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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오른팔 (64/75)

4. 오른팔

니아 프레슬리는 그녀를 짓누르는 갑갑함의 원인, 필릭스 쿠아란의 오른팔을 떠올렸다. 언제나 망토 속에 가둬 두는 필릭스 쿠아란의 오른팔을.

오른팔이 그곳에 있는지를 확인하려면 망토 깊숙이 손을 넣어 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손을 넣으면, 오른팔의 존재를 확인할 수는 있었으나 메마른 고목처럼 죽은 기운이 흘렀다. 그것만으로도 니아는 애가 타는데.

‘웨이 경, 제가 여쭤볼 것이 있습니다. 솔직하게 대답해 주셨으면 합니다.’

‘물론입니다, 성녀님.’

‘필릭스 공작님의 팔 상태가 어떠합니까?’

‘아시는 대로입니다. 제 기능을 하지 못합니다. 형태는 남아 있으나, 없다고 여기시는 게 맞습니다.’

‘압니다. 그런데 아파하시는 것 같아서요. 감각이 없으니 고통도 없어야 할 텐데. 특히 낮보다는…….”

‘밤에, 말이지요.’

니아는 사형선고를 들은 사람처럼 힘겹게 숨을 내쉬었다. 걱정에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의 팔이 예전처럼 완전해져야만 이 답답함이 사라질 게 분명했다.

필릭스가 새벽 내내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목격한 날 이후로는, 니아 프레슬리는 하루도 마음이 편한 날이 없었다. 그러니 벅 프릴리가 타인에게 치유 능력을 보였다는 내용을 보았을 때, 니아가 작은 희망이라도 모든 것을 걸어 보고 싶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언제부터입니까? 언제부터 고통스러워했죠?‘

‘아마도, 전쟁터에서부터.’

‘항상 그랬다는 말입니까? 다친 이후로 계속?’

‘고통이 심해지는 시기가 있는 것으로 압니다. 비가 오는 날이나, 정신적인 한계에 다다랐을 때 특히.’

‘왜 내게 얘기하지 않은 거죠? 나 때문에 생긴 상처인데. 말해 줘야 내가 아는데. 어째서…….’

‘성녀님뿐만이 아닙니다.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제가 전쟁터에서 우연히 공작님이 아파하시는 걸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저 역시도 까맣게 모르고 있었을 테지요.’

니아는 눈을 감고 필릭스 쿠아란의 어린 모습을 떠올렸다. 그 시절, 두 손으로 칼을 휘두르며 용맹하게 검술장을 누비던 장면을.

허무맹랑한 꿈을 꾸는 것일까?

벅 프릴리와는 시간의 간격이 꽤 있었고, 서적에 실린 내용 또한 사실인지 과장인지 거짓인지 판단이 불가능했다. 필릭스 쿠아란에게 비밀로 하고 있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괜히 그에게 희망을 불어넣었다가 배로 실망을 안기고 싶지는 않았다.

니아 프레슬리는 의자에 눕듯이 앉아 높은 천장을 응시하며 심장 부근을 어루만졌다.

“차라리 심장을 주는 일이라면 편할 텐데.”

그때의 고통이 잊힌 것이 아닌데도, 그것으로 필릭스 쿠아란이 아프지 않을 수 있다면 또 한 번 심장을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시 자라난 그녀의 심장처럼, 그에게로 가 그의 것이 된 그녀의 심장처럼. 그렇게 다시 한번 그에게 기적을 줄 수 있으면 좋겠다. 그녀의 고통으로 그의 고통을 덮을 수 있다면.

“이렇게 간절한데…….”

말끝이 흐려지고 곧 뻑뻑한 눈이 껌뻑이다 점멸했다.

니아 프레슬리는 눈가에 달라붙는 희미한 햇살을 느꼈다. 그제야 자신이 어젯밤 침실로 돌아가지 못하고 책상에 엎드려 잠이 들었음을 깨달았다.

이렇게 또 하루가 가고 말았구나.

니아 프레슬리는 찌뿌둥한 몸을 일으켜 세웠다. 다음 날이 되었으나 그녀의 고민은 여전했고, 풀지 못한 숙제 탓에 새로운 하루가 조금도 새롭게 느껴지지 않았다.

니아 프레슬리는 일부러 벽난로 앞에 섰다. 검은 숯 토막이 타며 작은 돌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니아는 타닥타닥 타오르는 작은 재들을 바라보며 지금이 겨울이라는 사실이 무척 다행스럽다는 생각을 했다.

추위를 핑계로 벽난로 앞에 서면 시녀장을 등지는 게 가능했으니까. 표정이 얼핏 보인다 해도 불빛 덕에 많이 티가 나지 않았다.

그러니까, 꽤나 민망한 낯이 말이다.

니아는 매서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시녀장을 힐끗 봤다가 황급히 난롯불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성녀님, 오늘은 지난번처럼 혼자 돌아다니시면 안 됩니다. 제게 약속해 주세요.”

“시녀장님, 그땐 정말 인파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길을 잃은 거였잖습니까. 제가 길치라는 걸 잘 아시잖아요.”

“그렇다기엔, 성녀님을 찾았을 때 너무 신이 나 계셨습니다.”

“그야 울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억울함에 니아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물론 시녀장을 보고 외친 것은 아니었으나, 오히려 벽난로를 바라보고 있으니 자신감이 생겼다.

‘왜 오래전부터 황궁의 황녀와 황자들이 그토록 몰래 담을 넘어 다녔는지 알겠어. 밤새 저잣거리를 돌아다니다가 새벽에야 황궁으로 돌아가는 이유도.’

항상 지켜보는 시선들에게 둘러싸인 채 작은 행동 하나에도 제약이 따르는 생활. 언뜻 화려하게 보이나 바꿔 생각하면 커다란 새장에 지나지 않는 황궁. 니아에게 사원은 이제 집과 같은 존재였으나 가끔 맨발로 뛰쳐나가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일 때가 있었다. 그러니 황궁에서 나고 자란 황족은 오죽할까.

‘하지만 그건 정말 우연이었다고. 시녀들과 기사들이 모두 밀려날 만큼 큰 인파가 몰릴 줄 누가 알았겠어.’

날이 어두웠고, 변복을 하고 있어 니아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불행 중 다행이기는 했다.

“시녀장님, 제가 그날 말고 제 역할을 다하지 않은 날이 있습니까? 아니, 그날도 모든 일정을 마무리한 뒤 벌어진 일 아닙니까. 그것도 아주아주 우연히요.”

니아는 성녀로서 최선을 다해 온 나날들을 생각하며 천천히 중얼거렸다.

물론 그것을 기회로 삼은 것은 니아 프레슬리의 잘못이 맞았다. 하지만 그렇게 홀로 장터를 누빌 수 있는 천금 같은 기회가 또 언제 올 줄 알고 제 발로 사원으로 기어들어 가겠는가?

아무리 니아 프레슬리가 말 잘 듣는 성녀여도 그건 아니었다.

“오늘은 그런 일 없을 테니 제발 십 분에 한 번씩 번갈아 들어오시는 건 그만해 주세요.”

단호함이 서린 목소리였으나 시녀장은 아직도 그날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요. 그날, 성녀님께서 도박을 하고 계시는 뒷모습을 본 제 심정이 어땠는지를…….”

시녀장이 억장이 무너진다는 표정을 하고 가슴을 쳤다. 순간 아슬아슬하게 평정을 유지하고 있던 니아가 휙 몸을 돌렸다. 벽난로 앞에 있어서 벌게진 얼굴이 눈 깜짝할 사이에 창백해졌다. 억울했다.

“도박이라니요? 그건 그냥 놀이였습니다!”

“돈을 걸지 않으셨습니까? 땅바닥에 앉아서 돈을 던지시는 걸 분명 봤는데요. 제가 잘못 봤을 리는 없습니다. 다른 시녀와 기사들도 분명 그 모습을 목격했으니까요.”

니아는 콩콩 발을 굴렀다. 그러자 시녀장의 표정이 한겨울의 칼바람보다 더 매서워졌다. 성녀의 품위와는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라 여긴 것이 분명했다. 니아는 콧김을 내쉬며 가만히 발짓을 멈췄다.

“겨우 3키오네를 건 것뿐입니다. 컵 안의 숫자를 맞히는 놀이이고, 3키오네는 참가비였을 뿐이지요. 평범한 백성들도 즐겨 하던 걸 못 보셨습니까?”

“우리는 그런 것을 도박이라 부르기로 했습니다, 성녀님.”

겨우 사발 안에 든 주사위의 수를 맞히는 놀이를 좀 했기로서니 시녀장이 이렇게나 난리인 이유를 니아는 이해할 수도, 짐작할 수도 없었다. 아니, 사실 짐작했으나 너무 유별나다고 생각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성녀님의 안전을 위해 애쓰고 있는지 아시지요.”

시녀장은 말뚝을 박으려는 듯 니아를 몰아붙였다. 그 기세에 밀려 니아는 코를 찡긋거렸다.

“압니다. 물론 알지만…….”

“아신다니 다행입니다.”

“시녀장님…….”

시녀장이 열 살 아이를 다루듯 자신을 대하자 점점 대꾸할 의지가 사라져 갔다.

“알겠습니다. 제가 졌습니다.”

의미 없이 입을 비죽이던 니아는 결국 포기한 채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이만하면 괜찮은 성녀라고 생각하고 있던 자신을 호되게 혼냈다. 역시 주변 사람들이 보기에는 한참 미달인 모양이었다.

황족으로도, 귀족으로도 태어나지 않은 니아 프레슬리는 높은 자들을 모셔 온 사람들에게는 눈에 차지 않을 게 분명했다.

“지난번 일은 죄송합니다. 그런 일 또 없도록 할 테니 걱정 놓으세요.”

물에 젖은 장작처럼 축 늘어지는 니아의 어깨를 보고 시녀장은 고개를 내저었다.

“신께서 성녀님을 보호하고 계신 것을 압니다. 그러나 저희는 사람이고, 저희가 하는 것은 모두 사람의 일이지요. 부디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 주세요.”

타이르듯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에서는 애정이 읽혔다. 자잘한 주름 속에 고스란히 묻은 고뇌도.

“항상 걱정하고, 불안할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모르지 않았다.

시녀장은 마무리를 하려는 듯하다가 고민 끝에 덧붙였다.

“성녀님께서는 더없이 훌륭하십니다. 하지만 아주 가끔, 충동적으로 행동하실 때가 있어 아랫사람들을 놀라게 하시지요. 특히나 저희 같은 아랫사람들은 그럴 때마다 지켜 드리고 싶어도 지켜 드릴 수가 없어서…….”

그녀답지 않게 말끝을 흐렸다. 그러다 애매한 낯빛으로 부드럽게 중얼거렸다.

“부디 저희를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지 말아 주세요.”

결국 항상 이렇게 끝이 났다. 니아 프레슬리 홀로 고집을 부리는 어린아이가 된 심경으로.

새장처럼 느껴지는 동시에 집처럼 느끼게 하는 것도 모두 니아를 돕는 이들 덕분이었다. 그들의 과보호는 말 그대로 과할 때가 있었으나 그로 인해 니아는 사랑을 느꼈다.

“이제 가 보세요. 바로 나가겠습니다.”

그제야 시녀장은 만족한 듯 인사를 하고 밖으로 향했다. 니아는 애꿎은 벽난로를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고 털옷을 둘러썼다.

시녀장을 따라나서려는 순간 똑똑, 소리가 들렸다.

“성녀님, 조안입니다.”

들어오라고 말하자마자 조심스럽게 문이 열렸다. 니아는 동그란 두 눈을 천천히 살피곤 물었다.

“지금 나가 봐야 하는데. 다음에 하면 안 될까?”

조안이 모르는 문제를 물어보러 온 것이라 확신한 니아는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조안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알고 있습니다. 장터에 들렀다 마정석 연구소에 가신다지요? 금방이면 되어요.”

조안이 쪼르르, 짧은 팔다리를 열심히 움직여 니아 곁에 왔다. 니아는 습관처럼 아이의 머리를 매만지고는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위해 허리를 굽혔다.

“공작님께서 무척 분노하셨거든요.”

“뭐?”

“지난번 장터에 들렀다 성녀님이 사라지신 이후에요.”

“그걸 어떻게…….”

조안은 그들 말고는 아무도 없는 걸 알면서도 주위를 휙휙 둘러보다 다시 속삭였다. 니아 프레슬리는 가만가만 듣다가 결국 눈을 커다랗게 떴다.

“공작님께서 어찌나 화를 내시는지 다들 벌벌 떨었답니다. 성녀님께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표적이 될 수 있는지를 두어 시간에 걸쳐 얘기하셨고요. 시녀장님은 한마디 대꾸도 하지 못하셨죠.”

니아는 처음 듣는 이야기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필릭스 쿠아란이 그렇게 했다는 것보다, 자신 앞에서는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는 것이 더 놀라웠다. 그는 니아 앞에서는 언제나 봄 햇살처럼 따사롭게 굴지 않았던가.

“공작님은 사원을 지키는 기사들보다 훨씬 더 사원의 안전에 관심이 많으시니까요. 다른 시종들이 모두 세뇌가 될 때까지 멈추지 않으셨답니다.”

니아가 눈살을 살짝 찌푸리자 조안이 서둘러 덧붙였다.

“물론 공작님 말씀이 아니더라도 시종들과 기사들 모두 성녀님을 걱정하고 있어요. 모두가 성녀님의 안위를…….”

니아는 걱정 말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그제야 조안이 안심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무튼 시녀장님은 그날 이후로 각성하셨어요. 성녀님이 아무리 예쁘게 구셔도 결코 넘어가지 않겠다고 말씀하시던걸요.”

니아 프레슬리는 헛기침을 했다. 콜록거리는 걸 멈추기 위해 손으로 입을 막는데, 그사이 조안은 신이 나 이야기를 계속했다.

“저는 그날 북부의 산꼭대기에 와 있는 줄 알았지 뭐예요.”

“그게 무슨 말이니?”

겨우 기침을 멈춘 니아가 의문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공작님은 서늘하시죠, 시녀장님은 시종들을 달달 볶으시죠. 제가 얼마나 힘들었게요.”

조안은 그날을 떠올리면 아직도 힘겹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서럽고 추워서 죽을 뻔했다는 뜻이에요, 성녀님. 북부 산꼭대기에 올라선 것처럼요.”

니아는 웃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도 불구하고 작게 웃었다. 그녀가 여린 어깨를 감싸며 속삭였다.

“조안, 네가 내 편이라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하마터면 애꿎은 시종들을 원망할 뻔했잖니. 난 시종들이 공작님께 혼이 난 줄도 몰랐구나.”

문득 떠오른 듯 니아가 중얼거렸다.

“내게 이런 얘기를 해 주는 너는 괜찮을까? 시종들의 비밀 이야기를 엿듣는 건 옳지 않은 게 아닐까? 그들이 일부러 나에게 내색조차 하지 않은 이야기를.”

작게 중얼거리는 니아를 향해 조안은 더없이 진지하게 속삭였다.

“저는 괜찮습니다. 성녀님을 위해서라면 저 하나 희생하는 건 두렵지 않아요.”

제 발로 배신자를 청하는 아이를 보고 니아는 큭큭거렸다. 그러다 이내 진지한 목소리로 아이를 타일렀다.

“멋진 말이지만 조안, 네가 날 위해서 희생할 필요는 없어. 아니, 다른 사람 모두 마찬가지야.”

“왜요?”

“나는 내가 지킬 수 있으니까. 공작님의 마음도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아니지만, 시종들이 내게 말 한마디 못 할 만큼 혼을 낸 건…….”

말끝을 흐리는 니아에게 조안은 명쾌하게 답을 내리듯 말했다.

“성녀님, 누군가를 좋아하면 그때부터 마음은 내 것이 아니래요.”

“응?”

“좋아하는 사람의 것이래요.”

“좋아하는 사람의 것?”

다음 말을 하기 전 조안이 침을 꿀꺽 삼켰다. 니아는 아이가 얼마나 대단한 이야기를 하려나 싶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았다.

“그래서 그래요, 성녀님. 모두 성녀님을 좋아하니까 도무지 마음을 놓을 수가 없는 거예요. 성녀님께 마음을 모두 맡겨 놔 버렸는걸요.”

입으로 호선을 그린 채 자신을 바라보는 니아 프레슬리의 손을 끌며 조안은 마지막으로 말했다. 이번에는 속삭임이 아니었다.

“그래서 저는 필릭스 쿠아란 공작님도, 세실리아 시녀장님도 모두 이해가 돼요. 저도 성녀님을 무척이나 좋아해서, 성녀님이 오래오래 우리 곁에서 건강하셨으면 좋겠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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