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그날도 도착하자마자 책상 위에 가방을 내려놓던 그녀는 2층에서 부스스 일어나는 범진을 보고는 기절할 뻔했다. 잠에서 덜 깬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던 범진의 눈빛이 점점 명료해지는 것을 보며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너.’
‘미안. 너네 집인지 몰랐어. 열쇠도 없고 빈집이라고 생각해서……. 금방 나갈게.’
손을 뻗어 가방끈을 잡아당기면서도 준영의 눈은 계단을 내려오는 범진에게 꽂혀 있었다. 그와 관련된 소문들이 머릿속에 하나둘씩 떠올랐던 것이다.
잔뜩 긴장한 그녀를 응시하던 범진은 호랑이가 포효하는 것처럼 입을 떡 벌리고 하품을 했다. 늘어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우리 집 아닌데.’
‘뭐?’
‘빈집 맞아. 한 달 동안 아무도 안 왔어. 너 말고는.’
준영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범진은 태연하게 싱크대 아래 서랍에서 컵을 꺼내 수돗물을 받은 뒤 벌컥벌컥 마셨다.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리고 어깨를 안으로 말고 있던 준영이 더듬거리며 물었다.
‘너, 넌 여기서 뭐 하는데?’
‘자지.’
‘자, 뭐?’
‘그 자지 말고, 잔다고. 뭘 얼굴을 붉혀.’
‘내가 언제……!’
‘공부하러 왔지? 난 더 잘 거니까 하다 가라.’
눈을 비빈 범진은 그대로 다시 계단을 올라가 침대에 누웠다. 눈을 깜빡이며 정신을 수습하던 준영은 뻣뻣한 고개를 억지로 들었다. 숨소리도 코 고는 소리도 들리지 않아 위에서 뭘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나갈까? 나가는 게 맞잖아. 저 험상궂은 게 무슨 짓을 할지 누가 알아.
……그렇지만.
이렇게 좋은 장소는 또 없다. 게다가 권범진도 소유권을 주장할 입장은 아닌 것 같았다. 저보다 조금 더 전에 이곳을 발견한 것뿐이지 않은가.
가만히 주먹을 움켜쥔 준영은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조심스레 계단을 한 칸씩 올랐다. 정말로 자고 있는지 확인만 할 작정이었다.
계단은 한 칸의 높이가 꽤 높고 경사가 가팔라 조심해야 했다. 천장에 머리가 닿지 않도록 허리를 구부린 채 계단을 오른 그녀는 옆으로 돌아누워 눈을 감고 있는 범진을 발견했다.
진짜로 자는 건가. 건드려 볼 수도 없고.
아니, 그보다 내가 공부하러 왔다는 걸 알고 있었잖아. 어떻게 알았지?
‘뭐. 할 말 있으면 해.’
갑자기 툭 날아온 목소리에 깜짝 놀란 준영이 손잡이를 놓치고 휘청였다. 으악, 하고 비명을 지르며 뒤로 넘어가려던 몸이 순식간에 앞으로 당겨졌다.
심장이 튀어나올 것처럼 뛰었다. 눈을 질끈 감은 채 숨을 할딱이던 준영은 한참 만에 눈을 떴다. 그리고 제가 범진을 깔아뭉개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붙잡힌 손목이 얼얼했다.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른 그녀는 범진의 가슴팍을 꾹 누르며 몸을 일으켰다. 그 바람에 천장에 머리를 사정없이 꿍, 부딪치고 말았다.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몸을 공처럼 말고 고통을 견디는 그녀를 보며 범진이 비웃듯 픽 웃었다.
‘2층에는 안 올라와 봤냐? 여기 천장 낮아.’
배어 나온 눈물을 닦아 낸 준영은 아직 남아 있는 통증을 억누르며 아무렇지 않은 척 눈을 들었다.
‘냄새나.’
‘……그게 생명을 구해 준 사람한테 할 소리야? 나 아니었으면 너 머리통 깨졌다고. 혹 나는 걸로 안 끝났어.’
범진이 반쯤 몸을 일으킨 채 불퉁하게 말했다. 이만큼 거리가 좁혀진 것만으로도 압박감이 느껴져 준영은 어물거릴 수밖에 없었다.
‘침대에서 먼지 냄새 난다고.’
자기 티셔츠를 잡아당겨 킁킁대고 있던 범진이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틈을 놓치지 않고 준영이 물었다.
‘어떻게 알았어? 나 여기 공부하러 온 거.’
‘봤으니까.’
‘언제?’
‘그제.’
순순히 대꾸하던 범진은 커다래진 준영의 눈을 보고는 귀찮다는 듯 덧붙였다.
‘자다 깼더니 누가 책상 앞에 앉아 있는데, 보니까 뒤통수가 너더라고. 그래서 그냥 다시 잤지.’
‘뒤통수를 보고 알아봤다고, 날?’
‘너 내 앞자리잖아. 정확히는 앞, 앞자리.’
그렇다고 사람을 뒤통수로 알아볼 수 있나?
의아함에 눈을 깜빡이는 준영의 귓가에 음산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 침대가 목적이었다면 내쫓았을 테지만 말이야.’
준영은 경험을 통해 사람의 목소리에 담긴 폭력의 기운을 읽을 줄 알았다. 자동으로 경직된 눈으로 쳐다보자 범진이 덤덤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네 목적은 책상인 것 같더라고. 그렇다면 공존이 가능하겠다 싶었지. 우린 둘 다 조용한 공간이 필요한 거잖아. 원하는 게 다르니 서로 방해도 안 될 거고.’
술렁이는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며 준영은 눈을 가늘게 좁혔다.
범진은 분명 사람을 긴장시켰지만 대화는 의외로 평범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게다가 어쨌든 하는 말에도 일리가 있고 말이다. 적어도 말이 안 통하는 또라이는 아닌 것 같았다.
‘자러 온단 말이지, 여기?’
‘응.’
‘집에서 자면 되잖아.’
그녀의 의문에 범진이 무심한 말투로 받아쳤다.
‘너도 집에서 공부하면 되잖아.’
무슨 의미인지 준영은 단번에 알아들었다. 제게 사정이 있듯 그에게도 사정이 있는 것이다. 지금 확인해야 할 건 그런 것들이 아니었다. 생각을 굴리던 준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빈집도 맞고?’
‘응.’
‘빈집이더라도 너나 나처럼 앞으로 누군가 또 들어올 수 있잖아.’
쭉 뻗은 범진의 눈매가 날카로운 선을 그렸다. 눈을 마주친 범진이 그녀의 뜻을 이해했다는 듯 비딱하게 웃었다.
‘자물쇠가 필요하겠네. 다음에 가져올게.’
‘열쇠는 나도 주는 거야? 왜?’
확인하듯 묻자 작게 하품을 하며 범진이 중얼거렸다.
‘말했잖아. 공존이 가능할 것 같다고.’
‘혼자 쓰는 게 더 마음 편하잖아.’
불안함에 준영이 물고 늘어지자 금세 미간을 험악하게 찌푸린 범진이 언성을 조금 높였다.
‘그래서 줘, 말어?’
‘줘.’
‘알았으니까 네 구역으로 내려가.’
입맛을 다신 범진이 다시 드러누웠다. 눈을 굴리던 준영은 떨떠름한 얼굴로 조심해서 계단에 발을 디뎠다. 두 칸쯤 내려가던 그녀가 고개를 길게 뺐다.
‘근데 너 내가 누군지는 알아?’
‘공부 못한다고 사람 이름도 못 외우는 등신으로 보이냐. 전교 1등 윤준영.’
그런 이미지가 아니라고는 말 못 하지.
잇속으로 중얼거리며 준영은 고분고분 아래로 내려왔다. 그렇게 ‘공존’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학교에서 두 사람의 관계는 여전했다. 둘은 말을 섞지 않았다. 그럴 일이 없었으니까.
이곳에서도 처음에는 그다지 말을 하진 않았지만, 이제는 간단한 대화를 나누는 정도가 되었다. 권범진이 라면을 가져와 같이 끓여 먹은 뒤로.
그날 이후로 매일 라면을 가져온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지만, 달리 먹을 것이 없으니 사실 고맙긴 했다.
게다가 범진은 나름의 다양성을 추구했다. 어느 날은 계란을, 어느 날은 치즈를, 어느 날은 김치나 고추를 듬뿍 썰어 넣어 끓였다.
성의가 보이니 다 먹는 걸로 보답하는 수밖에.
학교에서 만든 영어 단어장을 들여다보던 준영은 코끝을 자극하는 냄새가 풍기자 주섬주섬 책상을 치웠다. 늘 냄비 받침으로 쓰는 것은 원래 이 집에 있던 무협 소설책이었다.
앉은 채로 의자를 옆으로 조금 움직이니 다가온 범진이 냄비를 내려놓았다. 뜨거운 김이 부옇게 솟았다.
“……계란을 몇 개를 넣은 거야?”
“다섯 개?”
“노른자 터졌잖아.”
“두 개는 안 터뜨렸어.”
“계란 풀지 말라니까.”
“야.”
수저를 건네던 범진이 미간을 좁혔다. 처음에 저런 표정을 봤을 때는 저도 모르게 눈을 내리깔고 말았지만 이제는 아니다. 눈을 바짝 치뜨는 그녀를 보며 범진이 수저를 흔들었다.
“한 냄비에 끓이는데 내 취향, 네 취향 맞추려면 별수 없어. 요령껏 덜어 가면서 먹어.”
입술을 비죽 내민 준영이 그릇에 라면을 덜었다. 따로 식탁이 없기 때문에 그들은 늘 책상에서 라면을 먹었다. 의자도 하나라서 번번이 서서 먹는 범진에게 한 번쯤 의자를 양보할 생각도 있었지만, 적어도 오늘은 아니었다.
면발에 붙어 있는 계란 흰자 덩어리들이 거슬렸지만 오늘은 고춧가루를 좀 넣었는지 얼큰해서 먹을 만했다. 후후, 입김을 불던 준영은 비딱하게 서서 라면을 먹고 있는 범진을 흘끗 보며 물었다.
“너도 못 먹는 거 있어?”
무어라 대답하려던 범진의 눈썹이 쭉 치켜세워진다. 그는 입꼬리를 슬쩍 당기며 준영을 바라보았다.
“너 성격 나쁜 거 너무 빤히 보인다.”
“넌 그렇게 생겨서는 의외로 눈치가 빠르구나.”
코웃음을 치며 대꾸하자 어이가 없다는 듯 입을 벌리던 범진이 헛웃음을 흘렸다. 그는 이내 준영의 코앞까지 몸을 훅 숙이고는 국물이 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후루룩, 면발을 빨아들였다. 그 국물의 피해자는 준영의 하얀 셔츠였다.
“야!”
점점이 튄 얼룩에 버럭 소리를 지르니 범진의 날카로운 눈매가 조금 움찔했다. 자기가 그렇게 조심성 없게 굴어 놓고는 정말로 튈 줄 몰랐다는 듯한 표정에 준영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다.
“집에 가서 빨아. 다른 셔츠 입으면 되잖아.”
하루 더 입을 생각이었는데.
입을 벙긋거리던 준영이 젓가락을 탁, 내려놓았다. 범진은 눈으로는 그녀를 보면서도 배가 고팠는지 라면을 계속 후루룩거리고 있었다.
네 주먹이 내 주먹의 두 배만 아니었어도 넌 죽었어, 진짜.
두 입 만에 제 몫으로 덜어 놓은 라면을 다 먹고 국물까지 깨끗하게 들이켠 그는 말없이 계속 노려보는 준영의 시선에 결국 손등으로 입을 훔치며 빈 그릇을 내려놓았다.
“알았어. 벗어. 빨아 줄게.”
“뭐? 뭘 어떻게 벗어?”
“어떻게 벗긴. 단추를 풀면 되지.”
“이 미친놈아!”
멀뚱한 범진의 대답에 흠칫 놀라 의자를 뒤로 확 물리던 준영이 뒤통수를 벽에 부딪치고 말았다. 오만상을 찌푸리는 그녀를 실눈으로 쳐다보며 범진이 혀를 찼다.
“머리 박는 게 취미냐? 왜, 머리가 너무 좋아서 짜증 나?”
“입 다물어.”
뒤통수를 문지르며 뾰족하게 대꾸하자 어깨를 으쓱인 범진이 갑자기 티셔츠를 훌렁 벗었다. 눈앞에 훤히 드러난 남자의 탄탄한 상체에 당황한 준영의 입이 딱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