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새로운 비밀
니아 프레슬리는 미소 짓지 못했다. 연신 한숨을 푹푹 내쉴 뿐이었다. 입에서 나온 하얀 입김은 공중에 맺혔다가 사라졌다.
겨울을 맞이하여 사원을 온통 하얀 꽃으로 단장하고, 제국의 어린아이들 서른 명과 함께 성서를 외우는 오전 일정을 완벽히 소화했다. 드물게 오후 일정이 없는 오늘, 니아 프레슬리의 얼굴에 여유가 없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그녀는 종이에 꾹꾹 힘주어 눌러쓴 글씨를 북, 소리가 나게 손등으로 지웠다. 채 마르지 못한 잉크가 지저분한 종이와 하얀 손에 얼룩으로 번졌다.
“무슨 일 있으세요?”
황궁에서 사원으로 옮겨 온 시녀 조안이 니아의 눈치를 보며 다가왔다. 생각에 빠져 있느라 몰랐는데, 아이는 한참 동안 걱정스러운 낯빛으로 니아를 쳐다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런, 걱정을 끼쳤구나.”
“뭐가 또 잘 풀리지 않으시나요? 며칠째 표정이 안 좋으세요.”
니아는 잉크가 묻지 않은 손으로 조안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었다. 조안은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이며 중얼거렸다.
“공작님께 여쭤보는 건 어떨까요? 성녀님의 질문이라면 진지하게 고민해 주실 거예요.”
“평소라면 그랬겠지만…….”
니아가 말꼬리를 늘이며 애매하게 웃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정말 물을 수가 없어. 우연에 기댈 수도 없고. 정말 중요한 일이거든.”
어깨를 으쓱거리자 하얀 실크 망토가 차르르 소리를 내며 아래위로 흔들거리며 물결치듯 빛이 일렁였다.
조안은 고이 접힌 니아의 눈을 골똘히 바라보다 이내 숨을 들이쉬었다.
“아, 공작님을 위한 일이군요!”
“똑똑하기도 하지.”
감탄에 조안은 총명한 눈을 빛내며 활짝 웃었다. 그다음 순서가 무엇인지 안다는 듯 그녀는 머리통을 니아 프레슬리의 손 가까이 가져다 대었다.
“내가 할 수 있을까…….”
다시 고민에 빠져든 니아 프레슬리는 습관처럼 동그란 아이의 머리를 간질간질 매만졌다. 서리 낀 창 너머를 멍하니 응시하며.
“니아? 뭐 하고 있었어?”
약속보다 한 시간이나 먼저 나타난 필릭스 쿠아란이 서고 안으로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책상에 걸터앉아 종이뭉치를 바닥에 툭툭 던지고 있던 니아는 놀라 굳었다. 멍하니 입이 벌어졌다.
“시간이, 아, 직…….”
당황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뻐끔거리는 니아 프레슬리를 보며 필릭스 쿠아란은 입꼬리를 스윽 올렸다.
“시간이 안 가더라고. 그래서 내가 시간을 달렸지. 한 시간 정도 더 빨리.”
바보처럼 눈을 끔뻑이던 니아는 이제야 상황이 파악된 듯 그에게서 시선을 뗐다. 민망한 나머지 얼굴이 붉게 타올랐다.
‘왜 벌써 온 거지?’
니아 프레슬리는 바닥에 이리저리 널브러진 종이 쓰레기들을 줍기 위해 허리를 굽혔다. 다급한 손이 바닥을 이리저리 휩쓸고 다녔다.
“곧 나갈게요!”
“응.”
“잠시만…… 거기서 기다려 주세요.”
니아는 허겁지겁 종이를 줍다 문득 눈동자를 찌르는 따가움에 눈을 감았다. 그녀는 그제야 엉망인 서고보다도 더 큰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머리!’
머리칼을 오후 내내 쥐어뜯은 바람에 산발이었던 것이다. 아침에 시녀가 꾸며 준 머리는 이미 유명을 달리한 지 오래였다.
“자. 여기 있어.”
웃음 서린 목소리에 니아 프레슬리가 멍청히 고개를 들었다. 필릭스 쿠아란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니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도련님?”
“응?”
“제가 분명 곧 나간다고…….”
“응. 그랬지.”
“그런데 왜…….”
필릭스 쿠아란이 팔 안 가득 모은 찌그러진 종이를 니아의 품에 와르르 쏟았다. 니아는 울상을 지으며 그것을 받아 들었다.
“잠깐 나가 계시라는 의미였다고요!”
니아는 책상 위로 종이 더미를 내던지고는 툭툭 팔을 털었다.
필릭스 쿠아란은 키득대며 눈을 가늘게 접었다. 마침 그쪽으로 기운 햇빛 속을 뒹구는 봄날의 고양이 같았다.
“왜 저를 놀리세요. 재미없단 말이에요.”
니아는 그를 향해 밉지 않게 눈을 흘깃거렸다. 그러나 목소리와는 달리 입꼬리가 삐쭉삐쭉 올라갔다.
필릭스 쿠아란은 니아 프레슬리가 성녀가 된 이후, 그녀가 봐 온 그 어느 필릭스 쿠아란보다 가장 행복하고 평온해 보였다.
편안함과 안락함.
니아는 이것이 사랑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니아 프레슬리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그리고 정수리가 보이게 고개를 숙인 후 고개를 도리도리 돌렸다. 희미하게 웃음소리가 귓불을 스쳐 지나갔다.
“그래, 착하다, 착하다.”
필릭스 쿠아란이 부드럽게 머리칼을 쓸었다. 동시에 니아는 팍 고개를 쳐들었다.
“또 장난이에요?”
“어?”
이번에도 필릭스 쿠아란이 자신을 놀리는 거라 생각한 니아는 눈을 얄궂게 치켜들었지만, 마주 본 그는 정말로 모르는 눈치였다. 장난스레 웃음 짓고 있으리라 생각한 얼굴에는 외려 의문이 서려 있었다.
“엉망이잖아요.”
니아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손가락으로 자신의 머리를 가리켰다.
“뭐가?”
그가 순진하게 되물었다. 니아는 어이가 없어 허, 중얼거리곤 소리쳤다.
“머리요! 머리카락!”
니아 프레슬리는 이리저리 머리를 흔들었다. 엉킨 머리칼은 너무 부스스해 잘 흔들리지도 않았다. 머리 장식도 머리칼 끝에 대롱대롱 달려 볼품없는데. 그의 눈엔 그게 보이지도 않는다는 말인가?
“몰랐어.”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요? 이렇게나 심각한데.”
“그냥…….”
그는 물끄러미 니아 프레슬리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시선이 니아에게 오래 머물렀다.
그가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을 지을 때, 니아는 입술을 비죽이며 돌아섰다.
“됐어요. 제가 알아서 해 볼게요.”
“정말이야. 그냥, 오늘도 예쁘구나 생각했을 뿐이야.”
필릭스 쿠아란이 돌아선 니아를 향해 황급히 덧붙였다.
“네?”
“그리고 네 머리는 항상 정신이 없잖아. 난 네가 머리카락이 한 가닥도 없어도 좋은데 뭘 그렇게 신경 써.”
마녀가 어린아이를 꾀어내듯, 필릭스 쿠아란은 나긋하고 사랑스럽게 속삭였다.
“거짓말. 제가 대머리라면…….”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한 것은 당황해서가 아니라 필릭스 쿠아란이 예고 없이 입을 맞췄기 때문이었다.
필릭스 쿠아란은 부드럽게 입술을 떼어 냈다 참새가 부리로 쪼듯 짧은 입맞춤을 여러 번 반복했다.
이어서 니아 프레슬리의 이마와 코에, 다시 입술에.
그와 처음 입 맞춰 본 것도 아닌데 낯선 기분에 목덜미가 오싹했다.
니아 프레슬리가 숨을 들이쉬고 있는데, 필릭스 쿠아란이 왼손을 들었다. 그는 머리에서 달랑거리고 있는 장신구들을 먼저 떼어 낸 다음, 살살 엉킨 부분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좋아.”
나비 모양의 장신구 하나가 책상 위로 툭 떨어져 빙글빙글 돌다가 멈췄다. 니아는 그 움직임을 관조했다.
“네 이런 모습을 볼 수 있는 게 나뿐이라서.”
그는 차분하게 말을 뱉어 냈다.
“내게만 허락하는 거잖아.”
필릭스 쿠아란이 빠른 속도로 풀어낸 머리칼을 확인하듯 부드럽게 쓸었다. 머리칼은 언제 그랬냐는 듯 찰랑거렸다.
“대머리라면 더 좋지 않을까?”
한 발 떨어진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니아 프레슬리는 홀린 듯한 기분으로 고개를 들었다. 창을 통해 들어온 창백한 겨울의 햇빛이 필릭스의 얼굴 반쪽을 달구고 있었다. 날카로운 콧날이 만든 그림자가 움찔거릴 때, 그의 손에 예상치 못한 힘이 실렸다.
“그럼 사람들이 널 조금은 덜 좋아할지도 모르니.”
반사적으로 눈살을 찡그리자, 필릭스는 놀란 듯 바로 머리에서 손을 뗐다. 니아는 그의 손이 닿았던 부분을 그대로 매만졌다.
“대머리라면, 사람들이 모두 내 머리를 만지고 싶어 할 텐데요. 어쩌면 머리를 만지면 복을 받는다고 여길지도 몰라요. 그럼 난 하루 종일 반질반질한 머리를 내줘야 할 테고요. 그래도 좋아요?”
“아니.”
필릭스가 바로 답했다.
“거봐요.”
니아 프레슬리는 명민하게 눈을 반짝거렸다. 그러고는 상처받은 소년을 어르듯 속삭였다.
“전 제 것이지만, 가끔은 도련님 것이 되어 드릴게요. 이 세상 사람들 중 도련님에게만 유일하게. 그러니 너무 속상해 마세요.”
니아는 두 손으로 필릭스 쿠아란의 왼손을 꼭 잡았다. 맹세하듯 온 힘을 주어.
필릭스 쿠아란이 작게 웃음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들으면 들을수록 더 좋은 음성이라는 것을 알기에, 니아는 혹여라도 놓칠세라 귀를 활짝 열고 그의 웃음을 음미했다.
이럴 때면 그의 전부를 가진 것 같아 무척 흡족했다.
니아 프레슬리는 그날 저녁, 나른한 몸을 침대에 뉘었다. 침대와 한 몸이 되자마자 졸음이 쏟아져 내렸다. 그러나 바로 잠들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걱정 앞에서 와르르 무너졌다.
‘어떻게 하지. 이제 이 주밖에 남지 않았는데.’
잠을 자고 싶어 미치겠는데,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문 이후부터는 정신이 말똥해졌다. 물론 놀랄 일은 아니었다. 니아 프레슬리는 이런 경험이 많았다.
그리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적어도 앞으로 두 시간은 자기 글렀다는 거지.”
니아 프레슬리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한 손에 램프를 들고 신발을 구겨 신은 그녀는 침실의 문을 열었다. 신발을 질질 끌며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발목이 으슬으슬해 걸음이 빨라졌다.
조심스럽게 서고의 문을 여니, 아까 둔 그대로 종이 뭉치가 책상 위에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니아는 그것들을 한쪽으로 몰아 놓고 책상 한편에 램프를 내려놓았다.
‘추워.’
순간 새벽의 한기가 몸속으로 가득 스며들었다. 니아는 서둘러 책장 가운데 있는 두툼한 담요를 꺼내어 몸에 걸치고는 의자에 앉았다. 그러고는 턱을 괴고 무언가를 열심히 적기 시작했다.
“황제 폐하께서 주신 벅 프릴리에 대한 자료……. 잘 연구해 보면 방법이 나올 것도 같은데…….”
니아 프레슬리는 머리를 싸맨 채 연신 되뇌었다.
“이럴 때 딕시 댁스터 교수님이 곁에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분명 나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알아내실 텐데.”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르는 니아의 얼굴에 잠시 우울한 기색이 스쳤다. 그러나 곧 아카데미를 다닐 때처럼 순식간에 집중력을 되찾곤 글자 하나하나를 정독했다.
<마력은 영구한 것이 아니라 소진되는 것. 벅 프릴리는 마정석을 만들어 내는 데 지나친 마력을 사용하여 사망에 이르렀음.>
“결국 마정석 없이 마법을 쓰는 것은 생명력을 사용한다는 이야기지. 앞으로 조심하면 괜찮아. 예전에도 대부분은 마정석을 사용했고…….”
<치유 능력은 벅 프릴리 본인뿐만 아니라 타인에게도 적용 가능했음. 벅 프릴리가 어린아이의 상처를 치료해 주었던 경우가 두 번 존재.>
니아는 수없이 반복해서 읽어 이제는 외워 버린 문장을 다시 바라보았다.
“어떻게 다른 사람을 치료할 수가 있지? 타인을 도대체 어떻게…….”
니아 프레슬리는 책상에 머리를 박았다. 쿵 소리와 함께 머리가 울렸다. 마음만으로는 될 수 없는 일이 니아의 마음을 온통 지배하고 있었다.
그녀는 붉어진 이마를 들어 달력을 바라보았다.
필릭스 쿠아란의 생일이 이 주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