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 필릭스 쿠아란의 생일 (69/75)

9. 필릭스 쿠아란의 생일

리바론 기사단은 분주했다. 아무도 시킨 적이 없지만, 그들은 공작의 생일파티를 준비 중이었다. 부단장 포말라드 웨이를 필두로, 새벽의 연무장은 해가 뜰 때까지 발소리로 쿵쾅거렸다.

“사이먼, 왜 그래. 너답지 않게?”

깃발과 어디서 구한 것인지 모를 반짝이는 모자를 들고 온 아이몬드가 물었다. 파티라면 사족을 못 쓰는 사이먼 캐치가 오늘따라 시들했다.

“이건 다 쓸데없는 짓이야.”

“뭐가? 공작님의 생신 연회를 여는 게?”

“그래. 아주 바보 같은 짓이라고.”

사이먼 캐치는 정말로 이해가 되지 않는지 펄럭거리는 종이 장식을 발로 툭툭 찼다.

“사이먼, 이 자식아. 일찍부터 깨웠다고 시위냐? 공작님의 생신 파티를 여는 데 돕지는 못할망정, 입술이 댓 발 나와 있는 놈은 너뿐일 거다.”

아이몬드가 부단장에게 이르겠다며 휙휙 주위를 둘러보는데, 사이몬이 풀쩍 뛰어올라 아이몬드의 목덜미를 잡아챘다.

“억, 억…….”

“아이몬드, 잘 들어. 공작님은 이런 걸 좋아하지 않으셔. 이런 화려한 파티 같은 거 말이지. 심지어 시꺼먼 사내놈들이 준비하는 파티잖아. 너라면 좋겠냐?”

“이거 놓고 말해, 사이먼 캐치!”

컥컥대는 아이몬드를 한심하게 바라본 사이먼은 슬쩍 힘을 풀었다. 붉어진 낯으로 사이먼을 죽일 듯 쳐다보던 아이몬드가 화를 참으며 물었다.

“싫어하실 건 또 뭔데?”

“바보 같은 것들. 공작님은 어렸을 때부터 생일파티는 열지 않으셨어. 작년에도 하루 휴식하신 게 전부란 말이야.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어?”

“무슨 의미인데? 작년부터 우리가 생일파티를 열어 주기를 기다리고 계셨다는 건가?”

사이먼이 뚫어져라 아이몬드를 쳐다보았다. 아이몬드는 순진한 눈빛으로 그에게 답했지만, 얼마 못 가 악을 쓰듯 비명을 내질러야 했다.

“눈은 왜 찌르는데!”

사이먼 캐치는 눈을 감싸 쥐고 방방 뛰는 아이몬드에게서 미련 없이 멀어지며 답했다.

“공작님은 자기 생일을 끔찍이도 싫어하신다, 이 말이다, 바보야.”

니아 프레슬리는 새벽녘의 하늘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오늘따라 하늘에 별이 잘 보이지 않았다. 유성 하나 떨어지지 않고, 세상을 삼켜 버리기라도 할 듯 다가오는 커다란 달도 오늘만은 흐릿했다.

“어디로 모실까요.”

시녀장이 외출 준비를 마친 니아에게 물었다.

“시녀장님, 제가 어디로 갈 것 같으세요?”

이미 답을 정해 놓고 묻는 질문이었다. 시녀장은 확신 없이 답했다.

“황제 폐하께 가실 것 같습니다.”

“황제 폐하께요?”

“네.”

“공작님께 갈 것 같지 않나요? 특히나, 오늘은 공작님의 생신인데.”

니아가 의외라는 듯 되묻다 드문드문 미소를 띠었다.

“공작님은 어차피 사형을 무를 생각이 없으시고, 남은 것은 황제 폐하뿐이니까요.”

“그렇군요.”

“성녀님은 아이가 죽는 것을 지켜만 보고 계실 분이 아니지 않습니까. 결심을 내리셨다고 하니, 아마도 그건 공작님의 뜻에 반하는 결심이겠다 생각했습니다.”

니아 프레슬리가 부정하지 않자 시녀장이 조금 더 선명해진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래서 평소보다도 시간이 오래 걸리신 게 아닙니까? 공작님께 죄송스러운 마음에요.”

니아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느리게 한 걸음씩 떼며 중얼거렸다.

“시녀장님이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공작님께서도 그렇게 생각하고 계시겠죠? 그 사람은 나를 잘 아니까.”

니아 프레슬리의 얼굴에 긴장 어린 홍조가 떠올랐다.

“가죠, 공작가로.”

필릭스 쿠아란은 발코니에 서서 한곳을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세상이 전부 잠든 와중에 연무장에서만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다른 감각을 모두 죽이고 귀를 세우면 작은 북소리가 연무장에서 들려오는 것 같기도 했다.

“아…….”

분명 웃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입에서 나온 것은 깊은 신음이었다.

며칠 내내 스트레스를 받았더니 또 팔이 말썽이었다. 이럴 때면 참는 수밖에 없었고, 사실 그리 고통스럽지도 않았다. 니아 프레슬리가 곁에 있다면 충분히 참을 수 있는 정도였다.

그러나 그녀를 못 본 날이 벌써 며칠째던가. 견디기가 점점 힘들어졌다.

“이번에도 진 것 같아.”

질 수 없다고 생각했다. 니아 프레슬리가 이번에야말로 확실히 깨달아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녀는 좀 더 조심해야 하고, 몸을 아끼는 방법도 알아야 한다. 더불어 그녀의 위치까지도.

그랬기에 황제에게 그런 추태까지 보인 것인데.

그래도…….

“하지 말걸.”

하지 말걸. 무엇을?

필릭스 쿠아란은 오른팔을 부여잡고 늪에 빠지듯 눈을 감았다.

성녀가 되는 것을 막아야 했나. 그럼 이렇게 그녀를 걱정할 일도 없지 않았을까.

필릭스 쿠아란은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어차피 그것은 그의 문제지 않은가. 니아 프레슬리는 성녀가 되어 행복하다.

필릭스 쿠아란이 후회하는 것은 다른 쪽이었다.

“화내지 말걸.”

적어도 니아 프레슬리에게 화를 내어서는 안 되는 거였다. 일주일, 딱 일주일이 지났다. 니아 프레슬리를 발견하고, 화를 내고, 납치범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그녀를 찾아가지 않은 것이. 냉정하고 단호하게 군 것이.

오늘이 무슨 날이던가.

니아 프레슬리가 십 년 동안이나 죄 없이 심장을 뜯긴 날이다.

그리고 그가 염치없이 그 심장을 십 년 동안 받아먹은 날이다. 아무것도 모른 채로. 무지는 죄가 된다.

“이젠 안 되겠어.”

오늘은 그녀를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필릭스 쿠아란은 기사단 중 한 명이겠거니 생각하며 고개를 돌렸다.

“공작님, 일어나셨습니까.”

“길리.”

집사였다. 필릭스는 망토를 집어 들어 어깨에 걸치고는 문 가까이 걸어갔다.

“들어와.”

직접 문을 열어 주는데, 길리 포바즈는 방금 일어난 듯 엉망인 꼴이었다. 덥수룩한 머리를 쳐다보는 눈길을 눈치챈 그가 민망한 듯 머리를 매만졌다.

“지금 막 전달이 와서요. 급히 알려 드려야겠다 싶어 이런 꼴로 오고 말았네요.”

“상관없으니 말해. 저 멍청이들이 또 무슨 사고를 쳤나?”

“네?”

길리 포바즈가 잠이 다 달아난 듯 눈을 깜빡였다.

“기사단 놈들이 생일파티를 준비하다 무슨 사고를 친 게 아니냐고.”

“아.”

그제야 그의 말이 이해가 된 듯 길리는 문이 열려 있는 발코니 너머를 바라보았다.

“아닙니다. 문제없이 진행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알고 계셨습니까? 절대 비밀이라고 했는데요.”

“그 녀석들 하는 일이 다 그렇지. 그래도 너무 나무라지는 마. 나름대로 애쓰는 중일 테니.”

피곤한 필릭스의 낯을 바라보던 길리의 얼굴색이 순간 변했다. 그러더니 아차 싶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취소하라고 할까요?”

“뭐라고?”

필릭스 쿠아란이 무슨 뜬금없는 소리냐는 듯 물었다.

“기사단에게 그만두라고 하겠습니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길리 포바즈는 자책하며 머리를 짚고 답했다. 모두가 들떠도 그만큼은 평정을 유지했어야 했는데. 필릭스 쿠아란에게 생일이 어떤 의미인지를 먼저 생각했어야 했다.

“공작님께서는 생일을 싫어하시니까요. 오늘 하루 누구도 방해하지 말라 이르겠습니다.”

“길리.”

“네.”

“내 문제다.”

필릭스 쿠아란이 꺼질 듯 속삭였다.

“알게 하지 마.”

길리는 차마 다음 말을 하지 못했다. 괜한 말을 꺼낸 것 때문이 아니라, 주인을 잘못 판단한 것 때문에 민망해서가 아니라, 그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홀로 감당하는 것이 늘고 있구나. 안타까우면서도 대견했다. 대견하면서도 속상했다.

필릭스 쿠아란이 나이를 먹어 가고 있었다.

“제가 잘못 판단했습니다. 죄송합니다.”

“할 말은.”

“네?”

“그 꼴로 달려온 이유가 있다고 하지 않았나.”

“아, 그게…….”

길리 포바즈는 혹여나 또 실수할까,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성녀님께서 꼭두새벽부터 마차를 준비하라 명하셨다는군요.”

그의 얼굴에 당황이 서릴 거라 예상했다. 하지만 필릭스 쿠아란은 잠잠히 웃고 있었다. 빛바랜 눈을 하고서.

“그래. 그럴 줄 알았어. 어디로 간다지?”

“아직은 알리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움직이기 시작하면 바로 연락이 오겠지요. 그것보다…… 알고 계셨습니까?”

필릭스 쿠아란은 낮은 숨을 섞어 답했다.

“알고 있었다기보다는, 기다리고 있었지.”

그는 몸을 돌렸다. 아직 떠오를 기색이 보이지 않는 태양을 기다리듯 먼 곳을 바라보는 듯했다. 희미한 안개 속에 잠기는 뒷모습이 아득했다.

순간 필릭스 쿠아란이 몸을 작게 휘청였다.

이런. 길리는 오늘 새벽이 아주 못된 새벽임을 깨닫고는 원망했다. 오늘따라 공작님이 계속 불쌍하게 보이지 않는가.

“니아는 황제에게 갈 거야. 사형을 없던 일로 만들겠지.”

“이미 결정된 일입니다. 황제 폐하께서는 공작님의 편을 들어주셨어요.”

“아니, 니아 프레슬리는 해낼 거야.”

필릭스 쿠아란이 낡은 고민을 청산하는 것처럼 중얼거렸다. 이 새벽, 낮게 잠겨 있던 그의 목소리 중 가장 밝고 가장 슬펐다.

“왜냐면, 내가 져 줄 거거든.”

‘이제 와서 왜?’라는 질문은 하지 못했다. 어차피 져 줄 거라면 왜 며칠씩이나 질질 끌었는지도.

그는 그저 한계에 다다른 것뿐이다.

새벽안개가 서서히 걷혀 간다. 아침 해가 떠올랐다.

“가야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는 정확히 알고 있었다. 필릭스 쿠아란은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확인했다. 며칠간 잠들지 못해 평소보다 배는 얼굴이 날카로웠다.

아침을 먹고, 가장 화사한 옷을 입어야겠다.

필릭스 쿠아란은 벌겋게 충혈된 눈을 천천히 감았다가 떴다. 새벽 내내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더니 눈이 시렸다.

“길리, 사원으로 가자. 거기서 니아가 황궁에서 돌아오는 걸 기다리고 있는 게 낫겠어.”

익숙한 발소리를 눈치챈 필릭스가 중얼거렸다. 새벽과는 달리 정갈한 모습의 길리가 뚜벅뚜벅 걸어 들어왔다.

“공작님, 연락이 왔습니다.”

“그래. 황궁으로 갔다지? 언제쯤 돌아오는지 알아봐.”

“아니요, 그게 아니라…… 공작가로 오고 계신다고 합니다.”

“뭐?”

“곧 도착하신답니다.”

필릭스 쿠아란이 새벽 내내 유지하고 있던 평정이 한순간에 깨졌다. 유리가 깨지듯 와장창, 소리가 난다면 고막이 울릴 정도로 그는 크게 흔들렸다.

“오고 계신다고 합니다.”

쐐기를 박는 그 말에 필릭스 쿠아란은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산란한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왜 황궁으로 가지 않았지?”

길리 포바즈가 이유를 알 리 없건만, 그는 물었다.

패배를 인정한 새벽은 평화로웠고, 곧 니아 프레슬리에게 간다고 생각하니 속도 없이 즐거웠었다. 그런데 니아 프레슬리가 그에게로 온단다.

황제를 거치지도 않고, 일주일 만에 직접.

그 입술에서 나올 말을 모르고, 그 얼굴이 지을 표정을 모르니 두려웠다.

필릭스 쿠아란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더 빨리 보겠네, 얼굴.”

두려웠다.

그래도 좋았다.

니아 프레슬리는 빠르게 움직였다. 마음이 걸음을 앞지르기라도 하고 싶은지 미친 듯 쿵쾅거렸다. 그럴수록 니아는 발걸음을 더욱 재촉했다.

“공작님.”

이렇게 쿵쿵대서야 심장이 남아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 즈음, 문 앞에 도착했다. 니아는 이미 그녀가 올 것을 알고 있을 그의 이름을 불렀다.

단단한 문에서 익숙한 나무 향이 났다. 필릭스 쿠아란의 향이었다. 그 향에는 익숙함과 그리움이 모두 배어 있었다.

“들어와.”

문을 여니 눈앞에 필릭스 쿠아란이 있었다. 니아는 숨을 들이쉬었다.

일주일이 아니었다. 꼭 일 년 만에 보는 얼굴 같았다.

“생일 축하드려요.”

니아는 빈손으로 말했다. 그러나 말로만 그의 생일을 축하하러 온 것이 아님을 알아주기를 바랐다. 달리 붙잡을 곳이 없어 치맛자락을 꼭 붙잡았다.

“미안해.”

필릭스가 기다렸다는 듯 말을 꺼냈다.

니아는 그의 체취를 깊숙이 마시기 위해 가까이 걸어갔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다가, 니아가 한 걸음을 남겨 두었을 때 날카롭게 그녀를 잡아끌었다.

그는 그의 반절은 될까 싶은 니아 프레슬리의 작은 몸에 온몸을 기댔다. 그리고 그녀의 정수리에 얼굴을 대고는 그녀의 존재를 확인했다. 낮은 숨이 몇 번이고 니아 프레슬리의 머리에 내려앉았다가 사라졌다.

“이리 와.”

더 갈 곳도 없는데 그는 다가올 것을 요구했다. 목 뒤쪽을 잡는 손길이 급했다.

니아는 울고 싶은 마음으로 그에게 입을 맞추었다. 고개를 기울이는 사이 정말 눈물 같은 것이 떨어지려 했다. 아마 그것을 받아 낸 것은 필릭스 쿠아란이 맞을 것이다.

“미안해…… 미안해.”

그가 맹세하듯 사과를 속삭였다. 니아는 그에게서 살짝씩 떨어지며 속상한 마음에 고개를 숙였다.

“걱정돼서 그랬어. 처음에는 정말, 끝까지 할 생각이었어. 정말, 정말 화가 많이 났는데…….”

그런데도 그는 겨우 일주일 만에 모든 화를 내려놓았다. 마음속 깊이 그에게 미안했다. 습관처럼 입술을 깨무는데 그가 또 니아 프레슬리를 끌어당겼다.

“그래도 내가 졌어.”

그의 다정다감한 후회가 꼭 다급한 고백처럼 들렸다.

“아마 난 널 평생 이기지 못하겠지. 평생. 난 너에게 미움받을 용기가 없다.”

니아 프레슬리는 속으로 생각했다. 미움받을 용기가 없는 것이 어디 그뿐일까. 니아 또한 같은 마음으로 그에게로 왔다.

“사형을 취소하라고 말할게. 네가 그것 때문에 화가 많이 난 거 알아.”

“아니에요.”

부정의 한마디에 필릭스 쿠아란의 고백이 정지됐다. 그는 의문 어린 눈으로 니아를 바라보았다. 떨리는 눈동자는 니아의 입술을 좇았다.

니아 프레슬리가 숨을 한번 들이쉬고 말했다.

“내가 졌어요.”

“그게 무슨 말이야?”

“잘못했어요, 도련님.”

니아 프레슬리의 양손이 필릭스 쿠아란의 손을 나붓이 덮었다.

“제가 잘못한 게 맞아요. 이번엔 정말 제가 잘못했어요. 몸을 함부로 하면 안 되는 거죠. 성녀니까. 그리고 당신이 걱정하니까요.”

니아 프레슬리의 눈이 고요히 그에게로 향했다.

“너무 오래 힘들게 해서 미안해요. 그러니 이번엔…….”

“니아.”

“뜻대로 하세요.”

필릭스의 심장이 툭, 땅으로 떨어졌다. 예상치 못한 전개에 그는 할 말을 잃고, 혹여나 이것이 꿈인가 의심했다.

니아 프레슬리가 담담히 중얼거렸다.

“도련님이 상처받지 않는 게 내겐 가장 중요하니까요.”

클라우디아 엘로이는 온실로 들어서며 옷을 스르르 풀어 헤쳤다. 유리온실에 장갑, 망토, 단단히 머리를 고정시켰던 장신구, 푸르푸앵과 신발이 그녀의 그림자처럼 차례대로 늘어섰다.

물장구치듯 의자로 향한 클라우디아는 신이 나는 듯 의자 위에 퐁당 내려앉았다.

“폐하, 정무를 보실 시간입니다.”

따분한 목소리에 클라우디아는 싱긋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여기서 할래.”

그녀는 고집스레 말하고선 어깨를 으쓱거렸다. 시종장은 토를 달지 않고 그녀 앞에 서류를 가득 올렸다.

익숙하게 종이를 넘기던 손길이 잠시 멈칫했다.

“그렇지, 사형.”

“성녀 납치범의 사형 말씀입니까?”

눈치 빠른 시종장이 물어 왔다. 클라우디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골치가 아파.”

“진행하시는 것 아니었습니까?”

“아니, 보류.”

클라우디아 엘로이가 고개를 저었다.

며칠 전 필릭스 쿠아란 공작이 다녀간 것을 보았던 시종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공작이 사형 건에 대해 쐐기를 박고 간 것으로 알고 있었다.

“아니, 아니었어. 연애 상담이나 하러 왔지.”

클라우디아 엘로이는 그날만 생각하면 진절머리가 나는지 눈살을 찌푸렸다. 이내 해밝은 표정을 되찾은 그녀는 가볍게 중얼거렸다.

“아마 사형은 없을 거야.”

“네?”

“겨우 소르몬으로 보내지 않는 걸로 만족할 거라고, 그 바보는.”

클라우디아가 손을 한번 까딱이자 시종장은 그녀에게로 달려왔다.

“새벽에 기별이 왔어. 니아 프레슬리가 필릭스 쿠아란을 만나러 갔다던데.”

맞혀 보라는 듯 클라우디아 엘로이가 미소 지었다. 홀로 모든 햇살을 머금은 성숙한 여인처럼 화사하게, 그리고 속내를 숨기고 있는 장난스러운 뱀처럼 무시무시하게.

시종장이 입을 벌리려는 찰나, 클라우디아가 그의 대답을 가로챘다.

“두 사람이 화해할 거라는 의미야.”

“사형은…….”

“당연히 없지. 필릭스 쿠아란은 그럴 배짱이 없거든. 니아 프레슬리에게 미움받을 배짱이.”

클라우디아는 후후 웃었다.

“나만 고생이지. 성녀 납치범에게 사형을 취소할 만한 명분이 필요하니까. 더불어 성녀 납치범에게 사형에 준하는 벌을 내리기도 해야겠고.”

시종장이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준비하겠습니다.”

만족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클라우디아는 음을 섞어 중얼거렸다.

“귀찮게 한단 말이야, 참.”

두 사람의 사랑놀음이 귀찮았다.

“그래도 봐줘야지.”

울고불고 난리 칠 것이 귀여워서, 클라우디아 엘로이는 그냥 넘어가 주기로 했다.

“뜻대로 하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

필릭스 쿠아란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알아요.”

필릭스는 망설였다. 독점욕과 이기심 사이에서, 그는 제 이기심을 그럴싸하게 포장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아무도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나를 납치한 그 아이도, 도련님도요. 하지만 한 명을 선택해야 한다면, 저는 도련님이에요.”

목마름을 채워 주듯 듣고 싶은 말만 쏟아 내는 니아 프레슬리를 향해, 필릭스 쿠아란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마법을 쓰지 않았으면 좋겠어. 날 불안하게 하는 일정 같은 것도 없었으면 좋겠어. 무엇보다 네가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고, 너 스스로 네가 다치는 걸 가볍게 여기지 않았으면 좋겠어.”

듣기 싫다는 얼굴을 할 줄 알았던 니아는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물꼬가 트인 듯 말이 이어졌다.

“실은 네가 성녀가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그럼 나는 널 지키기 더 편했을 테고, 우리는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할 수 있을 테니까.”

니아 프레슬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심을 담은 눈동자가 고스란히 그에게로 향하자 살갗이 따끔하게 덴 기분이었다.

“내가 너무 몰라줬군요.”

오늘의 니아 프레슬리는 정말 이상했다. 정말 그녀의 전부가 필릭스 쿠아란인 듯 굴었다. 무엇이든 들어줄 것 같았고, 무엇이든 이해해 줄 듯했다.

“니아, 나는…….”

이런 말을 해도 될까, 생각하는 순간에 이미 입은 열려 있었다.

“나는, 내 생일이 너무 싫어. 생일이 돌아오는 겨울이면 미칠 것 같아.”

적막이 흘렀다. 불안해서 다음 말을 하지 않는 시간이 길어졌다. 그러나 이미 시작해 버린 말이었다.

“네가 보낸 십 년과 내가 보낸 십 년이 떠올라. 아무것도 모른 채 보낸 시간들을 생각하면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야. 괜찮다가도 그 생각이 나면 슬프고 무력해져.”

마음속 해묵은 진심을 꺼내기 시작하자 태도가 어수선해졌다. 부모에게 잘못을 털어놓는 어린아이처럼 의지와는 상관없이 숨이 차고 다리가 떨렸다.

그리고 이런 모습을 니아 프레슬리에게 보이고 있다는 것이 가장 신경 쓰였다.

“네가 나를 사랑하는 게 정말 기적 같아. 하지만 그래서 언제고 내게서 멀어질 수 있을 것 같아. 눈을 뜨면 이건 다 꿈이고, 정신을 차리면 지옥일 것 같아…… 불안해.”

닳고 닳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는 그래. 네가 다치거나, 네가 떠날까 봐.”

속내를 다 말하고 말았으니, 이제 남은 것은 니아 프레슬리가 그에게 실망할 일뿐이라고 생각했다.

역시나 그녀는 놀란 표정이었다. 필릭스 쿠아란은 방금 뱉은 말들을 그녀의 머릿속에서 삭제시켜 버리고 싶은 심정을 다독이며 숨소리를 골랐다.

니아 프레슬리는 언제나 손에 보이지 않는 목줄을 쥐고 있었는데, 이제는 눈에 보이는 목줄을 쥐고 있는 셈이 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언제든 그 목줄을 놓을 수 있다. 그런 위치다.

“언제부터?”

니아가 나지막이 물었다.

“네가 날 사랑한다고 말한 후부터.”

고민 끝에 니아 프레슬리가 물었다. 차근차근, 진지한 목소리로.

“다 그만할까요?”

“…….”

“제가 다 그만두면, 괜찮아지실까요?”

그런데 진지하게 묻는 그 말이 그에게는 꼭 협박처럼 들렸다. 네가 감히 그런 선택을 할 수 있겠냐고.

“도련님이 그렇게나 힘든 건, 제가 잘못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필릭스 쿠아란은 고개를 저었다. 협박이든 아니든, 답은 정해져 있었다. 그는 그저 투정을 부린 것뿐이었다.

“아니, 그래선 안 돼. 그럼 네가 행복하지 않을 테니까.”

“그럼 나는 어떡해요?”

순식간에 니아 프레슬리의 눈에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필릭스 쿠아란이 놀라 손을 뻗었을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작은 얼굴에 반짝이는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어떻게 해야 도련님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죠?”

방금까지만 해도, 필릭스 쿠아란은 스스로가 투정 부리는 아이 같았다.

“난 정말 도련님한테 상처 주고 싶지 않아서 이렇게 왔는데. 그런데도 이렇게나 많이 힘들어하고 있으면…….”

그런데 울고 있는 니아 프레슬리를 보는 순간 그는 어른이 되어 버렸다. 우는 아이를 달래 줘야 할 의무가 있는, 그런 어른.

“왜 네가 울어.”

그래서 울고 싶었던 마음은 온데간데없어지고 이제는 스르르 웃고 있다. 니아 프레슬리가 선수를 쳐 버리니 도리가 없었다.

“어떡, 하냐고요.”

니아 프레슬리가 히끅거렸다. 필릭스 쿠아란이 천천히 그녀를 품속에 안았다. 자신의 입에서 나올 리 없다고 생각한 ‘아이구’ 하는 소리가 자연히 흘러나왔다.

“그냥 사랑한다고 말해 주면 돼.”

“그걸론, 안 돼요.”

“아냐, 돼.”

“……사랑해요.”

니아 프레슬리가 품속에서 꼬물거렸다.

“매일 그렇게 말해 주면 괜찮아. 그럼 그날 하루를 온전히 살 수 있을 테니까.”

생각해 본 적 없는 말이 정답처럼 나갔다. 니아 프레슬리를 다독이기 위해 한 말인데, 뱉고 나니 정말로 정답 같기도 했다.

다독이는 시간이 길어져 갔다. 니아 프레슬리를 다독이고 있다 보니, 자연스레 그의 마음도 정리가 됐다.

“니아, 들어 봐.”

필릭스 쿠아란은 애정을 담아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오늘 내가 한 말 너무 마음에 담아 두지 마. 매번 그런 게 아니야. 그냥, 가끔 그런 거야. 특히나 오늘은 겨울이고, 생일이고. 그래서 내가 너무 과했던 거야.”

“……거짓말.”

“너를 일주일이나 보지 못했더니, 그래서 그런 거래도.”

한참이나 그의 품에 얼굴을 파묻고 울던 니아 프레슬리가 빼꼼 고개를 들었다. 눈이 퉁퉁 붓고 눈 주위는 벌게져 있었다. 그게 사랑스러워 웃음이 났다.

“왜 웃어요. 난 슬픈데.”

투정 부리는 듯한 말이 나오는 걸 보니, 니아 프레슬리도 어느 정도 감정을 추스른 게 분명했다. 안심한 필릭스는 그녀의 머리칼을 천천히 쓸었다.

“앞으로는 정말 조심할게요. 마정석 없이 마법을 쓰는 일은 절대 없을 거예요. 맹세해요.”

“약속.”

“약속.”

필릭스가 말하자 니아가 입술을 쪽 하고 부딪혔다.

“예외가 있잖아.”

“다칠 것 같을 때. 날 위해서.”

“그래, 착하다.”

“그거면 돼요? 뭐든 더 말해요. 뭐든.”

재촉하며 니아 프레슬리는 콧방울을 들썩거렸다. 울고 난 후라 얼굴이 참 꼬질꼬질했다. 필릭스 쿠아란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없어.”

“생각나면 말해요. 언제든.”

니아 프레슬리가 매번 이렇게 굴었다면, 어쩌면 필릭스는 그의 모든 것을 그녀에게 주었을지도 모른다. 이미 모든 것을 주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줄 것이 남아 있나 보다.

원한다면 영혼이라도 바치고 싶은 심정이다.

“……부탁이 있어요.”

속마음을 들킨 것인가. 슬쩍슬쩍 눈치를 보던 니아가 입을 열었다. 지금의 마음이라면 어떤 부탁이든 들어줄 것 같아 스스로도 두려웠다. 그런 마음으로 그는 말했다.

“말해. 들어줄게.”

니아가 싱긋 웃었다.

“생일 선물을 주고 싶어요. 주게 해 주세요.”

부탁 한번 사랑스러웠다. 니아 프레슬리답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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