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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그의 귀환 (74/75)

14. 그의 귀환

“성녀님, 새벽부터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서고에서 밤을 새우고 나오던 니아 프레슬리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혼 안 내세요?”

“네? 왜요?”

“제가 밤새우는 거 싫어하시잖아요.”

시녀장이 눈을 치켜떴다.

“밤을 또 새우셨습니까?”

“네에…….”

모르고 계셨구나. 니아 프레슬리는 속으로 욕을 되뇌며 입술을 깨물었다. 아니나 다를까, 잔소리 폭격이 시작되었다.

“어제 분명 침실로 들어가셔 놓고는! 또 도둑고양이처럼 기어 나오셨군요. 앞으론 언제쯤 성녀님이 말을 들을까 고민하지 않겠어요. 어차피 들은 척도 안 하실 텐데, 제가 뭐 하러 그런 고민을 합니까?”

니아 프레슬리가 민망한 듯 웃다가, 이내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나름대로 혼나지 않고 넘어가려는 시도였다. 니아는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시녀장 곁으로 가 팔짱을 낀 채 살랑살랑 속삭였다.

“그래도 제게 칭찬할 거리가 하나 있으신 거 아닌가요? 그걸로 넘어가 주세요. 네? 시녀장님, 네?”

“서고에서 밤을 새우셨다면 성녀님이 아니신 모양인데요.”

“네? 뭐가요?”

“자, 이리 오십시오.”

앞장선 시녀장이 니아 프레슬리를 바깥으로 이끌었다.

“저는 성녀님이 범인인 줄 알았습니다.”

물끄러미 시녀장이 보여 주는 풍경을 바라보던 니아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요, 제가 아닙니다.”

“그럼 누가 범인일까요.”

니아 프레슬리가 새순들이 돋아난 나뭇가지 옆으로 가 섰다. 그리고 거친 나무껍질을 뚫고 돋아난 새순을 조심스럽게 만지며 답했다.

“아마도 범인은, 날씨인 듯하네요.”

겨우내 마법으로 만들어 두었던 하얀 솜꽃들이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한동안 앙상한 나뭇가지로 인해 황량한 그녀의 정원이었는데.

“올해는 작년보다 빨리 봄이 찾아올 모양입니다.”

포근한 온도를 이기지 못하고 싹이 피어났다.

니아 프레슬리는 웃었다. 생각보다 더 빨리, 그녀에게 좋은 소식이 도착할 듯했다.

“승전보입니다! 승전보입니다! 필릭스 쿠아란 각하께서 이끄시는 리바론 기사단이 틸란 왕국을 무찔렀다고 합니다!”

마치 잘 짜인 각본처럼, 이보다 더할 나위 없는 순간에 시종 아이 하나가 사원이 떠나가라 외쳤다.

이제 그녀에게 남은 것은, 기꺼운 마음으로 그를 기다리는 일뿐이었다.

강가에 잠시 멈춘 리바론 기사단은 갑옷을 벗어 던지고 며칠간의 피로를 풀었다. 장정들이 한꺼번에 물속으로 쏟아지니 물거품이 정신없이 잔물결을 일으키며 올라왔다.

“이야! 이렇게 빠르게 압살한 건 또 처음입니다! 역사로 남을 게 분명한 전투였죠!”

사이먼 캐치는 하반신은 강에 담근 채 술병을 허공 위로 높이 들어 올렸다.

“사이먼, 술 어디서 났어? 축제는 제국으로 돌아가서 즐기기로 약속했잖아!”

“전리품, 전리품. 딱 한 잔만 할 거야.”

“안 돼. 이리 내놔.”

포말라드 웨이가 사이먼의 뒤통수를 거세게 치고는 순식간에 그의 손에서 술병을 앗아 갔다.

“너무해, 부단장! 한 잔도 안 된단 말이야?”

“안 돼, 이놈아.”

“그래, 사이먼. 제국으로 돌아가면 긴 축제가 시작될 텐데, 이건 반칙이지.”

“아무튼 사이먼 캐치야. 맨날 말썽이지.”

목욕을 빠르게 끝낸 기사단 단원들이 젖은 물수건으로 찰싹찰싹, 사이먼의 등을 치고 지나갔다. 줄을 서 차례대로 수건을 던지고 가는 모양새가 꼭 무슨 의식이라도 치르는 것 같았다.

“아! 아! 아! 아아!”

도망칠 생각은 안 하고, 그 자리에서 곧이곧대로 물수건을 맞으며 소리를 지르는 사이먼 캐치도 분위기를 돋우는 데 한몫했다.

필릭스 쿠아란은 물 위로 늘어진 나뭇가지 뒤에서 그런 기사단을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 사이먼 캐치가 휙, 등을 돌렸다.

“단장도 와요!”

흐뭇한 미소를 띠고 있던 필릭스 쿠아란은 급히 정색했다. 그러나 이미 다 들켜 버린 것 같았다.

“때리기 딱 좋은 등인데, 안 올 거예요? 이번을 놓치면 다시는 기회 없어요!”

“됐어.”

필릭스 쿠아란은 고개를 휙 돌렸다. 젖은 머리카락에서 흘러내린 물방울이 어깨를 지나 매끈한 바위 위로 뚝뚝 떨어졌다.

“그래요! 단장만, 아니 공작님만 손해죠!”

필릭스 쿠아란은 고개를 숙인 채 피식거렸다. 혀로 입술을 축이니 땀인지 물인지 알 수 없는 톡 쏘는 맛이 났다. 그는 구태여 웃음을 감추지 않으며 젖은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래. 손해 보고 살면 안 되지.”

“엇, 농담이었는데.”

그를 향해 다가오는 필릭스를 본 사이먼이 놀라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바로 옆에서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포말라드 웨이가 그것을 두고 볼 리가 없었다.

“아, 뭐야 부단장! 나 일어날 거야. 목욕 끝났다고!”

“공작님이 때려 주신다잖아. 가문의 영광이지.”

“내가 가문이 어딨어!”

어떻게든 물 밖으로 벗어나기 위해 사이먼 캐치가 몸을 뒤흔들었다. 거센 요동에 찰박찰박, 물방울이 연신 밖으로 튀어 나갔다. 그러나 도망치려 할수록 사이먼 캐치는 더 깊이 물속으로 빠져들어 갈 뿐이었다.

하나둘 합심해 사이먼 캐치를 내리누르고 있었다.

“너무해, 다들!”

젖 먹던 힘까지 짜내어 얼굴을 내민 사이먼 캐치가 외쳤다. 물 먹은 코를 훌쩍거리며 머리를 터는데, 정수리 위에서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아기가 귀여워서 그러지.”

사이먼은 팍 얼굴을 구겼다.

“뭐야! 부단장, 그런 토악질 나오는 말도 할 줄 알아?”

“토악질?”

“어. 완전 우웩이야……. 어라?”

분명 정수리 위에 있어야 할 부단장 포말라드 웨이는 떡하니 그의 옆에 있었다.

“부단장, 언제 그쪽으로 갔어? 다 늙은 줄 알았는데 되게 빠르다.”

사이먼의 도발에도 포말라드 웨이는 친절하게 답했다.

“난 아까부터 여기 있었는데?”

“그 아까가 언제 아까인데?”

포말라드 웨이가 싱긋 웃었다.

“네가 공작님께 등짝을 때려 달라고 말할 때부터.”

“그럼 방금 말한 건 누구지?”

“글쎄. 직접 확인해 봐.”

“어휴, 부단장 말고 누가 또 그런 토악질 나오는 말을 할 줄 아는 거야, 정말! 난 아기가 아니라, 어엿한 남자…….”

사이먼 캐치는 고개를 스르르 꺾어 올렸다. 곧바로 거꾸로 뒤집힌 필릭스 쿠아란이 보였다.

“안녕, 사이먼.”

사이먼 캐치의 이마에서 삐질삐질 땀이 흘러나왔다.

“우와, 난 뒤졌다. 그 힘든 전쟁에서도 다 살아남았는데, 이렇게 죽는 거야?”

물 표면에 햇빛이 번쩍하고 비쳤다.

“아아!!”

새된 외침과 함께 사이먼은 물속으로 고꾸라졌다. 미동 없이, 흔적 없이 꼬르르 소리만을 내며.

필릭스 쿠아란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죽었나?”

“시체 처리도 귀찮으니 그냥 두고 출발하시죠, 공작님.”

“훌륭한 계책이다, 포말라드.”

“그나저나, 오른손이 끝내주십니다.”

“그런 편이지.”

“역시 겸손하십니다.”

“그런가? 그런 말은 처음 듣네만.”

필릭스 쿠아란은 원래 오른손잡이 기사였다. 물에 젖은 그의 오른손이 유독 탐스럽게 빛났다. 마치 완고한 예술가가 오랜 시간 공들여 깎아 만든 것처럼.

잠시 뒤, 그의 오른손 맛을 처음 본 사이먼은 타오르는 것 같은 등짝을 매만지며 물속에서 치솟았다.

“정말 다들 너무해!”

모닥불 속의 나무가 타오르며 그 안의 수액이 타닥거렸다. 몇몇은 침낭 안에서 잠든 깊은 밤, 띄엄띄엄 모닥불 주위에서 긴긴 삶의 이야기를 나누는 이들도 있었다.

모두가 술 한 잔 없이 분위기에 취해 갔다.

“공작님, 밤을 새워 달리자고 하면 달릴 텐데요. 아무도 반대하지 않을 겁니다.”

포말라드 웨이가 모닥불 앞에 앉아 있는 필릭스 쿠아란에게 말했다.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고 싶으시잖아요.”

“그렇지.”

“당장이라도 깨울까요?”

“아니, 그러지 마라.”

필릭스 쿠아란은 커다란 바위에 스르르 몸을 기대었다. 머리를 한쪽으로 살짝 기울이고 눈을 감았다. 속눈썹이 나뭇가지처럼 길게 그림자를 만들었다. 그는 눈을 감은 채 나직이 말했다.

“포말라드. 네게만 미리 말해 두겠다.”

필릭스 쿠아란의 여유로운 모습을 감상하고 있던 포말라드 웨이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었다.

“또, 무슨 일이 있는 겁니까.”

“아주 중요한 일이 내게 남아 있다.”

포말라드 웨이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 언젠가와 마찬가지로 지금 또한 역사적 순간임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필릭스 쿠아란이 있는 대로 뜸을 들이다, 포말라드 숨이 넘어갈 때 즈음 말했다.

“나는 결혼을 하려고 한다.”

“결혼이라니요, 누구와?”

필릭스 쿠아란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의 눈동자가 모닥불을 삼킨 채 타올랐다. 그는 한심함을 담은 눈빛으로 누구겠냐고 물었다.

포말라드 웨이는 천천히 답했다.

“성녀님.”

“그래. 나는 니아 프레슬리에게 청혼할까 해.”

포말라드 웨이는 눈이 번쩍거리는 경험을 했다. 필릭스 쿠아란이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모닥불을 핑계로 달아오른 빛을 감추려고 하는 모양이었으나 어림도 없었다.

한참 모닥불을 바라보던 필릭스 쿠아란이 첫사랑에 빠진 소년 같은 낯으로 포말라드 웨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정확하지 않은 발음으로 웅얼거렸다.

“너무 떨리는데, 어떻게 하지.”

“저도 떨립니다. 결혼이라니요, 가능합니까? 성녀님이신데.”

“그러게 말이야. 날 허락해 줄까? 니아 프레슬리가.”

포말라드 웨이는 그가 청혼하고자 하는 여자가 성녀인 것을 걱정하는데, 필릭스 쿠아란은 그가 청혼하고자 하는 여자가 니아 프레슬리임을 걱정했다.

그러나 아무렴 어떤가. 필릭스 쿠아란이 청혼할 마음을 먹었다는 게 중요하지.

“아무튼 정말 긴장되시겠습니다. 이번 전쟁보다 떨리십니까?”

“비교도 되지 않아. 이런 소꿉장난 같은 전쟁하고는.”

포말라드 웨이가 고른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암요. 결혼에 비하면, 전쟁은 소꿉장난이죠.”

필릭스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포말라드 웨이는 그보다 더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자녀 계획은 어떻게 되십니까?”

“자녀 계획?”

“네. 자녀 계획이요. 그게 정말 중요합니다, 공작님.”

“글쎄. 니아 프레슬리가 어떤 생각이냐에 따라 달라지겠지.”

별반 신경 쓰지 않는 필릭스 쿠아란의 모습에 포말라드가 펄쩍 뛰었다. 그는 그렇게 안일하게 청혼해서는 안 된다며, 드물게 필릭스 쿠아란을 혼냈다.

“적어도 두 명은 낳으셔야 뛰어노는 걸 보는 즐거움이 있지 않겠습니까.”

“글쎄. 그냥 나랑 니아 프레슬리, 둘이 뛰어노는 게 더 즐거울 것 같은데.”

“……몇 살이십니까.”

“그냥 니아 프레슬리가 하자는 대로 할래. 어차피 그렇게 될 거거든.”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필릭스 쿠아란이 원하는 것은 명백했다. 만약 니아 프레슬리가 청혼을 승낙한다면, 필릭스 쿠아란은 신이 나 자녀 계획이든 뭐든 그녀가 하자는 대로 할 거다.

이기는 법 따위 관심이 없는 남자였다. 그리고 그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일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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