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화해
“길리 집사님, 좀 늦으셨네요. 아침 일찍 오겠다고 하셔 놓고는.”
몇 년 사이 격 없는 사이가 된 부단장 포말라드 웨이가 멀리서 걸어오는 길리를 향해 투덜댔다.
“준비는 잘되고 있나요?”
길리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엉망진창이었다.
“그럼요. 보시다시피 완벽합니다.”
“그래요. 컨셉은 확실하네요.”
엉망진창 기사단의 서툰 파티 제작기. 마음속으로 오늘의 리바론 기사단에게 딱 어울릴 만한 제목을 붙여 주며 길리는 슬쩍 웃었다.
“공작님께서는요? 아직 주무시나요?”
“그럴 리가요. 벌써 해가 중천인데요.”
“언제쯤 오시려나…….”
“오늘 안에는 오시겠죠.”
희미하게 중얼거렸는데, 구석에서 판판이 놀고 있던 사이먼 캐치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집사님, 이 사람들한테 그만하라고 좀 해 주세요. 다들 잠도 안 자고 뭐 하는 짓이람.”
“사이먼.”
포말라드 웨이가 낮은 목소리로 을렀다. 하지만 사이먼은 타격 하나 없이 길리 포바즈를 잡고 늘어졌다.
“공작님이 이걸 좋아하실 리가 없잖아요. 단장은, 아니 공작님은 생일을 싫어하신다고요! 그걸 이 사람들은 모른다니까요. 바보도 아니고.”
“사이먼, 도와줄 거 아니면 저리 가 있어. 제발 철 좀 들자.”
“정신 차려야 할 건 부단장이랑 다른 사람들인데.”
사이먼이 툴툴거렸다. 길리 포바즈가 그런 그를 보며 의외라는 듯 말했다.
“맞아요. 공작님은 생일을 싫어하시죠.”
“네?”
포말라드 웨이가 불쑥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그들의 대화에 신경 쓰지 않는 듯 보였던 여러 기사들도 고개를 돌렸다.
“일 년 중 가장 싫어하시는 날일 겁니다.”
“아니, 그런…….”
여기저기서 탄식이 새어 나왔다. 이럴 수가, 헛수고를 한 것이란 말인가? 그중 사이먼 캐치만 승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거봐요. 내가 뭐랬어. 다들 내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더니.”
오늘 하루 한 것도 없는 사이먼이 툭툭 손을 털며 어깨를 들썩거렸다. 아이몬드가 째려봐도 히죽 웃기만 했다.
그가 일부러 보란 듯이 길리 포바즈의 어깨에 손을 올렸을 때였다.
“그래도 진행하세요. 공작님께서는 기꺼워하실 겁니다. 이 허접…… 서툰 파티를요.”
길리 포바즈가 후련한 표정으로 기사들을 향해 말했다. 그의 어깨에 살포시 놓여 있던 사이먼의 손이 순간 삐끗했다.
“확실히 도련님은 오늘 기분이 좋지 않으셨죠. 성녀님과 다툼도 있었고. 그러니 공작님께는 더욱 최악의 날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오늘을 기점으로 매년 좋은 기억을 쌓아 갑시다. 그럴 수 있을 것 같아요.”
“이걸로?”
황당한 목소리로 사이먼 캐치가 물었다.
“그래. 이걸로.”
“맙소사. 저는 빼 줘요. 이 엉터리 파티에서.”
“그리고 성녀님이 그렇게 만들어 주실 거야.”
질린 듯 아예 연무장 바깥으로 향하려던 사이먼이 멈칫했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물었다.
“……성녀님이요?”
“그래. 성녀님이 오셨어. 그리고 아마 화해를 하시겠지.”
“……그걸 왜 이제 말해요? 정말 너무하네.”
사이먼 캐치가 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드디어 공작님의 얼굴이 좋아지겠다며 기사단이 즐거움으로 술렁이는 와중, 사이먼은 이미 사다리를 타고 천장 높은 곳에 올라 있었다.
“사이먼, 뭐 해?”
“뭐 하긴. 파티 준비하지.”
“이런 건 안 한다며? 엉터리 파티라며?”
“니아 프레슬리 누나가 직접 왔다잖아. 그리고 화해한다잖아!”
사이먼은 거친 손길로 천장에 달아 놓은 과일 장식을 떼어 냈다. 연무장 바닥으로 완두콩 줄기로 엮은 토마토들이 하나둘 힘없이 떨어졌다.
“솔직히 아까부터 말하고 싶었는데, 이거 정말 별로였어. 대체 누가 고른 거야? 아무도 손 안 들 것 같아서 하는 말인데, 누구든 앞으로 본인 안목은 믿지 마. 앞으로 내게 친한 척도 말고. 완두콩, 토마토가 웬 말이야!”
“사이먼…….”
고개를 숙인 포말라드 웨이가 조용히 손을 들고는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그 아련한 목소리에도 사이먼은 멈추지 않았다.
“내가 예언 하나 해 볼까? 오늘 단장 입이 찢어져라 웃는 걸 볼 수 있을걸. 내기해도 좋아!”
그의 미소는 허락이었다.
니아 프레슬리는 허리춤에 매달고 온 주머니를 풀어 뒤집었다. 와르르 쏟아진 형형색색의 마정석들이 방 안을 굴러다니다가 멈췄다.
“뭐야?”
니아 프레슬리는 가장 빛나는 마정석 하나를 두 손가락으로 집어 들었다.
“마법을 쓸 거예요.”
“니아.”
아무리 마정석을 사용해 마법을 한다고 하지만, 생명을 쓰는 마법은 결코 하지 않겠다 약속한 게 불과 몇 분 전이었다. 필릭스 쿠아란은 배신감에 눈을 잘게 떴다.
이러려고 그렇게 예쁘게 소원을 빌었구나. 니아 프레슬리.
눈치를 보던 니아가 거절하기 힘든 목소리로 속삭였다.
“제발요. 제발 하게 해 주세요.”
“설마, 너…….”
“맞아요. 저는 마법을 쓸 거고, 오늘 도련님의 팔을 고쳐 줄 거예요.”
그러고는 두 손을 꼭 모은 채 중얼거렸다.
“제발, 돼라. 돼라. 돼라.”
마치 신에게 기도하는 모양새였으나, 실은 필릭스 들으라고 하는 소리였다. 제발 싫다고 하지 마라, 마라, 마라. 대충 이런 뜻.
“니아 프레슬리, 너 정말.”
“내가 얼마나 답답했는데요. 팔을 고칠 수 있게 됐는데 일주일이나 도련님을 못 봐서요. 솔직히, 속이 마구 터져 나가는 줄 알았어요.”
니아 프레슬리가 그를 침대로 이끌었다. 필릭스는 뭐라 하지도 못하고 그녀가 이끄는 대로 끌려갔다. 고르고 골라 입은 푸른색의 베스트 단추를 푸는 손길도 거절하지 못했다.
“내 팔을 고치는 데 내 가슴이 필요해?”
니아가 집중하느라 입을 내밀고 있는 것이 귀여워 물었다. 듣지도 못했는지 그녀는 답이 없었다.
베스트를 다 벗기고, 앞부분이 주름져 있는 흰 셔츠의 단추 또한 망설임 없이 벗겨 나갔다. 니아 프레슬리의 손길이 흐트러뜨리는 대로 그는 흐트러졌다.
“응?”
부드럽게 한 번 더 묻자, 그제야 니아는 빠르게 답했다.
“아니요. 이게 편해서.”
딱딱한 단답이었다. 윗옷은 제멋대로 다 벗겨 놓고, 신경은 온통 필릭스의 오른팔에만 가 있는 것이 귀여웠다. 조금 얄밉기도 했고.
“아가씨, 간지러워요.”
오른팔부터 탄탄한 복부까지 이리저리 만져 대는 통에 웃음이 새어 나왔다.
“네?”
이상한 호칭에는 또 눈이 뜨이나 보다. 니아 프레슬리가 눈알을 도르르 굴려 그를 바라보았다.
“간지러우니까 살살 하시라고요, 아가씨.”
니아 프레슬리의 얼굴이 서서히 붉어졌다. 아까 그가 골몰하듯 바라보던 태양만큼 발갛게.
니아 프레슬리의 손이 눈에 띄게 느려졌다. 필릭스는 지금이 훨씬 더 간지럽다는 것을 굳이 내색하지 않았다.
사실 간지러운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만…….”
그렇게 말하는 순간 니아 프레슬리는 바닥에 떨어뜨렸던 마정석들을 향해 갔다. 그가 ‘……해 줬으면 좋겠어’라고 말할 때에는 이미 마정석을 줍느라 바닥을 기고 있었고.
“시작합시다.”
품 안에 마정석을 가득 안고 숨을 크게 내쉬는 것이, 포부가 대단해 보였다. 아마 그가 두 팔을 모두 사용할 수 있었더라면, 손바닥이 부서져라 손뼉을 쳤을 것이다.
“네, 선생님. 시작해 주세요.”
사실 그는 정말 상관이 없었다. 오른팔을 사용하지 못해 불편한 적은 있었어도 슬픈 적은 없었다. 니아 프레슬리를 구하려다 다친 팔이니 그 나름대로는 영광의 상처쯤으로 여기기도 했다.
그래도 니아 프레슬리가 원한다면야.
앞으로 그녀가 깜찍한 행동을 할 때마다 두 손으로 손뼉을 칠 수 있겠다는 건 만족스러웠다.
“아플 거예요. 그래도 밤마다 아픈 것보다는 낫잖아요.”
“알고 있었구나.”
“모를 리가 없잖아요. 그렇게 다친 강아지처럼 낑낑거리는데.”
다친 강아지라. 네 눈엔 그렇게 보였나 보지. 필릭스는 웃으며 기꺼이 온몸을 내줬다.
니아 프레슬리가 천천히 그를 침대에 눕혔다. 또 어디서 꺼내 온 건지 쓱, 긴 나무의 뿌리를 눈앞에 대고 흔들었다. 순간 시큼하고 썩은, 고약한 냄새가 났다.
“냄새가 좀 이상하죠.”
“그러게. 썩 좋은 향은 아니네.”
“미안한데, 먹어야 해요.”
니아가 재빨리 한 번 더 사과했다.
“미안해요.”
“먹으라고?”
순식간에 달콤했던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필릭스 쿠아란이 설마 하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설마, 네가 사랑한다면서 내게 이런 걸 먹으라고 할 리가 없어.
“꼭꼭 씹어 넘겨야 해요.”
이미 나무뿌리는 그의 입술에 닿아 있었다.
“이아 으에으리.”
입을 열지 않고 니아 프레슬리를 불렀다. 발음이 뭉개지고 체면도 구겨졌다.
“제발요, 도련님. 잠깐의 고통으로 평생을 편하게 살 수 있어요.”
“…….”
“제가 이렇게 꼭 붙어서 지켜보고 있을게요. 네?”
꼬드기는 자세가 수준급이었다. 침대에 눕혀 놓고 무릎을 꿇은 채 고약한 나무뿌리를 먹으라고 종용하는 것이. 편하게 살 수 있다는 쪽보다 꼭 붙어 지켜보겠다는 쪽이 그에겐 훨씬 더 솔깃했다.
“에.”
“네?”
“에오아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에 니아가 얼굴을 찡그렸다.
“떼 보라고.”
결국 필릭스는 소리를 내 말했다. 입을 여는 순간 뿌리의 맛을 조금 본 것 같기도 했다. 착각이겠지. 혀가 타는 것 같은 기분이 든 것은.
“그, 알아보니까 냄새만 고약한 거예요. 맛은 없대요. 그러니까 맛이 없는 게 아니라, 정말로 아무 맛도 안 난다고요.”
“그냥 솔직하게 말해 줘.”
어차피 저걸 먹어야 한다면, 알고 당하고 싶은 마음에 필릭스 쿠아란은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맛은 안 나는데…… 기록에 쓰여 있는 걸 보면, 혀가 파괴되는 느낌이 난대요.”
니아 프레슬리는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진짜 파괴되는 건 아니고, 느낌만.”
그래, 그렇겠지. 정말 혀가 파괴되면, 너는 또 내 혀를 고쳐 주겠다고 일 년이고 이 년이고 연구를 할 테니까.
“하자.”
“잘 선택했어요. 사랑해요.”
왠지 사랑한다는 말이 이용당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할수록 숭고해지는 단어가 이번만큼은 미지근했다. 그래도 필릭스 쿠아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랑한다는 말에는 힘이 있었다. 설령 그게 그를 설득하기 위해 내뱉는 사랑일지라도.
“멋져요.”
니아 프레슬리가 싱긋 웃었다.
“자, 드세요.”
필릭스 쿠아란이 서서히 입을 벌렸다. 고른 치아가 드러나자마자 니아는 기다렸다는 듯 나무뿌리를 그의 입에 쑤셔 박았다. 혹시라도 그가 변심해 입술을 닫을까 걱정되는 듯했다.
필릭스 쿠아란은 생전 처음 느끼는 감각에 눈을 바르르 떨었다.
혀가, 파괴되어 간다.
“어떡해…….”
단 일 초도 망설이지 않고 그의 입에 뿌리를 집어넣은 니아 프레슬리가 모은 두 손을 입에 댄 채 종종거렸다. 필릭스는 감았던 눈을 떠 힐긋 그녀를 쳐다보았다.
‘생각보다는 괜찮은데.’
놀랍게도 참을 만했다. 점점 씹다 보니 감각이 아예 사라지는 것도 같았다.
“많이 아파요? 삼킬 수 있겠어요? 잠깐 뱉을래요?”
눈망울을 빛내며 니아가 물어 왔다. 어찌나 걱정스러운 낯빛인지 고개도 저을 수 없었다.
“좀만, 좀만 더 참으면 돼요…….”
그녀가 그의 이마에 입술을 맞대어 왔다. 부드러운 것이 이마에 닿자 혀에서 느껴지던 감각은 찾아볼 수도 없었다. 온 신경이 이마에 쏠렸다.
“으…….”
고통스러운 척 신음을 흘리자 니아가 화들짝 놀라 안타까운 손길로 그의 얼굴을 연신 쓸어 댔다.
“으으…….”
니아가 그의 몸을 꼭 붙잡고서 얼굴을 기대어 왔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귀에 울먹거리며 속삭였다. 따듯한 숨결이 귓가를 타고 스며 와 전신을 지배했다.
이대로 얼마나 시간을 더 끌 수 있을까.
최대한 아픈 척을 많이 해서 이렇게 황홀한 순간을 길게 늘리고 싶었다. 고민하던 필릭스 쿠아란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자, 다 됐어요.”
그러자 애타던 니아 프레슬리의 표정이 순식간에 돌변했다. 아무리 아픈 환자를 봐도 감정이 흔들리지 않는, 나이 지긋한 의사처럼.
“깔끔하게 먹었네요. 잘했어요.”
스스로의 실수를 깨닫는 사이, 니아는 그의 입을 벌려 안쪽을 확인하고는 강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어라 반응할 시간조차 없었다.
“그다음은 마법을 걸 거예요. 원리를 설명하자면, 방금 먹은 뿌리에는 마법이 걸려 있어요. 벅 프릴리의 마법 문양이 새겨져 있던 거 봤죠?”
그랬던가. 잘 모르지만 필릭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쉬움에 혀를 축이며.
“그건 저와 연결되어 있어요. 내가 몸을 겹쳐 누운 다음에, 도련님 몸에 마법을 걸 거예요. 그럼 잠시 동안 도련님은 내가 되는 거예요. 정확히는, 내 치유 능력을 가지는 거죠.”
“응.”
겹쳐 누운 다음에, 다음으로는 잘 들리지 않았으나 필릭스는 또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니아는 그의 눈빛을 자세히 살피더니 고개를 저었다.
“이해 못 했네요. 다시 설명해 줄게요.”
“……응.”
“방금 먹은 뿌리가 도련님 몸이 마법을 받을 준비를 도와줄 거예요. 간단히 설명하면 나와 하나가 된다고 생각해도 좋겠죠. 마법을 거는 순간만큼은.”
하나가 된다. 그 말이 무척 마음에 들어 필릭스는 미소를 지었다. 진지한 낯으로 설명하던 니아 프레슬리도 그의 미소를 보고는 긴장이 조금 풀렸는지 살짝 웃었다.
“반나절 정도 걸릴 것 같아요. 제 예상으로는. 더 걸려도 사실 상관은 없어요. 마정석은 충분히 준비해 왔고, 저도 마음의 준비를 충분히 했거든요. 아침도 든든히 챙겨 먹었고.”
내내 은은한 미소를 띠고 있던 필릭스가 순간 미소를 거뒀다.
“왜요? 걱정돼서 그래요? 잘못될까 봐?”
“응.”
필릭스는 확인하려는 듯 커다란 손으로 니아 프레슬리의 턱을 쥐었다. 붕어처럼 변한 그녀의 얼굴을 이리저리 돌리고 살폈다. 거짓말을 하면 결코 봐주지 않겠다는 눈빛으로.
그제야 니아는 눈을 내리깔고 고백했다.
“사실 나도…… 정말 걱정돼요. 딱 한 번 성공해 본 거잖아요. 똑같이 잘할 수 있을까 싶고, 많이 아플 게 걱정되기도 하고…….”
“나 말고 너.”
“네?”
“네가 아픈 건 아니지?”
니아가 멀뚱멀뚱 눈을 깜빡였다. 필릭스 쿠아란은 순간 미간을 구기고 몸을 일으켰다.
“안 돼. 하지 마, 그럼.”
구겨진 얼굴로 옷을 챙겨 입으려는 그를 황급히 니아가 붙잡았다.
“전 안 아파요. 진짜로.”
그리고 투명한 눈빛을 깜빡이지도 않고 말했다.
“내가 아픈 게 아니라, 도련님이 아플 거예요. 상처가 낫는 건 무척 아프거든요. 특히나 나는 도련님을 최대한 빨리 낫게 만들 테니 더 힘들지도 몰라요.”
찬찬히 니아 프레슬리의 눈을 들여다보던 필릭스 쿠아란이 그제야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됐어.”
그는 스스로 침대로 가 누웠다.
“겹쳐 눕는댔지. 이리 와.”
멀뚱히 서 있는 니아 프레슬리가 곁으로 오도록 팡팡, 침대 옆을 두드렸다. 니아는 입술을 비죽이면서도 침대 가까이 다가왔다.
“팔 절대 떼지 말아요. 내가 됐다고 할 때까지.”
스르르 그의 위에 몸을 겹치며 니아가 주의를 주었다. 몸의 무게가 고스란히 느껴지자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필릭스 쿠아란은 왼손으로 니아 프레슬리를 끌어당기며 답했다.
“알았어.”
“무거워요?”
“아니.”
니아가 ‘다행이다’ 중얼거렸다.
“그리고 너무 아프면 말해요.”
“알았어.”
“근데 정말 그러면 어떡하죠? 멈추는 건 안 되고, 고통을 완화시키는 방법은 모르는데…….”
니아가 거기까지는 생각을 못 한 듯 울상을 지었다.
“괜찮을 거야.”
필리스 쿠아란은 죽을 만큼 고통스러워도 절대 말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걱정스러운 듯 필릭스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은 니아가 애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너무 아프면 뽀뽀해 줄게요. 조금 나아질지도 모르니까.”
필릭스 쿠아란은 조금만 간지러워도 말해야겠다는 다짐을 하며 답했다.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거 좋은 생각이네.”
단단히 끌어안은 왼손을 니아가 부드럽게 원래의 자리로 가져다 놓았다. 허전함도 잠시, 니아 프레슬리가 마법을 부리기 시작했다. 눈을 꼭 감고 집중하는 모습이 귀여웠다.
필릭스 쿠아란은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 말만은 꼭 해 주고 싶은 마음이 더 커, 그녀가 집중하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귓가에 속삭였다.
“팔이 낫지 않아도, 혹여나 더 엉망이 되고 왼팔까지 망가지게 되더라도 상관없어. 결과가 좋지 않아도 네 탓이 아니야. 편하게…… 편하게 해.”
반나절이라더니, 어느새 해가 사라지고 없었다. 방은 어둑했고, 침대 위에는 다 쓴 마정석들이 빛바랜 채로 널려 있었다.
그리고 필릭스 쿠아란 위에는, 쌔액쌔액 숨소리를 내며 잠든 니아 프레슬리가 있었다.
반나절이 훨씬 넘는 시간 동안 쉬지 않고 마법을 써 댔으니 피곤할 만했다.
필릭스 쿠아란은 잠든 니아에게 자잘하게 입술을 쫀 후 조심스럽게 그녀를 옆으로 옮겼다. 베개 위에 눕히기 위해 고개를 드는 와중에도 니아 프레슬리는 깨지 않았다.
필릭스 쿠아란은 잠든 그녀의 모습을 음미하며 일어섰다.
“공작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그래.”
몇 번을 망설이다 돌아간 발걸음을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이 나올 기미를 보이지 않으니 걱정스러울 만도 했다. 필릭스는 셔츠를 입으며 답했다.
길리 포바즈가 들어서자마자, 필릭스 쿠아란은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었다.
“쉿. 자고 있어.”
그는 턱 끝으로 잠든 니아 프레슬리를 가리켰다. 길리는 고개를 끄덕이고 속삭이듯 말했다.
“저녁입니다. 기사단이 기다리고 있어요.”
“그래. 오래 기다렸겠군.”
필릭스 쿠아란이 몸을 돌려 발코니 너머를 바라보았다. 새벽녘에 홀로 빛을 내던 연무장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여전히 가장 밝은 색깔로 빛을 내고 있었다.
“가시겠습니까?”
“조금만 더 있다가. 피곤할 테니 더 자게 내버려 두자.”
필릭스 쿠아란이 잠든 니아 프레슬리를 바라보며 옅게 웃었다. 길리 포바즈는 안심했다. 역시 이번 싸움도 잘 화해를 한 모양이었다.
“길리.”
“네.”
나지막한 부름은 왠지 따듯했다. 길리 포바즈는 웃으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자, 나와 악수하자.”
“네?”
“악수하자고.”
뜬금없는 말에 푸시시 웃음이 났다. 불쑥 내민 손이 황당했다.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자마자 필릭스 쿠아란이 조용히 하라며 그를 을렀다. 그러면서도 내민 손을 거두지 않았다.
내민 손을, 거두지를…….
“도련님.”
필릭스 쿠아란이 세차게 웃었다. 자신감이 가득 찬 전사 같은 얼굴을 하고서.
“팔이…….”
필릭스 쿠아란이 오른손을 내밀어 그에게 악수를 청하고 있었다. 마치 꿈처럼.
“그래. 오른팔이 되살아났다. 니아 프레슬리 덕분에.”
믿을 수 없는 현실에 길리 포바즈는 말을 잃었다. 내색하지 않으려고 했으나 감격스러움을 숨길 수가 없었다. 눈가가 시큰거렸다.
한참 후에야, 처음 그가 검술을 시작하던 것을 지켜보던 기분으로 물었다.
“기분이 어떠세요?”
물으며 길리 포바즈가 오른손을 뻗었다.
“글쎄…….”
굳센 힘이 길리의 오른손을 붙들었다. 강하게 아래위로 흔들며, 필릭스 쿠아란이 답했다.
“좋아. 아니, 좋은 정도가 아니지.”
긴 악수가 끝났다.
“끝내줘.”
그날의 생일은 완벽했다.
그의 완벽해진 오른팔과 함께, 파티가 시작되었고 끝났다. 문제가 있다면 그의 기사들이 연신 오른손으로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해 보라며 돌아가며 졸라 댔던 것 정도였다.
니아 프레슬리는 웃다가 또 한참을 울었다. 아니, 웃으면서 울었다.
“너무 좋아요. 너무 좋아서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기뻐서 눈물이 나는 게, 정상은 아닌 것 같은데.”
“울지 마.”
기사들이 둘러앉은 가운데 필릭스 쿠아란은 니아 프레슬리의 눈물에 입을 맞추었다. 눈물의 맛을 느끼며 웃었다. 울리고 싶지 않았지만, 이런 눈물이라면 언제든 기꺼울 것도 같았다.
기사들이 서로의 장기를 자랑하며 연무장에 모래바람을 일으키는 사이사이, 니아 프레슬리는 까르르 웃기도 했고 벅차오르는 듯 숨을 들이쉬기도 했다.
모닥불이 잔상을 남기며 타올랐다.
“너 술 먹으니까 귀여운데, 술은 나하고만 먹자.”
계속 주는 대로 술을 먹는 것이 신경 쓰이긴 했다. 니아 프레슬리가 일어서서 사이먼의 손을 붙잡고 춤을 추려 하자 필릭스가 사납게 눈을 치켜떴다. 눈치껏 사이먼은 멀리 도망갔고, 니아 프레슬리는 발개진 볼로 웃었다. 실실거리며 웃다가 혼자 넘어지려고도 했다.
“나하고만 먹어.”
쐐기를 박듯 말하고, 필릭스 쿠아란은 흥이 오른 그녀를 겨우 달래 의자에 앉혔다.
니아 프레슬리가 눈을 감고서 두 손을 뻗었다. 안아 달라며.
필릭스 쿠아란은 그다음 무엇을 하려 했는지도 까먹고 그대로 두 팔을 뻗어 그녀를 맞이했다. 꼭 껴안자 일정한 심장 박동수가 느껴졌다.
살아 있음을 알리는 일정한 박동 소리.
열 번을 그를 위해 심장을 내놓고서, 그의 팔마저 고쳐 주었다.
필릭스 쿠아란이 태어나 맞는 생일 중, 단연 최고의 생일이었다.
“솔직하게 말해 봐. 사형이 취소될 거라는 걸 예상하고 있었지?”
“네?”
니아 프레슬리는 일부러 딴청을 피웠다. 어림도 없지. 필릭스 쿠아란이 두 팔을 벌려 그녀를 품속에 가두었다.
“네가 그렇게 말하면, 내가 어떻게 사형을 진행시키겠어. 눈을 그렇게 동그랗게 뜨고서 나한테 상처받지 말라고 말하면.”
“그게…….”
“다 알고서 그런 거잖아. 속일 생각 마.”
아직 겨울이 분명한데도 살랑살랑 미풍이 불어왔다. 머리카락이 흔들리며 하얀 목덜미가 드러났다. 필릭스 쿠아란이 잔머리를 살살 만져 대는 사이, 니아가 그 틈을 노려 그의 품속에서 탈출했다.
“저도 할 말이 있어요.”
니아가 숨을 들이쉬고는 턱을 치켜세웠다.
“일정을 취소시키는 게 어딨어요?”
“내가 언제?”
그가 발뺌하려 들자 니아 프레슬리가 허, 하곤 힘을 조금 실어 그의 가슴팍을 툭 쳤다.
“매번 황제 폐하와 거래를 한 거죠? 이번에 소르몬으로 가지 않게 만든 것, 다 공작님이 그런 거라는 거 알고 있어요. 다 들었다고요.”
“다 듣다니, 누구한테?”
살살 꼬드기듯 물었으나 니아는 넘어가지 않았다.
“아무튼 앞으로는 그러지 마세요.”
애매하게 웃는 필릭스에게 니아 프레슬리는 덧붙였다.
“걱정이 되면 저한테 말하세요. 같이 상의하면 되잖아요.”
그제야 필릭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앞으로는 그렇게 할게.”
“좋아요.”
서고에서 책을 열심히 뽑고 넣기를 반복하던 니아가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근데 어떤 거래를 한 거예요?”
“응?”
“황제 폐하랑 둘이서요. 소르몬에 가지 못하게 하는 정도면, 어느 정도 거래를 해야 하는지 궁금해서요.”
필릭스는 말해 줄까 말까 입을 달싹거렸다. 니아의 손이 찰싹, 입술을 때리고 멀어졌다.
“말해 줘요, 당장.”
필릭스 쿠아란이 진심으로 중얼거렸다.
“혼날 것 같다.”
“혼날 것 같다고요?”
“그때 조금 흥분해서, 평소보다 조금 더 손해 보는 장사를 했거든.”
그래도 말은 듣고 나서 화를 낼 요량으로 니아 프레슬리는 천천히 되물었다.
“어떤 거래를 했는지 말해 줘요.”
필릭스 쿠아란이 어깨를 들썩였다.
“속국인 틸란 왕국이 말썽인 모양이야. 처리를 부탁하더군. 심한 정도는 아니고, 뭐라더라, 산산이 짓밟으라고 했던가.”
“틸란 왕국이라면…….”
니아 프레슬리는 대륙의 지도를 머릿속으로 샅샅이 훑었다. 번쩍 번개가 허공을 할퀴듯 정답이 떠올랐다.
“예전에 공작님이 대승리를 거두었던 전투에 참여했던 연합군 중 하나 아닌가요?”
“맞아. 그 전투 이후 연합군은 와해됐고, 틸란 왕국은 제국에게 충성을 맹세했지.”
니아가 미소를 지운 채 물었다.
“……전쟁을 열겠다는 거예요?”
“전쟁은 아니야. 겁을 주러 가는 것 정도지. 그 정도로 수지가 맞지 않는 거래는 아니었어.”
“하지만, 그래도 멀리 떠나야 하는 거잖아요. 맞죠?”
누가 보아도 내키지 않는 얼굴이었다.
“겨우, 내가 소르몬으로 가지 않는 조건으로 그런 거래를 하다니…….”
“어려운 일이 아니래도.”
“쉽게 말하지 말아요. 그래도 기사단을 제대로 꾸리고, 오랜 시간 원정을 가야 하잖아요.”
니아 프레슬리가 고개를 숙인 채 낮은 목소리로 꿍얼거렸다.
“기다리는 사람은 생각도 하지 않고서…….”
아차 싶어 필릭스는 변명을 하기 시작했다.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그런 일이라면 허락도 하지 않았어. 국경까지 며칠 걸리지 않지. 돌아오는 건 그보다 더 빠를 테고. 그리고…….”
“그리고요?”
“네 말대로야. 작게 기사단을 꾸려서 보내도 되는 일이지.”
니아 프레슬리가 휙, 고개를 들었다.
“그 말은, 공작님이 직접 가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에요?”
“그래. 그래도 된다는 의미야.”
니아 프레슬리의 눈동자는 어느새 안심으로 반짝거리고 있었다.
“미워요. 그것부터 미리 말해 줬으면 됐잖아요.”
“널 두고 내가 어딜 가겠어.”
필릭스가 니아를 꼭 끌어안았다. 서고를 청소하러 들어오려던 시종이 그와 눈이 마주치고 놀라 달아났으나, 니아에겐 말해 주지 않았다. 민망해서 떨어져 나갈 것이 분명한데, 그는 그게 싫었다.
좌우로 흔들거리던 니아가 아까보다 훨씬 안정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누구를 보내려고요?”
“부단장을 필두로 꾸려야겠지.”
“웨이 부단장님이라면 믿을 만하죠.”
“믿을 만하다고?”
필릭스 쿠아란의 목소리에 살짝 날이 섰지만 니아는 눈치채지 못했다.
“그러고 보면 너는 부단장을 꽤 좋아하는 것 같던데.”
“글쎄요. 존경하는 것 아닐까요?”
“존경?”
필릭스 쿠아란의 얼굴에 못마땅한 빛이 어렸다. 이번엔 니아 프레슬리가 눈치챌 정도는 되었다.
“이상한 데 힘 빼지 말아요. 옛날에 공작님이 오랫동안 전쟁터에 가 있을 때, 공작님 소식이라면 뭐든 사 모았단 말이에요. 그 소식에 항상 부단장님이 함께하시던걸요.”
“그래도 존경이라니.”
조각 같은 얼굴에 금을 있는 대로 내고서, 필릭스 쿠아란은 용납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저 존경하는 사람 많아요.”
“누구?”
“앞에 계신 분이요.”
창피도 모르고 필릭스 쿠아란이 씨익 웃었다.
“왼팔의 영웅이잖아요.”
니아 프레슬리는 한때 그가 가졌던 별명으로 그를 불렀다. 입 밖으로 내니 민망하고 웃겼다.
“이제는 아니지.”
양팔을 들어 보이는 그를 보며 니아는 키득거렸다.
니아 프레슬리는 행복했다. 이렇게나 행복해도 될까, 너무 행복해서 오히려 두려울 만큼.
이제 그녀를 괴롭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