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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청혼 (75/75)

15. 청혼

백성들의 환호를 받으며 리바론 기사단과 병사들은 제국을 가로질렀다.

포크 음악과 북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필릭스 쿠아란은 웃음기 하나 없이 말을 몰았다.

“어이, 부단장. 공작님께 좀 웃으시라고 하는 게 어때. 너무 딱딱하신 것 같은데.”

기사 한 명이 포말라드 웨이 곁으로 다가와 중얼거렸다. 포말라드 웨이는 차갑게 대꾸했다.

“지금 최선을 다해 마음을 다스리는 중이시다. 공작님께 무리한 요구 하지 마.”

전후 사정을 알지 못하는 기사는 머리를 긁적이며 멀어졌다. 그가 투덜대는 소리를 들었으나 포말라드는 신경 쓰지 않은 채 고개를 돌렸다.

‘확실히 긴장하셨어.’

포말라드 웨이는 필릭스 쿠아란 쪽을 힐끔힐끔 주시했다. 그뿐만 아니라 누구든 눈치챌 수 있을 만큼 필릭스의 얼굴엔 긴장감이 역력했다. 쳐다볼 때마다 잘난 얼굴이 떨리고 있는 게 훤히 보였다.

‘어휴. 저러다 오늘 안에 청혼은 할 수 있으실지 모르겠네.’

결혼에 대해 얘기했지, 정작 청혼을 어떻게 할지에 대해서는 듣지 못했다. 포말라드는 슬슬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다시 작전을 짜자고 말씀드려야겠어. 오늘은 날이 아닌 것 같아. 저렇게 긴장해서는 될 일도 안 된다고.’

포말라드 웨이는 머릿속으로 착착, 필릭스 쿠아란의 청혼 계획서를 짜기 시작했다. 성공률을 높이는 것이 가장 중요했지만, 후에 정말 두 사람이 결혼하게 되었을 때 두고두고 떠올려도 결코 부끄럽지 않은 기억이 되는 것도 중요했다.

“사람 많은 곳에서 청혼하시는 건 절대 안 된다고 쐐기를 박아야…….”

암, 안되고말고. 포말라드 웨이가 그것만큼은 미리 당부해 두자 싶어 필릭스 쿠아란 곁으로 다가갔을 때였다.

“황제 폐하와 성녀님께서 납시십니다!”

친히 마중을 나온 황제와 성녀가 포말라드 웨이의 계획을 방해했다. 포말라드는 하는 수 없이 잠시 물러섰다.

붉은색과 하얀색 마차에서 각자 내린 클라우디아 엘로이와 니아 프레슬리가 기사단을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성녀의 시선이 어디에 고정되어 있는지, 그리고 필릭스 쿠아란의 시선이 어디에 고정되어 있는지는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자명했다.

그래도 확인차, 포말라드 웨이는 말에서 내리며 필릭스 쿠아란을 바라보았다. 그는 마치 청혼하기 직전의 사람처럼 얼어붙어 있었다.

설마 지금은 아니겠지? 두 사람이 평생 간직하게 될 청혼의 순간이.

포말라드 웨이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한 자신이 우스워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포말라드 웨이, 지금 무슨 생각을. 아무리 공작님께서 생각이 없으시다 해도 그 정도로 없으실까. 이 불경한 녀석!’

그는 스스로를 마구 혼내 주었다.

“니아 프레슬리.”

필릭스 쿠아란이 물 흐르듯 말에서 내려 성녀 앞에 섰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이 얼마나 애틋한지, 보는 사람들의 낯이 다 홧홧해질 지경이었다. 서로 좋아 죽었다.

하지만 황제에게 예를 갖추는 것이 먼저 아닐까. 포말라드 웨이는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며 생각했다.

‘아니, 그래도 공작님께서 다 생각이 있으시겠지. 뇌가 있으시잖아.’

웃으며 생각하는 순간, 여기저기서 탄성이 흩어져 나왔다.

포말라드 웨이는 번쩍 고개를 들었다.

필릭스 쿠아란과 니아 프레슬리가 열렬히 입을 맞추고 있었다. 황제 폐하는 그 옆에 멀뚱히 세워 두고서.

황제의 표정이 삽시간에 썩어들어 갔다.

“안 돼…….”

포말라드 웨이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는 가능성이 무척이나 낮은 것을 알면서도, 현실을 외면하고픈 마음에 속으로 중얼거렸다.

‘키스를 했다고 그게 청혼은 아니지 않나?’

“성녀님, 저와 결혼해 주시겠습니까?”

필릭스 쿠아란이 니아 프레슬리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언제부터 품고 다녔는지 모를 반지를 내밀었다.

“평생 행복하게 해 드리겠습니다.”

포말라드 웨이는 필릭스 쿠아란의 목덜미를 한 손으로 잡고 끌고 오고 싶은 마음을 꾹 눌렀다.

이렇게 된 이상은…….

“박수 쳐.”

함께 무릎을 꿇고 있던 기사들이 포말라드 웨이의 목소리에 반응했다.

“다들 박수 치라고.”

포말라드 웨이는 그의 왼쪽 대각선에 있는 사이먼 캐치의 엉덩이를 툭 쳤다.

와, 청혼했다. 입을 벌리고 필릭스와 니아를 구경하고 있던 사이먼이 포말라드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입 모양으로 물었다. 재밌는 구경 하고 있는데 왜?

포말라드 웨이는 울고 싶은 마음을 참으며 속삭였다.

“사이먼, 휘파람 불어. 최대한 신나게.”

“성녀님, 저와 결혼해 주시겠습니까?”

필릭스 쿠아란이 니아 프레슬리에게 물었다.

“평생 행복하게 해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묻는 그의 얼굴은 창백하다 못해 차가웠다.

니아 프레슬리는 그가 이런 상황에서 장난을 치는 게 아닌 줄 알면서도 의심스러웠다.

방금 우리가 입 맞춘 것이 맞는지조차 헷갈렸다.

누가 딱 죽기 직전의 표정으로 청혼을 한단 말인가.

“진심이에요?”

필릭스 쿠아란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답을 하지 않는 시간이 길어지자, 여기저기서 강렬하게 뿜어져 나오던 함성과 박수갈채, 그리고 경박하게 울리던 휘파람 소리가 줄어들었다.

“저는 매 순간 당신께 진심이었지만, 그래도 지금 이 순간만큼 간절한 적은 없었습니다.”

니아의 입꼬리가 올라갈락 말락 했다. 그런데 그게 또 어찌 보면 내려갈락 말락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단 일 초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니아 프레슬리의 표정만을 살피던 필릭스의 얼굴에 드디어 표정이란 것이 생겼다.

“거절…… 거절이야?”

그는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만 들릴 만큼의 목소리로 속삭였다.

“난 너와 결혼하고 싶어.”

필릭스 쿠아란의 뺨이 오후의 빛에 닿아 붉게 물들었다. 눈빛에는 옅은 물기가 감돌았다.

“성녀도 하고…… 공작부인, 싫어?”

니아 프레슬리의 심장에 조금씩 간질간질한 느낌이 퍼져 나갔다. 간질거림은 이내 몸 전체를 지배했다.

“잠시만요, 공작님.”

니아는 웃음을 머금고 상냥하게 말했다. 그리고 게걸음으로, 이미 그들이 입 맞춘 순간부터 썩은 표정을 짓고 있던 황제에게 다가갔다.

“황제 폐하, 허락해 주시겠어요? 원래 청혼에는, 적어도 한 명 이상의 친구가 증인을 서 줘야 해서요.”

정말로 대답하기 싫은 듯 클라우디아 엘로이는 입술을 다물고선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자리가 자리였다. 백성들이 지켜보는 한가운데서 청혼을 했으니, 허락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필릭스 쿠아란 저놈도 분명 이것을 노린 것이다.

클라우디아 엘로이는 빛보다 빠르게 고개를 한 번 까딱했다.

“보셨어요? 황제 폐하께서 허락을 해 주셨어요.”

니아가 잘게 웃음을 쪼개며 필리스에게로 향했다. 필릭스 쿠아란의 입꼬리가 작게 휘어졌다.

그런 필릭스 쿠아란이 괘씸해 죽을 지경이었으나, 속내와는 달리 클라우디아 엘로이는 화사하게 웃었다.

“그럼요, 성녀님. 제국의 경사지요. 두 분의 앞날을 축복합니다.”

말을 마치자마자 그녀는 미소를 싹 지웠다. 그리고 복화술로 열심히 중얼거렸다.

“그래, 다음 대의 성녀도 필요하니까. 너희 둘은 반드시 딸을 낳아야 돼. 짜증 나니까 얼른 키스나 해 버려, 이 골칫덩어리들아.”

그녀는 눈으로 심한 욕을 하며 또 한 번 이어질 열렬한 키스를 기다렸다.

그런 클라우디아에게 가볍게 눈짓하고서, 니아는 천진하게 웃으며 필릭스 쿠아란에게 말했다.

“어, 그럼…… 들어갈까요? 다른 일정은 없으시죠?”

순간 은은하게 남아 있던 박수갈채가 멈췄다. 분명 봄이 온 것 같았는데, 한겨울 같은 냉기가 제국 내에 흘렀다.

“배고프시죠? 졸리진 않으세요? 다친 곳은 없으신 거죠? 가서 빨리 쉬세요.”

기대하던 장면이 나오지 않자 사람들이 서로의 눈치를 보며 눈빛으로, 이게 어떻게 된 전개인지를 물었다. 물론 답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싸늘해진 분위기에 니아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왜지? 저는 방금 답하지 않았나요?”

“답을 했다고?”

잠자리 날개를 찢는 어린아이보다도 잔인하다. 니아 프레슬리를 바라보고 있는 모든 사람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필릭스 쿠아란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순수함이 이렇게 원망스러웠던 적이 없었다.

“니아……. 네가 직접 내게 답을 해 줘야지. 내가 황제 폐하께 청혼을 한 건 아니잖아.”

필릭스 쿠아란이 겨우 쥐어짜 내듯 말했다.

“아.”

니아 프레슬리가 짧게 중얼거렸다.

“아아, 그렇지.”

급기야 웃기 시작했다. 온 세상의 미소를 혼자 다 가지려는 듯 발갛게 웃다가, 키득거리다가, 엷은 미소를 띠었다가, 해사하게 웃다가 급기야는 선득하게도 웃었다.

마지막으로 니아 프레슬리는 저녁노을처럼 찬란하게, 그리고 풋사과처럼 싱그럽게 웃었다. 그녀의 볼에 보조개가 움푹 파였다.

니아 프레슬리가 경애하듯 무릎을 꿇은 필릭스 쿠아란의 이마에 쪽, 하고 입술을 맞췄다.

“내 심장을 가져간 남자가 아니면, 내가 또 누구와 결혼을 하겠어요?”

“그럼…….”

“당연히 허락하죠. 결혼해요, 우리.”

니아 프레슬리는 왼손 약지에 반지를 끼워 넣었다. 그러고는 만족스러운 듯 손을 이리저리 돌려 보았다. 해가 손 틈 사이로 비칠 때마다 순간순간 반지는 투명하게 빛났다.

필릭스 쿠아란은 자신의 귀와 얼굴, 그리고 온몸이 발갛게 변하는 것을 몰랐다. 그냥 시간이 멈춘 것 같다고 생각했을 뿐.

니아 프레슬리가 천천히 그를 일으켜 세웠다. 필릭스 쿠아란은 멍하니 그녀가 이끄는 대로 따르며, 꿀을 탄 우유를 마시듯 공기를 들이마셨다. 숨결마저 달콤했다.

두 사람이 서로를 보며 미소 짓는 모습은 까르르 웃는 갓난아기처럼 눈길을 끌었다.

잠시 멈칫거렸던 박수갈채가 다시 한번 터져 나왔다. 누가 이렇게 휘파람에 능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청혼가가 봄바람에 실려 울려 퍼지며 공개 청혼을 아름답게 장식했다.

분홍빛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필릭스 쿠아란은 자석에 이끌리듯 그녀에게로 가 입술을 맞물렸다.

“사랑해, 니아 프레슬리.”

간질간질한 웃음을 내뱉으며 전하는 진심은 숭고했다.

“같은 마음이에요.”

봄 향기가 꽃가루와 함께 하늘 위를 날았다.

쾌청한 봄의 시작 한가운데에서, 필릭스 쿠아란과 니아 프레슬리는 사정없이 그들만의 행복에 도취되었다. 다름 아닌 사랑만으로.

<공자님이 내 심장을 가져갔다>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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