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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성녀 책봉식 (62/75)

2. 성녀 책봉식

필릭스 쿠아란은 성녀 임명식 준비로 정신없이 바빴다. 누가 보면 그가 성녀 임명이라도 받는 줄 알 만큼. 덕분에 리바론 기사단만 고생이었다.

“단장, 이럴 거면 그냥 사원을 폐쇄하자고 해요. 성녀 임명식, 그거 뭐 그냥 임명한다고 말하면 끝나는 거 아닌가?”

강렬한 햇빛 따위 신경 쓰지 않고 단련한 나머지 온몸이 검게 그을린 사이먼 캐치가 순수하게 물었다. 제 딴에는 심각한 얼굴의 단장이 안쓰러워 나름의 해결책을 건넨 것이었다.

“너, 너 이놈 자식. 이리 와. 또 어디를 갔나 했더니…….”

“아, 아아!! 왜 이래, 부단장!”

“죄송합니다, 공작님.”

예의 바르게 인사를 한 부단장 포말라드 웨이는 사이먼 캐치의 귀를 잡고 질질 끌고 나갔다.

거칠게 그의 손을 떼어 낸 사이먼은 복도가 떠나가라 외쳤다.

“이건 학대야!”

“학대? 네가 나한테 하는 게 학대다, 사이먼!”

포말라드 웨이는 이마를 짚고 필릭스 쿠아란의 표정을 살피기 위해 목을 쭉 뺐다. 그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서류를 보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공작님께서 요즘 얼마나 예민하신지 몰라?”

“알아!”

“근데도 그래! 언제 철이 들래, 사이먼.”

깊은 한숨을 내쉬는 포말라드 웨이를 보고 사이먼이 눈을 잘게 떴다.

“설마, 이번에도 날 빼놓고 일을 하려는 건 아니겠지?”

“그건…….”

그에게 계획을 비밀로 한 채 국경 지대로 보냈던 일이 떠오른 포말라드 웨이가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는 잠시 미안한 마음에 머뭇거리는데 사이먼의 눈이 험악해졌다. 햇볕에 그을려 까만 얼굴에 흰자가 홀로 흉흉하게 빛났다.

“또 날 왕따시킨다면 가만있지 않을 거야! 아이몬드에게는 중요한 임무를 맡기고! 나는 허허벌판으로 보내고!”

억지로 포말라드의 고개를 돌려 눈을 맞춘 사이먼이 울부짖었다. 아직까지도 서러움이 가시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른 건 다 용납할 수 있어도, 또래인 아이몬드 오베르튜레를 작전의 중심으로 세운 것은 도저히 용서가 되지 않았다.

“이제 그런 일 없어. 그리고 네가 가만있지 않으면 어쩔래? 작전에 대해 비밀로 한 건 미안하게 생각해. 하지만 네 입이 좀 싸야…….”

“내 입이 싸다고? 부단장, 정말 실망이다.”

툭, 하고 두 볼을 잡았던 손이 떨어졌다. 입술이 댓 발 나온 사이먼은 급기야 하늘을 올려다보며 눈을 바르르 떨었다. 하지만 결코 눈물은 떨어지지 않았다.

이 사춘기 소년의 머리를 쥐어뜯고 싶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으나 포말라드 웨이는 부드러운 손길로 그의 등을 다독였다.

“공작님께서는 너를 믿으시니까. 그래서 성녀님을 네게 맡기신 거야. 그리고 봐, 이번에는 다 너한테 차근차근 설명해 줬잖아? 어디 어디를 지켜야 하고, 어떤 사람들을 더 유심히 봐야 하는지. 뭐 빠진 게 있나?”

훌쩍이는 척하던 사이먼 캐치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울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앞으로는 날 빼놓지 않겠다고 맹세해. 신의 이름으로. 누나가 무슨 무슨 신의 자식이라며. 안 그러면…….”

“…….”

“기사단 인권위에 고발할 거야.”

포말라드 웨이가 인상을 찌푸렸다. 누나는 뭐고, 기사단 인권위는 뭐지?

“누나라니? 그리고 기사단 인권위? 그런 건 어디에서 들었어?”

계속 우울한 척하고 있던 사이먼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누나가 가르쳐 줬어!”

“설마 그 누나란 사람이…….”

“니아 프레슬리 누나!”

순간 우당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포말라드 웨이는 급히 몸을 돌려 집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공작님, 무슨 일 있으…….”

안에는 필릭스 쿠아란이 조각상처럼 앉아 있을 뿐이었다.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아무 일도.”

필릭스 쿠아란이 가볍게 고개를 까딱였다. 그는 나가 보라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부단장! 나랑 얘기하다 말고 어딜 가!”

사이먼이 쿵쾅거리며 포말라드 웨이를 따라 들어왔다.

“사이먼! 왜 또 들어왔어. 나가, 빨리 나가.”

잡상인을 보듯 사이먼을 쳐다본 포말라드가 그의 등을 밀기 시작했다.

“이런 식이면 정말 인권위에 고발이야, 부단장!”

“너 정말 나랑 얘기 좀 해야겠다. 응? 버릇을 고쳐 놔야지 안 되겠어.”

등에 힘을 꽉 준 채 움직이지 않는 사이먼을 향해 포말라드가 경고했다.

그때, 느릿한 목소리가 두 사람의 소란에 끼어들었다.

“여기서 해.”

동시에 서로를 밀던 포말라드 웨이와 사이먼 캐치의 고개가 돌아갔다.

“얘기, 여기서 하라고.”

필릭스 쿠아란이 휙휙 서류들을 넘겼다. 얼굴에는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데, 어쩐지 종이 넘어가는 소리가 신경질적이었다.

“어, 사이먼의 훈육을 여기서 하란 말씀입니까, 공작님?”

포말라드 웨이의 질문에 사이먼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단장이 보는 앞에서 훈육? 그건 좀…….

“누가 훈육을 하라고 했나. 대화를 하라고 했지. 빨리, 마저 해.”

아예 서류를 멀찍이 치워 버린 필릭스 쿠아란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고 웃었다. 그러다 갑자기 정색을 하고 말했다.

“누나부터.”

포말라드는 필릭스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해 미간을 찡그렸고, 훈육이 아니라는 말을 들은 사이먼 캐치는 활짝 표정을 폈다. 그는 신이 나 종알거리기 시작했다. 역시 단장은 내 편이라면서.

“니아 프레슬리 누나가 엄청 잘해 줘요, 단장! 국경에서 돌아온 이후에 맛있는 것도 몇 번 사 주고. 제가 부단장한테 맞았다고 하니까 인권위? 얘기도 해 줬어요. 괴롭히는 사람이 있으면 인권위 세 글자만 말해도 한 방 먹이는 거라고. 그래도 괴롭히면 자기한테 오래요. 웃기죠?”

“음.”

필릭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더 얘기해 보라는 듯 종용하는 미소가 어쩐지 섬뜩했다.

“처음엔 좀 이상한 누나다 싶었는데, 같이 몇 밤 자 보니까 생각보다 이 누나 참 괜찮다, 싶더라고요. 좋은 말도 많이 해 주고! 물론 너무 많이 사라져서 귀찮기는 했지만요. 벌판에 드러누워 있는 걸 업고 돌아온 적도 있다니까요?”

“참 많은 걸 했네. 그 며칠 사이에. 국경에서 할 일도 없었을 텐데.”

사태의 심각성을 슬슬 깨달은 포말라드 웨이가 강한 힘으로 사이먼 캐치의 허벅지를 쳤다. 사이먼은 왜 이래, 하고 포말라드의 손을 휙 치웠다.

“네, 네. 니아 누나는 몸을 가만히 두지를 못해요. 뭐, 하지만 나쁘지 않죠. 엄청 잘 웃고, 웃을 때 좀 예뻐야지요. 나보고 좀 무식한 것 같다면서 책을 몇 권 줬는데, 세 줄 읽고 말았다는 건 비밀이고요. 또 뭐냐……. 아! 누나가 꽃도 선물해 줬어요!”

순간 쾅, 하고 집무실이 흔들렸다. 필릭스가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쳤기 때문이었다.

“꽃?”

서늘한 물음에 사이먼은 곰곰이 다시 생각했다. 꽃이 아니라…….

“아니요!”

“그래, 아니겠지. 니아 프레슬리가 꽃을 선물해 주었을 리가 없지. 나도 받아 본 적이 없는데.”

필릭스 쿠아란은 그렇게 말하며 어디에 사용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어 품속에 넣고 다니는 손수건을 떠올렸다. 니아가 그에게 준 유일한 선물이었다.

“네, 네, 아니에요. 꽃이 아니라…….”

사이먼은 그날만 떠올려도 황홀하다는 듯 외쳤다.

“꽃밭! 누나가 나한테 꽃밭을 선물해 줬어요!”

필릭스 쿠아란은 한바탕 소동이 지나간 집무실에 홀로 앉아 턱을 괴었다.

커다란 창 너머로 포말라드 웨이가 사이먼 캐치를 끌고 연무장으로 가는 것이 보였다. 사이먼 캐치는 항의를 하듯 연신 두 손을 하늘 높이 뻗고 흔들고 있었다.

필릭스 쿠아란은 짧게 웃었다.

‘다, 단장! 무슨 말이에요. 이번에도 날 작전에서 뺀다고요?’

‘중요한 임무를 맡겼잖아.’

‘빈 연무장 지키기가 어떻게 중요한 임무예요!’

‘토 달지 마.’

우선은 하나의 일 처리가 끝났다.

필릭스 쿠아란은 고개를 내저으며 창 쪽에서 시선을 돌렸다. 일이 많은 와중에 예상치 못한 사건으로 시간을 뺏기고 말았다.

‘임명식에 어떤 사람들이 올지 모르는데. 무조건 철저해야 해. 이중, 삼중, 안 되면 사중, 오중으로라도.’

사실은 사이먼 캐치가 사원의 폐쇄를 제안했을 때 적극적으로 동의하고 싶었다. 완정 개방만이라도 막을 수 있었더라면…….

‘사원을 개방한다고? 임명식 날에?’

두 여자가 필릭스 쿠아란에게 동시에 답했다.

‘당연한 거 아니에요?’

‘당연한 건 묻지 마세요, 공작.’

요즘은 걱정하는 것이 그의 일인 듯싶었다. 언제는 안 그랬나 싶긴 했지만.

“니아 프레슬리.”

필릭스는 아무도 없는 곳에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한때는 부르는 것만으로도 벅찼고, 즐거웠고, 두근거렸고, 그리고 한때는 속으로 되뇌는 것만으로도 죄를 짓는 것 같던 그 이름을.

필릭스 쿠아란은 언제나 줄곧 니아 프레슬리에 대해 생각해 왔다. 그러니 함께 있을 때도, 함께 있지 않을 때도 필릭스 쿠아란은 그녀에게 골몰하는 셈이었다.

니아 프레슬리가 성녀가 된다.

그것은 필릭스 쿠아란의 계획이 아니었다. 사 년 전, 황녀와 거래를 하고 떠날 때는 그저 니아가 평범하게 살 만한 세상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

그러나 어디 세상일이 뜻대로 되는 것이던가.

“네가 얼마나 변할지를 몰랐던 거지…….”

니아 프레슬리가 직접 성녀가 되겠다 결심을 할 줄은 몰랐다. 자신과 같은 사람이 있음에 아파할 줄은 몰랐다. 그녀에게서 열 개의 심장을 빼앗고, 어머니를 죽인 남자의 아들을 사랑해 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어떻게 날 사랑할 수 있지?”

아직까지 필릭스 쿠아란은 믿지 못했다. 어떻게, 나를.

그는 매 순간 자문했다.

“니아 프레슬리니까.”

그러나 매번 정답을 찾아냈다.

그런 사람이니까. 상처받은 만큼 다른 사람의 상처를 들여다볼 수 있는 여자니까.

나는 너 하나 차별받지 않는 세상을 원했는데, 너는 모두가 차별받지 않는 세상을 원했다.

나는 너의 상처를 전부 변상해 주고 싶었는데, 이제 와 보니 아물어 있는 것은 나의 상처였다.

“치유 신. 잘 어울리네.”

세월이 무상해 필릭스 쿠아란은 자조하며 웃었다.

니아 프레슬리,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녀가 이로 인해 행복해진다면, 어그러진 계획이라 해도 완벽한 목적 달성이었다. 찬란하도록 눈부신.

그때, 길리 포바즈가 집무실의 문을 두드렸다.

“공작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누구지?”

참 기막힌 타이밍이라고 생각하며 필릭스 쿠아란이 물었다.

“레오 아리데오입니다. 들여보낼까요?”

“또 예상외의 사건이군.”

읊조리며 필릭스는 짧게 답했다.

“들여보내.”

“어쩐 일이지?”

필릭스 쿠아란이 멀뚱히 서 있는 레오 아리데오를 향해 물었다.

자세히 보니 그는 멀뚱히 서 있는 것이 아니라 필릭스 쿠아란을 유심히 보고 있는 것이었다. 필릭스 쿠아란이 그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앉지.”

고요한 공기 위에 무심한 말이 얹어졌다.

레오는 고개를 끄덕이고 필릭스 앞으로 다가와 앉았다. 행동이 무척이나 침착했다.

“고맙습니다.”

레오 아리데오가 필릭스 쿠아란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빨갛게 물든 머리가 찰랑거렸다. 그 타오르는 태양 같은 머리칼을 응시하던 필릭스 쿠아란이 피식 웃었다.

“그 말을 하러 온 건 아닌 것 같은데.”

어느덧 다시 얼굴을 보인 레오 아리데오는 진지했다.

“진심입니다. 공작님이 아니었더라면 이런 날은 오지 않았겠죠.”

“이런 날…….”

구해 줘서 고맙다는 인사가 아닌, 니아 프레슬리에 대한 감사였다.

이번에야말로 필릭스 쿠아란은 즐거이 웃었다. 웃지 않던 레오 아리데오도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자, 이제 본론을 말해 봐.”

필릭스 쿠아란이 종용했다.

레오 아리데오는 두 손을 모으고 허리를 앞으로 조금 숙였다. 말을 고르기 위해 고심하는 눈치였다.

“제가, 이 나라를 떠날까 합니다.”

예상치 못한 말에 필릭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실없는 이야기나 하려고 여기까지 오지는 않았을 걸 알고 있었지만, 또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몰랐다.

필릭스가 머리를 쓸어 넘기며 화를 참듯 물었다.

“또 무슨 일이 있나? 내가 모르는 일이 더 있다거나.”

“아닙니다. 다른 일은 없고, 그저…….”

“솔직하게 말해야 도와줄 수 있다.”

레오 아리데오는 니아의 가족이고, 그는 그녀의 가족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는 사람이었다. 필릭스 쿠아란의 표정이 더없이 진지해졌다.

“성녀 임명식에 차질을 주어서는 안 돼.”

말투 또한 다분히 명령조로 바뀌어 있었다.

“물론입니다.”

그러나 레오 아리데오는 주눅 들지 않고 차분하게 필릭스 쿠아란을 응시했다.

어색한 분위기를 깨고 먼저 가볍게 툭 뱉은 것은 레오였다.

“제가 떠난다고 하면 좋아하실 줄 알았는데요.”

“그게 무슨 개소리야.”

필릭스의 답에서 조급함을 읽은 레오가 어깨를 작게 들썩였다. 안 그럴 것처럼 생겨서, 실은 성미가 급한 니아와 닮아 있었다.

레오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천천히 중얼거렸다.

“저를 질투하지 않으셨습니까.”

“네가 니아의 가족이라는 걸 알게 된 이후부터는 그런 적 없어.”

필릭스 쿠아란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비웃었다.

레오 아리데오가 대답 대신 다 안다는 표정으로 필릭스를 쳐다보았다. 어쩌라고, 하는 얼굴로 맞부딪치고 있던 필릭스 쿠아란이 결국 고개를 돌렸다.

“그래, 질투할 수도 있지. 그게 나쁜가?”

필릭스 쿠아란이 혼자 중얼거렸다. 그는 한숨을 짙게 내쉬더니 휙, 레오를 향해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렇다고 내가 네가 니아 프레슬리의 곁을 떠나기를 바라겠어? 죽겠다는 놈을 어떻게 살려 냈는데.”

“그건 정말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인사치레는 됐어.”

웃는 모습의 레오 아리데오를 필릭스는 샅샅이 살폈다. 또 무슨 일이 터진 것은 아님을 확신한 그는 일어섰다.

“내 질투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너는 그대로 있어. 니아 곁에.”

레오는 성급히 대화를 끝내려는 필릭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반응이 어떨지 궁금해하며 레오는 여상히 말했다.

“제가 니아 프레슬리를 사랑합니다.”

순간 필릭스 쿠아란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바로 걸음을 돌려 레오에게로 돌아왔다. 오늘 중 가장 서늘한 표정을 하고서.

“뭐?”

“사랑한다고요.”

“남자로?”

그렇다고 말하면 죽일 기세였다.

레오는 고개를 젓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끄덕이는 것도 아닌 애매한 고갯짓을 했다. 필릭스 쿠아란을 미치게 만들려는 의도는 아니었으나, 그렇게 되어 버린 듯했다.

“사랑에는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

“아마 말씀하신 사랑도 있을 겁니다.”

필릭스 쿠아란은 고요하게 레오 아리데오를 바라보았다. 레오 아리데오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 모두 이제야 대화가 시작되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며칠 뒤, 성녀 임명식을 앞두고 니아는 클라우디아 엘로이를 만나기 위해 황궁으로 걸음 했다.

니아가 아무리 바쁘다고 해도 황제에게 비할 수는 없기에, 니아는 기쁜 마음으로 두 시간째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음, 세 시간인가.”

니아는 자신 앞에 쌓여 있는, 비어 있는 간식 접시들을 보며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차라리 클라우디아의 작업실로 가서 그림이라도 하나 그리고 있을까 싶던 찰나였다. 끼익 소리와 함께 문이 반쯤 열리더니 누군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니아 쪽에서는 잘 보이지 않았다.

니아 프레슬리는 차분히 누가 들어오는 것인가 기다려 보려고 했으나 결국…… ‘황제 폐하?’라고 묻고 말았다. 문이 열린 지 한참이 지나도록 아무도 들어오지를 않아서.

하긴, 클라우디아 엘로이라면 머뭇대는 일 없이 단박에 성큼성큼 걸어왔을 것이다.

니아는 남은 차를 꿀꺽 한입에 삼키고 몸을 일으켰다. 다가가 문을 양쪽으로 열어젖히는데, 생각보다 훨씬 낮은 위치에 사람이 서 있어서 미간을 찌푸렸다.

“어?”

“두, 두 번째로 뵈어요. 아가씨.”

꼬마 시종이었다. 아이는 부끄러운 듯 얼굴이 빨개져 있었다. 이 정도 어린 나이의 꼬마를 가르친 일은 없었는데…….

“우리가 만난 적이 있었니?”

고민하던 니아가 허리를 굽혀 아이와 시선을 맞추고 부드럽게 물었다.

“네. 지난번에, 제게 은혜를 내려 주셨습니다.”

차분히 대답을 기다리던 니아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또렷한 눈으로 꼬마 시종의 이목구비를 살피던 그녀가 놀라 손뼉을 쳤다.

“너! 그때 그 아이구나!”

어두운 사창가 골목길에서 클라우디아가 구해 준 아이였다. 니아가 그날 가진 돈을 전부 주었던 그 아이.

너무 반가운 마음에 니아는 부끄러워하고 있는 아이의 머리칼을 사정없이 쓸었다. 아이는 더욱 부끄러워하기 시작했다.

“시녀가 되었을 줄이야. 일은 괜찮니?”

“네, 아가씨.”

조심스럽게 답하는 아이를 향해 함박웃음 지은 니아는 주위를 두리번두리번 살폈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혼자 와도 되는 거야? 몰래 나온 거라면 들키기 전에 어서 돌아가.”

“아, 그것이…….”

“이미 들켰답니다.”

고상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클라우디아 엘로이가 화려한 장신구로 머리를 높이 올리고, 새하얀 피부와 대비되는 검붉은 드레스를 끌며 걸어오고 있었다.

아이와 니아는 동시에 같은 표정을 지었다.

니아는 본능적으로 아이를 등 뒤로 숨겼다. 그리고 방실방실 웃으며 아이를 위한 변명을 시작했다.

“이건 농땡이가 아니라, 그러니까 음……. 일종의…….”

“일종의?”

클라우디아 엘로이가 말꼬리를 잡았다.

“일종의…….”

“…….”

“……봐주세요, 황제 폐하.”

클라우디아 엘로이에게 거짓말 같은 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니아는 한숨을 내쉬고 실토했다.

“제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어 왔답니다. 그 마음이 너무 예쁘니, 벌을 내리시기보다는 넘어가 주시는 게 이 아이의 고운 마음을 해치지 않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클라우디아가 작게 웃고는 중얼거렸다.

“싫은데요?”

“음, 싫으셔도 한 번만…….”

“칭찬해 줄 거랍니다.”

“어…….”

당황한 니아는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아이가 해맑게 웃고 있었다. 상황 파악을 하던 니아는 허무하게 중얼거렸다.

“제가 당했네요.”

니아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아이 앞에서 비켜 주었다.

“조안, 이제 가 보거라. 인사는 충분히 했을 테니.”

클라우디아 엘로이가 턱짓했다. 그러자 아이는 니아와 클라우디아에게 동시에 꾸벅 인사하고 종종걸음으로 달려갔다.

아이가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던 클라우디아 엘로이가 운을 뗐다.

“임명식이 코앞인데, 놀러 온 건 아니죠?”

“그럼요, 황제 폐하.”

클라우디아 엘로이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속삭이듯 말했다.

“무슨 말을 하러 왔을지 들어 볼까요?”

니아는 굳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한 건, 제가 니아를 사랑하고 앞으로도 사랑할 거라는 겁니다.”

레오 아리데오가 묵묵히 말했다.

“국경에 있던 내내, 그리고 돌아와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어떻게 해야 니아를 그녀가 원하는 방식으로 사랑해 줄 수 있을까.”

“곁에 있어 줘.”

필릭스 쿠아란의 단호한 대답에 레오는 틀렸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내 세상에 니아 하나뿐이었기에 힘들었던 겁니다.”

“…….”

“망가지고 망가졌던 내게 유일하게 온전히 남은 것이라. 그게 오직 나의 삶의 이유라.”

필릭스 쿠아란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도 마찬가지였기에. 하지만 단 한 번도 그것에 대해 불만을 가져 본 적 없기에.

필릭스 쿠아란은 언제나 니아 프레슬리 하나만을 보고 달렸다.

“그래서 니아가 나 때문에 망가질 거라는 확신이 든 순간, 내가 나를 포기하려 했던 겁니다. 하지만…….”

레오 아리데오는 그날을 떠올리는 듯 눈을 감았다.

“사랑은 그러면 안 되는 것이겠지요. 사랑이라면. 정말 사랑이라면.”

레오는 눈을 감은 채로 미소 지었다. 아늑한 미소였다.

“국경에 갔을 때, 주변은 모두 황야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곳에서도 꽃은 피어나더군요.”

“…….”

“그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 오히려 더 먼 곳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지평선 너머 먼 곳을요. 도무지 끝이 어디일지 가늠조차 되지 않더군요. 세상이 참 넓고도 높았습니다. 내 예상보다 훨씬…….”

천천히 눈을 뜨자, 여전히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의 필릭스가 보였다. 레오는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그를 이해했다.

그 장면을 그는 직접 보지 못했고, 그날의 감상은 말로써 전해질 수 없는 것이었다.

꽃이 아름답다고, 사랑스럽다고, 그것에만 시선을 주기에는 황야가 너무 넓었다는걸. 세상은 니아 프레슬리와 레오 아리데오 둘이 살아 가는 게 아니라는걸. 그곳에서 레오는 그런 깨달음을 얻었다.

이제 변화가 필요했다.

“내가 나를 사랑해 보려고 합니다. 그게 내가 니아를 사랑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에요.”

레오 아리데오가 필릭스 쿠아란의 찌푸린 미간을 보며 웃었다.

“굳이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냥 그런 사랑도 있다, 그렇게만 생각하시면 됩니다.”

레오는 모든 것을 가볍게 갈무리하고 결론을 내렸다. 서사를 너무 장황하게 깔아 두었다는 생각에 약간의 민망함이 있었지만.

“필릭스 쿠아란 공작님, 저 유학 보내 주세요.”

필릭스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유학이라니?

“성녀 임명식이 있고 바로 다음에요.”

“떠나겠다는 게, 공부를 하러 간다는 거였어?”

“돌아오기 위해 떠나는 겁니다. 그리고 돌아왔을 때는…….”

레오 아리데오가 슬쩍 그의 표정을 살피다가 당당한 포부를 담아 말했다.

“당신보다 더 큰 사람이 되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성녀가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생각해 봤어요.”

니아는 클라우디아 엘로이에게 수북한 종이를 내밀었다.

니아의 녹색 눈동자를 면밀히 살피던 클라우디아는 눈썹을 가볍게 들썩이고는 그것을 받아 들었다.

“음, 검토해 볼게요. 성녀 임명식이 있기도 전에 이렇게 뭘 많이 준비할 줄은 몰랐네요.”

“미리 생각해야 폐하께서도 제게 이건 된다, 이건 안 된다 말씀해 주실 수 있을 테니까요. 저 혼자 판단하면 안 되는 거잖아요?”

“좋아요.”

클라우디아가 긍정적으로 웃었다. 그러자 차가워 보이던 인상이 따듯하게 변했다.

“아, 그리고 나도 말해 주고 싶은 얘기가 있었어요. 벅 프릴리에 대한 비밀 자료들을 황궁 비밀 서고에서 찾아냈거든요. 초대 황제가 벅에 대해 조사해 놓은 자료들 말이에요. 곧 사원으로 보내 줄게요.”

뜻밖의 좋은 소식에 니아는 웃으며 고개를 여러 번 끄덕거렸다.

“이것도 한번 볼래요?”

“네?”

후련하게 웃는 니아 프레슬리를 향해 클라우디아는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 서랍에서 종이를 꺼냈다.

그녀는 급히 무언가를 써 내려가더니 턱 하고 니아 앞에 내밀었다.

“읽어 봐요.”

개발새발인 글씨체였다. 그러나 읽힐 정도는 되는. 니아는 틀리게 읽지 않기 위해 미간을 찌푸린 채 천천히 소리 내 읽어 나갔다.

“국무 회의, 조약 체결, 의회의 소집, 개회, 하원 해산…… 서훈? 뭐가 많네요. 음, 황제 폐하의 공식 일정인 것 같은데, 맞나요?”

“거기에 앞으로는 종교 활동까지!”

클라우디아가 손뼉을 치며 덧붙였다.

니아는 고개를 들었다. 클라우디아가 너무 신이 나 보여, 뭔지는 몰라도 니아도 기분이 좋아졌다.

“왜 읽어 보라고 하신 거예요?”

“나도 바쁘다는 걸 알려 주려고요.”

클라우디아가 눈을 접어 웃었다. 그녀에게 니아의 계획을 공유해 주었으니 자신의 것도 알려 주겠다는 뜻이었다. 마치 친구 사이처럼, 동업자처럼, 그리고 황제와 성녀의 관계처럼.

니아는 빙긋 웃으며 종이를 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좋아요. 잘 알아들었습니다.”

“그럼 오늘의 얘기는 끝난 건가요?”

시간을 확인하는 클라우디아를 향해 니아는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젓고 지그시 눈을 맞췄다. 그러자 클라우디아가 서서히 웃음을 멈췄다. 그녀는 아, 중얼거리고 니아 프레슬리를 장난스럽게 째려봤다.

“중요한 이야기는 또 따로 있었군요?”

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하기에 앞서 니아의 얼굴이 들뜬 색으로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얼굴이 붉어지건 말건 개의치 않고, 그녀는 자연스럽게 두 팔을 탁자 위에 올리고는 깍지를 꼈다.

“성녀가 되는 당일, 하고 싶은 일이 있어요.”

말랑말랑하게 부푼 니아의 가슴이 두근대고 있었다.

“그게 뭘까.”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클라우디아의 표정이 조금 묘해졌다.

니아는 맞혀 보라는 듯 더욱 커다랗게 눈을 떴다. 녹색 눈동자 가득히 황제 클라우디아 엘로이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녀의 얼굴을 모두 삼킨 눈을 하고서, 니아는 정갈하게 입을 열었다.

“신탁을 내리고 싶어요.”

클라우디아의 입꼬리가 살짝씩 말려 올라가기 시작했다. 니아의 생각을 전부 읽은 것이다.

“음. 지금 생각하고 있는 그 내용으로요?”

“네.”

클라우디아 엘로이는 씩 웃었다.

“마음 가는 대로 해요, 나의 성녀님.”

필릭스 쿠아란은 니아 프레슬리가 거세게 숨을 들이쉬는 모습을 보며 웃었다.

그녀는 마음을 다독여 보려고 얼마 전 레오에게서 배운 호흡법을 열심히 시도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스스로 숨을 내쉬고 마시는 일조차 어색하게 느껴지는 듯했다.

“호흡법은 포기.”

중얼거린 니아 프레슬리가 거울을 향해 돌아섰다.

“어때요?”

어깨를 살짝 드러낸 하얀 빛의 드레스를 입은 그녀가 필릭스 쿠아란에게 물었다.

“예쁘다.”

필릭스가 그녀의 머리에 둘린 레이스를 만지작거렸다.

니아 프레슬리는 팔자 눈썹을 한 채 고개를 저었다. 그녀를 본 모든 사람이 입이 닳도록 칭찬해 주었는데도 그녀는 계속 걱정스러워했다.

“예쁜 게 목적이 아니라, 그러니까…….”

“예쁜 걸 예쁘다고 하지 뭐라고 해.”

낮게 중얼거린 필릭스 쿠아란이 씩 웃었다.

실은, 오늘로 또 거추장스러운 놈들이 여럿 늘겠구나 하는 생각으로 머리가 지끈거리고 있었다.

“여신 같아.”

필릭스는 기다렸다는 듯 무릎을 꿇었다. 그러고는 니아의 손등에 키스를 쪼개고 간지럽게 콧등을 비볐다. 하루 종일 긴장하던 니아는 처음으로 작은 웃음소리를 내었다.

“밖에는 사람들이 많겠죠?”

필릭스가 일어서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 최초의 성녀를 구경하려는 사람들로 사원이 넘쳐나고 있었다. 철저히 준비했지만 그조차 걱정스러울 만큼.

“네가 좋아하는 사람은 다 왔을 거야.”

하지만 이 불안을 그녀에게 전염시키고 싶지 않았기에, 필릭스 쿠아란은 그저 미소 지었다.

“레오와 딕시 댁스터 교수님도요?”

“당연하지.”

니아는 긴장된 숨을 토해 내며 필릭스 쿠아란의 어깨에 기댔다.

“두 사람 다 내 곁에서 행복하기만 했으면 좋겠다. 꼭 내 곁에서.”

작은 속삭임에서 따듯한 마음씨가 읽혔다.

필릭스 쿠아란은 니아의 손을 꼭 잡으며 또 한 번 속마음을 삼켰다.

‘딕시 댁스터도, 레오 아리데오도 당분간은 너의 곁을 떠나 있을지 몰라. 하지만 그들은 돌아올 거야. 반드시.’

그저 레오 아리데오가 직접 말할 때 니아가 너무 걱정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어차피 그 또한 필릭스와 마찬가지로 니아에게 인생을 저당 잡힌 남자니까.

“당연히 도련님도요.”

그의 침묵을 서운함으로 알아들었는지 니아가 덧붙였다.

“응.”

필릭스는 입술을 작게 휘고는 다정하게 답했다.

그녀의 곁에 오로지 자신뿐이었으면 했던 시절도 있는데, 이제는 니아 곁의 사람들이 떠나갈까 걱정이었다. 필릭스의 목울대가 그런 사색을 넘기며 미세하게 울렁거렸다.

그것을 모르는 니아 프레슬리는 그를 향해 부드러운 목소리를 흘렸다.

“내가 도련님 덕분에 오늘 같은 날을 맞았다는 걸 생각해 줘요. 내가 도련님을 얼마나 좋아하는지도요.”

그러다 니아는 문득 떠오른 듯 그의 귓가에 속닥거렸다. 귓가에 낮은 바람이 불었다.

“도련님이 제 첫사랑이에요. 아세요?”

순간 필릭스는 아프게 웃었다. 마음이 너무 저릿해 완벽한 웃음을 지을 수가 없었던 까닭이다. 그는 어릿어릿하게, 찬란한 기분에 속절없이 빠져들었다.

“응, 알고 있었어.”

때문에 멍하게 답이 나갔다.

“알고 있었구나.”

니아 프레슬리가 키득대며 그에게서 멀어졌다. 순식간에 곁이 허전해졌다.

자신을 바보로 만들어 놓고 본인은 하늘거리며 웃는 니아 프레슬리가 필릭스 쿠아란은 정말 좋았다. 언제나처럼.

사랑해 마지않는 니아 프레슬리가 그를 돌아봤다.

“걱정하지 말라고 해 줘요. 모든 게 괜찮을 거라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강한 척하느라…… 내 입으로 모든 게 괜찮을 거라고 말했거든요. 나도 듣고 싶어요, 그 말.”

“걱정하지 마.”

걱정은 모두 내가 할 테니까.

“다 괜찮을 거야.”

“그럼요. 걱정 안 해요.”

니아는 기다렸다는 듯 답했다.

“이제 나갈게요. 시간이 다 됐으니까.”

니아가 오른손에는 성전을, 그리고 왼손에는 새하얀 검을 들었다. 그러고는 필릭스 쿠아란에게 다가와 새가 부리로 쪼듯 작은 입맞춤을 여러 번 했다.

그저 품 안에 감추고 싶은 마음을 여러 번 강하게 누르고, 필릭스 쿠아란은 그의 작은 소녀가 세상 밖으로 날아갈 수 있도록 지켜봐 주었다.

필릭스 쿠아란은 속삭였다.

내내 행복하길, 니아 프레슬리.

니아는 하얀 검으로 손바닥을 그었다.

스스로에게 내는 첫 상처였다. 그러나 아프지 않았고, 상처가 아무는 순간에는 벅차오르기까지 했다. 모두가 경이로운 눈으로 상처가 낫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니아 프레슬리는 그녀를 향한 환호성을, 검을 든 손을 하늘 높이 들어 멈추었다. 그러자 세상이 고요해졌다. 몇 번이고 연습한 말을 공중 높이 띄워 보낼 순간이었다.

“성녀의 이름으로 신탁을 내린다. 치유 신께서 말씀하시길, 곧 신의 축복을 받은 자가 또 세상에 나타나리라. 백성들은 그를 환호로 맞이하라. 그리하면 제국에 더 큰 평화가 오리라!”

니아는 이 많은 사람 가운데 있을 딕시 댁스터와, 그리고 이 자리, 혹은 또 다른 어딘가에 있을 미지의 누군가를 떠올렸다. 그들에게 니아가 해 주고픈 말이었다. 여기 내가 먼저 와 자리를 잡았으니 이곳으로 와도 된다고.

니아는 성전과 칼을 모두 내려놓고, 마정석이 없는 빈손을 올렸다. 푸른 하늘과 햇살이 니아에게로 왔다.

니아는 확신할 수 있었다. 오늘만은, 온 세상이 그녀를 빛내 주기 위해 존재하고 있음을.

와아!!

다시 환호성이 시작되었다.

하늘에서 꽃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하얗고 팔랑거리는 것이 끝도 없이 떨어져 사람들의 머리에, 어깨에, 손끝에, 축복처럼 내려앉았다.

한여름의 눈이 소복이 쌓여 가는 것을 보며, 니아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오랫동안 꽃잎을 하늘에 뿌리는 것을 연습했지만 이렇게나 찬란할 줄은 몰랐다.

니아 프레슬리는 곧 차분함을 되찾은 두 눈으로 세상을 응시했다.

삶은 그 자체로 니아에게 많은 것을 배우게 만들었다.

어느 순간부터 잘 먹고, 잘 자고, 잘 배우고, 사랑하며 살다 보니 이 높은 곳에 올라 있었다.

저 먼 끝 바닥에 살 때도 있었는데, 이제는 제국의 가장 귀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다름 아닌 니아 프레슬리라는 여자아이가.

그러나 니아 프레슬리가 니아 프레슬리가 아닌 게 되는 건 아니었다. 언제나 그녀는 니아 프레슬리였다.

그저 또 다른 시작일 뿐.

“그래. 시작이야.”

아마도, 잘해 낼 수 있을 것이다.

니아는 그렇게 믿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지금 행복한가?

니아 프레슬리가 답했다.

“응. 행복하네. 무척이나.”

니아 프레슬리는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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