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최선의 선택
“성녀님!”
조안이 헐레벌떡 니아에게로 뛰어왔다.
“응?”
필릭스에 대한 고민으로 밤을 새워 얼굴이 텁텁했다. 그러나 니아는 내색하고 싶지 않아 일부러 밝게 눈을 접어 답했다.
“눈이 와요!”
“눈?”
“하늘에 구멍이 뚫렸어요.”
니아는 유리창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내가 이 정도로 정신이 없었구나.
이미 세상은 하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심지어 하늘까지도.
“폭설이네.”
니아는 가만히 중얼거렸다.
“작년처럼 눈이 온다면 좋겠어요. 아주 많이요!”
발그레한 얼굴을 하고서 조안은 수줍게 몸을 흔들었다. 아이의 탐스러운 머리칼이 물결처럼 너울거렸다. 니아는 조안의 키에 맞춰 무릎을 굽혔다.
“조안, 눈이 많이 왔으면 좋겠니?”
“네!”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 주는데, 새삼스럽게 감탄이 일었다. 아이는 이렇게나 눈을 좋아한다.
“얼마나 오래?”
“저는 매일매일 눈이 오면 좋겠어요. 너무나 아름다운걸요. 아주 하얗고 예뻐요.”
“그래, 아름답지…….”
니아는 몸을 일으킨 뒤 창문을 열었다. 손바닥에 눈이 쌓이도록 내밀고 가장 낮은 곳을 바라보았다. 손끝이 빨갛게 얼어붙었다.
“보렴, 조안. 벌써 시종들은 쓸고 닦느라 고생이야.”
“저도 빨리 도와주러 갈래요! 그리고 조금 시간이 남는다면…… 그, 눈싸움도 하고, 눈사람도 만들래요. 그래도 될까요?”
조심스러운 물음에 니아는 살포시 웃었다. 그러다 속삭였다. 내색하고 싶지 않았지만 목소리에 물기가 묻어났다.
“조안, 폭설이 길어지면 백성들은 힘들어진단다.”
“왜요?”
순수한 답변이 돌아왔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날들이 길어지니까.”
조안은 열심히 니아의 눈치를 살폈다. 아름다운 눈이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지금 풍경과 그림처럼 조화로운데, 왠지 슬퍼 보였다.
“힘드세요, 성녀님?”
조안은 눈이 쏟아져 들어오는 창을 닫았다. 니아는 물끄러미 아이를 보다가 바람 빠진 소리를 냈다.
“티가 나니? 너한테도 들켰다면, 이미 사원의 모든 사람들에게 들켰겠구나. 걱정 끼치기는 싫은데.”
니아가 허탈한 듯 말하자 조안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저만 알아요, 성녀님. 그러니 걱정 마세요.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아요. 성녀님이 슬프다는걸. 그렇지만…….”
“응?”
조안이 얼굴을 잔뜩 찡그린 채 물었다.
“왜 슬프세요? 전 성녀님이 힘든 게 싫어요. 제가 대신 아플 수는 없는 걸까요?”
니아는 손을 뻗어 조안의 정수리에 얹었다.
“너도, 너처럼 어린아이도 누군가를 위해 대신 아프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구나.”
“…….”
“아무도 상처받지 않았으면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욕심인 것 같아. 어쩜 좋을까.”
니아 프레슬리가 눈을 감고 고개를 저었다.
“성녀님, 걱정하지 마세요. 신께서는 성녀님을 사랑하시잖아요. 반드시, 반드시 도와주실 거예요.”
조안은 사랑스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래, 그래.”
힘겹지만 입꼬리가 올라갔다. 니아 프레슬리는 막연히 아이가 빨리 자라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명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넌 뛰어놀아, 조안. 어린아이들은 눈이 오면 눈싸움을 하고 눈사람을 만들 의무가 있단다. 더불어 눈썰매도 타야지. 꼭 그래야 해. 지금 내게 약속하렴.”
“네, 성녀님!”
언제 침울했냐는 듯, 조안은 치맛자락을 휘날리며 복도를 뛰어갔다.
아이가 사라질 때까지 그 뒷모습을 바라본 니아 프레슬리는 바닥에 주저앉듯 침대에 내려앉았다. 문을 닫은 창밖으로는 여전히 눈이 내리고 있었다.
‘이렇게 되면 오늘 일정은 없겠다. 폭설이니까.’
니아 프레슬리는 오늘 할 일을 모두 잃은 셈이다. 평소라면 기뻤을 테지만, 작년의 일이 생각나 쉽게 좋아할 수가 없었다. 눈이 또 길어질 수도 있다.
“오래가서는 안 될 텐데.”
니아 프레슬리는 중얼거리다 문득 무언가를 떠올렸다. 작년 이맘쯤의 기억이었다.
물방울이 찰나를 이기지 못하고 얼음이 되어 버리는 계절.
니아 프레슬리는 사원의 옥상에서 하늘에서 떨어지는 하얀 눈을 쳐다보았다. 잿빛 구름에서 추락하는 눈송이들은 사원에 소복이 내려앉아 층층이 쌓여 갔다.
니아는 넋을 놓고 남청색으로 어두워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눈이 와 우유가 섞인 듯한 탁한 남청색은 현실감을 지워 냈다.
“하늘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무섭게도 내리는구나.”
니아는 숄을 끌어당겨 머리 위로 푹 눌러썼다. 그러고는 눈이 닿지 않는 옥상 구석에 쪼그려 앉았다. 서늘한 공기가 폐 깊숙이 들어오는데 정작 마음이 간질거려 웃음이 났다.
“오후 일정은 취소겠지?”
기쁜 기색을 지우지 못하고 중얼거리는 찰나, 턱에 차가운 손이 닿았다. 니아는 희미하게 웃었다.
“오후의 일정은 취소야.”
그가 힘을 주는 대로 이끌려 바라보니, 망토를 뒤집어쓴 필릭스 쿠아란의 얼굴이 보였다. 고개가 뒤로 꺾여 필릭스의 모습이 거꾸로 뒤집혀 보였다.
“계획이 있으신가 봐요.”
“응. 네 소중한 시간이 내게 왔으니 잘 써야겠지.”
니아는 벌떡 일어나 필릭스 쿠아란의 망토 안으로 비집고 들어갔다. 서늘했던 그의 손길과는 달리 품 안이 난로처럼 따듯했다.
필릭스 쿠아란은 니아 프레슬리를 망토 안에 단단히 가둔 채 중얼거렸다.
“일주일 동안 폭설이 내릴 거야.”
“어떻게 알아요?”
필릭스가 피식대며 말을 교묘히 바꿨다.
“폭설이 내리라고 기도 중이야. 신은 내 편이니, 간절히 기도하면 들어주겠지.”
니아는 그의 가슴팍에서 꼼지락대며 속삭였다.
“눈이 많이 오길 바라요? 폭설이 길어지면 백성들은 힘이 들 텐데요.”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필릭스 쿠아란은 조용히 품에서 니아를 떼어 냈다.
“네가 소르몬에 가지 않길 바라니까.”
“지방의 사원에 방문하는 건 이미 몇 달 전부터 준비된 일정인걸요. 황제 폐하께서도 소르몬 방문을 무척 강조하셨고요. 이제부터는 매년 방문해야 해요. 그렇게 약속했으니까.”
“그 여자는 백성들을 생각하지.”
“황제 폐하시니까요.”
“나는 널 생각하고.”
니아 프레슬리는 움푹 파인 그의 눈을 응시했다. 눈이 펑펑 쏟아지는 배경 속에 홀로 시야 가득하니, 마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어쩐지 피로한 기색은 우중충한 분위기와 어울려 묘하게 예뻤다.
홀린 듯 그를 바라보다 홀린 듯 살며시 입을 맞췄다.
“멀리 가는 게 불안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무슨 일이 있겠어요? 언제나 내 곁에는 당신이 있는데. 지켜 줄 거잖아요.”
“변수가 생기는 상황들이 싫어.”
타이르는 말에 그는 투덜거렸다.
“성녀가 되고 나서 이 정도 먼 거리를 가는 건 처음이잖아. 나는 네가 언제나 여기에 있었으면 좋겠어. 내 통제가 닿는 곳에.”
통제. 니아는 낯선 단어에 눈을 껌뻑였다.
“사람들이 너를 보는 것도 싫고.”
필릭스가 부스스한 머리칼에 가만가만 입술을 내리 쪼았다. 니아는 그의 장난스러운 행동과 사랑스러운 질투에 마음이 쏠려 그 두 글자가 준 미묘함을 잊어버렸다.
필릭스 쿠아란이 니아 프레슬리의 허리를 당겨 안았다. 그의 옆구리로 파고들며, 니아는 습관처럼 그의 오른팔을 쓰다듬었다. 한참을 아기 보듬듯 쓰다듬다 그와 눈을 맞췄다.
필릭스 쿠아란의 엄지손가락이 니아의 콧등과 눈썹을 쓸고 지나가는 사이 니아는 천천히 중얼거렸다.
“도련님이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난 행복한데?”
“가끔은 아닌 것 같아서요. 내가 힘들게 하고 있는 건 아니죠?”
“이렇게 너랑 있으니 행복하다. 같이 있기만 해도 좋다.”
반사적으로 흘러나오는 답에 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도 울적하지 않고 하나도 슬프지 않은데 눈이 시려 왔다.
“왜 그래?”
필릭스 쿠아란이 놀라 한달음에 달려오듯 니아의 눈가를 빠르게 매만졌다. 눈물은 흘러내리지 않았지만, 그는 니아를 한바탕 울고 지친 사람처럼 대했다.
“어디가 아파?”
“아니요.”
“그런데 왜 이래.”
“무슨 일 없어요.”
니아 프레슬리가 고개를 내저었다. 스스로가 웃겨 정말 웃기도 했다.
필릭스 쿠아란은 울상을 짓다 웃는 그녀를 심각하게 바라보았다.
“아무 일도 없이 이럴 리가 없잖아.”
딱딱해지는 말투를 막아 내기 위해 니아는 서둘러 답했다.
“좋아해서 그런가 봐요.”
“…….”
“도련님이 점점 좋아져요. 그래서 가끔, 도련님을 생각하면 눈물이 날 것 같은가 봐요. 도련님이 행복하길 바라면 또 눈물이 날 것 같고…….”
니아가 어색하게 웃었다.
“이상하죠?”
“아니, 이상하지 않아. 나는 언제나 그랬으니까.”
필릭스 쿠아란이 낮게 중얼거리다가 문득 깨달았다는 듯 웃었다.
“아니다. 이상하네, 너.”
니아는 얄밉지 않게 눈을 흘겼다. 그가 장난을 치는 줄로만 알았던 것이다.
“네가 날 좋아해서 눈물이 날 것 같다니, 너무 이상하잖아.”
필릭스가 키득키득 웃었다.
“그래요. 우리 둘 다 이상한 걸로 해요, 그럼.”
“근데 니아, 그런 건 나만 하자.”
“네?”
“우리 둘 사이에 슬픈 일이 있다면, 그걸 슬퍼하는 쪽은 나로 하자고. 너는 행복한 쪽을 해.”
니아 프레슬리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다.
그를 생각하다 그저 조금 울컥했을 뿐인데. 가끔은 그런 날도 있을 수 있는 법이다. 니아에게는 그가 첫사랑이었고, 그러니 감정이 절제되지 않는 날도 있는 것인데.
“무슨 말이에요?”
그는 스스로도 몰랐던 정답을 말해 줬다. 그를 생각하면 눈물이 날 것 같은 이유를.
“내 팔은 신경 쓰지 마, 니아. 나는 하나도 슬프지 않고, 이 팔 때문에 불행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나는 행복해.”
니아 프레슬리는 저도 모르게 그에게 닿아 있던 손을 떼었다. 그의 오른팔에 진득하게 붙어 있던 손이었다. 당황해 말문이 막혔다.
“난…….”
“알아. 아는데, 그러지 마.”
나 때문에 아파하지 마.
니아는 하늘을 바라봤다. 눈이 왔다. 나보다 내 마음을 더 잘 아는 사람이 있다. 이번에야말로 정말로 눈이 시큰해졌다.
“도련님이 행복하면 좋겠어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면 좋겠어요. 이건 진심이에요. 몇 번을 말해도 모자라요…….”
“알지, 그럼.”
따듯한 목소리가 발목까지 쌓인 눈에 묻혔다. 겹겹이 쌓인 눈에 스르르 내려앉은 두 사람은 그대로 눈에 파묻혔다. 상상치 못한 오후였다. 눈은 소리 없이 쌓였고, 그들은 소리 없이 눈을 맞았다.
그때부터였나. 필릭스 쿠아란의 팔을 고쳐 주고 싶다는 결심을 하게 된 것이.
그날을 시작으로, 작년의 폭설은 일주일이 넘도록 계속되었다.
필릭스 쿠아란은 힘없이 중얼거렸다. 클라우디아 엘로이가 저를 얼마나 천치처럼 바라보고 있는지는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로.
“니아 프레슬리는 상처에 무뎌. 본인은 모르지만.”
“무디다고? 오히려 트라우마가 있다고 들었는데.”
처음 듣는 소리에 클라우디아 엘로이는 아픈 팔을 툭툭 허공에 치며 물었다.
“무뎌. 결정적인 순간에는 항상.”
“무디다…….”
클라우디아는 곱씹듯 그 단어를 반복하다 싱긋 웃었다.
“니아 프레슬리는 그렇게 생각 안 해. 본인이 무디다거나, 상처가 나도 괜찮다든가 하는 생각. 내가 다 읽어 봐서 알아. 얼마나 다치는 일에 민감한데. 그러니까 제발 땅굴 그만 파고 꺼져.”
그래도 필릭스 쿠아란은 고개를 내저었다.
“본인이 그렇게 믿으니까.”
“내가 잘못 봤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거지?”
클라우디아 엘로이가 날카롭게 되물었다.
“아니. 말 그대로야. 마음을 읽는 능력의 맹점이지. 그 사람의 생각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것.”
“지적 고마워.”
살기 넘치는 눈으로 클라우디아 엘로이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뱀처럼 혓바닥이 날름거렸다. 고해 성사하듯 중얼거리는 필릭스 쿠아란의 입술을 쫓으며.
“니아 프레슬리는 항상 불안해하다가도 가장 마지막에는 안심해. 결국엔 살아날 거라는 생각에.”
“음?”
클라우디아 엘로이는 이번에도 결코 동의할 수 없어 겨우 콧소리만 짜내었다.
“당장에 죽지 않는다는 생각이 그 애를 위험하게 만든다고.”
필릭스 쿠아란은 가슴이 답답한지 망토의 매듭을 풀었다.
클라우디아는 귀만 열어 둔 채 의자를 향해 갔다. 드르륵 소리가 나며 의자가 끌려왔다. 가장 폭신한 부분에 클라우디아는 옆으로 눕듯 기대앉았다.
“성녀는 그렇게 안일하지 않아. 이번 사건만 놓고 봐도, 사람을 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마력을 쓴 거잖아? 그냥 천성이 착한 것뿐이야. 그러니까 좀…….”
필릭스 쿠아란은 클라우디아의 말을 가차 없이 끊었다. 서 있는 몸은 땅바닥에 뿌리라도 박은 듯 미동이 없는데, 표정은 쉽게 구겨지는 것이 볼 만했다.
“나랑 약속했어. 마정석 없이는 마법을 하지 않기로……. 그런데 했잖아.”
“겨우 한 번이야.”
“언젠가 또 이런 상황이 오면, 쉽게 몸을 내던질 거라고. 아주 쉽게. 몸이든 마법이든.”
그는 참담한 듯 작게 실소했다.
“어쩌면 당연해. 평생을 그런 몸으로 살았으니까. 습관이겠지. 다치고 말지, 아프고 말지. 그런 생각.”
클라우디아는 하얀 손가락으로 턱을 괴었다. 그녀가 손끝으로 톡톡 두드릴 때마다 꽃망울이 피어나듯 입꼬리도 같은 방향으로 기울었다.
“그래, 알겠어. 네 사랑스러운 니아 프레슬리가 상처에 무디고, 그래서 네 마음이 찢어지는 거. 수명도 쥐똥만큼 썼지만 그래도 네 가슴이 진창 나는 거 다 알겠다고. 그래서 뭐? 나는 성녀의 일정을 황제의 권한으로 다 취소하고 다녀야 하나?”
필릭스는 마른 머리칼을 손으로 쓸었다. 자비 없이 거칠게 머리를 헤집은 손가락은 힘없이 바닥으로 툭 내리꽂혔다.
“가장 미치겠는 건, 내가 알 수가 없다는 거야.”
필릭스 쿠아란이 고개를 숙인 나머지, 클라우디아는 그의 생각을 제대로 읽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냥 목소리로 알았다. 그가 진심인 것을.
“보이지 않잖아.”
“…….”
“내가, 알 수가 없잖아. 다쳐도, 수명의 절반을 깎아 먹고 돌아와도. 나는 말을 해 주지 않으면, 알 수가 없잖아. 웃으면서 아무 일 없었다고 하면 나는 믿을 수밖에 없잖아.”
“…….”
“그런 끔찍한 경험은, 그 애가 날 위해 십 년간 심장을 줬다는 걸 모른 그 시간으로 충분해.”
클라우디아 엘로이는 눈살을 찌푸리고 잠시 생각했다.
저렇게 고통스러우면, 뭐 하러 사랑을 할까?
“눈떠.”
가벼운 명령에 우울한 모양새로 감긴 눈꺼풀이 들어 올려졌다. 삽시간에 필릭스 쿠아란의 눈동자가 클라우디아에게 파 먹혔다. 비유적인 표현이었으나, 멀리서 보면 잡아먹히기라도 하는 듯 재빨랐다.
무섭게 필릭스 쿠아란의 눈동자 가까이 다가선 클라우디아는 멀어지며 낄낄거렸다.
필릭스 쿠아란은 황제에게 아주 깊은 속내까지 읽히고 말았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이런 것이 부끄러웠다면 황제에게 오지도, 모양새를 구기는 말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일정을 취소해 줘.”
“다는 안 돼.”
“소르몬. 사원을 멀리 벗어나는 일정만. 그거면 만족할게.”
“정말 애새끼란 말이지.”
클라우디아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한풀 꺾인 목소리로 요구했다.
“내게 줄 게 있어야지.”
“…….”
“공짜는 없어. 알잖아, 공작.”
어느덧 평소의 쿠아란 공작으로 돌아온 필릭스가 답했다.
“원하는 걸 말해.”
“내가 원하는 건…….”
클라우디아가 작게 속삭였다. 필릭스 쿠아란은 고민하는 시늉조차 없이 답했다.
“좋아. 뜻대로 하지.”
“왜 일정이 이렇게 취소됐죠?”
니아는 수정된 일정이 적힌 양피지를 들고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소르몬에 피해가 크다고 합니다. 성녀님을 모실 준비를 하기가 힘든 모양입니다.”
“수도에는 하루만 눈이 내렸는데, 소르몬은 아닌가요? 작년처럼 오랫동안 폭설이 내렸다든지.”
시녀장은 바로 답했다.
“지금 소르몬으로 가기에는 시기가 적절치 않으니, 내년 이맘쯤 다시 가는 것으로 하시라는 황제 폐하의 명령이 계셨습니다.”
“음…….”
니아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문득 하나의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혹시, 공작님께서 황제 폐하를 알현하셨나요?”
시녀장이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저었다.
“저는 알지 못합니다, 성녀님.”
그녀는 망설이지 말았어야 했다. 그 순간, 니아는 무언가 있음을 알아챘다.
“시녀장님.”
“……네.”
“정말 모르세요?”
“모릅니다.”
한숨을 내쉰 니아는 작게 도리질 치며 조금 기울어 있던 자세를 바로 했다.
“시녀장님, 지금 하시고 있는 생각, 저한테 다 들려주세요. 제가 알아야 해서 그럽니다. 그게 절 돕는 길이에요.”
시녀장 세실리아는 곤란한 듯 입을 악물었다. 눈동자에 몇 번 고뇌가 스친 후, 그녀는 결심한 듯 입술을 벌렸다.
“네, 성녀님. 제 주인은 성녀님이시니까요. 공작님이 아니시죠.”
“말씀하세요.”
“저는 알지 못합니다. 황제 폐하와 공작님께서 어떤 대화를 나누셨는지, 아니 알현하셨는지조차. 하지만…….”
말끝을 흐리는 그녀를 향해 니아는 조용히 되물었다.
“그런데요?”
“아마도 그러셨을 겁니다.”
세실리아는 두 손을 공손히 모았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해요?”
“그건…….”
“그런 적이 몇 번 있는 거군요. 공작님의 부탁으로 내 일정이 취소된 적이.”
세실리아가 황급히 변명을 했다.
“공작님께서는 성녀님을 걱정하는 마음에 그러신 겁니다. 말씀을 하시지 않은 이유도, 혹시나 걱정하실까…….”
“시녀장님.”
니아 프레슬리가 나긋하게 세실리아를 불렀다. 부드러웠으나 경고 같은 호명이었다.
에메랄드 같은 눈동자가 시녀장을 차분히 응시했다. 시녀장 세실리아는 니아 프레슬리가 천방지축으로 굴 때와 어른처럼 굴 때의 차이를 알게 되었다.
세실리아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네, 성녀님.”
“사원의 주인은 나고, 내가 성녀입니다.”
“그렇습니다.”
“걱정하는 마음이 앞서 나를 속여서는 안 되는 겁니다.”
“……죄송합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니아 프레슬리는 그제야 힘겨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푹 숙인 고개를 올릴 생각이 없어 보이는 시녀장에게 말했다.
“시녀장님, 시녀장님께서는 아시겠죠. 제가 요즘 고민이 많다는 사실을요.”
바뀐 목소리에 시녀장이 천천히 고개를 올렸다. 니아 프레슬리는 조금 웃고 있었다. 하지만 오랜 시간 고민에 닳고 닳은 얼굴은 지우지 못한 채였다.
“네, 압니다.”
“며칠 동안 고민을 많이 했어요. 공작님이 오시지 않는, 이 며칠 사이 무척이나요.”
니아는 얼굴을 조금 찡그렸다. 어지러운 듯 비틀거리자 시녀장은 놀라 그녀에게로 달려왔다.
니아 프레슬리가 괜찮다는 듯 손을 내저으며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그대로 무게중심을 벽으로 모두 옮겨, 빨려가듯 기댔다.
“어린아이가 사형을 당할지도 모릅니다. 내가 괜한 짓을 해서요. 아니, 내가 현명하게 굴지 못해서요. 반성하고 있어요. 납치된 며칠간 소식을 전할 생각조차 하지 못한 것…….”
소식을 전했더라면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텐데.
니아가 한숨을 쉬고 손톱으로 손톱을 긁었다. 딱딱 소리가 불유쾌하게 울리는 도중, 니아는 용기 내듯 입을 열었다.
“이미 공작님은 내게 실망하셨죠. 내가 약속을 지키지 않고 내 몸을 함부로 했거든요.”
“……네.”
망설이던 시녀장은 결국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니아 프레슬리가 사라진 며칠 동안은 그녀에게도 지옥이었다. 아니, 사원의 시종들 모두 그런 며칠을 보냈다. 그러니 공작은 오죽했겠는가. 그가 이렇게 강하게 나오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그렇죠? 미안해요, 모두에게.”
니아는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싱긋, 예쁘게 웃었다. 그런 그녀를 향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시녀장은 갈피를 잡지 못했다.
“하지만 사람을 살린 것은 후회하지 않습니다. 그러지 않았다면 더 큰 후회를 했을 테니.”
“성녀님, 그 말씀은…….”
“저는 결정을 내렸어요. 저로서는 최선의 결정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