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너 뭐, 뭐……?”
“이거 입고 벗어 줘. 난 다 먹었으니까.”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범진은 제 티셔츠를 내밀었다. 준영은 제 온몸을 칭칭 감을 수 있을 만큼 커다란 티셔츠를 보며 멍하니 되물었다.
“진심이야?”
“그런 건 주방 세제로 문지르면 금방이야. 빨아 줘, 말어?”
굳이 그럴 필요까지 있나 싶었지만 저 덩치가 제 셔츠를 빨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니 어째 웃기긴 하다. 눈을 굴리던 준영이 턱짓으로 문을 가리켰다.
“나가 있어, 그럼.”
“별…….”
“야!”
준영의 눈에서 흰자위가 많아지자 코웃음을 친 범진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열렸다 닫히는 문 틈새로 들어온 바람이 차갑다. 그제야 그가 상체에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다는 것이 떠올라 준영은 책상 아래로 몸을 낮추며 서둘러 셔츠 단추를 풀었다.
밤에 빨래를 하는 건 귀찮은 일이다. 온수가 나오지 않는 데다 산골이라 아침저녁으로는 손이 저릴 만큼 차가운 물이 나오기에 더더욱.
그 수고로움을 덜 수 있다면야.
셔츠를 벗고 범진의 티셔츠를 입자 따뜻한 온기가 무릎 위까지 내려왔다. 어지간히 체온이 높은 모양이다. 분명히 반팔이었지만 소매가 거의 그녀의 손목까지 덮고 있었다. 먼지나 담배 냄새가 아닌, 부드러운 나무 냄새 같은 것이 난다는 게 의외였다.
“됐어.”
문 쪽을 향해 말하자 이내 문이 열리고 범진이 들어왔다. 그는 셔츠를 내밀고 있는 준영을 보고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준영도 덩달아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왜. 빨아 준다며. 그새 마음 바뀌었어?”
새카만 제 티셔츠를 입고 있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범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는 다소 거칠게 셔츠를 낚아채며 말을 뱉었다.
“너 그런 말 어디 가서 하지 마라.”
“무슨 말?”
반문했지만 범진은 고집스레 앞만 볼 뿐 대답은 하지 않았다. 싱크대 앞에 서서 물을 틀고 세제를 묻힌 셔츠를 비벼 대는 그를 흘끔거리며 준영은 라면을 먹었다.
힘이 들어가면 널찍한 어깨에서 뻗어 나온 팔에 단단한 근육이 솟는다. 길쭉한 팔을 가로지르는 퍼런 핏줄이 꿈틀거릴 때마다 제가 가진 것과는 전혀 다른 수준의 힘과 생명력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고, 아무것도 두려울 게 없을 것 같은.
권범진의 몸은 아름답다. 문득 그렇게 생각했다. 반듯한 뼈대를 덮고 있는, 매끈하게 깎아 놓은 듯한 근육은 미학적인 균형을 보여 주고 있었다. 까무잡잡한 피부마저 윤기가 흐르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윤준영.”
라면을 입에 문 채 저도 모르게 멍하니 그를 보고 있던 준영이 퍼뜩 놀라 눈을 들었다. 셔츠를 비틀어 짜고 있던 범진이 어느새 그녀를 향해 비딱하게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너 지금 내 몸 보면서 침 흘리냐?”
“라면이 맵네. 고춧가루를 얼마나 넣은 거야? 물 좀 줘.”
스읍, 하고 입맛을 다시며 준영은 얼른 미간을 찌푸렸다. 범진이 피식 웃고는 컵에 수돗물을 따라 건넨다. 한입에 전부 들이켜며 그녀는 숨을 골랐다. 어쩐지 목덜미가 화끈거리는 것 같았다.
* * *
라면을 먹은 후 그들의 행동반경은 철저하게 1층과 2층으로 나뉘었다.
처음에는 자고 있을 범진에게 굳이 제가 간다는 말을 해야 하나, 를 고민했었다. 그러나 그 고민의 답을 찾기도 전에 가방을 챙기는 기척을 느꼈는지 그가 부스스 일어나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계단을 내려왔다.
‘너도 가게?’
‘밖에 캄캄한데 집에 갈 때 어떻게 가냐?’
의외의 말에 은근히 긴장하고 있던 준영이 어색하게 물었다.
‘너 혹시 지금 내 걱정 하는 거야? 바래다주려고?’
그 말에 범진은 호되게 뒤통수를 한 대 후려 맞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내 말없이 흉악하게 눈을 부라리는 그를 마주 보기가 어려워 준영은 시선을 피한 채 들고 온 손전등을 흔들었다.
‘이걸로 길 비추면서 가는데.’
‘그럴까 봐 물어본 거다. 그거 가지고 다니지 마.’
범진은 그녀의 손에서 손전등을 빼앗아 가방 안에 던지듯 넣었다. 그러고는 눈썹을 바짝 치켜세우는 준영을 보며 말했다.
‘여기 드나드는 거 광고할 일 있냐? 밤에 손전등 불빛이 얼마나 잘 보이는지 알아?’
‘아.’
수긍하면서도 준영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럼 어떻게 다니라고. 길이 어두운데.
눈을 또르르 굴리던 그녀는 갑자기 구석에 세워 둔 나무 몽둥이 같은 것을 들고 오는 범진을 보고는 그대로 몸을 굳혔다.
내내 미동도 없이 고른 숨소리를 내며 곰처럼 잠만 자기에 방심하고 있었는데 그는 다름 아닌 권범진이다. 십수 명이 얽힌 흉흉한 폭력 사건으로 유명한 바로 그 권범……!
‘난 밤눈 밝아. 이거 잡고 따라와.’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있던 준영은 저를 지나쳐 문을 열고 나가는 범진의 뒷모습을 눈알을 굴려 좇았다. 밖으로 나간 범진이 그녀를 향해 길쭉한 몽둥이 끝을 내밀고 있었다.
……그땐 매일같이 이걸 잡게 될지 몰랐지.
준영은 손에 익은 몽둥이의 표면을 만지작거리며 생각했다. 첫날 따갑다고 꿍얼거리는 걸 들었는지 다음 날 범진이 내민 나무 끝에는 청테이프가 감겨 있었다.
누가 봐도 한층 업그레이드된 흉기처럼 보였지만 준영은 순순히 잡을 수 있었다.
권범진에 대해 수군대는 소리는 제 욕을 하는 소리만큼이나 흔하게 들린다. 하지만 제가 겪어 본 범진은 마음에 안 든다고 선생님에게 쌍욕을 지껄이며 주먹을 휘두르거나, 돈을 뺏기 위해 노인들의 뒤통수를 후려갈기고 지갑을 털어 갈 것 같지는 않았다.
물론 제가 아는 권범진은 이곳에서의 권범진뿐이지만, 적어도 누구든 그가 물기 묻은 셔츠를 말리겠다고 빳빳하게 각 맞춰 접어 자기 자는 이불 밑에 깔아 두는 것을 봤다면 그런 생각을 하기는 힘들 것이었다.
세 시간쯤 범진의 등허리 아래 깔려 있던 그녀의 셔츠는 다리미로 다린 것처럼 되어 있었다. 희미한 먼지 냄새와 뜨끈한 온기를 품고 있는 셔츠를 어떤 표정으로 받아 들어야 할지, 준영은 알 수 없었다.
“여기 구덩이 파였다.”
두 발짝쯤 앞서가던 범진의 말에 준영의 걸음이 느려졌다. 아래쪽 도로에 있는 가로등의 부연 불빛으로는 나무들의 그림자 정도만 구분할 수 있었기에 여기에서는 범진의 말을 잘 들어야 했다.
“하긴, 넌 고양잇과처럼 생겼어. 이름에도 범이 들어가고.”
불쑥 말하자 범진이 흘끗 그녀를 돌아본다. 혼자서 고개를 끄덕이고 있던 준영이 덧붙였다.
“고양이가 밤눈이 밝다잖아. 동공이 넓게 열려서 적은 빛으로도 잘 볼 수 있다고.”
“별걸 다 아네.”
코웃음을 치는 소리가 들려 준영은 어깨를 으쓱였다. 바람이 나뭇잎을 흔드는 소리가 음산하게 들린다. 아마 범진이 없었다면 그녀는 이렇게 늦게까지 이곳에서 속 편히 공부할 수 없었을 것이다.
“너 밤에도 자고 낮에도 이렇게 자는 거 아니지?”
“밤에 뭐 하냐고 묻고 싶은 거야?”
뒤도 돌아보지 않고 범진이 되묻는다. 목소리만 들어도 내키지 않는 말이라는 걸 잘 알겠기에 준영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어느 날 갑자기 네가 안 오면 난 밤에 어떻게 집에 가나 생각하다가.”
그녀의 말이 어이가 없었는지 범진은 피식 웃었다.
“해 있을 때 집에 가.”
“집에는…….”
갈 수 없어.
무심코 대답하려던 준영이 얼른 입을 다물었다. 갑작스레 끊긴 말에도 의외로 범진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다시 내려앉은 침묵 속에서 그들은 조용히 흙과 마른 나뭇가지들을 밟으며 걸음을 옮겼다. 가로등이 있는 길까지 나오고 나서야 범진은 유연한 동작으로 나무 몽둥이를 회수하며 고개를 돌렸다.
“가라.”
“응.”
고맙다는 말이 입가에 맴돌고 있었지만 또 내뱉을 타이밍을 잡지 못했다. 늘 심심한 인사 후에 칼같이 돌아서는 것이 습관이 든 탓이었다.
몇 걸음 걷다가 뒤를 돌아볼까 싶었지만 그래지지가 않았다. 결국 짧게 한숨을 내쉰 준영은 느릿느릿 집으로 향하는 골목으로 들어섰다.
그녀와 엄마, 두 식구가 사는 집은 외진 골목 끝에 있는 지하 단칸방이었다. 그 길목에서는 특유의 곰팡내와 지린내가 섞인 듯한 냄새가 풍겼다.
하지만 숨을 참을 수는 없었다. 집에 들어가기 전 입구에서 술 냄새가 나는지 안 나는지를 감지해야 했기 때문이다.
발소리를 죽이고 흘러내리는 가방끈을 추어올리며 깊이 숨을 들이쉬던 준영의 미간에 주름이 잡힌 것과 불투명한 유리창이 달린 철제문이 열린 것은 거의 동시였다. 흠칫 놀라 뒤로 물러선 준영은 눈앞에 툭 튀어나온 검은 그림자를 쳐다보았다.
“어, 엄마, 안 자고 있었어?”
조금만.
……조금만 더 있다가 올걸.
비틀거리면서도 점점 다가오는 진한 술 냄새에 준영은 가방끈을 세게 움켜쥐었다. 차게 굳은 심장이 조금씩 오므라들고 있었다.
2
“외야, 내야 나눴으면 얼른 시작해라.”
만년 같은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는 체육 선생님의 박수 소리와 함께 아이들이 느릿느릿 움직였다.
자리를 잡던 준영은 제 어깨를 세게 치고 지나가는 사람에게 밀려 비틀거리다 쓰러질 뻔했다. 긴 머리에 리본 핀을 꽂은 혜수가 팔짱을 낀 채 그녀를 돌아보며 웃고 있었다.
“미안. 안 보였네.”
준영은 말없이 한숨을 내뱉었다. 그녀가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린 뒤 세 번째 손가락을 힘차게 세우자 혜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준영이 무표정한 얼굴로 이죽거렸다.
“아. 이건 보여?”
“너…….”
선생님이 힘차게 부는 호루라기 소리가 들렸다. 준영은 저를 죽어라 노려보는 혜수에게서 슬금슬금 떨어졌다.
평소였다면 혹시 이성을 잃은 혜수가 달려든다고 해도 상대할 자신이 있었지만 오늘은 아니다. 찬물을 끼얹은 몸으로 두어 시간 동안 밖에서 덜덜 떨며 졸았더니 컨디션이 말이 아니었다. 아침부터 목 언저리가 뜨끈했다.
적당한 타이밍에 죽어서 빨리 쉬어야 할 것 같다. 쓰러져서 보건실로 실려 가는 시나리오도 나쁘진 않지만 왠지 여기서 제가 쓰러지면 혜수의 발에 밟힐 것만 같았다.
물론 혜수가 아니어도 저를 밟을 발들은 많다. 역시 죽는 게 최선이다.
계산을 끝낸 준영은 공을 맞기 좋은 자리를 향해 움직였다. 그러나 공은 그녀의 반대편으로 날아갔다. 미간을 찌푸린 준영은 차라리 가만히 있자, 생각하며 모퉁이 부분에 서 있었지만 공은 그녀를 향해 날아오지 않았다.
시간이 조금 지난 뒤에야 그녀는 깨달았다. 킬킬대며 웃는 아이들은 일부러 그녀를 게임에서 배제하고 있었다. 없는 사람 취급을 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