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저 여명일 뿐-1화 (1/86)

1부

<1화>

1

날씨가 맑다. 활짝 열어 둔 창문 너머에서 밀어닥치듯 쏟아지는 햇살이 눈이 부셨다. 노곤한 오후라 그런지 교실 안에 있는 대부분이 고개를 숙인 채 졸고 있었다. 그도 예외는 아니었다.

오늘 그는 머리 모양이 바뀌었다. 다소 덥수룩해 보이던 머리를 쳐 낸 것만으로 기다란 목과 부드러운 턱선이 눈에 띄게 드러났다. 덕분에 아침부터 소란이었다.

준영은 그의 깨끗한 피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자리는 그의 대각선 뒤였기 때문에 옆모습을 훔쳐보기 나쁘지 않았다. 그의 셔츠는 늘 빳빳하게 다려져 있었고, 보기만 해도 청량한 냄새가 날 것처럼 깨끗했다. 대부분 땀내를 풍기기 시작하는 이 시기에도 말이다.

꾸벅거리던 고개가 아래로 툭 떨어지자 자기도 놀랐는지 그가 퍼뜩 눈을 들었다. 햇빛이 그의 얼굴을 빛과 어둠으로 양분하고 있었다.

보기 좋은 얼굴이다. 귀공자 같은 하얀 피부와 조화로운 눈, 코, 입, 겸연쩍은 듯 슬쩍 웃는 미소까지 그림처럼 완벽했다.

애초에 이런 산골짜기 시골과는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그런 위화감에서 맥없이 독기를 빼내 버리는 것은 저 태연하고도 유한 표정 때문일 것이다.

애매한 시기에 전학을 왔음에도 금세 학교의 모두를 아군으로 만들어 버린 ‘왕자님’.

“나와서 풀어 볼 사람.”

칠판을 두드리는 선생님의 목소리에 준영은 턱을 괸 채 삐딱하게 고개를 돌렸다. 이 수업 시간 내내 그녀가 한 것이라고는 왕자님을 훔쳐본 것뿐이었지만 잠깐 훑어본 것만으로도 칠판에 적힌 문제의 답을 알 수 있었다.

“나승운, 충분히 잔 거 같은데 나와 봐라.”

시선을 외면하는 학생들 사이에서 영광스럽게도 선생님의 지적을 받은 그가 화들짝 놀라 엉거주춤 일어선다. 그는 얼른 문제를 눈으로 읽어 보고는 당황한 얼굴로 웃었다.

“너, 너무 어려운데요, 선생님.”

“뭐가 어려워, 인마. 서울에서 이다음 챕터까지 진도 나갔었다면서?”

“하지만 저 문제는 풀어 본 적이 없어서요. 자다 깨서 정신이 없기도 하고…….”

애교 있는 말투로 중얼거리는 그를 보며 아이들이 와르르 웃었다. 선생님마저 어이가 없다는 듯 눈매를 누그러뜨렸다. 손가락 사이에 걸쳐 둔 펜을 빙글, 돌리던 준영은 당연한 순서처럼 제게로 날아오는 선생님의 시선을 받았다.

“준영이.”

“네.”

자리에서 일어서자 그가 돌아본다. 준영은 약간의 눈길조차 흘리지 않고 정면만 응시하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털털거리며 돌아가는 선풍기 바람에 긴 머리칼이 흩날린다. 그녀는 머리를 묶지 않은 것을 잠깐 후회했다. 지저분해 보일 것 같았다.

스치는 시야에 저를 보며 미안하면서도 고맙다는 듯한 표정으로 그가 웃고 있는 것 같았지만 확실하진 않다. 칠판 앞에 서서 막힘없이 답을 적자 팔짱을 끼고 옆에 서 있던 선생님이 피식 웃었다.

“딴생각하는 것 같더니 이 녀석. 역시 우리 반 1등이네.”

전교 1등이거든요. 수준 낮고 코딱지만 한 학교라 그렇지만.

속으로 중얼거린 준영은 고개를 가볍게 숙인 뒤 돌아섰다. 드문드문 앉아 있는 아이들 사이에서 유독 하얀 얼굴의 승운이 보인다. 머리를 짧게 잘라 반듯한 이마가 드러난 잘생긴 얼굴로 그는 화사하게 웃고 있었다.

어쩐지 한숨이 흘러나올 것 같아 입술 끝에 힘을 준 채 돌아와 자리에 앉았다. 무어라 말을 걸려던 승운의 기색에 표정을 굳히던 찰나 선생님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나승운. 너 시골 내려왔다고 방심하고 그러면 안 돼. 계집애한테 지고도 자존심 안 상하냐?”

계집애, 계집애, 하는 게 선생님의 말버릇이라는 건 알지만 어쩔 수 없이 펜을 쥔 준영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녀의 얼굴을 본 승운이 얼른 입을 열었다.

“선생님, 준영이는…….”

“선생님.”

탕, 하는 소리와 함께 훌쩍 일어서는 누군가의 기척에 아이들이 동시에 뒤를 돌아보았다.

“수업 끝났는데요.”

걸걸한 목소리에는 거침이 없었다. 마뜩잖은 얼굴을 하며 선생님이 손가락질을 했다.

“인마, 권범진. 수업을 끝내는 건 선생님이 결정하…….”

“제가 지금 화장실이 존나 급해서요. 벌써 벨트도 거의 풀어 놨거든요.”

범진의 손끝에서 덜렁거리는 가죽 벨트의 끝자락을 본 여학생들이 날카로운 비명을 질러 댄다. 뒤를 돌아보지 않는 여학생은 준영뿐이었다. 당황한 표정으로 선생님이 책을 챙겼다.

“가라, 가. 수업 끝.”

“수고하셨습니다.”

선생님의 퇴장과 함께 삼삼오오 일어난 아이들이 움직이는 소리에 순식간에 교실이 시끌벅적해졌다. 책을 덮던 준영은 제 위로 드리워진 그림자에 고개를 들었다.

“나 때문에 괜히 문제 풀었네. 미안.”

승운이 목덜미를 긁적이며 서 있었다. 키가 큰 만큼 그림자도 길다. 소매를 걷은 셔츠 아래로 뻗어 나온 하얀 팔을 파란 핏줄이 나뭇가지처럼 가로지르고 있었다.

은은한 비누 냄새가 풍긴다. 깨끗하고 포근한 냄새.

“비켜.”

“응?”

“비키라고. 화장실 갈 건데 네가 길 막고 있잖아.”

그녀의 말에 귓가를 붉힌 승운이 한 발 물러섰다. 빈 공간으로 빠져나가는 그녀의 뒤통수에 대고 들으란 듯이 중얼대는 소리들이 울려 퍼졌다.

“하여튼 성격 더럽다니까. 쟤한테 괜히 말 걸지 마, 승운아. 기분 나쁘잖아.”

“아니, 나는…….”

“너무 졸리지 않아? 날씨가 좋으니까 요즘 더 그런 것 같아. 놀러 가고 싶다. 주말에 뭐 해?”

끈적하게 늘어지는 목소리를 들으며 준영은 교실을 벗어났다. 복도를 걷던 그녀는 문득 제 셔츠 소매를 내려다보았다. 헌 옷이라는 걸 제발 알아 달라는 듯이 소매 끝이 해져 있었다.

모든 게 구질구질하다. 제 몸에 걸치고 있는 것 중 어느 하나도 쓸 만한 게 없었다. 죄다 낡고 닳은 것들뿐.

이곳의 대부분은 저와 대동소이하다. 다른 것은 나승운뿐이었다.

물론 개중에서도 자신은 좀 더 후진 쪽에 속하지만 말이다.

“……재수 없어.”

낮게 읊조린 그녀는 고개를 빳빳이 들고 걸음을 옮겼다. 머릿속에는 멋쩍은 표정을 지은 채 비켜서던 승운의 얼굴이 가득 차 있었다.

* * *

해가 지면 산은 금세 어두워진다. 가방을 멘 준영은 집이 아닌 곳을 향해 걷고 있었다.

애석하게도 그녀의 집은 공부할 만한 환경이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일단 책상이 없었으니까.

학교에서 자습을 할 수도 있었지만 학교 역시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다. 애초에 대학 진학을 목표로 하는 아이들 자체가 적었고, 공부할 생각이 있는 한 줌의 아이들은 보통 학교에 남지 않고 학원에 갔다.

물론 준영은 학원에 다닐 돈 같은 건 없었다. 하지만 내가 노는데 왜 방해되게 너는 공부하느냐는 식의 교실 분위기 속에서 공부를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던 차에 우연히 발견한 곳이 있었다.

아는 사람이 별로 없는 학교의 개구멍으로 나와 산으로 이어지는 길을 조금 걸어 올라가다 보면 오래된 창고 같은 집 하나가 있다. 언제부터 거기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술에 취한 엄마에게 뺨을 맞고 방황하다 발견한 작은 2층집은 나무로 지어진 것이었는데, 1층에는 창문에 붙은 책상과 약간의 여유 공간이, 그리고 계단을 올라가면 침대 하나가 덩그러니 있는 곳이었다.

얼마 전까지 누군가 살았던 게 분명했다. 안에 있는 책상이나 책들, 벽난로와 침대는 그다지 낡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수도 시설과 밖에는 간이 화장실까지 있었다.

하지만 이유가 무엇이든 지금은 빈집이었다. 중요한 건 그것이었다.

그곳은 산속에 있어 절간처럼 고요했다. 그리고 저녁에는 여름 초입인데도 시원했다. 오히려 조금 쌀쌀하게 느껴질 정도였지만, 집중해서 공부하기에는 정말이지 최고의 장소라고 말할 수 있었다.

가방을 추어올리던 준영의 눈썹이 삐죽 섰다. 집에 불이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주머니에서 꺼내려던 열쇠를 다시 넣었다. 문에 달아 놓은 간이 자물쇠의 열쇠였다.

가까이 다가가 손잡이를 벌컥 잡아당기자 훈훈한 공기가 달려 나와 그녀를 맞이했다.

“왔냐.”

부스럭대는 소리와 함께 2층에서 낮게 잠긴 목소리가 날아왔다. 준영은 혀를 차며 책상에 가방을 올려놓고는 고개를 들었다. 자다 일어났는지 머리를 털어 내며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 있는 범진이 보였다.

“그길로 안 들어오더니 지금까지 여기서 잔 거야?”

“어. 그리고 더 잘 거야.”

말과는 다르게 범진은 잠이 덜 깬 얼굴로 계단을 터덜터덜 내려왔다. 교복이 따로 없는 학교였지만 그는 까만 티셔츠를 교복처럼 입고 있었다. 준영이 하얀 셔츠를 교복처럼 입고 있듯이.

범진은 키가 컸다. 사실 키는 승운과 별 차이가 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TV에 나오는 연예인처럼 늘씬한 승운과는 달리 떡 벌어진 어깨에 운동선수 같은 몸을 갖고 있어 훨씬 위압적으로 보였다.

물론 그런 느낌을 풍기는 데에 그의 인상도 한몫한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매서운 느낌을 풍기는 눈초리, 칼날처럼 깎인 날카로운 턱선과 곧게 뻗은 콧날은 한 끗 차이로 잘생김과 무서움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었다.

아무렇게나 헝클어진 새카만 머리칼이 반쯤 가리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형형함이 느껴질 정도로 눈빛이 세다. 거기다 타고난 태도마저 불량하니 대체로 그의 이미지는 무서움 쪽으로 치우칠 때가 많았다.

“라면 먹을래?”

범진이 1층으로 내려오면 가뜩이나 손바닥만 한 공간이 반으로 줄어드는 느낌이라 준영은 그가 계단을 밟는 순간부터 늘 책상 앞에 있는 의자에 앉곤 했다. 그녀는 가방을 열며 짧게 대꾸했다.

“질렸어.”

“달걀 넣어, 말어?”

“넣어. 지난번처럼 풀지 말고.”

코웃음을 치며 범진이 물을 틀었다. 이곳에 냄비와 그릇 하나, 수저 두 세트를 가져온 것은 범진이었다. 문에 자물쇠를 단 것도.

권범진과는 고등학교에 들어오면서 처음 만났지만 대화를 나눠 본 적은 없었다. 1학년 때는 같은 반이 아니어서 마주칠 일도 없었고, 둘 다 누군가에게 먼저 말을 거는 성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의 존재는 알고 있었다. 어릴 때 부모님을 잃고 친척 집을 전전하다 중학교 3학년 때 이곳에 왔다는 것도. 이전 학교에서 폭행 사건에 휘말렸던 전적이 있어 선생님들이 좀처럼 건드리지 못한다는 소문도.

2학년 때 같은 반이 되었지만 여전히 그와는 말을 섞을 일이 없었다. 아마도 졸업할 때까지 그럴 거라고 생각했었다.

우연히 이 집을 발견하고 드나든 지 일주일쯤 되던 날, 오늘처럼 2층의 침대에서 자고 있던 그와 마주치기 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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