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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기쁜 소식 (65/75)

5. 기쁜 소식

밖으로 나서자마자 살을 에는 듯한 바람이 니아에게 들이닥쳤다. 발목까지 오는 긴 털옷을 입어 몸은 바람을 막아 냈으나 귀와 코, 미처 장갑을 끼지 못한 손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모자를 쓰셔야지요.”

이가 딱딱 부딪치는 바람에 시녀장의 말에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있는데, 그것을 거절의 의미로 받아들인 시녀장이 한숨을 내쉬었다.

“성녀님, 털모자를 쓰시면 기쁜 소식 하나를 드리겠습니다.”

아이를 어르는 듯한 말투였다. 니아는 허, 숨을 내뱉으려다 차가운 공기에 급히 입을 다물었다. 이가 딱딱 떨렸다. 기쁜 소식 따위 주지 않아도 모자가 간절한 판이었다.

동상에 걸린 것 같은 손가락으로 모자를 쥐려는데, 세실리아가 성큼성큼 다가와 니아의 머리에 하얀 털모자를 씌웠다. 턱 아래에 매듭을 단단히 묶고 나서야 그녀는 한 걸음 물러섰다.

“훨씬 따듯하시죠?”

놀랍게도 귀가 털로 뒤덮이니 추위가 서서히 가셨다. 장갑을 꺼내 두 손을 열심히 집어넣은 니아는 발그레한 볼로 끄덕였다.

“장터는 잠시 들르는 것이고, 바로 마정석 연구소로 가셔야 합니다. 평상복을 입으셨으니 알아보는 사람은 많지 않겠지만,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알리세요. 기사들을 더 보내겠습니다.”

니아는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무리 여러 번 말을 했기로서니 이토록 고분고분한 니아 프레슬리를 의외라는 듯 힐끔 쳐다본 시녀장은 마부에게 턱짓했다.

“시녀장님, 기쁜 소식은요?”

혹시라도 그녀가 까먹은 건 아닐까 싶어 니아가 물었다. 시녀장은 오늘 단 한 번도 미동이 없던 입꼬리를 슬쩍 비죽였다. 니아는 기대감 어린 눈빛으로 눈꺼풀을 깜빡거렸다.

“자, 마차 안에서 읽으세요.”

그녀가 건넨 것은 낡은 종이 뭉텅이였다. 이리저리 생채기가 난 소포 같은 편지지를 발견한 순간, 니아의 얼굴이 화색을 띠었다. 그녀는 시녀장의 손에서 빼앗듯 종이를 휙 가져갔다.

“와!”

“천천히요, 성녀님.”

“편지죠? 레오에게서 온 거죠? 그렇죠?”

니아는 언제 추웠냐는 듯 편지지를 꼭 쥐고 소리 내 웃었다. 그녀 주위로 몽글몽글한 입김이 구름처럼 맺혔다. 공중에 뿌려 둔 흔적이 채 지워지기도 전에, 니아 프레슬리는 한시라도 빨리 편지를 읽고 싶어 마차로 돌진했다.

“어쩜 좋아.”

시녀장은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혹시라도 사원에 외부인이 있지는 않은지 걱정이 되어서였다. 품위 따위는 모두 잊고 마차 안으로 빨려 들어가듯 몸을 던진 성녀 니아 프레슬리. 그런 그녀를 시종장과 사원을 지키는 기사들 말고는 아무도 몰라야 했으니까.

타닥거리는 말발굽 소리를 들으며 니아는 허겁지겁 편지지를 풀어 헤쳤다. 사두마차가 출발 반동으로 인해 뒤뚱거리자 따라서 몸이 흔들렸다. 그러나 한시도 참지 못한 니아 프레슬리는 개의치 않고 투박한 끈을 잡아당겼다. 기다렸다는 듯 바닥에 새하얀 모래가 쏟아져 내렸다.

“이런!”

탄식을 뱉은 것과는 달리 표정이 즐거움으로 가득했다. 무릎 위 치마에서 반짝거리고 있는 모래알들을 바라보며 니아 프레슬리는 얼마나 사랑스럽게 웃었는지 모른다.

“이번에는 또 어디를 갔길래.”

의도치 않아도 자연스레 따듯한 온도의 말이 나왔다. 덕분에 싸늘한 마차 안의 공기가 산뜻해졌다. 다 레오 아리데오 덕분이었다.

“안녕, 니아. 너무 오랜만이지…….”

보조개를 훤히 드러내며 읽기 시작하는데, 순간 마차가 덜커덩하는 것과 동시에 익숙한 목소리가 그녀를 불렀다.

“누나?”

니아는 기시감에 얼굴을 찌푸린 채 고개를 들었다. 그녀를 누나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손에 꼽았다. 기껏해야 리바론 기사단의 소년 기사 몇 명…….

“사이먼!”

깜짝 놀라 소리 지르니 사이먼이 머쓱한 표정으로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수행 시녀는 어디 가고 네가 있어? 사원의 기사들 두 명은 지금 따라오고 있을 텐데.”

니아는 혹시 몰라 마차의 창문을 벌컥 열고는 매서운 바람을 뚫고 고개를 내밀었다. 옆에서 말을 타고 따라오고 있던 기사가 마차 가까이 말을 몰고는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니아는 고개를 저은 뒤 다시 마차 안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왜 마차에 탄 거야?”

“나도 그게 좀 민망해요.”

“뭐가?”

“기사도 아니고 수행 시녀라니. 게다가 난 곧 정식 기사가 될 몸이란 말이에요.”

“도대체 네가 왜…….”

니아는 순간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에 인상을 찌푸렸다.

“공작님께서 널 보내셨니?”

사이먼 캐치가 정답이라는 듯 히죽거렸다.

“아무래도 불안하다나 뭐라나. 머리 좋은 수행 시녀는 필요 없으니 싸움 잘하는 내가 수행 시녀를 하래요.”

“그게 무슨……. 수행 시녀의 일자리를 네가 뺏을 수는 없어.”

사이먼이 커다란 덩치를 들썩거리며 손을 내저었다. 덕분에 마차가 자갈길에서보다 더 강하게 흔들리는 기분이었다. 니아는 어쩐지 오늘 안티고네가 유달리 밝아 보였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외출복을 챙겨 입지 않았던 것도.

“이번만이에요. 저도 수행 시녀를 계속할 생각은, 그러니까 수행 시녀가 아니라 수행 기사죠. 나중에 위대한 기사가 되었을 때 수행 시녀를 했다는 게 알려지기라도 하면……. 아무튼 나는 제국에서 두 번째로 위대한 기사가 될 거예요. 가장 위대한 기사는 필릭스 쿠아란 단장…….”

“사이먼, 알았으니까 제대로 얘기해 봐.”

딴 곳으로 새려는 사이먼을 니아가 붙들었다. 사이먼은 짙게 그을려 겨울에도 홀로 여름 같은 꼴을 하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그는 춥지도 않은지 양쪽 소매를 모두 걷어 올리고 있었다. 니아는 다른 쪽으로 혀를 내둘렀다.

“그러니까 오늘같이 시녀나 호위 기사가 많이 따르지 않는 날은 위험하대요. 같이 가라고 하셨죠. 공작님이.”

“이제 단장이라고 부르지 않는구나.”

“저도 철이 좀 들었죠.”

니아는 한 손으로 머리를 짚었다. 상의도 없이 사이먼을 수행 시녀로 보내다니. 이게 무슨 전례 없는 일이란 말인가.

니아의 속도 모르고 사이먼 캐치는 바닥에 떨어진 모래를 밟으며 만족스럽게 웃고 있었다.

이 건에 대해서는 오늘 밤 필릭스와 제대로 이야기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니아는 편지지를 품 안에 집어넣었다.

“어, 왜 안 읽어요?”

“응?”

“편지 읽고 있었잖아요. 레오 형에게서 온 거 아니에요?”

사이먼 캐치는 보통은 철딱서니가 없고 순수해 보이는데, 가끔은 감이 좋았다. 왠지, 어떻게든 편지를 훔쳐본 사이먼이 과장을 한 움큼 섞어 필릭스에게 전달할 것만 같아 니아는 눈썹을 힐끗 올렸다.

“마차에 타면 우선 누나가 편지를 읽을 거랬어요. 소리 내 읽을 테니 잘 듣고, 배은망덕한 내용이 없나 꼭 알아 오는 게 오늘의 첫 번째 임무인데요.”

“배은망덕?”

니아는 가장 황당한 단어를 골라 되뇌었다. 레오에게서 편지가 왔다는 사실을 아는 건 둘째 치고, 배은망덕이라니. 어이없는 와중에 사이먼은 고개를 열심히 끄덕이고 있었다.

“네, 배은망덕. 특히나 사랑했어, 사랑해, 사랑할지도 몰라, 아무튼 과거형 현재형 미래형 아무거나 상관없이 사랑은 금지어랬어요.”

“만약에 있으면?”

“그 자리에서 찢어 버리래요.”

“…….”

“누구 덕에 여행을 다니고 있는지 명심하라면서.”

니아는 품 안에 있는 편지지를 결코 꺼내지 않을 생각으로 털옷을 여몄다.

사이먼 캐치의 눈빛이 날카로워지기 전에 니아가 먼저 물었다. 그의 주의를 돌리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왜 나는 누나야?”

사이먼 캐치가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표정을 지었다.

“네? 그거야, 누나가 누나라고 하랬으니까.”

“그거야 예전 일이지. 공작님도 이젠 단장이 아니라 공작님이라고 부르는데, 나는 그대로라는 게 말이 안 돼. 불경죄야.”

니아는 있지도 않은 죄의 목록을 조목조목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머리가 나쁜 수행 시녀 사이먼은 처음에는 믿지 않다가 니아가 항목을 더하자 점점 얼굴을 구긴 채 창백해져 갔다. 그의 관심은 금세 호칭에 쏠렸고, 레오 아리데오의 편지에 대해서는 잊고 말았다.

니아는 장터에 다다를 때까지 풀이 죽어 있는 사이먼 캐치를 보며 슬쩍슬쩍 웃었다.

실은 레오의 마지막 말을 제일 먼저 읽은 이후였다.

‘사랑을 담아, 니아.’

웃음을 참아 낼 도리가 없었다.

니아 프레슬리는 장터에 도착하자, 사이먼에게 먼저 내리라고 말한 후 마차의 문을 닫았다. 사이먼이 돌아봤을 때에는 이미 마차의 문은 굳게 잠겨 있었고, 니아는 여유롭게 편지지를 꺼낸 후였다.

“잠깐 거기서 기다려.”

사이먼이 부서질 듯 마차의 문을 두드렸고, 실제로 그 정도의 덩치라면 마차의 문을 부술 수 있었다.

하지만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마차를 부수면 불경죄에 해당한다고 말하니 쿵쿵거리는 소리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니아는 키득거리며 모래알이 묻은 편지지를 다시 집어 들었다.

<안녕, 니아. 너무 오랜만이지.

나는 지금 힌드라 사막이야. 우연히 도시로 향하는 힌드라 부족 사람들을 만나 편지를 부탁했어.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 사막에 온 이후 네게 편지를 보내기는 글렀다고 생각했는데.

그래, 알아 알아. 가장 궁금한 걸 먼저 말해 줄게. 나는 건강해, 니아. 몸도 마음도.

이 편지가 정말 너에게까지 전달된다면, 아마 그건 기적에 가까운 일이겠지. 하지만 기적은 언제고 일어나니까. 이번에도 나는 믿으며 편지를 보내.

사막은 정말 멋진 곳이야. 이런, 옆에서 동료가 딴지를 거네. 사막은 지옥이라고 고치래. 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하루에도 몇 번씩 예고 없이 모래 회오리바람이 우릴 덮쳐 오고, 강해 보이는 돌들도 쉽게 바스러지지. 이곳의 하늘은 항상 탁하고 짙어. 숨을 쉴 때면 입안에서는 금속 맛이 나고, 코에서는 오래된 먼지 향이 나. 썩은 고기들도 많아서 몇 번씩 구역질을 하게 되는데, 바꿔 말하면 이런 곳에서도 생명이 살아간다는 의미잖아? 오늘도 흰꼬리사슴을 두 마리나 봤는걸.>

니아는 다음 장으로 넘기며 조용히 웃었다. 그리고 달리 슬픈 것도 없는데 속으로 조금 울었다. 레오 아리데오가 몸도 마음도 건강하다고 말했다. 그게 아마 그토록 좋은 모양이었다.

<하루는 짧게 비가 내렸는데, 신기하지? 비가 내리면 사막의 꽃은 부르르 떨어. 너는 꽃을 좋아하니까 꺾어서 보내 주고 싶었지만, 사막에서 겨우 자라난 꽃을 꺾기가 미안했어. 대신 네가 사막을 느낄 수 있도록 모래를 보내.

넌 허겁지겁 편지를 뜯었을 테니 분명 모래가 방에 어지럽게 흩어졌을 테지. 아니, 묵직한 편지지를 받고 뜯기 전에 예상했으려나? 만약 그렇다면 축하해. 드디어 인내심을 길러 냈구나, 니아.

다행히 우리 무리에 마법사가 있어서 사막에서 겨우겨우 살아남으며 전진 중이야. 무리라고 해도 세 명뿐이긴 하지만.

하루는 모래늪에 빠졌는데, 마법사가 없었다면 꼼짝없이 모래 속으로 빨려 들어갔을 거야. 그 생각만 하면 아찔해. 네가 놀랄까 봐 말을 할까 말까 하다 적은 거야. 왜냐면 이 말을 꼭 네게 전해 주고 싶었거든.

모래 속에 갇히는데, 살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어. 미안한 얘기지만 니아, 나는 그 순간에 널 떠올리지 않았어. 웃긴 일이야. 나는 매 순간 탁한 하늘에서 너를 봤는데, 죽기 직전에는 네가 없었다니.

니아, 사막의 끝에 바다가 있대. 진짜일까? 진짜라면 나는 그 바다를 꼭 보고 싶어. 하지만 가짜라면 또 어때. 이미 나는 사막의 끝까지 가 봤는걸.

기회가 된다면 또 편지할게.

사랑을 담아, 레오 아리데오가.>

레오 아리데오는 니아에게서 멀어질수록 가까워지고 있었다. 니아는 마음으로 그것을 느꼈다. 이미 레오 아리데오는 충분했다.

입이 댓 발 나온 사이먼 캐치를 건성으로 툭툭 친 니아는 턱짓했다. 따라오라는 뜻이었다.

사이먼이 부루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저보고 앞서 걸으라고 했거든요.”

에휴, 덩치는 산만 해서는 삐친 게 분명했다. 한숨을 내쉰 니아는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그렇게 신경이 쓰였으면 본인이 올 것이지.”

“단장, 아니 공작님은 오늘 바빠요. 기사단 전체 훈련이 있거든요. 공작님 없이 전체 훈련을 진행할 수는 없으니까. 그러니까 제일 믿을 만한 나를 보낸 거 아니겠어요.”

분명 속삭이듯 중얼거렸는데, 귀는 또 얼마나 밝은지 사이먼이 툴툴대며 답했다. 니아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의문이 들어 물었다.

“넌? 너도 기사단이잖아.”

사이먼이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물끄러미 니아를 바라보다 그제야 깨달았다는 듯 입을 쩍 벌렸다.

“그렇죠. 나도 기사단이죠……? 뭐야. 뭐야!”

니아는 괜한 말을 했음을 깨닫고 자신의 입을 쳤다. 저 머리 나쁜 소년에게 굳이 알릴 필요 없는 진실을 전하고야 말았다. 그 결과, 잠들었던 본성이 깨어나고 있지 않은가.

“나만 빼놨다고? 또?”

“넌 그러고 있어. 난 먼저 갈 테니까.”

그를 바로 어르기는 그른 것 같아 니아는 몸을 움직였다. 이성을 잃은 듯 보였던 사이먼은 괴성을 내지르면서도 따라왔다. 필릭스가 왜 이번에도 다른 사람이 아닌 그를 붙여 놨는지를 알 것 같았다.

니아 프레슬리는 유리로 된 출입문을 열었다. 기묘한 끼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림과 동시에 박제된 마물의 머리가 벽에 걸려 있는 것이 보였다. 사슴과의 마물인 듯했다. 곤충의 표본들이 유리 상자 안에 줄줄이 늘어서 있는 건 이제 꽤나 익숙했고.

누가 봐도 박제 가게였다.

“이런 취미가 있었어요? 성녀가?”

아니나 다를까, 휙 가게를 한 바퀴 둘러본 사이먼이 킬킬대며 놀려 댔다.

니아는 어깨를 한번 들썩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하고 매대 위에 놓인 종을 집어 흔들었다. 종소리가 울리는 것과 거의 동시에 어린아이들이 여럿 뛰쳐나왔다.

“언니!”

“누나!”

니아는 뭉뚱그리지 않고, 보이는 아이 한 명 한 명에게 인사를 해 주었다.

“안녕, 그레즈미. 안녕, 제이콥. 안녕, 크리스타…….”

“쟤들이 여기 주인이에요? 어린 나이에 취미가 꽤 고약한데.”

니아가 반갑게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답했다.

“사냥터지기 그루가 운영하는 가게야. 이 애들은 그루의 아이들이고.”

“박제 가게요?”

“아니, 의약품 가게야.”

니아가 뭐라 뭐라 속삭이자, 주황 머리의 여자아이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서랍에서 무언가를 꺼내 왔다.

“여기가? 누구 한 명 죽어 나갈 것 같은데…….”

“마물 박제는 그루 씨의 취미야. 제국에서 포획 명령이 떨어진 마물만 잡아들이지. 아니면 곤충이나.”

“취미라고요?”

“그래. 진짜 직업은 사냥터지기가 아니라 산에서 나는 약초들로 약을 만드는 거고.”

사이먼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다가 순간 이해가 안 되는지 머리를 퍽 쳤다. 아프지도 않은지 사이먼은 그 표정 그대로 물었다.

“그래도 성녀가 이런 곳에 오는 건 좀 그렇지 않아요? 제대로 된 약사도 아닌 것 같은데. 산에서 아무거나 꺾어서 만드는 그거, 불법 아니에요?”

“아니야.”

단호하게 답하고 니아는 아이에게 값을 치렀다. 아이가 얌전히 사냥터지기 그루의 자리에 돈을 가져다 놓는 것을 보곤 니아는 챙겨 온 호박 초콜릿을 수대로 나누어 주었다.

“차라리 황실에 얘기를 하죠. 바로 필요한 약재들을 구해 줄 텐데요.”

“황실보다 여기가 더 빨라. 하루면 다 팔리고 없다고.”

“아무래도 성녀가 이상해. 좀 많이.”

사이먼이 과장되게 두 손을 들었다. 니아는 차분히 설명했다.

“내가 연구 중인 게 있는데, 시중에 나와 있는 약재보다 아르키파 용액이 더 효과가 있지 않을까 싶어서.”

“아르키파?”

사이먼이 낯선 용어에 반사적으로 물었다. 니아는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르키파는 용암 근처에서 서식하는 새 이름이야. 불사조처럼 생겼는데, 생긴 것과 달리 수명이 무척 짧지. 놀라운 건, 완벽한 새의 형상인 그것이 사실은 파충류로 분류된다는 점이야. 하긴, 그러니까 용암 근처에서 살 수 있는 걸까? 아무튼, 그래서 아르키파 용액을 얻는 게 하늘의 별 따기라고들 하는 거야. 옛날 사료들을 보면 분명 치료에 효과가 있다고 했거든. 특히나 부러진 팔다리에. 아마 뼈와 뼈를 잇는 데에 특화된…….”

“그만!”

“특화된…….”

“그만, 그만! 잘못했어요.”

“네가 물어봤잖아.”

“물어보자마자 후회했어요. 누나는 항상 이런 식이지.”

니아는 마녀처럼 후후 웃었다. 여러 마물이 박제된 가게 한가운데서 웃으니 그녀는 성녀보다는 마녀에 훨씬 더 가까워 보였다.

사이먼 캐치는 ‘이러니까 다들 마음을 못 놓지’ 투덜댔다. 백성들은 이런 마녀 같은 여자를 고귀하고 우아한 성녀로만 안다는 것이 기가 찰 노릇이었다. 얼마나 악독한 누나인데!

“빨리 마정석 연구소로 가요. 나도 이 수행 시녀 일 얼른 끝내고 전체 훈련에 가게요.”

니아도 그의 말에 동의했다. 기사단 전체 훈련에 늦게라도 사이먼을 보내 주고 싶었고, 본인도 빨리 일정을 끝낸 후 사원으로 돌아가 어제 하던 연구를 계속하고 싶었다.

‘이게 도움이 되어야 할 텐데.’

니아는 작은 병 속에 담긴, 잘 익은 베리 색의 용액을 간절히 쳐다보았다.

쾅!

그때 문에 달린 종이 급히 흔들리고 유리가 바닥을 긁는 소리가 났다. 언제 투덜댔었냐는 듯 사이먼이 재빨리 니아 앞을 막아섰다. 덩달아 긴장한 니아 프레슬리가 낮게 자세를 구부린 사이먼 너머를 숨죽이고 지켜보던 찰나였다.

누구인지를 확인하자 두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작은 한숨이 푸시시 흘렀다.

사이먼 캐치가 슬쩍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뭐예요. 얘도 여기 사냥터지기 아들이에요?”

“아니. 아닌데…….”

낯선 꼬마였다. 언뜻 소년처럼 보이는.

사이먼은 ‘뭐야’ 중얼거리더니 시비를 걸듯 말을 걸었다.

“어이, 혼자 온 거냐? 박제된 게 멋있어 보여서 들어왔을 수도 있는데, 실은 여긴 박제 가게가 아니라 약을 파는 곳이래. 사람 고치는 약 같은 거. 안 믿기지? 나도 안 믿겨.”

긴장이 풀어진 사이먼이 나불대는 사이 니아는 천천히 앞에 서 있는 사이먼을 밀쳐 냈다.

“왜 그래요?”

“잠시만.”

그가 돌연 진지해져 니아에게 속삭였다.

“가지 마세요. 모르는 아이잖아요.”

사이먼의 만류에도 니아는 천천히 걸어갔다. 어떤 본능적인 예감인지, 아니면 정말 성녀와 같은 신비한 예지력이라도 생긴 것인지. 사이먼은 끝까지 말리지는 않았다.

니아는 알 수 있었다.

“너, 다쳤구나?”

낭패한 얼굴로 거칠게 숨을 들이마시던 소년이 놀란 눈빛을 보였다. 어쩐지 지쳐 보였다. 니아 프레슬리는 이런 아이들에게 유독 약했다.

“도와줄게.”

니아는 경계심 어린 눈빛을 다독이듯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목소리는 마치 상처받은 짐승을 다루듯 나긋했다.

“……의원?”

떨리는 목소리가 잇새로 새어 나왔다. 고통을 참는 듯했다. 니아는 고개를 저었지만, 그새를 참지 못하고 사이먼이 또 입을 벌렸다.

“의원이지 그럼! 이 나라 제일가는 의원이라 봐도 될걸? 물론 본인 한정…….”

사이먼이 피식대며 장난스레 말을 흘리던 순간, 온 세상이 깜깜해졌다. 귀도 어둠에 먹혀들어 간 듯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사이먼, 사이먼?”

외쳐도 메아리처럼 돌아오는 기분. 외딴섬에 홀로 고립된 것만 같은 외로움이 순식간에 차올랐다.

이게 뭘까?

니아는 멀어지는 의식 속에서 어린 소년이 마지막 순간에 입꼬리를 올렸던 것을 기억해 냈다.

“공작님, 공작님!”

“무슨 일이지?”

답하는 필릭스 쿠아란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나른했다. 마치 꿈속에 취해 있는 듯. 그는 그의 부하들을 관조하던 시선을 시종에게로 돌렸다.

“성녀님이 납치되셨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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