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권 차례
1. 최초의 성녀
2. 성녀 책봉식
3. 새로운 비밀
4. 오른팔
5. 기쁜 소식
6. 니아 프레슬리 납치 사건
7. 다툼
8. 최선의 선택
9. 필릭스 쿠아란의 생일
10. 화해
11. 또다시, 이별
12. 마지막에 짓는 미소
13. 특별한 삶
14. 그의 귀환
15. 청혼
1. 최초의 성녀
새로운 여황제의 대관식이 있은 지 석 달이 지났다. 사원의 건축이 얼추 마무리되고 있는 시점이었다.
건물을 짓는 데 특화된 마정석이 천문학적인 숫자로 사용되었다는 소문을 들었고, 그것이 사실이라는 클라우디아 엘로이의 확답도 들었다.
사실 니아는 그 천문학적 숫자라는 것이 실감 나지 않았다. 그러나 필릭스 쿠아란과 함께 점차 완공되어 가는 사원을 보고 올 때마다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했다. 웅장하다. 멋있다. 뭐 이런 감상과 함께.
“내가 왜 이런 선택을 했는지 잊지 말자.”
아직 정식으로 성녀로 임명을 받기도 전인데 니아는 매번 다짐하곤 했다.
빈 시간을 참지 못하는 니아가 초심을 찾을 겸, 딕시 댁스터를 만날 겸 해서 오랜만에 방문한 아카데미에서도 그랬다. 그 다짐을 누군가 방해하기 전까지만 해도 몇 번이고 반복해서.
“조교님, 아카데미 그만두셨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오즈 르나드가 눈치도 없이 니아의 사색을 방해하지만 않았더라면 그랬을 것이다.
“아무리 댁스터 교수님이 자리를 비우셨다지만, 일을 그만두신 조교님께서 제게 이러시는 건 조금…….”
물론 니아는 이제 이런 일을 할 이유가 없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불성실한 학생을 ‘벌’주는 일을.
하지만 이것은 하나의 본능 같은 것이었다.
벌을 받고 있어야 할 오즈 르나드가 소파에 잠들어 있는 모습을 본 순간, 참을 수 없는 화가 치민 것이다. 게다가 코 고는 소리가 너무도 요란해, 그를 모르는 척 소파에서 떨어뜨리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얼마나 필사를 열심히 했는지 보죠.”
니아는 최근 열심히 연습하고 있는 성녀의 자애로움은 전부 던져 버린 채 딱딱하게 중얼거렸다.
<치유의 신 벅 프릴리께서는 마법의 땅에서 태어나 스스로 존재하셨다.
그는 위대한 능력을 이끌고 에슬란 제국으로 향하셨고, 그의 능력의 일부를 돌에 담아 제국에 선물하셨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 에슬란 제국의 마법사들이 사용하는 마정석의 시초이다.
그러나 초대 황제인 에슬란 엘로이는 신의 전능을 탐하였고, 신의 선한 마음을 이용하려 들었다. 신께서 황제에게 마정석을 만드는 일이 그의 생명력을 깎는 일이라는 사실을 밝히신 바 있는데, 그것을 에슬란 황제가 악용한 것이다.
황제는 장님이라는 것을 감추기 위해 이십 년간 황궁에 감추어 두었던 황녀를 신께 보였으며, 신은 능히 그녀에게 사랑을 주고 두 눈을 주셨다.
신께서는 열흘이 지나 사라진 두 눈을 회복하셨으나, 황제가 이미 황녀를 먼 곳에 숨긴 후였다. 황제는 황녀…… 아, 졸리다…….>
“삼분의 일도 필사를 하지 못했군요, 오즈 르나드 학생?”
“음, 그랬던가? 하하.”
니아가 인상을 팍 찌푸렸다. 그리 길지도 않은 내용을 중간에 멈추고 자빠져 잔 게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녀였으면 차라리 다 끝내 놓고 잠을 자든지 놀든지 했을 텐데. 도대체 오즈 르나드의 머릿속에는 뭐가 들어 있는 걸까? 돌? 똥?
“백지.”
오즈 르나드가 스스로 정답을 외쳤다.
“백지가 더 이상 없어서요, 니아 프레슬리 조교님.”
“제 눈에 보이는 이건 뭘까요?”
니아는 발에 차일 만큼 많은 종이들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에이이, 조교님! 굳이 안 적어도 귀에 딱지 앉게 들었다고요. 딕시 댁스터 교수님이 퇴임 전까지 모든 학생이 이 내용을 줄줄 외우게 하시겠다면서…….”
“댁스터 교수님께서요?”
진심으로 놀란 니아가 화를 내려던 것도 잊고 물었다.
“네! 그렇다니까요! 그다음에 그, 마정석을 더 많이 만들면 황녀를 만나게 해 주겠다는 약속에 속아 넘어간 벅 프릴리, 아니 벅 프릴리 님께서 결국 마력이 고갈돼 죽고, 멀리 보냈다는 황녀님은 어디로 갔는지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고 뭐……. 아무튼 덕분에 마정석이 에슬란 제국에 많이 생겼다는…….”
놀랍게도 오즈 르나드는 그럭저럭 내용을 알고 있었다.
“흠, 완전히 바보는 아니네.”
니아는 작게 중얼거렸다.
“그런데 조교님, 그거 아세요?”
“또 뭘요?”
뭔지는 몰라도 그보다 많이 알 것이 분명한 니아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 행방이 묘연하다는 황녀님이요, 치유 신께 눈을 받아 황족 중 유일하게 눈 색깔이…….”
“…….”
“녹색이었대요!”
니아 프레슬리가 눈을 끔뻑거렸다. 어, 생각보다 더 많이 아네.
“그래요? 그건 나도 몰랐는데.”
니아 프레슬리가 짐짓 놀란 척을 하자, 오즈 르나드의 입꼬리가 스르르 올라갔다.
“조교님처럼 아름다운 녹색이었을까요?”
“음?”
“황녀님이 무척 아름다우신 분이었다잖아요. 신이 한눈에 반할 만큼! 분명 그랬을 거예요.”
“뭐……. 그런가…….”
니아는 묘한 기시감에 허허, 웃었다. 오즈 르나드의 얼굴색이 더욱 밝아졌다. 그는 손을 배배 꼬다가 결심한 듯 중얼거렸다.
“조교님. 이제 조교님이 아니시니까 제가 조교님을 조교님이라고 딱딱하게 불러야 할 이유가 없지 않을까요?”
니아는 오즈 르나드가 또 무슨 신박한 이야기를 할지 궁금해 꽉 쥔 주먹을 등 뒤로 숨겼다. 마치 뒷짐을 진 듯 보이겠지만, 이것은 저 입술을 향해 언제든 튀어 나갈 준비가 되어 있는 무시무시한 무기였다.
“이제 조교님을 조교님이라고 부르지 않겠어요.”
“그럼, 뭐라고 부를 예정이죠?”
오즈 르나드가 한 발짝 니아에게 다가왔다. 니아는 주먹을 더욱 꽉 쥐었다.
“너.”
“…….”
“너라고 부를게.”
말하고 나서 그가 수줍게 씨익 웃는 순간, 니아의 퓨즈가 끊겼다. 성녀의 품위는 콩알만큼도 생각나지 않았고, 사람의 입에 주먹을 집어넣어서는 안 된다는 기본 상식도 잊었다. 니아가 요, 요 주둥아리로 주먹을 넣으려던 순간이었다.
“너?”
니아 프레슬리는 재빨리 주먹을 다시 등 뒤로 숨겼다. 그리고 비딱한 자세로 서 있는 필릭스 쿠아란을 향해 고이 눈을 접었다. 아이처럼 사르르.
“도련님! 오셨어요?”
“응. 왔는데…….”
필릭스가 다시 한번 낮게 중얼거렸다.
“너?”
아직까지도 상황 파악이 안 된 오즈 르나드는 실실 웃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니아도 수줍게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오즈 르나드, 너는 죽었다!’를 외치며 킬킬거렸다.
오즈 르나드가 입을 가리고 니아에게 물었다. 왜 입을 가렸는지 모를 만큼 큰 목소리로.
“저분은 누구시죠? 어디서 많이 뵌 분 같기는 한데……. 음, 어디서 뵀는지 영…….”
어느새 니아 옆으로 다가온 필릭스 쿠아란은 서늘한 눈으로 오즈 르나드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미간을 찌푸린 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샅샅이 훑더니 이내 피식 웃었다.
“아아.”
그러면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말을 내뱉기도 했다.
“어, 왜 비웃죠? 저를 비웃은 것 같은데! 방금 내가 봤는데!”
오즈 르나드가 발끈했다.
니아도 웃음을 멈추고 동그란 눈으로 필릭스를 바라보았다. 예전의 그는 이런 경우 노발대발 화를 내며 온갖 질투를 보이지 않았던가. 웃어넘기는 것은 그의 방식이 아니었다.
“니아의 취향이 아니야.”
필릭스 쿠아란이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던 니아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필릭스 쿠아란이 똑똑해졌다!
“뭐, 뭐가요!”
오즈 르나드는 아직까지도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한 채 발끈하는 중이었다.
필릭스는 그를 무시한 채 팔을 니아에게 둘렀다.
“이사진들의 회의가 늦어지는 모양이던데. 계속 여기서 기다릴 거야?”
이 꼬맹이랑?
필릭스 쿠아란은 마지막 말을 생략했지만 눈빛으로 읽혔다.
니아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니요. 가 보는 게 좋겠어요. 제가 그렇게 한가한 사람은 아니니까. 저 칠푼이 말처럼, 조교 일도 그만뒀는데 사서 고생을 할 필요는 없죠.”
니아가 말을 하며 흘깃, 오즈 르나드를 쳐다봤다. 비웃음이 역력한 표정으로.
르나드는 똑 닮은 표정을 짓고 있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씩씩거렸다.
“칠푼이? 지금 아카데미 학생한테 칠푼이라고 했어?”
니아가 뭐, 중얼거리더니 왈칵 성을 내듯 되받아쳤다.
“이제 조교도 아니잖아! 상관없지!”
방금 충격적인 ‘너라고 부를게’ 발언이 다시 떠올라 울컥한 나머지 그만.
“그래도 칠푼이는 아니지!”
“너도 반말은 아니지, 인마!”
니아가 불꽃 같은 눈으로 바라보자, 오즈 르나드가 기가 죽어 깨갱 했다.
“갈까요, 필릭스 쿠아란 공작님?”
굳이 공작님에 힘을 주어 말한 니아는 오즈를 지나쳐 걸으며 곁눈질로 그를 살폈다.
오즈 르나드는 눈썹을 아래로 축 내려뜨리고선 연신 중얼거리고 있었다.
“필릭스…… 필릭스 쿠아란? 정말, 그 필릭스 쿠아란?”
예상대로의 반응이군. 니아는 큭큭대며 필릭스의 팔을 잡으며 걸어갔다.
“잠시만! 잠시만요!”
완전히 문밖으로 나가기 전, 오즈 르나드가 손을 들었다.
“뭐지?”
필릭스 쿠아란이 니아보다 먼저 고개를 돌려 물었다.
니아는 보지 않아도 그가 위협적인 표정을 짓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한 번 더 오즈 르나드가 당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어 니아는 작게 웃었다.
“영웅! 필릭스 쿠아란 공작! 와, 진짜다!”
“…….”
“실물이 훨씬 낫네요! 그림보다 훨씬!”
“…….”
“와, 와!! 저 오즈 르나드예요. 제가 팬레터 보냈는데, 못 보셨어요? 매주 보냈잖아요!”
그러나 오즈 르나드는 니아의 예상을 뛰어넘는 칠푼이였다. 아니, 칠푼이 아니고 팔푼이.
황제와는 친구 먹고, 공작과는 연인이 되고, 본인은 곧 성녀가 될 니아 프레슬리였지만 그런 그녀도 팔푼이 앞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팔푼이, 승리.
회의실 앞 복도에는 흥분한 아리갈리 버도네 교수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리고 있었다. 단단한 문을 뚫고 나오는 목소리에 필릭스와 니아는 동시에 눈을 맞추었다. 그리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 댁스터 교수만큼 훌륭한 교수를 또 어디서 구하냐고, 응! 가지 마, 댁스터 교수. 응? 가지 말라고!”
억지를 부리는 그와는 달리, 나름대로 침착하게 이야기를 꺼내는 목소리도 들렸다. 그러나 니아와 필릭스에게 들릴 정도로 크게 말하는 걸 보면, 마찬가지로 무척 답답한 듯 보였다.
“그, 자꾸 교수직을 그만둔다고 하지 말고 얘기를 좀 해 보게. 응? 솔직하게 말해야 우리도 협상이란 걸 해 볼 것 아닌가. 댁스터 교수, 다른 아카데미에서 연락 온 거 맞지? 얼마 준다던가? 사람 참. 돈에 휩쓸리는 사람으로 보지 않았건만…….”
니아는 문에 가까이 다가가 귀를 기울였다. 이사진들과는 달리 차분한 딕시 댁스터의 목소리가 들렸다.
“제 선택은 확고합니다. 다른 아카데미로 옮기는 것도 아닙니다. 개인적인 이유입니다.”
“거짓부렁!”
아리갈리 버도네가 처절하게 외쳤다.
“정말로, 거짓이 아닙니다.”
딕시 댁스터의 한숨 소리가 들리더니, 그녀답지 않게 지친 목소리가 나왔다. 아마도 몇 번이나 똑같은 말을 반복한 듯싶었다.
“제 개인적인 사정을 설명드려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저는 이렇게 이사진이 소집된 것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사직서 제출이 왜 몇 번이나 보류가 되는지도요.”
쾅쾅, 울림과 함께 의자가 드르륵 끌리는 소리가 들렸다.
“알았어! 이제 우리도 잡지 않겠네! 어디, 잘 먹고 잘 사나 보자고!”
“버도네 교수, 감정적으로 굴지 말고 일단은 좀 앉아 보게…….”
“아, 나는 모르겠으니까 갈 거라고! 그, 뭐냐, 이사진들 전원 동의가 없으면 사직서 수리가 안 되는 거는 모르겠고! 일단 나는 간다고!”
아리갈리 버도네는 ‘이럴 줄은 몰랐지?’ 히히 웃으며 성큼성큼 회의장 밖으로 나갔다. 본인이 무척 기특한 모양이었다.
서로 눈치를 보던 남은 이사진들도 하나둘 밖으로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댁스터 교수, 조금만 더 생각해 보라고. 응? 알겠지?”
한 명 한 명 나갈 때마다 어찌나 당부를 하던지, 니아는 당장이라도 달려가 딕시 댁스터의 귀를 두 손으로 꼭 막아 주고만 싶었다.
“혹시라도 사교육계로 진출하는 거라면, 이사회가 가만있지 않을걸세!”
가장 먼저 문을 나섰던 아리갈리 버도네가 다시 돌아와 마지막의 마지막으로 외쳤다.
문 뒤에 숨어 모두 나오기를 기다리던 니아와 필릭스는 딕시 댁스터가 홀로 남자 허겁지겁 회의장으로 들어섰다. 피곤한 낯으로 의자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는 딕시 댁스터가 보였다.
“교수님.”
니아가 조심스럽게 딕시 댁스터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녀의 눈꺼풀이 조금씩 열렸다.
“니아 프레슬리.”
딕시 댁스터가 고개를 저으며 피식 웃었다. 정말로 힘들어 보였다. 그러나 그녀는 이렇게까지 해서라도 에슬란 제국에서의 생활을 잘 마무리하고 싶은 것이었다. 몇 달 전, 니아의 손을 잡고 당장이라도 떠나려고 했던 마음을 뒤집고서.
“교수님, 정말로 떠나실 거예요?”
“그래. 네가 성녀가 되면 바로.”
니아가 댁스터 앞에 바로 앉을 수 있도록 필릭스 쿠아란이 의자를 가져왔다. 그러고는 주위를 살피더니, 열려 있는 창문과 문을 모두 닫았다. 마지막으로는 왕을 지키는 기사처럼 문 앞에 굳건히 섰다.
“편안하게 말해.”
다짐하듯 말하는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거리고, 니아는 딕시 댁스터의 두 손을 꼭 잡았다.
“교수님, 제가 왜 이런 선택을 했는지 정말 모르시겠어요?”
“…….”
“저 같은 사람이 또 있지만 않았더라면, 저는 그냥 평범하게 살았을지도 몰라요. 아시잖아요, 우리가 얼마나 평범한 삶을 원했는지.”
생기 없던 딕시 댁스터의 눈이 잠시 반짝거렸다. 그녀의 눈에는 추억이 담겨 있었다.
“그래, 알지. 평범함……. 특별함을 찾아서 왔는데, 결국 평범함을 쫓게 되었지.”
“이 나라 어딘가에 우리 같은 사람이 또 있을지도 모르고, 어쩌면 소식을 들은 벅 프릴리의 후손들이 용기를 내 세상 밖으로 나올지도 모르죠. 제가 그 사람들이 걸을 길을 앞서 걷고 싶어요. 교수님 같은 사람을 지켜 주고 싶어요. 저 같은 사람이 더는 없게 하고 싶어요.”
니아는 그녀에게 진심을 전했다.
차분한 설득이 시작되자, 딕시 댁스터는 니아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눈을 맞추고 희미하게 웃었다. 몇 달을 더 머물러 준 것으로 만족하고, 더 이상은 잡지 말라는 듯이.
“이런 변화가 두렵게 느껴지실 거 알아요. 왜 아니겠어요? 저도 얼마나 두려운데요. 내가 잘할 수 있을까, 잘못된 선택을 한 건 아닐까. 매 순간이 고뇌고 후회예요.”
그러다 니아는 말투를 가볍게 바꾸었다. 씨알도 안 먹힐 소리를 한번 시도해 보기 위해서.
“교수님께서 마음만 먹으면 저와 함께 성녀가 되실 수도 있죠.”
예상대로 딕시 댁스터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니아를 보았다. 그녀의 학생일 때, 그리고 조교일 때 니아가 실수를 할 때마다 지었던 그 표정으로.
그녀가 꼭 잡은 손을 빼내고 진지한 니아의 미간을 가볍게 때렸다.
“아, 아파요.”
니아가 중얼거리자 그녀는 작게 웃었다.
“성녀가 두 명인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니아 프레슬리.”
니아는 합죽이처럼 입을 다물었다. 딕시 댁스터는 여상히 말했다.
“니아, 클라우디아 황녀, 아니 황제가 왜 너를 선택했는지 알아?”
니아는 잠시 생각해 보다 고개를 저었다. 적당한 대답을 찾을 수 없었다.
클라우디아는 오래전부터 딕시 댁스터와 니아 프레슬리의 비밀을 눈치채고 있었다. 그러나 왜 둘 중 꼭 니아여야만 했을까?
니아의 머릿속 물음에 딕시 댁스터가 답했다.
“내가 결코 그녀의 편에 서지 않을 걸 알았기 때문이야. 황족을 향한 내 반감을 없애지 못할 걸 알고.”
“지금의 황제 폐하는 그런 분이 아니에요.”
딕시 댁스터는 고개를 잔잔히 저었다. 그러고는 그녀에게는 그녀만의 주관이 있다는 듯 단호히 눈을 맞춰 왔다.
“난 붉은 눈을 가진 사람을 믿지 않는다. 로즈 언니가 죽은 자리에 황실 문양이 놓여 있던 걸 발견한 그날부터. 어린 시절 그토록 어른들이 황족을 조심하라 을러도 듣지 않던 내가 말이야.”
“…….”
“니아, 성녀가 하루아침에 마녀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라.”
니아는 애써 웃으며 짜내듯 말했다.
“지금처럼 사실 수도 있어요. 저는 세상으로 나가지만, 교수님께서는 이곳에 계실 수도 있다고요. 그것도 싫으세요?”
“응. 두려워.”
돌아오는 답은 빠르고, 짧고, 솔직했다.
‘혹시 내 욕심으로 이 사람을 괴롭히고 있는 건가?’
니아는 순간적인 생각에 멈칫했다.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저었다.
“생각을 해 봤어요. 왜 교수님은 그토록 오랜 기간 저에게 말씀하지 않으셨을까? 기회는 차고 넘쳤는데.”
니아는 다시 딕시 댁스터의 손을 잡고 눈을 맞췄다.
“멈춰 있는 게 좋아서?”
“…….”
“저는 교수님이 아니기 때문에 교수님의 정확한 마음 같은 건 몰라요. 하지만 저라면 그랬을 것 같아요. 어머니의 이야기도, 어딘가에 같은 사람들이 모여 있다는 것도 알게 하기 싫겠다. 그런 고민을 안겨 주느니 그냥 내가 지켜 주는 게 낫겠다.”
딕시 댁스터가 또 한 번 희미하게 웃었다. 반쯤은 정답이라는 표정으로. 하지만 반쯤은 틀렸으니 소용없다는 표정으로.
니아 프레슬리는 말했다.
“저라면 그랬을 거라고요.”
딕시 댁스터가 니아의 손을 꽉 쥐었다. 그러나 그녀의 눈은 니아에게 향해 있지 않았다. 닫힌 창문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니아, 넌 멈춰 있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멈춰 있는 건 언제나 나였어. 두려워하는 것도 나였고.”
니아는 그다음 말을 기다렸지만 딕시 댁스터는 그 이후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것이 꼭 그녀의 작별 인사인 것처럼 느껴졌다.
니아는 굳게 입을 닫은 딕시 댁스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교수님, 정말 저를 두고 떠나실 수 있으세요?
그렇게 묻고 싶었다. 하지만 니아는 입 밖으로 내지는 않고 그저 웃었다. 만약 딕시 댁스터가 정말로 떠나게 된다면, 그녀에게 지금 니아의 말이 너무 무거운 짐이 될 것 같았다.
“존중합니다, 교수님. 교수님이 어떤 선택을 하시든, 저는 제 할 일을 잘할게요.”
대신 니아는 스스로 잘 살아 나갈 것을 약속했다. 어떤 선택을 하든, 그녀에게 니아가 자랑으로 남을 수 있도록.
니아는 필릭스 쿠아란이 입에 넣어 준 얼음 조각을 양쪽 볼에 욱여넣었다. 어제도 덥다고 생각했는데, 오늘은 더 더운 것 같았다.
아카데미를 나서는 길이 어찌나 후덥지근한지 물웅덩이가 있다면 드러눕고 싶은 심정이었다.
날씨에 대해 백분 토론을 하려는 듯 웅얼웅얼거리는 입을 필릭스 쿠아란은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떠올랐다는 듯 작게 외쳤다.
“다람쥐?”
“아암이여?”
“아니, 아니야.”
필릭스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니아와 필릭스는 호수 위 잘 다듬어진 돌다리에 올랐다. 함께 아카데미에 다니던 시절 종종 함께 걷곤 했던 다리였다.
그때는 서로를 몰랐고, 지금은 서로를 잘 알았다.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많은 것이 변했다.
그때와 지금의 공통점이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서로를 알아 가는 중이라는 것 정도일까? 서로를 이해하게 된 만큼 더욱 조심스럽게.
돌다리의 가운데쯤 왔을 때, 망설이던 필릭스가 니아를 멈춰 세웠다. 호수 위 개구리들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니아가 도서관에서 밤을 새워 공부했던 어느 여름밤, 집중을 방해하던 그 소리가.
“왜요?”
니아가 웃으며 물었다. 필릭스 쿠아란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조심조심 뱉었다.
“니아, 그녀가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실망하지 마.”
니아가 방금보다 작아진 얼음을 입에서 찬찬히 굴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놀랍게도 그는 딕시 댁스터를 변호하고 있었다.
“도망치는…… 떠나는 사람이 가장 괴로운 법이야.”
필릭스 쿠아란이 더운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가 머뭇대며 말꼬리를 끌었다.
니아는 와그작, 남은 얼음을 전부 깨물어 목구멍으로 넘겼다. 잔향처럼 입안에 시원함이 맴돌았다.
“그리고요?”
“도망친 사람은 반드시 후회하기 마련이거든.”
그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었다는 듯, 부드럽게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후회가 시작된 순간, 도망칠 때보다 더 큰 열망에 사로잡혀. 다시 돌아가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에.”
딕시 댁스터의 이야기이자, 곧 필릭스 쿠아란 본인의 이야기였다. 알아들은 니아가 머리칼을 귀에 꽂으며 예쁘게 웃었다.
“교수님께서 떠나고 후회하실까요?”
“확신해.”
니아는 지금 이 순간, 그의 눈에 자신이 어떻게 비칠지 알고 있었다. 마치 니아 프레슬리를 처음 보던 그 순간처럼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그는 종종 이렇게, 몇 번이고 다시 사랑에 빠졌다.
“그럼 돌아오실까요?”
“응.”
필릭스 쿠아란이 홀린 듯 답했다.
“너를 두고 떠나는데, 어떻게 돌아오지 않을 수 있겠어?”
중얼거림과 함께 커다란 손이 볼에 닿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의 입술이 닿았다.
니아는 눈을 감았고, 부드러운 숨결이 오고 가는 것이 간지러워 웃었다.
그의 말처럼 될 수도 있고, 딕시 댁스터는 한다면 하는 사람이기에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녀조차 그녀의 선택을 알 수 없을 것이다. 지금은.
마치 무엇이 나올지 알 수 없는 어두운 밤길과 같다.
하지만 이제 니아는 절망보다는 희망에 걸어 보기로 했기에, 필릭스 쿠아란의 말을 믿어 보기로 했다.
그녀가 떠나더라도 쉽게 돌아올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 보자고. 그럼 어느 순간 기적처럼 딕시 댁스터가 돌아올지도 모른다고.
밤길을 비추는 빛이 되리라.
에메랄드를 담은 듯한 녹색 눈동자가 한여름의 잎사귀처럼 산들거렸다.
다음 주, 니아 프레슬리의 성녀 책봉식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