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마지막에 짓는 미소
‘도망치고 또 도망칠 거야. 그러니까 오지 말라고. 오지 말라고!’
비가 무섭게도 내리던 날이었다. 그의 눈엔 니아 프레슬리의 머리칼이, 옷이 젖어 드는 것만 보이는데 정작 본인은 모르는 듯했다.
‘처음부터 도망쳤어야 했어. 공작가에 들어온 그 순간부터……. 그때 도망쳐서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갔어야 했어. 사람 같은 건 없는 곳으로. 어차피 어딜 가도 다 똑같은 인간들인데. 근데도 난 십 년을 당신한테……!’
창백한 니아 프레슬리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뱉었다. 이토록 생생하게 기억하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 그날의 필릭스 쿠아란은 좋지 않았다. 모든 것이. 몸도, 마음도, 하물며 날씨까지도.
‘지금 날 잡으면 계약 같은 건 상관없이 도망갈 거야. 도망치고 또 도망칠 거야. 어떻게든지! 그리고 다신 안 돌아올 거야…….’
그때의 필릭스 쿠아란은 그렇게 답했었다.
‘……날 버리겠다고?’
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는 정말 버려졌다.
필릭스 쿠아란은 말을 멈춰 세웠다. 높은 곳에 오르니 광활한 대지가 눈앞에 펼쳐졌다. 갈 길은 멀었으나, 어느덧 해가 지고 있었다.
숲에서 보내야 하는 첫날이었다.
전쟁이 처음인 자들이 많았다. 몇 년간 제국에 전쟁이 없었던 탓이다. 낯선 소리와 냄새는 동요를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시간이 지나니 어둠 속에서 불안한 눈길을 주고받는 사람이 생겨났고, 전쟁을 여러 번 겪은 기사들 중에서도 무기를 더 단단히 손에 쥐는 사람들이 늘어 갔다.
“주무십시오.”
천막 틈으로 바람이 파고들며 사람이 들어왔다. 부단장인 포말라드 웨이였다. 정작 말하는 그의 손엔 칼자루가 쥐어져 있었다. 필릭스 쿠아란은 낮게 웃었다.
“웨이, 긴장되나?”
“작은 왕국입니다. 그동안 겪어 온 전쟁들에 비하면 시시하지요.”
필릭스 쿠아란의 시선이 길어졌다. 웨이는 흠칫 어깨를 떨었다.
“그런데 왜 떨고 있지?”
“그건…….”
포말라드 웨이는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무어라 답해야 할지 몰라 그런 것은 아니었고, 오히려 너무나 명확해 망설여지는 종류의 것이었다.
“그건, 제게 가족이 생겨서겠지요.”
필릭스 쿠아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켜야 할 것이 있다는 건 약점이지.”
부엉이가 날카롭게 우는 소리가 들렸다. 기나긴 밤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였다.
“하지만 그 약점은, 네가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강점이 되기도 한다.”
그때는 몰랐으나, 지금 생각해 보니 그랬다. 필릭스 쿠아란은 그가 가진 약점으로 인해 강해질 수 있었다.
그날도 짐승이 울었다. 비는 멈췄으나 짐승의 울음소리가 더욱 지독하게 살갗을 덮었다.
겨우 찾은 니아 프레슬리는 날개가 부러진 새처럼 늘어져 있었다. 땅은 그녀의 피로 물들어 있었고, 생명이 남아 있는 흔적 따위는 없었다.
지친 몸으로 마물들을 모두 해치우고 무릎을 꿇었을 때, 니아 프레슬리가 숨을 쉬고 있음을 알았다. 구멍이 뚫린 팔로 그녀를 들어 올렸다.
니아 프레슬리의 상처가 아물어 가는 것을 보았을 때의 그 감각이란, 어떤 언어로도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기쁘다, 찬란하다, 슬프다, 아름답다, 경이롭다, 다행이다……. 사람이 만들어 낸 그 어떤 단어로도 결코.
그 누구도 그녀의 은밀한 비밀을 알아챌 수 없게 망토로 덮은 뒤 공작가로 데려갔다.
후에 의원은 말했다. 그날 그렇게 팔을 쓰지 않았더라면 가망이 있었을 거라고. 이제 도련님은 다시는 오른팔을 쓰지 못하게 되었다고.
본인조차 모르겠지만 그 의원은 돌팔이였다. 결국 필릭스 쿠아란은 완벽한 오른팔을 다시 얻었으니까.
“아버지에게 갔다 올게. 그때까지, 이 방에는 아무도 들이지 마. 길리, 너도 마찬가지다.”
니아 프레슬리의 비밀을 알고 나자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녀가 뱉은 말들과 행동과 표정과 그리고 무엇보다, 필릭스 쿠아란이 제대로 알지 못하는 니아 프레슬리의 과거를 알아야만 했다.
상처가 아무는 몸, 공작가에서의 십 년, 아버지와의 계약.
답을 알려 줄 수 있는 이는 그의 아버지, 쿠렐 쿠아란 공작뿐이었다.
붕대 하나를 매고 찾아간 헬릭시에서, 그는 누워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는 쿠렐 쿠아란을 발견했다. 늙고 병들어 보였다. 요양을 떠나기 전보다도 훨씬.
“팔이, 왜 그러느냐. 왜 그런 꼴이야!”
자신을 발견하자마자 아픈 몸을 바로 일으키는 아버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걱정으로 구겨진 표정과 안타까워하는 신음 속에서는 숨겨진 짙은 과거의 냄새가 났다.
“말씀해 주세요. 니아 프레슬리를 왜 데려왔는지. 그 아이가, 십 년 동안 공작가에서 무슨 일을 했습니까.”
불길한 예감이 틀렸기를 바랐다.
“어떻게, 그걸…….”
“말씀해 주세요.”
다친 몸을 이끌고 먼 길을 달려온 아들이었다. 원하는 답을 듣기 전에는 결코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쿠렐 쿠아란은 주름진 눈을 부르르 떨었다.
자리를 비운 사이, 결국 사달이 났구나.
“그래. 말하마. 모두 말해 주마.”
마음이 약해지면 사람은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지 못하게 된다.
평생 홀로 무덤까지 가져가겠다 생각한 비밀을, 가장 들키고 싶지 않았던 사람에게 털어놓을 수 있을 만큼. 쿠렐은 입술을 떼었다.
“너는 저주에 걸렸다. 지난 십 년간, 네 생일이 되는 날 자정이면 심장이 사라지는 저주에.”
“저주라고요?”
필릭스 쿠아란이 이해가 가지 않는 얼굴로 되물었다.
“그래, 저주. 니아 프레슬리의 몸에서 심장을 꺼내 네 몸에 넣었어. 그렇게 너를 살렸다. 십 년간, 매번.”
필릭스는 지난 과거를 떠올리며 웃는 아버지를 멍하니 지켜보았다. 쿠렐 쿠아란은, 그의 아버지는 아들을 잘 알지 못했다. 그의 아들이 누구를 마음에 두고 있는지도.
“별일 아니다. 네가 끝까지 모르기를 바랐지만……. 괴물의 심장을 가진 것쯤이야 네게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아. 니아 프레슬리는 절대 세상에 떠들어 대지 못할 거다. 말하는 순간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 꼴이 되니까.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야!”
“아버지.”
“필리스, 걱정 마라. 저주는 끝났어.”
“끝났다고요…….”
그에게는 지금, 저주가 시작되고 있었다.
십 년 동안, 아무것도 모르고 니아 프레슬리의 심장을 빼앗았단 말인가.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그 후에 그로 인해 니아 프레슬리가 겪어야 했을 일들과, 그녀가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는지를 생각하는 것이 진짜 고통의 시작이었다.
너는 날…….
‘저는 도련님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워요.’
이해하지 못한 순간들이 있었다.
‘싫고, 무섭고, 끔찍해요. 도망가고 싶어요. 도련님 곁이 싫어요. 처음부터 그랬어요. 언제나 그랬어요.’
이제는 이해하지 못할 일이 없었다.
“저는 그것도 모르고서, 겨우 떠날 수 있게 된 아이를 붙잡고 사랑을 요구했군요. 그게 그 아이에게는 얼마나 끔찍했겠습니까.”
담담히 말하는 그 순간이 얼마나 지독했는지 모른다. 단어 하나를 뱉을 때마다 숨통이 조이는 기분이었고, 문장 하나를 끝낼 때마다 정말로 그의 왼손은 그의 목으로 향하고 있었다.
쿠렐 쿠아란은 아들의 초점이 니아 프레슬리에게 맞춰진 것이 이상하다 여기면서도, 대수롭지 않게 중얼거렸다.
“어차피 그 아이는 죽지 않는다. 괴물이니까.”
“…….”
“심장 정도 파인 것은 아무것도 아닐 거다. 충분한 돈도 주고, 원하는 것도 들어주었지. 그 끔찍한 괴물로서는, 호강을 누린 것 아닌가.”
“괴물…….”
눈앞이 캄캄해지고.
“어차피 멀리 떠난 아이야. 지금쯤 알아서 몸을 사리며 살고 있을 게다……. 필릭스? 필릭스! 왜 그러느냐. 왜……. 밖에 아무도 없느냐!”
세상이 뒤집혔다.
‘괴물만 아니면 되는 거 아니겠어?’
그녀에게 했던 말이 부메랑이 되어 심장에 박혔다. 그런 말을 했던, 그리고 니아 프레슬리에게 그런 표정을 짓게 한 자신이 다름 아닌 괴물이라는 것을 처절하게 깨달으며.
니아 프레슬리를 사랑하기 시작한 이후, 그제야 그의 삶은 시작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를 만난 이후, 니아 프레슬리는 매 순간 죽어 가던 것을 모르고서.
“공작님, 공작님!”
누군가 그를 흔들어 깨웠다. 포말라드 웨이였다.
“포말라드.”
필릭스 쿠아란은 꺼져 가는 목소리로 포말라드 웨이를 불렀다. 온몸이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다.
“악몽을 꾸신 듯합니다. 잠시 기사들을 살펴보고 온 사이에요…….”
“떨지 말라고 말해 놓고선, 오히려 내가 추한 꼴을 보였군.”
“아닙니다. 좀 드십시오.”
포말라드가 모닥불에 데운 물을 건넸다. 필릭스는 그것을 받아 들고 단숨에 목으로 넘겼다. 식도로 불구덩이가 지나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정신이 드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이제 팔도 다 나으셨는데, 왜 또 그러십니까.”
포말라드 웨이가 무뚝뚝하게 물었다. 그러나 그가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음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게 말이야.”
필릭스 쿠아란은 까딱 고갯짓을 보내고 웃었다. 침낭을 벗어나 의자로 간 그는 다리를 꼬았다. 그러고는 빠르게 지난 과거를 훑는 표정으로 턱을 괴었다.
그는 어느 지점에서 막히는 듯 눈살을 찌푸리곤 포말라드 웨이에게 물었다.
“웨이, 자네가 나를 처음 봤을 때……. 그때 나는 어떤 모습이었지?”
서로를 빤히 쳐다보는 시간이 길었다.
포말라드 웨이는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답했다.
“그때의 공작님은…… 날개 꺾인 새 같았습니다.”
“날개 꺾인 새?”
필릭스 쿠아란이 흥미로운 듯 웃었다.
“맞는 말이군. 오른 날개가 꺾인 새 말이야.”
건방지다고 한 대 맞는 건 아닐까 걱정하던 포말라드는 안심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새로운 용기도 생겼다.
“그다음도 말씀드릴까요?”
“응?”
“처음에는 날개 꺾인 새인 줄 알았습니다.”
필릭스 쿠아란이 관심을 보였다. 포말라드 웨이는 손을 내저으며 중얼거렸다.
“그다음에는 미쳐 버린 살쾡이 같았죠.”
“…….”
“그리고 그다음은…….”
포말라드 웨이가 필릭스 쿠아란의 표정을 살피다 멈칫거렸다. 역시나 날개 꺾인 새에서 멈췄어야 했나?
“계속해.”
“밤이 깊었습니다. 다시 주무…….”
“계속.”
포말라드 웨이는 저도 모르게 무릎을 덜덜 떨었다. 자신은 겁을 먹은 것이 아니라, 추위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자연의 섭리로 몸을 떠는 거라고 여기면서.
“그다음은 말입니다.”
포말라드 웨이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겨우 생명을 연명하며 살아가는…….”
“…….”
“늙은 늑대 같았습니다.”
필릭스 쿠아란은 늦게 정신을 차렸다. 눈을 뜨자마자 찾아오는 현실감이 지독했다. 그다음으로 보인 것은 자신의 침대에 그를 눕힌 채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아버지였다.
“……그래서, 의원이 우연히 발견해서 니아를 데려왔다고요.”
“그래. 모르트 독테, 그자가 내게 니아 프레슬리를 데려왔어. 그 아이를 찾아서, 널 살려 낸 거야.”
“아는 사람이 또 누가 있습니까.”
“너와 나, 모르트 독테, 그리고 니아 프레슬리. 네 명뿐이다. 우리 모두 무덤까지 이 비밀을 가지고 가면 돼.”
필릭스 쿠아란은 침대를 박차고 일어섰다. 아들의 차가운 태도가 불안한지 공작은 그의 뒤에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한때 위대해 보였던 그의 아버지는 이제 사랑하는 여자를 이용하고 자신을 속인 배신자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저주는 왜 걸린 겁니까?”
“…….”
“저주가 걸린 이유가 있을 것 아닙니까.”
“태어나는 순간부터 넌 저주에 걸려 있었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떨린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가 진짜 진실을 숨긴 채 말하고 있다는 것도.
“아, 처음부터.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필릭스 쿠아란은 창백한 얼굴로 피식거렸다.
“내가 태어난 게 잘못이군요.”
“필릭스!”
“태어나지만 않았으면 아무런 일도 없었을 것 아닙니까. 어린 여자아이를 십 년 동안이나 착취할 이유도, 필요도.”
토해 내듯 말을 뱉은 후 핏기 가신 입술을 깨물자 기다렸다는 듯 피가 터져 나왔다. 아픔이 느껴지지 않았다. 필릭스는 입술을 잘근잘근, 그러다 뜯어내듯 씹고 또 씹었다.
그 모습을 보는 쿠렐 쿠아란의 표정이 충격으로 물들었다.
“내가 널 어떻게 살려 냈는데. 나라고 마음이 편했는 줄 아느냐? 니아 프레슬리를 찾기 전까지, 난 네 죽을 날을 받아 놓은 부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어.”
“그냥 죽게 내버려 두지 그러셨습니까. 죄 없는 사람 이용할 바에는.”
“그 괴물을 찾고도 마찬가지였어! 십 년 동안 네 심장이 잘못되기라도 할까 봐…… 나는 살아도 사는 게 아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 끔찍한 괴물을 미워하는 것뿐이었어.”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있던 필릭스 쿠아란의 눈에 광기가 어렸다.
“왜 당신의 증오가, 니아 프레슬리에게로 향합니까.”
“…….”
“스스로에게로 향해야지.”
필릭스 쿠아란은 일어나 다시 공작가를 향해 먼 길을 떠났다.
아버지를 버리듯 떠났다는 것은 중요치 않았다. 떠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쿠렐 쿠아란이 그를 어떤 목소리로 불렀는지 알지 못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아버지가 미웠다. 돌아보고 싶지 않을 만큼.
그러나 가장 미운 것은 자기 자신이었다.
가는 길 내내 한 가지에 대해 생각했다.
“니아 프레슬리…….”
내가 너를 어떻게 해야 하지?
무엇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가서 용서를 구해야 할까? 그럴 자격이 있는 걸까? 십 년이나 그녀의 고통을 모른 채 유유히 살았는데.
얼마나 미웠을까. 얼마나 끔찍했을까. 얼마나…… 죽이고 싶었을까. 그가 그대로 저주로 죽어 없어지길 바라고 또 바라지 않았을까!
‘처음부터 도망쳤어야 했어. 공작가에 들어온 그 순간부터……. 그때 도망쳐서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갔어야 했어. 사람 같은 건 없는 곳으로. 어차피 어딜 가도 다 똑같은 인간들인데. 근데도 난 십 년을 당신한테……!’
그런 니아 프레슬리를 위한 것이 뭘까. 눈앞에서 사라져 주는 것? 죽어 주는 것?
죄책감과 슬픔이 굴러 굴러 그를 기어코 진창으로 이끌었다.
필릭스 쿠아란은 가는 길 내내 그녀가 되어, 어떤 삶을 살아왔으며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할지 생각하며 울었다.
그리고 필릭스 쿠아란은 돌아가는 길에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물을 마시며 마음을 굳혔다.
니아 프레슬리가 살 만한 세상을 만들어 주는 것. 그것 말고는 다른 정답은 없다.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 죽더라도, 그 일을 끝내고 죽자.
그리고 공작가에 도착하기 전 발견한 것은, 그라나다 전투로 향할 병사를 구하는 전단이었다.
“떠나세요.”
망설이는 등 뒤로, 높은 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민 말고 떠나서, 니아 프레슬리가 살 만한 세상으로 만들어 주세요.”
필릭스 쿠아란이 몸을 휙 돌렸다. 눈빛은 금방이라도 사람을 죽일 듯 형형했다. 그는 완전히 미쳐 있었다.
“넌 누구지? 누군데 니아 프레슬리를 알고 있어.”
“눈빛 봐라.”
로브를 깊게 눌러쓴 여자였다. 그녀는 미친 필릭스 쿠아란을 보며 비웃었다.
“그냥 알고만 있을까? 니아 프레슬리가 어떤 비밀을 가졌는지도 다 알고 있어.”
여자는 우아한 손길로 로브를 벗었다. 그러자 제국에 몇 없는 백색에 가까운 금빛 머리칼이 드러났다.
“황녀…….”
놀랄 시간조차 없었다.
“니아 프레슬리에 대해 어떻게 알지?”
황녀를 죽일 생각까지 했다. 그 짧은 시간에.
클라우디아 엘로이는 천천히 그녀의 목에 닿은 왼손을 떼어 냈다.
“내가 도와줄게. 니아 프레슬리가 차별받지 않는 세상으로 만드는 것.”
설득은 그리 길지 않았다.
“어떻게?”
“전공을 세워서 영웅이 되어 돌아와. 그리고 그 힘으로 내가 황제가 되는 걸 도와.”
“그다음은?”
“황제가 된 내가, 벅 프릴리에 대한 모든 인식을 바꿔 주지. 맹세해.”
선택은 그보다도 더 짧고 명료했다.
“약속을 지켜, 황녀.”
“도련님!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꼴은 또 그게 뭐고…….”
길리 포바즈가 그를 보고 정색했다.
“니아는?”
“분부대로 했습니다. 아무도 방 가까이 가지 않았고, 멀리서 지켜만 보았죠.”
길리가 방으로 향하는 필릭스 쿠아란을 졸졸 따라오며 말했다.
“그래.”
그러자 길리 포바즈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물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도련님은 한쪽 팔을 다쳐서 오시고, 니아 프레슬리는 며칠째 방 안에 가둬 두시고.”
“니아는 방 밖으로 나오지 않았지? 아직은. 그래, 아직은 아닐 거야.”
필릭스 쿠아란은, 심장을 빼앗긴 이후 니아가 항상 일주일 넘게 사경을 헤맸다는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러니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살아나겠지, 니아 프레슬리.
“피 묻은 망토로 감싼 채 니아 프레슬리를 들고 오셨죠. 니아 프레슬리도 다친 거라면, 의원에게 보이든지 해야 할 게 아닙니까!”
문득 한 가지 가정이 생각난 듯 길리 포바즈가 더듬거리며 물었다.
“설마…… 시체를 방에 두신 건 아니죠? 이미 죽어서, 아무도 들어가지 말라…….”
“함부로 말하지 마.”
“하지만.”
“니아 프레슬리는 다치지 않았어. 그 애는, 다치지…….”
다쳤다. 너무 많이. 너무 오랜 시간.
“……않았어.”
필릭스 쿠아란은 방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아직 깨어나지 않았을 니아 프레슬리의 얼굴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나 확인하고 싶지 않기도 했다.
두려웠다.
“길리, 넌 내려가 있어라.”
“네?”
“내려가 있어.”
문에 고개를 파묻는 필릭스 쿠아란을 보며, 길리 포바즈는 놀라 고개를 끄덕였다. 황급히 계단을 내려가는데, 쿵, 쿵, 머리로 문을 찧는 소리가 들렸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저택을 울리는 무시무시한 소리를 들으며 겨우 계단을 내려간 길리 포바즈는 현기증에 주저앉았다.
“도련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길리 포바즈는 처음으로 그의 도련님을 향해 언성을 있는 대로 높였다.
“난 전장으로 간다. 그라나다 전투로.”
“왜요? 도대체 도련님이 뭐가 부족해서 전장으로 향합니까? 그것도 병사로 지원을 한다고요? 공작의 아들이?”
“길리.”
길리 포바즈는 답답함에 심장을 내리쳤다. 이마부터 팔까지 성한 곳이 한 군데 없는 필릭스 쿠아란을 보니 억장이 무너져 내렸다.
“그 팔을 가지고서!”
길리 포바즈가 무릎을 꿇었다.
“도련님, 무슨 일인지 제게 말씀해 주세요. 돕겠습니다. 목숨 바쳐 돕겠습니다. 제발 말씀해 주세요. 전쟁터로 가지 마세요. 여기서, 여기서 해결하세요.”
“길리.”
필릭스 쿠아란은 답 없이 길리 포바즈의 이름만을 불렀다.
“니아 프레슬리가 곧 깨어날 거야. 잠시 깊은 잠에 빠져 있는 것뿐이니, 일어나면 네가 잘 챙겨야 한다.”
“도련님…….”
“너를 믿겠다.”
길리 포바즈는 그를 강한 힘으로 일으켜 세우는 필릭스 쿠아란을 보며 망연히 중얼거렸다.
“지금, 제정신이 아니십니다…….”
그제야 필릭스 쿠아란은 웃었다. 드디어 그의 얼굴에 표정이란 것이 생겼건만, 길리 포바즈는 더욱 참담해졌다.
소리 내며 웃는 모습이, 그가 미쳤다는 방증 같았다.
“걱정 말라고 전해 줘.”
“네?”
“걱정 말라고……. 그렇게 전해 줘.”
필릭스 쿠아란이 웃으며 돌아섰다.
한쪽 어깨는 무너져 내렸으며, 언제나 정갈하게 빗어 두었던 머리는 지저분하게 엉켜 있었다. 전장으로 향하기 전이건만 그는 이미 패잔병의 몰골이었다.
누가 저 꼴을 한 필릭스 쿠아란을 공작가의 아들이라고 생각할까.
“무엇을…… 걱정 말라고 전할까요.”
길리 포바즈가 눈을 감은 채 물었다.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눈을 떴을 때, 이미 그는 눈앞에 없었다.
후에야 알았다. 아주 시간이 많이 흐른 후, 그가 전장에서 보내온 편지들과, 그가 제국으로 돌아온 이후 보인 행동들과, 그리고 그가 이루고자 했던 것을 알아낸 후에야.
그의 뒷모습이 남기고 간 말의 조각들이 이어졌다.
니아 프레슬리에게, 네가 살아갈 만한 세상을, 만들어 줄 테니, 걱정 말라고, 그렇게 전해 줘.
“어이. 일어나.”
병사로 지원하며 그가 공작의 아들이라는 것을 밝히지 않았다.
“야, 거기 팔 병신. 일어나라고.”
필릭스 쿠아란은 서서히 눈을 떴다. 덥수룩한 머리에 눈이 가려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이 새끼가. 일어서라고! 하루 종일 잠만 처자고 있어!”
아직 다친 어깨가 익숙지 않았다. 중심을 잡지 못한 필릭스 쿠아란은 발길질 한 번에 짐마차에서 굴러떨어졌다.
발길질을 당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예상치 못한 감각이긴 했다. 아픔보다는 수치를 배웠다.
그가 묵묵히 다시 짐마차에 오르는 순간, 누군가 그를 대신해 말했다.
“쟤는 건드리지 않는 게 좋아.”
“팔 병신을 군대에 들인 멍청이들이 짜증 나서 그래! 아무리 사람이 없다 해도 다 죽어 가는 새끼를 들여?”
“소문 못 들었어? 저런 어깨로도 군대에 들어온 이유가 있댔어. 입대 시험을 일등으로 통과했다고 하던데.”
“……저 새끼가?”
웅성거리는 소리가 이어지다가, 이내 필릭스 쿠아란은 혼자가 되었다. 소문이 사실이든 아니든 정상은 아닌 듯 보이니 건드리지 말자고 결론을 내린 모양이었다.
필릭스 쿠아란은 흔들리는 마차에 앉아 눈을 감았다. 끝도 없이 잠이 왔다.
이 길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생각뿐이라, 깨어 있는 모든 순간이 지독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 덕에 도저히 살 수가 없었다. 현실이 너무 괴로워 필릭스는 매번 꿈으로 피난 가는 쪽을 택했다.
차라리 밤낮없이 홀로 전쟁터로 빠르게 달려갈 수 있다면 감사하겠다.
“일어나. 일어나! 이러다 죽겠어.”
누군가 그를 흔들어 깨웠다. 어느덧 마차는 멈춰 있었고, 그들은 짙은 어둠 속에 있었다. 멀리서 모닥불의 불빛과 빛나는 짐승들의 눈이 보였다. 숨을 들이마시니 진한 숲의 향기가 느껴졌다.
“무슨 꿈을 그렇게 험하게 꾸는 거야? 오늘 보니 먹은 것도 없는 것 같던데. 자, 먹어. 네 몫을 남겨 놨어.”
“내버려 둬.”
다시 돌아누우려던 필릭스 쿠아란은 강한 압력에 의해 고개를 들었다.
“자려거든 먹고 자. 전쟁터에 도착하기도 전에 굶어 죽은 바보가 되기 싫으면.”
“…….”
“지금 죽으면, 너를 병신이라고 놀리는 저놈들한테 웃음거리 하나 만들어 주는 거야.”
필릭스 쿠아란보다 조금 더 나이를 먹은 듯한 남자는 그의 입으로 묽은 죽을 들이밀었다. 태어나서 한 번도 맡아 보지 못한, 고약한 향이 나는 죽이었다.
“그래, 너도 좀 군침이 돌지? 먹어. 먹어야 산다니까?”
계속 죽을 먹으라며 귀찮게 구는 탓에, 필릭스는 그가 내민 죽을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식어 빠진 재를 먹는 기분이었다. 인상을 찡그리는 필릭스를 보고 남자는 웃으며 등을 팡팡 쳤다.
“잘했어.”
무시하며 돌아눕는 필릭스 쿠아란을 향해, 남자는 유쾌한 말투로 중얼거렸다.
“팔을 다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 병사로 지원한 걸 보면, 너도 무슨 사정이 있는 놈이겠지. 여기는 다 그래. 누가 전쟁터에 가고 싶겠냐. 다 여기 아니면 갈 곳이 없어 가는 것 아니겠어? 물론 명예를 위해 가는 미친놈들도 몇은 있겠지만 말이야.”
남자가 킬킬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달그락 소리를 내며 죽 그릇을 치우고는 필릭스 쿠아란 옆자리에 누웠다.
“앞으로는 꼬박꼬박 주는 대로 챙겨 먹어. 여기 죽으려고 온 녀석은 한 놈도 없어. 네가 그런 식으로 굴면, 여기 있는 사람들 다 바보 만드는 거야.”
그제야 남자는 자신을 소개했다.
“포말라드 웨이야. 잘 지내 보자.”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가 홀로 떠드는 그 순간만큼은 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
“누가 지원하겠나?”
모두가 쭈뼛거리며 손을 들지 않았다.
“다시 한번 묻지. 누가 지원하겠나? 제국을 위해 용기를 낼 전사는 손을 들어라.”
그때, 손 하나가 하늘로 치솟았다.
“야, 너 미쳤어? 첩자로 가는 게 말이 좋아 첩자지, 죽으러 가는 거나 마찬가지야. 여태까지 그렇게 가서 돌아온 사람이 있는 줄 알아?”
포말라드 웨이가 놀라 필릭스 쿠아란의 왼팔을 끌어당겼다. 그러나 이미 솟은 팔은 무쇠처럼 단단했다.
“제가 가겠습니다.”
“좋아. 용맹하군! 이름이 뭐지?”
“필릭스입니다.”
“필릭스! 공작가 그분과 이름이 같구먼. 살면서 놀림 꽤나 당했겠어.”
이미 제국 내에는 공작가의 아들 필릭스 쿠아란이 한쪽 팔을 잃은 채 전쟁터로 향했다는 소문이 파다했지만, 제국을 떠난 군대가 그 소식을 알 리가 없었다.
“지도를 줄 테니, 지름길로 가 적진의 동태를 살펴라.”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는 필릭스 쿠아란 곁에서 포말라드 웨이가 ‘야, 야!’ 계속 외쳐 댔다. 무시하고 필릭스는 앞으로 나갔다.
“자네한테 기대하는 건 적장의 목을 베어 오라는 것이 아니야. 내가 자네한테 거는 가장 큰 기대는, 정체를 들켰을 때 기쁜 마음으로 자결해 명예를 지키는 걸세.”
상관은 그의 품에 작은 약병을 넣어 주며, 그를 다독였다.
“자결해야 해.”
한 번 더 그 말을 강조하며, 그는 필릭스 쿠아란에게 지도를 건넸다. 필릭스는 눈으로 빠르게 지도를 훑었다.
“언제 출발하면 됩니까.”
“해가 지기 시작하면 출발하게.”
필릭스 쿠아란은 약병이 있는 품 안에 지도를 함께 넣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스름한 기운이 깔리기 시작할 때쯤, 떠나는 필릭스 쿠아란을 포말라드 웨이가 붙잡았다.
“너 정말 죽으려고 온 놈이었냐?”
그는 배신감과 걱정이 뒤섞인 얼굴이었다.
“죽고 싶어 환장한 놈인 줄 알았으면, 그날 그렇게 하지도 않았어. 계속 챙겨 주지도 않았다고.”
필릭스 쿠아란은 제 팔을 붙잡은 손을 냉정히 떼어 놓았다.
“죽으러 가는 게 아니야.”
“멍청한 놈. 거짓말 마. 첫눈에 알아봤어야 했는데. 죽고 싶어 환장한 놈 안쓰러워 도와준 내가 바보지. 내가 바보야.”
포말라드 웨이는 툭 떨어진 자신의 손을 보며 콧김을 씩씩 내쉬었다.
본 지 얼마 되지도 않고, 심지어 얻어 낼 것 하나 없는 팔 병신인 자신을 걱정해 화까지 내다니. 필릭스 쿠아란은 그런 그가 그저 신기했다.
“할 일이 있어 온 거야. 그 일을 위해서라면 난 뭐든 닥치는 대로 해야 해.”
“뭐?”
“난 아직 못 죽는다고.”
필릭스 쿠아란은 그 말을 남기고 망설임 없이 뒤돌아섰다.
필릭스 쿠아란은 적장의 목을 베어 들고 군으로 귀환했다.
작전 회의를 하던 간부들 한가운데로 적장의 머리가 데구루루 굴러가다 멈췄다.
“지금쯤 그들의 대공이 살해당했음을 알아챘을 겁니다. 지금이 기회입니다. 적들이 혼란스러워하고 있을 때 쳐야 합니다.”
군의 총사령관인 비비고르 후작은 놀라 몇 번이고 상대 적장의 얼굴을 확인했다.
“자네는 누구지?”
필릭스 쿠아란이 답했다.
“필릭스입니다.”
귀족들은 전부 성을 가지고 있었으나, 평민들은 성이 없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비비고르 후작은 눈앞에 서 있는 이자가 결코 평민은 아닐 거라는 강한 직감에 명령했다.
“두발을 정리해라. 지저분한 머리는 병사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필릭스는 어느덧 눈을 전부 가린 머리칼을 망설임 없이 잘라 냈다. 그의 얼굴이 드러나자, 비비고르 후작과 주변의 간부들은 놀라 입을 벌렸다.
“필릭스 쿠아란? 왜 자네가? 아니, 이 꼴은 또 뭐고…….”
공작가의 후광에서 벗어나야, 그는 더 빠르게 영웅이 될 수 있을 테니까.
사람들은 처음부터 잘난 영웅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은 언제나 역경과 고난을 거치고, 한 번쯤은 실패해 본, 공감할 수 있는 영웅을 원한다. 그는 그렇게 굴곡 있는 서사가 필요했다.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비비고르 후작님.”
“그래. 자네의 부친께서 예전에…….”
그들은 당장의 전쟁보다 제국 안에서 요양하는 공작에게 더 관심을 보였다. 필릭스 쿠아란은 웃으며 그들의 호의와 관심과 배려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이제는 공작가의 후광을 이용해 높은 곳으로 향할 차례였다.
그라나다 전투. 그의 첫 승리였다.
머리칼을 자른 후, 병사의 옷이 아닌 기사의 옷을 입었다. 더 이상 짐마차가 아닌 훌륭한 천막에서 몸을 누일 수 있었다. 그러나 어쩐지 마음은…… 마음만은 더욱 짙어졌고, 그리워졌고, 죽어 갔다.
짐마차에서는 잠을 쫓아 하루를 보냈는데 막사 안에서는 도무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전장에서는 훨훨 날아다니던 몸이 잠을 자려고 들면 열이 들끓고 뼈가 끊어지는 듯 고통스러웠다.
기억 때문에. 죄책감 때문에.
“……공자님이신 줄은 몰랐습니다.”
어느 날, 막사 안으로 병사 한 명이 찾아 들어왔다. 포말라드 웨이였다.
“처음부터 말씀해 주셨다면, 그렇게 무례하게 구는 일도 없었을 텐데요.”
하는 말과는 달리 목소리가 퉁명스러웠다. 이미 필릭스 쿠아란이 군에 지원했으며, 적장의 목을 베어 왔다는 이야기가 퍼진 지 오래였다. 뒤끝이 길어도 한참 길다 싶었다.
“내가 사과해야 하나?”
“아니요. 아니죠. 제가 멍청하게 쓸데없이 정 주고 먹을 것 주고 그랬을 뿐인데요.”
“그래.”
필릭스 쿠아란은 고개를 까딱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말라드 웨이는 밖으로 나가지 않고 멀뚱히 서 있었다.
“나가 봐.”
고저 없는 명령에 포말라드의 표정이 구겨졌다. 따라서 필릭스도 의문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그의 막사까지 찾아와 이러는 연유를 알 수가 없었다.
“전장에서!”
갑작스레 포말라드가 목소리를 높였다.
“전장에서, 잘도 날아다니시더군요.”
“뭐?”
“피바다를 만드시고, 매번 턱턱 적장의 목을 베어 오는 거요, 대단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팔 한쪽 없는 건 보이지도 않더군요.”
필릭스는 이걸 고맙다고 해야 할지, 당장 꺼지라고 해야 할지 고민하며 입을 축였다. 그사이 포말라드는 결심했는지 그의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죽고 싶어 환장한 놈이라고 한 것 죄송합니다. 이 말을 할 마음먹기까지가 좀 걸렸습니다. 그래도…… 제가 풀죽 챙겨 드렸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저 좀 받아주십시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군.”
“앞으로, 가시는 길 뒤따르겠다는 말입니다. 제가 사람 보는 눈이 좀 있는데, 아무것도 모르면서도 풀죽 챙겨 드린 걸 보면, 본능적으로 안 겁니다. 아, 이 사람이다.”
그놈의 풀죽. 필릭스 쿠아란은 그 맛대가리 없던 죽을 얼마나 더 우려먹을지 궁금해 그를 지켜보았다.
“할 일이 있다고 하셨지요. 제가 도우면, 저도 높은 자리 하나 차지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저도 한 사람 몫은 합니다. 여기까지 그냥 온 것도 아니고요.”
필릭스 쿠아란은 무릎을 꿇은 그에게로 다가갔다.
이제야 그가 제대로 보였다. 포말라드 웨이는 명예를 위해 전쟁터에 온 미친놈들 중 한 명이었다.
“포말라드 웨이.”
그래도 필릭스 쿠아란은 너른 마음으로 그를 받아들였다.
“마음대로 해라.”
포말라드 웨이보다, 필릭스 쿠아란이 몇 배는 더 미친놈이었기 때문이다.
<도련님께.
어느덧 전쟁터로 떠나신 지도 석 달이 훌쩍 지났군요.
니아 프레슬리는 잘 있습니다.
……라고 말씀드리고 싶지만, 솔직하게 적겠습니다.
니아 프레슬리는 잘 못 지내는 것 같습니다. 실은 어젯밤에도 방에서 훌쩍거리는 소리를 들었거든요. 여전히 아카데미도 열심히 다니고, 밥도 잘 먹습니다만…….
도련님이 안 계시니 본인이 아카데미를 다녀서는 안 된다고 고집부리는 걸 뜯어말리느라 고생 좀 했습니다. 돌아오시면, 제 고생에 꼭 보답해 주세요.
몇 번이나 말씀드렸지만, 니아 프레슬리는 도련님의 팔 때문에 힘들어합니다. 그리고 말없이 전쟁터로 떠나신 것도요. 기다리고 있습니다…….>
<도련님께.
일 년 반이 지났습니다, 도련님. 왜 돌아오지 않으십니까?
이미 제국에서 알 만한 사람들은 모두 압니다. 도련님이 왼팔만 가지고도 충분히 해내신 것을요. 아마 돌아오시면 깜짝 놀라실 겁니다. 승전보를 전해 오실 때마다 나라가 뒤집힌다니까요.
네, 네. 알겠습니다. 다 필요 없고, 니아 프레슬리가 궁금하시죠? 잘 있습니다. 정말이에요.
제가 지난번에 좋은 집을 구해 준 건 이미 아실 테고…… 놀라운 소식을 하나 전해 드리죠.
니아 프레슬리가 보 아카데미의 조교가 되었습니다. 생명술 교수의 조교가 되었다고 하더라고요. 안 그래도 꽃바구니를 보냈습니다. 보내고 싶어 하실 것 같아서.>
<도련님께.
이 년 반……. 너무하신 건 알고 계시겠죠?
항상 답장도 짧고, 제가 궁금한 건 하나도 알려 주지를 않으시니 제가 좀 삐쳐 갑니다……. 아효.
건강하시죠? 건강하니 승전보를 계속 전해 오시겠죠. 그래도 도련님, 잠을 잘 주무셔야 합니다. 밥도 잘 드시고요. 그래야 버팁니다.
일전에 말씀하신 레오 아리데오에 대해서는 거의 조사가 끝나 갑니다. 우리가 예상했던 대로 그는 옥폴린 고아원에서 블루아르 백작가로 입양된 것이 맞았습니다. 니아 프레슬리와 함께 옥폴린 고아원에 있다가 헤어진 게 맞는 듯해요.
문제는 백작가에 입양되고 나서부터입니다. 이놈이 사람을 죽인 같아요.
나쁜 놈은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 물론 제가 잘 살필 테니 니아 프레슬리는 걱정하지 마세요. 둘은 가족이고, 서로 아주 애틋합니다. 니아 프레슬리에게 해코지할 아이는 아니에요, 적어도.>
“단장님.”
포말라드 웨이가 입꼬리에 호선을 그리며 편지를 읽고 있는 필릭스 쿠아란을 불렀다.
“웨이, 무슨 일이지?”
“여쭐 것이 있습니다.”
필릭스가 고개를 까딱이자 포말라드 웨이는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여기서 멈추시지 않겠습니까.”
필릭스가 눈썹을 들썩였다. 무슨 의미냐는 뜻이었다.
어느덧 어엿한 부단장이 된 그였다. 포말라드 웨이는 필릭스 쿠아란과 함께 리바론 기사단을 만들고, 이끌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필릭스에게 직접 찾아와 받아 달라고 떼를 쓴 이후로 그는 한 번도 추태를 보인 일이 없었다. 그는 묵묵하고 든든한 부단장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오늘따라 표정이 어두웠다.
“우리는 제국의 영토를 충분히 넓혔습니다. 더 이상 도전해 오는 왕국도, 제국도 없고요. 그런데도 더 먼 곳을 향해 꼭 가셔야겠습니까.”
“충분한가?”
필릭스 쿠아란이 되물었다.
“충분합니다, 저는.”
“너의 명예욕은, 부단장에서 끝인가 보군.”
고저 없이 말하는 필릭스 쿠아란을 보며 포말라드 웨이는 얼굴을 찡그렸다.
“네, 저는 여기서 끝입니다. 저는 사생아고, 아버지께 인정받고 싶어서 이곳에 왔습니다. 리바론 기사단의 부단장이 되어 아버지를 뛰어넘었으니, 저는 더 이상 바랄 것도 이룰 것도 없습니다.”
“그래.”
필릭스 쿠아란은 잘게 웃으며 다리를 꼬았다. 그는 의자에 기댄 채 무표정하게 포말라드 웨이를 응시했다.
“너는 돌아가고 싶겠군. 충분하다니.”
“단장님께서는…… 돌아가고 싶지 않으십니까? 아직도 목적을 이루지 못하신 겁니까? 지금 돌아가면 무엇이든 뜻대로 하실 수 있을 겁니다.”
“아니, 아직이야 난.”
필릭스 쿠아란은 강경했다.
“나는 부족하다고, 포말라드 웨이.”
포말라드 웨이는 지쳤다는 듯 웃었다. 언제나 그의 단장은 이런 태도였다.
“돌아가서 치료를 받으세요, 제발. 밤마다 지치지도 않으십니까. 정말 이러다가 상 치를까 봐 겁납니다.”
“내가 죽을까 봐 걱정하는 놈도 다 있군.”
우스운 듯 중얼거리던 필릭스 쿠아란이 숨을 내쉬었다. 결코 드러내지 않던 피로감이 드디어 가면을 뚫고 나왔다.
“몸의 문제가 아니다. 정신의…… 정신적인 문제야.”
“그럼 그 망가져 버린 정신이라도 치료를 받으시든지요. 도저히 그냥 두고 보지를 못하겠습니다.”
필릭스 쿠아란은 그저 작게 웃었다.
어차피 망가져 버린 정신이며, 살아생전에는 치료할 수 없을 정신병이다. 과거를 뜯어고칠 수 있는 게 아닌 이상.
그나마 이제 웃기도 하지 않는가. 부단장은 밤마다 앓는 필릭스 쿠아란은 알면서, 웃음을 되찾은 필릭스 쿠아란은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대는 너무 우직해서 탈이야. 필릭스는 마음속으로 잔잔히 웃었다.
니아 프레슬리가 기다리고 있다는 서신을 받을 때마다 그는 조금씩 살아난다. 밤이 되면 죄책감으로 열이 들끓으나, 니아 프레슬리의 소식에 유쾌한 아침을 맞이한다.
그런 니아 프레슬리다. 그를 죽이고 살려 내는.
그녀를 위해 그는 확신이 필요했다. 나라의 백성들을 전부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다는 확신. 그것이 생긴다면 그는 주저 없이…… 주저 없이 니아 프레슬리에게로 향하리라.
설사 떠나올 때와 같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본다고 해도, 그것이나마 볼 수만 있다면 달게 받겠다.
그런 마음으로 필리스 쿠아란은 그가 차지할 다음 영토, 더 먼 곳을 바라보았다.
<도련님께.
쿠렐 쿠아란 공작님께서 위급하십니다. 이전처럼 그저 전하는 소식이 아닙니다. 얼마 남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부디, 보러 오세요.>
“포말라드, 돌아갈 때가 되었다.”
포말라드 웨이를 향해 그 말을 뱉는 그 순간은, 그조차도 놀랄 만큼 달콤했다. 생각보다 더 많이 자신은 이 순간을 기다려 온 것이다.
“드디어 갑니까.”
포말라드 웨이가 거세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래. 이제 충분하니까.”
“시끄러운 녀석들 준비시키겠습니다. 너무 흥분해서 사고 치지 않도록 단단히 주의도 주고요.”
포말라드는 강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필릭스 쿠아란은 들뜬 낯으로 막사를 나가려는 포말라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에게만은 미리 말해 두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포말라드, 잠시만.”
“네, 단장님. 더 하실 말씀 있으십니까?”
“네게만 미리 말해 두겠다.”
“……네.”
포말라드 웨이는 침을 꿀꺽 삼켰다. 역사적인 순간임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필릭스 쿠아란이 이토록 오랜 시간 준비하던, 그의 할 일에 관한 이야기임이 분명했다.
“나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시작이요? 무엇의?”
필릭스 쿠아란이 짙은 눈동자로 답했다.
“반란.”
그것을 위한 한 걸음 한 걸음이었나. 포말라드 웨이는 잠시 앞이 캄캄해지는 경험을 했다.
그러나 어떻게 하겠는가. 이미 사 년 전, 그는 필릭스 쿠아란의 뒤를 따르겠다고 맹세해 버린 터다. 불행히도 그는 한 입으로 두말하는 사람은 되지 못했다.
쿠렐 쿠아란은 임종을 앞두고 있었다.
“아버지, 제가 왔습니다.”
필릭스 쿠아란은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한참은 더 늙은 쿠렐 쿠아란에게 속삭였다.
“필릭스…….”
쿠렐은 꺼져 가는 불씨 같은 목소리로 아들을 불렀다. 필릭스는 목이 메는 감각을 애써 억누르며 중얼거렸다.
“저는 아직도 아버지가 밉습니다. 처음부터 그 아이를 사람 취급해 줬다면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얼마나 저를 괴롭힌 줄 아십니까. 적어도…… 적어도 더 나은 방법이 있지 않았겠습니까, 저를 살릴. 아버지는 잘못하셨습니다.”
쿠렐 쿠아란의 눈은 빛바랬으며, 그의 늙은 몸은 닳고 닳았다. 그래도 아버지였다. 그의 아버지도, 한때는 제국을 호령하던 공작이었다.
한 시대가 가고 있었다.
“하지만…… 저를 사랑해서 그러셨다는 것만큼은 이해합니다. 저는 자식을 가져 본 적은 없지만, 적어도 지키고 싶은 마음은 아니까요.”
“필릭스, 네 말이 맞다. 나는 잘못을 저질렀어.”
더 이상 목소리를 내지 못할 줄 알았던 쿠렐 쿠아란이 그를 불렀다. 덤덤히 말을 뱉던 필릭스는 놀라 쿠렐을 쳐다보았다.
“아버지, 정신이 드십니까?”
“필릭스, 미안하다.”
그때까지만 해도, 필릭스 쿠아란은 그의 아버지가 자신에게 사과하는 것으로 알았다.
그러나 아니었다.
“너는 나 때문에 저주에 걸린 것이다. 들키고 싶지 않았다. 네가 나를 원망하지 않기를 바랐으니까. 나는 네게 언제나 좋은 아버지이며 존경받을 만한 사람이고 싶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황제의 명령으로 괴물을 잡으러 갔다. 어떤 존재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어. 목숨 바쳐 저주를 내릴 수 있다는 것을 몰랐다. 그리고 괴물에게 자식이 있을 줄도. 모성이 그리 강할 줄도.”
쿠렐 쿠아란이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과거를 떠올리는 눈빛이었다. 희미하게 꺼져 가는 눈빛에는 후회가 담겨 있었다.
“그리고 내가 잠시 미쳐 그 자식에게 마음이 갈 줄도.”
필릭스는 아버지에게서 도망치고 싶었다. 어떻게 돌아온 제국인데, 어떻게 돌아온 니아 프레슬리의 곁인데.
“말하지 마세요.”
그는 쿠렐 쿠아란의 임종을 지키고서, 그 끝에 니아 프레슬리에게로 향하려고 했다. 이기적이라는 건 알지만 다시 시작해 보려 했다.
니아 프레슬리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그렇다고 하니까. 그렇게…… 길리 포바즈가 전했으니까.
“하지 마십시오. 그냥…… 듣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쿠렐 쿠아란은 이미 과거의 미망 속에 있었고, 죽기 직전에서야 겨우 응어리진 마음을 풀고 있는 중이었다. 멈출 수 없었다.
“니아 프레슬리, 그 작은 괴물에게 마음을 빼앗겨 시간을 주면 안 되는 거였어. 그 어미가 저주를 걸 시간 따위를…….”
“하지 말라고!”
“네게 친구를 만들어 주면 좋겠다 생각했다. 너와 잘 어울리는 아이 같았다. 너희 둘이 뛰어노는 모습을 볼 수 있다면…… 좋겠다고.”
쿠렐 쿠아란이 순간 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는 필릭스를 향해 손을 뻗고 꺼이꺼이 울었다.
“그 아이 없이 너는 살 수 없다고 했어. 네 사라진 심장은, 그 아이의 심장으로만 채울 수 있다고 했다. 그렇게 저주를 내렸어.”
“……나보고 어떡하라고 이제 와 그런 말을 해.”
“그 아이를 사랑하지 말렴. 그 아이의 어미가 네게 저주를 걸었고, 나는 그 어미를 사지로 이끌었단다.”
멍하니 바닥에 주저앉은 필릭스 쿠아란을 향해 쿠렐 쿠아란이 울며 말했다.
“하지만, 하지만 필릭스…….”
그는 허공에 손을 뻗어 필릭스 쿠아란을 찾았다. 이미 제 손으로 아들을 무저갱 속으로 밀어 넣은 줄도 모르고.
“필릭스, 그 아이에게 미안하다고 전해 주렴. 그렇게 전해 줘. 그 말을 해야 한다. 사과를 해야 해.”
필릭스 쿠아란은 산산이 부서져 더 이상 살아날 여지가 없는 심장으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사 년 전 니아 프레슬리의 진실을 알았을 때보다 더한 일이 남아 있는 줄 몰랐다.
십 년간 심장을 뺏은 줄로만 알았더니, 그는 니아 프레슬리의 어머니를 죽인 남자의 아들이기까지 했다.
“이제 와서?”
원망이 너무 짙게 서려, 오히려 물음은 가볍게 들렸다. 자조하듯 헛웃음이 돌고 돌았다.
“네게 저주를 내린 그 어미가 너무 미워서…… 모든 게 그 아이 때문인 것 같아서, 그래서 그 아이를 증오했다. 싫어했다.”
드디어 열이 들끓기 시작했다. 어깨부터 팔까지, 마디마디가 절단되는 감각이 그를 찾았다. 드디어 왔구나, 네가. 전쟁터에서 끊임없이 겪고 겼었던 이 고통을 기다리고 있었다. 신체의 아픔으로 정신의 격통을 지워 내고 싶었기에.
“그 어미를 빼다 박은 그 눈동자를 싫어했어. 모르트 독테가 그 아이를 괴롭히는 것을 눈감아 주었다. 그 아이가 원하는 것은 돈이 아니라 애정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 미안, 미안하다고…….”
“그 말을 전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필릭스 쿠아란이 몸 안에 득실거리는 고열에 숨을 헐떡이며 답했다. 눈앞이 캄캄해지고 세상이 멀어져 갔다.
“죽기 직전에서야, 그 말이 다 무슨 소용입니까. 당신 마음 편히 가겠다고 지금 와서 하는 이런 후회가, 사과가 다 무슨 소용이 있어!”
쿠렐 쿠아란은 답하지 않았다.
“말해 봐! 그렇게 말하고 가면 나는 어떡하지? 모든 게 나를 살리기 위해서였다면서, 왜 나를 죽이고 떠나는 거지? 차라리 몰랐다면, 몰랐다면……!”
아버지는 답하지 않았다.
“왜 내가 다시는 니아 프레슬리를 보지도 못하게 만들어.”
이제야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니아 프레슬리에게, 이런 과거의 이야기를 전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필릭스 쿠아란은 죽은 쿠렐 쿠아란 옆에 하릴없이 누워 있었다. 찬 바닥인가, 의자인가, 그것도 아니면 지옥인가. 그는 일어설 수조차 없었다.
전쟁터로도, 니아 프레슬리에게도, 이제는 그 어디로도 갈 수가 없었다. 그는 갈 곳 없는 부랑자이자 걸식자였다. 사랑을 구걸하고자 했으나 그마저도 그에게는 사치였다.
“공작님!”
“아버지…….”
“공작님, 일어나십시오. 아침입니다.”
필릭스 쿠아란은 눈을 번쩍 떴다.
“한 번 더 악몽을 꾸시면, 돌아가자마자 성녀님께 이르겠습니다.”
“뭐?”
필릭스 쿠아란이 머리를 흔들며 일어섰다. 그는 금세 정신을 차렸다.
“원정을 떠나자마자 벌써 두 번째 악몽입니다. 이래서야 원, 어디 제가 제 명에 살겠습니까.”
원망스러운 듯 말하는 포말라드 웨이였으나, 그는 이내 진심으로 걱정스러운지 입술을 악물었다.
“공작님, 정말 계속 나아갈 수 있으시겠습니까.”
“왜, 도망이라도 시켜 주려고 그러나.”
“마음 같아선 그러고 싶습니다. 아주 죽겠습니다.”
“산 한복판에서 답하기엔 너무 늦은 질문이지.”
필릭스 쿠아란은 웃으며 일어섰다. 확인하듯 양 손바닥을 바라보다 가벼운 숨을 내쉬고 고개를 돌렸다.
“걱정 마라.”
“네?”
“이다음 꿈부터는 조금씩 나아지니까.”
부하를 안심시키기 위해 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실로 그러했다.
정말 그의 인생은 끝났다고 생각했다. 다시는 보지도, 만지지도, 그녀를 향해 웃지도 못할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도 우연처럼 니아 프레슬리와의 만남은 계속되었다.
우연이 반복되면 운명이라고 했다.
‘도련님이 제 첫사랑이에요. 아세요?’
그리고 그의 꿈 끝에는, 그 말이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