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 다툼 (67/75)

7. 다툼

한참 뒤, 니아 프레슬리는 자신이 필릭스 쿠아란을 이해시키는 데 성공한 것인지, 아니면 그가 더 이상 그녀의 말을 들을 가치가 없다고 여기는 건지 몰라 혼란스러웠다.

눈가에 짙게 뱄던 절망이 사라진 것은 다행이었다. 그러나 니아에게 고생했다며 안아 주는 손길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는 눈길도 없었다. 니아 프레슬리에게로 한 걸음 다가오려는 시도조차도.

그런 그를 가만 바라보고 있으니 바다 깊은 곳에 잠기는 기분이었다.

“놀랍죠? 아마 벅 프릴리가 남긴 마법서 같은데, 그게 이런 산에 남아 있다는 것도 놀랍고, 그걸 이 형제가 주웠다는 것도 놀랍고…….”

“…….”

“덕분에 사람을 살릴 수가 있었어요.”

니아 프레슬리는 일부러 더 밝게 종알댔다. 그는 이런 니아를 알 터였다. 니아보다도 더 니아를 잘 아는 그였으니까.

“어떻게 살렸는지…… 안 물어봐요? 들으면 깜짝 놀랄 텐데.”

니아는 천천히 성냥에 불을 붙여 초에 옮겼다. 어둑하던 지하실에 다시 빛이 희미하게 번졌다.

그러나 촛불은 역시나 바람에 위태로이 흔들렸고, 니아는 그녀의 등을 내어 바람을 막아서야 했다.

“도련님…….”

그는 서늘한 눈으로, 형을 지키려는 듯 앞에 선 소년을 주시했다. 어이가 없는 듯 고서를 보며 피식거리기도 했다.

눈은 등에도 달려 있다.

보지 못했으나 그의 반응을 모두 읽은 니아 프레슬리는 결국 표정을 구겼다. 정의하기 힘든 감정은 서운함과 비슷했다.

“시간이 이렇게 흐른 건…… 미안해요. 내가 너무 들떠서, 며칠이 흐르는지 제대로 세지를 못했어요. 어딘지도 잘 몰라서 연락을 할 엄두도 내지 못했고요. 무엇보다 환자를 두고 가기가…….”

여태껏 중 가장 시린 바람이 불어왔다. 더불어 바람과 뒤섞인 그의 목소리도.

“니아 프레슬리.”

시작하지도 않은 대화가 단절되는 듯한 음성이 나지막하게 울렸다.

“나한테 등 돌리지 마.”

달리 눈 둘 곳이 없어 불빛을 응시하던 니아 프레슬리는 막연한 기분으로 몸을 돌렸다. 온몸의 솜털이 곤두섰다.

‘안 보여…….’

한참을 바라보고 있던 불빛 탓에 초점이 점멸하듯 붉은빛으로 깜빡였다. 필릭스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마정석을 썼어?”

겨우 돌아온 시야 속 마주한 것은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이었다. 겨우 화를 참고 있는 사람처럼, 혹은 질려 버린 사람처럼…….

“설마 마정석도 쓰지 않고 마법을 사용한 건 아니지?”

답이 없는 시간이 길어지자 필릭스는 서늘하게 눈을 치켜떴다. “거짓말은 안 돼.”

명령과 같은 말에 자물쇠처럼 잠겨 있던 입이 서서히 열렸다.

“……맞아요.”

“아, 그래.”

“하지만 너무 급해서……!”

“네 생명을 깎아서, 저 남자에게 썼단 말이지.”

필릭스 쿠아란은 다 알면서도 아니길 바랐던 사람처럼 입술을 비틀었다. 그리고 미련 없이 뒤돌았다.

뒤돌아서, 니아 프레슬리에게 등을 보였다.

그 순간 변명을 하려던 것도 까먹고 니아는 숨을 확 죽였다. 일시적으로 산소가 차단된 듯 멍해졌다.

방금 그도 이런 심정이었을까?

‘생각보다 더…….’

무척이나 익숙한 등을 보며 달려가 안아 주고 싶었다. 그의 손을 붙잡고 나직한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소리 없는 불꽃처럼 조용조용한 눈빛을 주고받고 싶었다. 그러나 너무도 낯설고, 너무도 멀게 느껴져 다가갈 수가 없었다.

코앞에 있는데도 이리 아득하게 느껴질 수가 있는 사람이었던가.

말을 잃은 사이, 필릭스 쿠아란이 밖을 향해 외쳤다.

“성녀 납치범이다!”

상황을 채 파악하지도 못했는데 일은 벌어졌다.

“연행해.”

그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기사들이 들이닥쳤다.

필릭스 쿠아란의 생일을 일주일 남겨 놓고서, 이토록 두 사람 사이에 찬바람이 부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즉, 전에 없던 냉전기였다.

필릭스 쿠아란은 공작으로서, 기다렸다는 듯 납치범에게 최고형을 내릴 것을 명했다.

제국에 성녀가 생긴 이후로 처음 생긴 납치 사건이니, 그가 말하는 것이 정답이고, 만드는 것이 곧 법이었다. 황제도 이번만큼은 성녀보다 그의 편을 들어주었다.

그는 이 나라의 공작이었다.

소년뿐만 아니라 그의 형도 벌을 피해 갈 수는 없었다. 그는 납치 혐의는 없었으나 마정석을 훔치고 허가받지 않은 마법을 사용한 죄로 감옥에 갇혔다.

니아 프레슬리는 필릭스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끝끝내 그의 결정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어린아이에게 그런 벌을 내리는 건 가혹 행위에 지나지 않으며,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아이니 다시 가르치고 반성하게 만드는 게 중요했다. 그가 그걸 모를 리 없었다.

“배우지 못했을 뿐인데!”

니아는 속상함에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이런 건 아이 하나를 두고 자존심 싸움을 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화가 났다. 그가 화를 내는 방식이 옳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정말 사이에 두고 싸우고 있는 것은 니아 프레슬리라는 사실을, 두 사람 모두가 이미 알고 있었다.

‘생명력을 쓰는 거라고?’

벅 프릴리에 대한 조사 자료를 읽으며, 배우면 배운 대로 필릭스에게로 가 종알댔던 적이 있었다. 마정석 없이 마법을 쓰는 것은 생명력을 사용하는 거라는 걸 알게 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니아는 큰 고민 없이 필릭스에게 평소처럼 그 말을 전했다.

그가 그렇게 놀랄 줄 모르고, 가볍게 지나가듯 말한 것이 화근이었다.

‘그럼 지금까지…….’

그는 말문이 막혀 한동안 멍해 있었다. 패닉에 빠진 게 분명한 그를 보며 니아는 당황해 변명하듯 그를 다독였다.

‘많이 사용한 게 아니니까 괜찮아요. 벅 프릴리도 셀 수 없이 많은 마정석을 만들어 내다 모두 소진한 거라고 하니까……. 그에 비하면 저는 마법을 배운 것도 그리 긴 시간이 아니고, 학생 때도 거의 마정석을 사용했으니까요.’

‘…….’

‘그러니까, 따지자면 소진된 건 며칠 정도겠죠.’

‘수명을…….’

끝내 말을 잇지 못하는 그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니아를 바라보는 눈동자는 바다 위 일렁이는 해처럼 흐릿했다.

‘어떻게…….’

멍하던 그가 돌연 초조하게 다그쳤다.

‘다시는 마법을 쓰지 마, 니아.’

‘마법을 사용할 땐 마정석을 꼭 사용할게요. 걱정 말아요.’

니아 프레슬리는 재빨리 대답했다. 그러나 그는 전혀 안심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아니, 마정석도 안 돼. 마정석을 쓰다가 네 마력을 쓸 수도 있잖아. 너 몇 번…… 그런 적이 있어. 마정석을 아끼려다가 네 힘을 쓰거나, 아니면 마정석이 소진된 걸 눈치채지 못하고 계속 마법을 이어 갔던 적.’

필릭스 쿠아란이 기억을 헤집어 니아 앞에 가져다 놓았다. 니아는 본인도 잘 기억나지 않는 일을 말하는 그를 보며 어설프게 웃었다.

‘아예 마법을 쓰지 말라고요? 하지만 그럼 난 아무 일도 할 수가 없는걸요.’

그녀가 늘 하는 연구도, 가끔 사람들 앞에서 보여야 하는 마법도 모두 하지 말라는 의미인가? 평생?

니아가 멀뚱히 그를 바라보며 원하는 답을 내놓지 않자 필릭스가 갑자기 태도를 바꾸었다. 불꽃 같던 눈이 금세 촉촉하게 젖어 들고, 정신 사나운 어린아이를 타이르는 듯한 목소리가 빠르게 이어졌다.

‘제발. 응? 마법사를 붙여 줄게. 원하는 만큼 부리게 해 줄 테니 앞으로 마법을 쓰지 않겠다고 맹세해. 그 편이 지금보다 더 편할지도 몰라. 마법을 쓰고 나면 항상 피곤해했잖아.’

‘…….’

‘대답해, 응?’

하지만 타이르듯 말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평정심을 잃었다. 더 정확히는 연기력을 잃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니아 프레슬리…….’

필릭스 쿠아란은 자꾸만 니아에게 긍정을 종용하고 다그쳤다. 그러나 니아는 거짓으로라도 알겠다고 말할 수가 없었고, 그는 그렇게 내내 안절부절못할 뿐 어떤 성과도 얻을 수 없었다.

‘이건 절대 내가 양보할 수 없는 문제야. 아무리 네가 싫다고 해도 이건 안 돼.’

그는 그렇게 무척 강고했다. 딱 삼 일 정도만.

‘내가 졌어, 니아. 그러니까 이런 건 그만두자. 못 견디겠어.’

마법을 쓰지 말라고 시위하던 필릭스 쿠아란은 채 나흘도 지나지 않아 니아 프레슬리에게 백기를 들었다. 그도 니아가 마법을 아예 쓰지 않는 것은 억지라는 것을 깨달은 듯했다.

‘마법을 써야 할 때는 반드시 마정석을 쓸게요. 내 수명을 사용하지 않을 거예요.’

니아 프레슬리도 그와의 싸움이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먼저 져 준 필릭스 쿠아란이 고마웠다.

‘언제든 마찬가지야. 축제에서도. 기념일에도. 어떤 행사에서든지.’

그러나 핵심을 찔러 오는 필릭스 쿠아란의 말에 니아는 조금 망설였다. 마정석 없이 마법을 할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백성들이 믿고 있는 신성이었다. 이미 증명했다고는 하나 앞으로도 몇 번이고 보여야 할 일인데.

니아 프레슬리가 한참을 고민하다, 그의 눈치를 보며 말을 꺼냈다.

‘일 년에 두 번. 가장 중요한 행사 두 번만요.’

‘니아 프레슬리!’

‘그때 말고는 사용하지 않을 거예요.’

니아가 간절하게 필릭스 쿠아란의 손을 꼭 붙잡자, 그는 고통스러운 듯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리고 마지못해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니아는 발갛게 웃었고, 필릭스 쿠아란은 겨우 웃었다. 두 사람의 차이였다.

‘한 가지, 예외가 있어.’

잘 끝난 줄로만 알았던 대화가 필릭스 쿠아란이 운을 떼며 다시 시작되었다.

‘예외요?’

‘위험에 처했을 때.’

‘아.’

니아는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 바보처럼 입을 벌렸다.

‘다치지 마. 난 네가 아픈 게 싫어. 정말 싫어. 그런 가정조차 끔찍하지만, 혹시라도 위험한 상황이 오면 마법을 써.’

‘알겠어요. 내 몸을 지키는 데 쓰라는 거죠.’

‘다치지 마.’

니아는 반복해서 말하는 필릭스 쿠아란을 향해 열심히 끄덕이다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하지만 저는 상처가 모두 아물잖아요. 마법을 써서 막는 것보다, 상처가 낫는 걸 기다리는 게 더 나은 거 아닐까요? 회복 능력은 생명이 소진되는 것도 아니니.’

비교적 명랑하게 뱉은 말과 달리 필릭스 쿠아란의 얼굴이 뭐를 씹은 사람처럼 어두워져 갔다.

그는 곤두선 눈빛으로, 말투는 부드럽게, 입꼬리는 단호하게, 그러나 말끝의 불안은 채 감추지 못한 채 말했다.

‘그렇게 생각하지 마.’

‘…….’

‘네 몸을 무기로 삼지 말라고.’

필릭스 쿠아란은 심각한 와중에 니아는 슬그머니 입꼬리를 올렸다. 하얗고 말간 미소가 그녀의 얼굴에 수채화처럼 번져 갔다. 깊게 파인 볼우물은 톡 하고 건드리면 청아한 종소리가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왜 웃어?’

제 말을 장난으로 받아들였다 여긴 필릭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가늘게 뜬 눈으로 니아를 좇았다. 니아 프레슬리는 길어지는 시선에 일부러 더 소리 내어 웃었고 바보처럼 실실댔다.

답 없이 계속 그랬다. 더도 덜도 아니고, 딱 그녀가 원하는 만큼. 그러다 나긋하게 속삭였다.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순간 필릭스 쿠아란의 입에서 너털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조차도 의도한 것이 아니었다. 오후의 빛이 넘실거린 까닭이었다. 니아 프레슬리의 주변에만.

‘뭐가 감사하길래 그렇게 예쁘게 웃어.’

아, 내가 지금 이 사람에게 예쁘게 보이는구나. 니아 프레슬리는 바로 알았다.

니아는 그의 곁에 딱 붙어 섰다. 잠시 그의 몸 쪽으로 고개를 기울이는 듯하다가 기습하듯 올렸다. 익숙한 나무 향 같은 것이 코끝으로 흘러들어 왔다.

그러나 그의 목덜미를 지나 니아 프레슬리가 발견한 필릭스 쿠아란의 표정은 예상과는 달랐다.

웃는 듯 보이기도 했고 우는 듯 보이기도 했다.

‘……보지 마.’

그가 갈피를 잡지 못한 얼굴로 속삭였다. 타인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단정치 못한 낯. 니아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왜 그럴까? 나는 웃고 있는데, 왜 그는 편히 웃지를 못할까.

니아 프레슬리는 느리게 알았다. 사랑하는 사람이 마음처럼 되지 않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스러워 짓는 얼굴이라는 것을.

깨닫자마자 니아 프레슬리는 말없이 그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마음속으로 수도 없이 그녀가 미소 지은 이유에 대해 답하며.

네 몸을 무기로 삼지 말라는 그의 간곡한 말 한마디가 듣기 좋아 웃었다. 걱정하는 말 속에 진심이 가득해 설렜다. 낮게 어르는 그 목소리가 순식간에 심장을 모두 앗아 갔다.

그래서, 서운하던 감정은 없고 고스란히 사랑만 남았다.

니아 프레슬리가 그 순간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른다. 두고두고 간직하고 몇 번이고 꺼내 볼 만큼 이 순간을 아꼈다.

뺨이 분홍빛으로 발그레 물들고, 설렘에 수도 없이 속눈썹을 끔뻑거렸다. 그래도 부족해 이미 파고든 그의 품속으로 여러 번 다시 파고들어야만 했다.

그렇게나 사랑한 순간이자, 혹여라도 깨질까 소중한 찰나였다.

하지만 이번엔 다르지.

니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형제가 그들 사이의 화풀이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필릭스 쿠아란은 그들이 미운 것이 아니다. 그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은 니아 프레슬리가 미운 것이다.

내가 미우면, 내게 화내야지.

“생일이 일주일 남았는데, 우리는…….”

니아 프레슬리는 창틀에 걸어 놓은 풍경을 손끝으로 톡 건드렸다. 유리로 만들어진 물고기가 허공을 헤엄치며 총명한 소리로 울었다.

현명해지고 싶었다.

니아 프레슬리는 며칠째 그녀와 아무 말 않고, 그녀를 찾지 않는 필릭스 쿠아란을 생각했다.

아무도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건 욕심일지도 모른다.

외부를 통제하는 병사들과 수많은 보안 초소들을 지나친 필릭스 쿠아란은 성큼성큼 유리온실로 걸음을 옮겼다.

그는 언뜻 보면 화가 나 있는 듯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가 불만으로 단단히 화가 나 있음을.

황제의 호위 기사에게 얼굴을 보인 그는 유리온실의 문을 벌컥 열었다. 잡초로 가득 찬 양동이를 열심히 이고 가는 황궁 정원사들 너머로 한 사람이 보였다.

황궁의 주인이자 유일하게 이 온실 속에서 다리를 꼬고 앉아 있을 수 있는 사람. 황제, 클라우디아 엘로이였다.

“도대체가.”

그녀는 필릭스 쿠아란을 보자마자 짜증스러운 듯 얼굴을 구겼다. 사랑만 받고 자란 듯 해밝은 얼굴이 금세 사나운 최상위 포식자로 변했다.

“또 뭐가 문제길래 공께서는 이 나라에서 가장 바쁜 황제를 이렇게 마음대로 알현하는 겁니까?”

클라우디아가 몸을 천천히 일으키며 손짓하자 시종과 정원사들이 고개를 숙이고는 삽시간에 유리온실 밖으로 사라졌다.

“성녀 납치 사건은 잘 해결되었고, 범인도 잡아넣었고, 공께서 원하는 대로 최고형을 부여하였습니다.”

“…….”

“사형.”

“…….”

“곧 사형이 치러질 예정이지요.”

클라우디아 엘로이는 슬쩍 필릭스 쿠아란의 낯을 살폈다. 눈동자가 잘 보이지 않아 생각을 읽는 것은 힘들었으나, 대충은 예상이 갔다.

“역시나 무를 생각이 없군요. 성녀가 좋아하지 않을 걸 알면서도. 그 납치범이라는 소년이 정말 죽으면, 앞으로 니아 프레슬리의 얼굴을 어떻게 보려고…….”

노랫말처럼 가벼운 목소리였으나 확실히 짜증이 섞여 있었다. 클라우디아는 정말로 골이 아픈 듯 붉은색 반지를 낀 손으로 머리를 짚었다.

“두 사람이 싸우면 얼마나 일이 커지는 줄 압니까? 어디 시골에서 촌뜨기들끼리 하는 연애도 아니고, 무려 성녀와 공작입니다.”

불만 가득한 얼굴로 찾아왔으면서, 필릭스 쿠아란은 입도 뻥끗하지 않았다. 대신 낮게 내리깐 눈으로 유리온실의 내부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클라우디아가 무척이나 공을 들인 온실이었다.

싸한 느낌에 클라우디아는 그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이번에 공의 편을 들어 준 건, 내 뜻과 공의 뜻이 일치하였기 때문입니다. 성녀 납치범에게 최고형을 부여해야 한다는 건 나도 동의하니까. 결코 당신의 그 유치한 마음에 동조해서가 아니라는 것을…….”

“그럼 너는 누구의 편이지?”

황제의 말을 끊고 너라니. 클라우디아 엘로이는 기가 차 웃었다. 예나 지금이나 그는 참 불경했다. 그녀도 덩달아 삐딱해졌다.

“누구의 편도 아니지. 원래 황제란 그래. 누구의 편도 되어선 안 되거든.”

필릭스 쿠아란의 눈썹이 들썩거리는 것을 발견한 클라우디아는 재빨리 덧붙였다.

“그래도 당신보단 니아 프레슬리가 낫지. 여자 하나에 모든 선택이 좌우되는 머저리는 아니니까. 가끔 너무 인간애가 넘친다는 게 문제지만…….”

클라우디아는 모르는 척 웃었다.

“어쩌면 이번 기회로 알았으려나? 착한 마음씨가 살아가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말이야. 괜한 오지랖을 부려서 아이 하나가 죽게 생겼잖아.”

“…….”

“사형을 내린 공작 각하가 얼마나 원망스러울까. 평생 미워할지도 몰라.”

겨울과는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붉은빛 가득한 온실 안. 그 가운데 필릭스 쿠아란이 눈을 사납게 치켜떴다. 홀로 한겨울이다. 조금만 더하면 회까닥 돌 게 분명했다.

그래, 참 위협적이기도 하다. 클라우디아가 피식거렸다.

“그 정도로 죽겠어?”

멍청한 놈. 이 정도 도발에 넘어가서 어쩌자고. 이런 식이면 니아 프레슬리가 그의 약점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게 생겼다.

깊게 한숨을 내쉰 클라우디아 엘로이는 갈무리하듯 특유의 산뜻한 태도로 중얼거렸다.

“쿠아란 공작. 그 주먹 펴고, 하려던 말 하고 얼른 끝냅시다. 계속 한 공간에 있는 게 그닥 유쾌하지가 않아서.”

죽일 듯 노려보던 필릭스 쿠아란이 순식간에 표정을 지웠다. 기다란 눈 가운데 박힌 동그란 눈동자가 요동 없이 클라우디아에게로 향했다. 클라우디아는 씨익 웃으며 혀로 핥듯 그의 눈동자를 훑었다.

“공이 그렇게 크게 일을 벌여 놓았어도 불필요한 입소문이 돌지 않게 철저히 관리했고, 심지어 사원에 호위 기사들을 배의 배로 늘리는 것까지 허락했습니다. 여기서 또 뭐가 부족합니까?”

필릭스 쿠아란은 바로 답했다.

“성녀의 일정을 줄여 주십시오.”

허, 클라우디아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공이 지금 제정신…….”

“이번 달, 소르몬으로 가는 일정을 취소해 주십시오. 그렇게 먼 곳까지 가는 일정은 앞으로도 없어야 합니다. 호위에 변수가 너무 많습니다.”

팔짱을 낀 클라우디아 엘로이는 네가 어디까지 하나 싶은 얼굴로 그를 지켜보았다. 필릭스 쿠아란은 묵묵히 계속 중얼거렸다.

“그리고 앞으로 어떤 행사에서도 니아 프레슬리는 마정석 없이 마법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이미 충분히 힘은 증명했고, 더 이상 수명을 쓰는 건 용납할 수 없습니다.”

“좀 적당히…….”

“적당히?”

그가 반문했다. 그의 눈이 순식간에 형형해졌다.

“몇 시간 눈을 떼었더니 납치당하는 성녀를 두고 적당히?”

클라우디아 엘로이는 지뢰를 밟은 기분으로 그를 쳐다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납치당해 놓고서, 제 목숨 걸어 다른 인간 목숨 구해 주고 다니는 니아 프레슬리를 두고 적당히? 마음 같아선 다 그만두게 하고 싶어!”

그의 외침이 높은 천장을 타고 퍼져 나갔다.

클라우디아 엘로이는 더 이상 웃고 있지 않았다. 얼굴 사이사이 묻어 있던 짜증도 이젠 없었다. 앞의 이 남자는 까먹은 것 같지만 그녀는 황제였다.

“조용히. 입 다물어.”

아슬아슬한 것은 넘어가 줄 수 있다. 그러나 클라우디아가 그어 둔 선을 넘어서는 결코 안 되는 것이었다.

“필릭스 쿠아란 공작.”

황제는 이미 충분히 화가 났다.

“지금 무얼 하고 계신 겁니까?”

필릭스 쿠아란이 망설임 없이 답했다.

“협박.”

“황제한테, 협박?”

그가 니아 프레슬리에게 눈이 돌아 이것 또한 까먹은 모양인데, 클라우디아 엘로이도 정상은 아니었다. 평범했더라면, 아버지의 목을 베고 황제가 되었겠는가? 이 얼간이를 반역의 선봉장으로 내세웠겠는가?

“왜, 온실을 진창으로 만들려고? 해. 상관없어.”

클라우디아 엘로이는 장미밭을 구두로 짓밟았다. 장미 가시가 종아리를 긁었고, 바닥에 떨어진 꽃잎에서 나온 즙은 핏빛이었다.

“온실. 겨우?”

필릭스 쿠아란이 비릿하게 웃었다.

“네가 나라면, 황궁을.”

“황궁을?”

클라우디아 엘로이가 서늘하게 그의 말을 따라 했다. 필릭스 쿠아란은 그보다 더 서늘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부숴 버리지 않을까?”

말이 끝나기도 전에 클라우디아 엘로이가 빠르게 필릭스 쿠아란에게로 향했다. 속도를 냈지만 결코 자세는 흐트러뜨리지 않은 채.

뚜벅뚜벅 걸어온 그녀는 손에 낀 반지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온실 바닥에 내던졌다.

반지가 유리 표면에 부딪혔는지 작게 쨍그랑 소리가 울렸다. 클라우디아 엘로이가 하늘 높이 손을 쳐들었을 때였다.

손바닥이 만든 그늘 아래, 필릭스는 맞거나 말거나 신경도 쓰지 않은 채로 중얼거렸다.

“니아 프레슬리는 몰라. 내가 어떤 마음인지.”

한순간에 실연한 소년처럼 변하는 얼굴. 그리고 내내 혼자 앓다 앓다 겨우 털어놓는 듯한 표정. 상처를 가득 담은 눈동자.

클라우디아의 미간이 꿈틀했다.

“지금 뭐 해?”

“너무 힘들어.”

“뭐가.”

“싸우는 거. 니아 프레슬리랑.”

“져 줘, 그러면.”

“……이번엔 안 돼.”

클라우디아 엘로이는 그를 살해하고 싶은 마음을 죽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다 내가 이런 걸 떠맡게 되어서는.

“일단 맞아.”

있는 힘껏 뺨을 갈기고, 그러나 필릭스 쿠아란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그녀의 손바닥만 아프다는 것을 더불어 깨달은 후, 클라우디아 엘로이는 흥미가 완전히 식어 버린 듯 헛웃음을 지었다.

“이거 완전 애새끼 아니야.”

동의하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필릭스 쿠아란이 입을 열었다. 그 전에 클라우디아 엘로이가 먼저 말했다.

“앞으로는 본론만 말해. 쓸데없이 힘 빼게 하지 말고.”

알아들었는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필릭스 쿠아란은 말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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