔 도와주려고.”

못마땅하게 기울어져 있던 준영의 입술이 천천히 누그러진다.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쉰 승운이 큼, 하고 헛기침을 했다.

“급하게 던지다 보니까 필요 이상으로 힘이 들어갔나 봐. 정말 미안해.”

고개까지 숙이며 정중하게 사과하는 승운을 보자 알 수 없는 감정이 휘몰아쳤다.

사람이 저렇게 솔직할 수가 있나. 나는 고맙다는 말 한 마디도 혀끝에 걸려 입 밖으로 잘 나오지 않던데.

“괜찮아. 뼈가 부러진 건 아닌 것 같으니까.”

불퉁하게 대꾸하자 승운의 입꼬리가 금세 호선을 그렸다. 짐을 벗고 홀가분해지려는 모습이다. 그것을 보자 저절로 입술이 움직였다.

“멍은 곧 빠질 거고.”

“멍도 들었어?”

승운의 서글서글한 눈매가 다시 튀어 오른다. 준영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이불을 젖히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부축을 하려는 듯 손을 뻗었지만 차마 그녀를 만지지 못하고 승운의 손은 허공만 떠돌았다.

“아.”

주름이 잡힌 셔츠를 털어 내던 준영이 문득 난로를 보고는 입을 열었다.

“이거 네가 한 거지? 너무 덥더라.”

초조한 얼굴로 그녀의 눈치를 살피던 승운이 눈을 깜빡였다.

“아, 나는…….”

“그래도 고마웠어. 창문 가려 준 것도.”

스스로도 의외였다. 누구 앞에서는 도통 나오지 않던 말이 너무 아무렇지 않게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잖이 놀란 듯한 승운의 표정을 보자 뒷덜미에 다시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준영은 다소 급하게 발을 놀려 그를 지나치려 했지만 순간 머리가 핑 돌아 비틀거렸다.

“준영아!”

기시감이 느껴지는 목소리와 함께 단단한 팔이 그녀의 등을 받쳐 주었다. 손목을 낚아채어 세게 그러쥐는 손이 난로보다 더 뜨겁게 느껴졌다.

코끝으로 밀려드는 시원하고 깨끗한 냄새에 준영은 입술을 깨물 뻔했다. 심장이 크게 요동치고 있었다.

“괜찮아? 급하게 움직이지 않는 게 좋겠다.”

포근하게 들릴 만큼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가를 나직하게 두드린다. 준영은 이대로 연기처럼 흩어져 버리고 싶은 심정에 휩싸였다. 빈틈없이 그녀를 안락하게 감싼 승운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상한 긴장감 속에서 애써 표정을 가다듬고 있던 준영은 난데없이 거친 소리를 내며 열리는 문 쪽을 돌아보았다. 길쭉하게 날이 선 눈매와 마주치자 입술이 저절로 힘을 잃고 벌어졌다.

“어, 권범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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