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니아 프레슬리 납치 사건
겨울의 가장 추운 날.
리바론 기사단은 견습 기사부터 정식 기사, 부단장과 단장 모두가 참여하는 전체 훈련을 시행했다. 전쟁터에서 돌아온 직후보다 배로 몸집을 키운 리바론 기사단이었다.
“이건 기회야. 나는 오늘 반드시 공작님께 눈도장을 찍고 말겠네.”
“어서 가자고. 오늘만 기다렸어.”
함께 전장을 누비지 않은 대부분의 견습 기사들은 이번이야말로 공작의 눈에 들 수 있는 기회라고 여기고 있었다. 훈련이라고는 하지만 필릭스 쿠아란 공작이 참여하는 이상, 대회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훈련은 연무장을 벗어나 낮은 산에서 진행되었다. 기사들은 추운 것도 모르고 씩씩하게 산을 올랐다. 보통의 이들과는 기백부터 남달랐다.
그들은 채 녹지 않은 눈이 묻은 잔디를 사각사각 밟아 평지에 다다랐다. 사각형의 과녁들이 늘어선 자리. 건초 더미와 바람의 방향을 읽기 위한 천들이 너른 하늘 아래 펄럭였다.
“자, 너무 긴장들 하지 말고.”
부단장 포말라드 웨이가 이곳저곳을 빠르게 돌아다니며 기사들의 사기를 북돋아 주기 시작했다. 그도 그 나름대로 공작에게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잘해, 잘해’ 하며 은근히 어깨를 누르고 압박하는 것을 잊지 않는 걸 보면 말이다.
반면 공작의 성향은 완전히 달랐다.
결국 모든 기사들의 어깨를 짓누르는 데 성공한 포말라드 웨이와 달리 필릭스 쿠아란은 시종일관 높은 곳 중앙에 그림처럼 앉아 그 아래를 응시할 뿐이었다.
“시작하지.”
턱을 괴고 의자에 파묻히듯 앉아 있는 모습이 한편으로는 지루해 보이기까지 했다. 확실한 건, 한참 동안 미동이 없어 까다로운 예술가가 조각한 것 같은 인상을 풍긴다는 것이었다.
그때, 산꼭대기에서부터 광풍이 불어닥쳤다. 그러나 아무도 광풍이라고 여기지 못했다. 필릭스 쿠아란이 미풍 정도 스쳐 지나간 것만 같은 착시를 주었던 탓이다.
바람이 기사들이 있는 아래까지 도달했을 때에서야 그들은 그것이 광풍이라는 것을 깨닫고 종이 인형처럼 흔들거렸다.
“이런! 건초 더미가 다 날아가잖아!”
“잡아, 잡아!”
필릭스 쿠아란이 기사단을 상대로 나름의 장난을 친 것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채 다섯이 되지 않았다. 일부러 바람에 흔들리지 않게 머리를 열심히 포마드로 고정시켰다는 것도.
그렇게 전체 연습이 시작되었고, 역시나 연습을 빙자한 대회가 본격적으로 열렸다. 이미 전우애가 쌓인 사람들끼리의 대련이라, 깊은 우정만큼의 열기가 타올랐다.
필릭스 쿠아란은 가끔 눈썹을 들썩거렸는데, 꽤나 인상적인 장면을 보았을 때 그랬다.
“방금 공작님 표정 봤어?”
“무슨 표정?”
“자네가 쌍검을 쓸 때 말이야. 잠시 웃으시던걸.”
“뭐? 정말이야? 역시 내 쌍검!”
필릭스 쿠아란은 웃었다. 쌍검이라니, 기사답지 않다며 비웃었다.
“아니, 도대체 어딜 향해 쏘는 거야? 평소에는 잘만 중앙에 콕콕 박히던 화살이 왜 엄한 지푸라기 쪽으로 날아가냔 말이야. 지금은 바람도 불지 않았잖은가. 이래서 공작님 눈에 들겠어?”
“어이, 말조심해. 공작님께서 오른팔을 쓰지 못하신다는 걸 잊은 거야? 유일하게 다시는 할 수 없는 것이 활쏘기라고. 다른 기사들은 다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고 일부러 못 쏘는 척하는 거라고.”
수십 개의 화살이 동시에 바람을 가르며 날아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과녁에 박혔다. 가히 장관이었다. 그렇게 연이어 화살이 타다닥 소리를 내며 꽂히는 광경을 바라보다 돌연 필릭스 쿠아란이 슬픈 낯을 보이자, 그들은 알아서 화살을 쌓아 놓은 건초 더미를 향해 날렸다.
필릭스 쿠아란은 슬펐다. 지금쯤 니아 프레슬리가 레오 아리데오의 편지를 전부 읽었을 터였다. 전부 읽기만 했겠는가. 좋아서 방싯방싯 웃으며 하얀 입김을 호호 불었을 것이다.
오늘로 연습 날짜를 잡은 포말라드 웨이가 참을 수 없이 미워졌다.
토너먼트 형식의 대련이 펼쳐졌다. 필릭스 쿠아란은 심심한 눈빛으로 대련을 관조했으나 눈에 띄는 기사는 잊지 않고 기억해 두었다.
마지막 한 명이 올라섰을 때, 필릭스 쿠아란은 그와 대련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귀찮았다. 무척 귀찮았는데, 부하들에게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면 그를 따라온 집사 길리 포바즈와 뭐가 다른가 싶었다.
그는 리바론 기사단의 단장이었다. 저기 모닥불 앞에서 곯아떨어진 집사 같은 것이 아니라.
직접 나선 시합은 시시하게 끝났다. 예상했던 결과였으나 생각보다 너무 빨리 끝나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애매한 분위기를 종식시키고자 필릭스 쿠아란은 예정보다 빨리 모닥불을 지피고 준비한 고기를 기사들에게 나눠 주었다. 지친 기사들은 날뛰며, 다 익지도 않은 고기를 양껏 집어넣었다.
‘음.’
필릭스 쿠아란은 슬쩍 미소 지었다.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고, 심지어 본인도 몰랐지만 실상이 그러했다.
‘으음.’
필릭스 쿠아란은 자각하지 못한 채 기사단을 바라보며 엷은 미소를 띠었다.
차츰차츰 구름이 피어올라 해를 가렸다. 필릭스 쿠아란은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해가 완전히 구름 속으로 먹혀들어 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니아 프레슬리가 마정석 연구소에서 나와 사원에 들어설 즘이었다.
분명 마정석 연구소에서 교수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는 눈을 초롱초롱 빛냈을 것이고, 마차에 타자마자 지쳐 폭신한 직물 시트에 몸을 누였을 것이다.
사원에 도착하면 잠에 취해 비틀대며 방으로 들어갈 것이고, 목욕물에 몸을 담근 뒤 막상 침대로 향하면 잠이 깨 고민하다 말똥말똥한 눈으로 서고로 향할 게 분명했다.
서고에서 공부하다 잠이 들 확률이 높으나, 그가 이제 곧 사원으로 갈 것이니 괜찮았다. 니아 프레슬리는 오늘 침대에서 자게 될 것이다.
모든 것이 눈에 보이는 듯 선명했다.
“공작님! 공작님!”
“무슨 일이지?”
다급한 외침을 들으면서도 필릭스 쿠아란은 나른한 기운을 지우지 못했다.
“성녀님이 납치되셨다고 합니다!”
니아 프레슬리가 납치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는, 분명 그러했다.
찾았다, 니아 프레슬리.
반쯤 돈 눈으로 왼손에 아무 검이나 든 필릭스 쿠아란은 숨을 헐떡였다. 며칠 밤을 새우며 쫓았는지 모른다.
일을 크게 벌이지 말라는 황제의 말에도 이성을 유지하지 못했다.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으며, 황제에게서 반드시 니아 프레슬리를 찾아내겠다는 약속을 받아 냈다.
클라우디아 엘로이는 자신 또한 성녀가 무사하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말했으나, 같지 않았다. 전혀 달랐다. 그녀의 정치적인 걱정이 그의 마음에 발끝 하나 닿을 리가 없었다.
니아 프레슬리가 마지막으로 머물렀다던 한 약품 가게. 니아가 그곳에 흘린 모자가 단서가 되었다.
제국에서 가장 뛰어난 마법사가 그것을 실마리 삼아 추적을 시작했고, 삼 일 밤을 지새운 결과 니아 프레슬리가 어디로 사라졌는지를 찾아냈다.
“아니야.”
다만 한 가지 무서운 점은, 추적 마법으로는 추적 대상의 생사 여부는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필릭스 쿠아란은 니아 프레슬리가 죽지 않았음을 확신했다. 그럴 리가 없었다.
니아 프레슬리의 특별한 능력 때문이 아니었다.
그가 이렇게 버젓이 살아 있는데 니아 프레슬리 홀로 잘못된다는 게 말이 되지 않았다.
무엇 하나 온전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머리카락 하나조차 잃었을 리가 없고, 생각보다 더 강한 사람이니 아마…….
필릭스 쿠아란의 눈에 희끗 절망이 어렸다.
강했던가?
순간 피어오른 의문에 동공이 허공을 멍하니 응시했다. 그 안에 니아 프레슬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렇게 꽤 오랜 시간을 허비했다.
다쳐도 몸이 낫는다는 이유로 험한 일을 당했으면 어떡하지? 그런 이유로 남들의 배의 배로 다쳤으면.
니아 프레슬리는 생각보다 강했지만, 또 생각만큼 약했다. 길게 뻗은 나무 같은 것이었다. 너무 곧아 부러지기도 쉬운.
필릭스는 삐거덕거리는 낡은 나무 계단을 밟아 내려갔다.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는 낡은 옷들이 그의 시야를 가린 채 바람에 흔들거렸다.
평소라면 신경도 쓰지 않았을 깨진 유리창이 꼭 그의 마음 같아 불안했다. 숭숭 들어오는 바람이 모두 그의 허파로 향하는 것 같았다. 금방이라도 공포감으로 인해 터져 버릴 듯이…….
다 쓰러져 가는 낡은 오두막의 지하실.
필릭스 쿠아란은 발로 문을 차 부쉈다. 낡고 곰팡이 슨 나무가 맥없이 부서졌다.
필릭스 쿠아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찾았다, 니아 프레슬리.
살아 있었구나. 그럴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삽시간에 얼굴이 일그러졌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엉망이 아닌 곳이 없는 니아 프레슬리의 몸 전체가 피로 얼룩져 있었다.
그제야 알았다.
찾았으나, 살아 있지만, 이번에도 구하지는 못한 것이다.
“공작님! 어떻게 여기를…….”
니아 프레슬리가 놀라 입을 벌렸다. 곧 커다랗게 벌어진 입의 꼬리가 시원스레 양쪽으로 올라갔다.
“제가, 도련님, 아니 공작님, 제가요……!”
자신의 꼴이 어떤지 생각도 하지 못한 니아는 눈을 반달 모양으로 접었다. 이 기쁜 마음을 그에게 어서 전하고 싶었다.
“도련님?”
마주 보며 환히 웃어야 할 필릭스가 웃음소리를 돌려주지 않자, 니아는 그제야 이상한 기운을 감지했다.
“왜 그래요?”
머쓱한 감정보다 걱정이 앞섰다. 니아는 그에게 성큼성큼 다가섰다.
작은 양초 하나에 의지하고 있는 지하실이라 그의 표정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마치 비가 오던 날, 오랜 기다림 끝에 재회했던 그날처럼.
니아는 멈추지 않고 그에게 꼿꼿이 걸어갔다. 작은 지하실이지만 그가 다가오지 않으니 니아가 가야 할 길이 두 배로 길었고, 불안도 두 배로 늘었다.
가까이 다가서서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차갑게 얼어붙은 그의 볼을 매만졌을 때, 두 가지를 깨달았다.
첫째, 자신의 손이 피로 얼룩져 있다는 것. 그의 볼에 볼썽사나운 타인의 피를 묻히고야 말았다.
그리고 둘째, 보석처럼 반짝거리는 눈물의 조각이 그의 볼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필릭스 쿠아란이, 울었다.
니아 프레슬리가 암흑 속에서 눈을 떴을 때,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이 오두막의 지하실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실은 오두막인 것은 몰랐고, 지하실인 것만 알았지만.
곰팡이 냄새가 섞인 공기, 창 하나 없는 벽, 공중에 걸린 거미줄. 그리고 무엇보다, 천장 위 계단에서 나는 삐거덕 소리.
한참을 지하실에 갇힌 적도 있는 니아 프레슬리다. 이 장소는 그녀에게 전혀 어렵지 않았다.
“의원님. 고쳐 주세요. 형이 죽어요. 형이 죽어요.”
마지막으로 비릿한 인상을 남겼던 소년이 지하실을 둘러보는 니아 앞에 섰다. 그는 벌게진 눈을 하고서 니아를 바라봤다.
“네가 날 여기까지 데려온 거야? 혼자서?”
소년이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도대체 어떻게, 왜 그런 건지를 물으려다 방금 소년의 말을 떠올렸다.
니아는 깨질 것 같은 머리를 부여잡고 물었다.
“형이 아파?”
“네. 아파요. 많이 아파. 의원님. 죽지 않게. 죽지 않게.”
자세히 들으니 말이 어눌했다. 가게에서 말을 아낀 이유가 그 때문인가? 아니, 애초에 니아를 납치할 생각이었다면 말이 어눌하건 말건 숨길 이유가 없었다.
문제는 소년이 니아를 의원이라 불렀다는 것이었다.
‘내가 성녀라는 걸 모르는구나.’
니아는 안도감에 한숨을 내쉬었다. 일이 커지지는 않을 테고, 이야기도 쉬워질 것이다. 의원을 납치하는 이유는 하나뿐이니까.
다친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서.
소년이 손가락으로 구석을 가리켰다. 그곳을 향해 빠르게 시선을 옮겼는데, 그 끝에 걸린 것은 이미 피를 많이 흘린 채 누워 있는 남자였다.
순간적으로 니아 프레슬리의 입에서 말이 튀어나왔다.
“안 될 것 같아.”
그러자 소년이 석상처럼 굳었다.
쓸데없는 말을 뱉은 자신을 원망하며 니아는 천천히, 다시 말을 반복했다.
“너무 많이 다친 것 같아. 난 의원이 아니야. 어떻게 살려야 하는지 몰라.”
입술을 깨물고 소년과 남자를 번갈아 보는데, 소년이 충격으로 곧 숨이 넘어갈 듯 헐떡이기 시작했다.
“죽을, 죽었, 다고?”
니아는 급히 덧붙였다.
“아니. 죽었다는 게 아니고, 잠시만. 살펴볼게. 숨 쉬어.”
니아는 벌떡 일어섰다.
남자가 죽었을까 봐 두려운 마음을 감춘 채 귀를 그의 코 가까이 가져다 댔다. 미약하지만 숨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다행이라고 가슴을 쓸어내린 것도 잠시. 이 추위에 이 정도 상처라면 곧 죽고 말 거라는 생각에 마음이 조급해졌다.
“내가 제대로 된 의원을 불러올게.”
그러나 밖으로 향하려는 니아의 발목을 잡고 소년이 절박하게 늘어졌다. 그는 강하게 도리질 치며 자신의 형을 가리켰다.
“안 돼. 안 돼. 죽어. 죽어.”
걸음을 옮기려던 니아는 떨리는 눈빛으로 남자를 쳐다보았다. 소년의 말이 맞았다. 이곳이 어디인지도 모르는데……. 니아가 의원을 데리고 돌아올 즘이면 남자는 분명 싸늘한 시체가 되어 있을 것이다.
아무리 훌륭한 의원도 죽은 사람을 살리지는 못한다.
니아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아, 신음을 내뱉다가 한순간 고개를 치켜들었다. 주먹을 쥐고, 빳빳해진 목을 소년에게 향하도록 돌렸다.
“네가 날…… 정상적으로 데리고 오지 않은 건 나중에 죄를 물을 거야.”
니아 프레슬리는 의학 지식도, 경험도 거의 전무했다. 기억나는 것은 아카데미를 다닐 때 배운 기초 의학뿐이었고, 그마저도 미미한 경상의 치료법을 배웠을 뿐이었다.
“최선을 다할게.”
그러니 믿을 구석이라곤, 그녀가 가진 마법뿐이었다.
“더 이상은…….”
모질게 추운 겨울이 살갗에 덕지덕지 달라붙었다. 그런 와중에 죽어 가는 사람을 살리려고 하다니. 딱 미치기 좋은 환경임을 부정할 여지가 없었다.
“산에서 살아남기 세트를 정독했으니 망정이지.”
니아 프레슬리는 상처가 더 악화되지 않도록 저속화 마법을 걸고, 오래전 혼자 연습해 보았던 체온 유지 마법을 기억 속에서 끄집어냈다.
생각보다 체온 유지 마법이 강하게 걸려, 놀랍게도 얼음장 같던 지하실이 금세 후끈해졌다.
방 안의 겨울이 서서히 녹아내려 갔다. 니아 프레슬리는 몸을 꽁꽁 싸매고 있던 털옷을 벗어 던진 지 이미 오래였다.
몇 시간을 꼼짝없이 환자 앞에 있었는지 이젠 가늠도 할 수 없었다. 골반과 허리가 뒤틀린 듯 고통스러웠다. 무엇보다 다리가 후들거려 서 있는 것이 고역이었다.
그러나 제일 골칫거리는, 니아와 남자에게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는 소년의 눈빛이었다.
“알았어! 알았다고.”
니아는 바닥에 주저앉으려다, 그녀를 애타게 바라보는 눈동자에 입술을 깨물었다. 소년은 니아가 남자 곁에서 한 발짝이라도 떨어질라치면, 어떻게 우리 형을 포기할 수 있냐는 눈빛으로 울먹거렸다.
“아직까지 살아 있는 걸 보면 내 방법이 아주 틀린 건 아닐 거야. 자, 이리 와 봐.”
니아는 소년의 손을 잡아끌고 남자의 얼굴에 귀를 기울이게 했다. 소년의 형에게선 처음보다 훨씬 더 강하고 규칙적인 숨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소년은 그제야 안심 섞인 신음을 토해 냈고, 니아 프레슬리도 조금 웃었다.
“일단은 잠시 이렇게 두자. 이 이상은 나도 할 줄 몰라.”
소년은 지친 낯으로 니아가 바닥에 주저앉는 것을 허락했다. 체력을 다 소모한 니아는 느릿하게 눈을 끔뻑이다 소년에게 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을 당한 거야?”
소년이 어색한 모양새로 입을 벌려 답했다.
“사냥감한테…… 당했어요.”
어절과 어절 사이에 빈 공간이 무척이나 길었으나 소년으로선 최선이었다. 니아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런 것 같더라.”
비슷한 고통을 알고 있었다.
무척 힘들 거야, 아프고. 다시 건강해진대도 사냥감에게 당한 기억은 평생 갈 거야.
그 말을 해 주려다 문득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니아 프레슬리는 자연스레 말하는 것을 포기하고 입을 다물었다.
가끔은 이러했다. 행복하다가 목구멍 속에서 불덩이가 들끓고 있는 것 같기도 했고, 녹지 않는 얼음 조각을 삼킨 것 같기도 했다. 몸은 더운데 마음이 차가웠다.
아직인가?
과거를 과거로 보내 줘야 그 자리에 미래가 오는 건데, 이럴 때면 꼭 잠식당하고 만다. 더 노력이 필요하겠다 싶었다. 삶이 끝없는 배움이듯이, 끝없는 노력이.
홀로 지하실을 밝히고 있는 양초의 불꽃이 나부끼는 것을 바라보다, 여전히 석고상처럼 굳어 있는 소년이 안쓰러워 니아는 그를 잡아당겨 바닥에 앉혔다. 그제야 입이 열렸다.
“너도 많이 놀랐겠다.”
니아는 조심스럽게 소년의 손등을 쓰다듬었다.
“그래도 다시는 그러면 안 돼. 제대로 도움을 요청해야지.”
부드럽게 말을 잇다가 어느 순간 니아 프레슬리는 얼굴을 찌푸렸다. 차분히 돌이켜 봐도 소년이 가게에서 한 일들이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렇게 어린아이가 어떻게 기사들을 따돌리고 니아를 납치할 수 있었을까?
“그런 건 어디에서 배운 거야? 갑자기 눈이 깜깜해지고, 순식간에 고독해졌어. 그런 마법은 들어 본 적이 없는데.”
갑작스러운 가정 하나가 떠올라 니아는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설마 흑마법을 배운 건 아니지? 그렇다면 다시는 사용해서는 안 돼. 배워서도 안 되고.”
하지만 마정석이 없었을 텐데. 이런 오두막에 사는 형제가 소수에게만 허락된 마정석을 구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니아의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빙글빙글 돌았다.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가 소년이 작게 중얼거렸다.
“마법이 아니라, 형이 만든 거.”
“뭐?”
“형이 만든…… 장난감.”
“장난감?”
니아가 흥미를 보이자 소년은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한참을 묵묵히 바닥을 보고 있던 소년은 니아의 손을 밀어내며 일어섰다.
“왜…… 뭘 하려고?”
소년은 대답 대신 포대 자루를 가지고 돌아왔다. 그 안에는 조각한 동물의 뼈나 덩굴식물을 휘감아 놓은 돌 같은 것들이 들어 있었다.
니아가 미간을 찌푸린 채 손을 넣어 그 안을 뒤적거리는데……. 그러다 알아낸 것은 모두 같은 문양이 새겨져 있다는 것이었다.
“책.”
니아가 집중해서 살피는 것을 힐끔힐끔 쳐다보던 소년이 불쑥 책을 내밀었다. 낡은 고서였다.
“무슨 책인데?”
작은 불빛에 기대어 천천히 책을 읽던 니아의 눈이 점차 놀라움에 커다래졌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 의심했던 것도 잠시, 전신에 찌릿찌릿한 감각이 빠르게 퍼져 나갔다.
“이걸 네 형이 배운 거구나. 이런 마법은 처음 봐. 마법을 부리는 방식도 훨씬 간단하고.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마정석이 필요했을 텐데…….”
니아에게 이것저것 다 내놓던 소년이 이번만큼은 말을 아꼈다. 그러나 니아는 금세 알겠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굳이 말해 주지 않아도 그의 표정이 정답을 말해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훔쳤구나.”
“…….”
“아무튼 좋아.”
니아 프레슬리는 소년의 머리를 이리저리 헤집고는 바르르 떨리는 눈을 감았다. 어쩌면 이 두 형제를 만난 것은 기적일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아니면 운명이든지.
“이 책에 쓰인 대로라면, 내가 네 형을 살릴 수 있을 것 같아.”
“진……짜?”
“그래. 그 전에 네가 해 줄 일이 있어. 저 장난감들 중에 나무뿌리로 만든 것 있지? 그걸 찾아 줘.”
소년이 다람쥐처럼 재빠르게 포대 안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니아는 쿵쾅거리는 심장의 박동을 느꼈다. 너무 흥분하지 않기 위해 연신 손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해야 했다.
내 연인의 팔이, 완전해지는 방법을 알아냈다.
그리고 한 가지를 또 배웠다.
갓 태어난 희망은 낡고 불온한 과거를 이겨 낸다. 오직 희망만이.
니아 프레슬리는 미소 지었다. 슬픈 기억이 마모되어 간다. 필릭스 쿠아란이 보고 싶었다.
남자의 치료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하였을 즘, 나무로 된 문이 바스러졌다. 동시에 찬바람이 지하실 내부로 훅 침입해 들어왔다.
그리고 그 너머로 발견한 것은 필릭스 쿠아란이었다.
“공작님! 어떻게 여기를…….”
니아 프레슬리는 내내 기적의 황홀함에 취해 있었기에, 그가 반갑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어쩜 이렇게 타이밍이 좋은지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제가, 도련님, 아니 공작님, 제가요……!”
남자를 구하느라 체력이 한계를 넘어선 지 오래였지만, 쓰러져도 좋으니 이 자리에서 당장이라도 필릭스의 팔을 치료해 주고 싶었다. 그만큼 신이 나고, 그만큼 기분이 좋고, 그만큼 머리가 핑핑 돌았다.
그의 표정에서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면서도 두근거렸다.
그런데 필릭스 쿠아란이 눈물을 흘렸다.
냉수를 한바탕 뒤집어쓴 기분이 들며 니아 프레슬리는 깨어났다.
급히 스스로를 돌아봤다. 손에도 피, 옷에도 피, 심지어 머리칼과 얼굴에도 피.
“아, 이건…….”
맹세컨대 니아 프레슬리의 피는 단 한 방울도 묻어 있지 않았지만,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뻔했다.
“다쳤지?”
그가 잇새로 물었다. 얼굴에 표정이 없었다.
니아가 고개를 젓자 그의 눈은 금세 상처로 얼룩덜룩해졌다. 믿지 않는 듯했다.
“다쳐서, 돌아오지 못한 거지?”
아니라는 말을 하면 할수록 필릭스 쿠아란의 얼굴이 절망에 가까워졌다. 그가 핼쑥한 얼굴을 왼손으로 쓸었다.
“다 나아서 돌아오면 된다고 생각했구나.”
“…….”
“내게 거짓말을 할 생각이었던 거야.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니아 프레슬리는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왜 그런 거짓말을 해요. 그게 아니라, 나는 이 남자를 치료해 준 것뿐이고……. 그것보다 내가 얼마나 대단한 걸 알아냈는지 알아요? 이제 난…….”
“네 몸을 무기로 삼지 말라고 했잖아!”
천둥같이 커다란 목소리가 지하실을 가득 메웠다.
분명 눈물을 한 방울 떨궜던 그의 눈동자는 이제 사막처럼 메말라 있었다. 아니, 어쩌면 혹한의 돌풍 같은 눈 같기도 했다. 그저 차가웠다.
거센 바람이 지하실을 강타하며 아슬아슬하던 촛불이 꺼졌다.
그는 고백했다.
“너무 무서웠어.”
“…….”
“또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너는 혼자 아플까 봐.”
앙상한 나뭇가지 같은 목소리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