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시작의 시작
빵 굽는 냄새가 집 안에 솔솔 흘렀다.
며칠 동안 레시피를 읽고 읽은 레오 아리데오는 드디어 완벽한 빵을 만들어 냈다. 이렇게 만족스럽다니. 레오 아리데오에게서 가벼운 콧노래가 흘렀다.
“니아, 빵 먹을 거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묻자 이층에서 니아가 소리쳤다.
“당연하지!”
레오는 씩 웃었다. 그리고 물었다.
“몇 개 먹을래?”
어떤 답을 할지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어떤 답을 할지 알고 있기에.
“만든 거 전부! 다 내 거야!”
듣고 싶어서.
모든 것은 예상대로였다. 그러나 레오 아리데오는 그의 예상보다 더 큰 행복에 감탄했다. 생각을 거치지 않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언제 내려올 거야? 지금 먹어야 맛있을 텐데?”
이번에는 정말 몰라 묻는 질문이었다. 도중에 슬쩍 봤는데, 니아는 거울을 보며 머리를 매만지고, 연신 뭐라 뭐라 홀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이런 경우, 웬만해서는 세월아 네월아…….
“곧!”
깔끔하게 떨어지지만 결코 믿음직스럽지 못한 답이 돌아왔다. 레오의 웃음이 허공에 자잘하게 흩어졌다.
반면, 니아는 거울을 보며 긴장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래, 할 수 있다니까.”
오늘의 계획들을 모조리 실천하리라 마음먹으며, 니아는 잔머리를 다듬었다. 다듬을수록 머리가 잡초가 되어 가는 것 같은 기분은 가뿐히 무시한 채로.
니아는 가장 좋아하는 옷을 꺼내 입고 심호흡을 한 후 계단을 내려갔다. 내려갈수록 갓 구운 빵의 향긋함이 짙어져 마음이 포근해졌다.
“레오, 지금 몇 시지?”
질문에도 여유가 담겼다.
“글쎄, 어제 네가 말한 시간에서…… 십 분 정도 남았네.”
“뭐?”
“십 분 동안 빵 먹고, 출발하면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야?”
“아니야!!”
니아가 갑작스레 화를 내고는 쿵쾅대며 다시 이층으로 올라갔다. 다 먹어 치우겠다고 말한 빵은 완전히 잊어버린 듯이…….
“레오, 내 겉옷 어디에 있지? 그, 흰 색깔의…….”
니아가 무엇을 찾는지 곧장 알아들은 레오가 빠르게 답했다.
“빨아서 널어놨어. 뒷마당에.”
“뭐? 그걸 빨면 어떡해! 나 오늘 입어야 한단 말이야아!”
“하지만 집을 비운 동안 먼지가 쌓였잖아. 네가 바닥에 던져 놓지 않고 얌전히 옷장 안에만 넣어 뒀어도…….”
“아, 몰라!”
투덜대는 니아를 보고 흠, 팔짱을 낀 레오는 선심 쓰듯 말해 주었다.
“오늘 햇빛이 좋아서 다 말랐을걸? 입으면 딱 예쁠 텐데.”
“진짜?”
순간 니아의 얼굴에 언제 그랬냐는 듯 웃음꽃이 피었다.
“그걸 먼저 말해 줬어야지!”
산뜻하게 외치고는 도도도 계단을 내려온 그녀는 미끄러지듯 문 앞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벌컥, 문을 열었다.
“어…….”
그리고 멈췄다.
니아가 놀란 만큼 그도 놀랐는지 잠시간 침묵이 일었다.
그가 먼저 눈을 곱게 접어 미소 지었다. 영원히 늙지 않는 소년처럼. 그만큼 눈부셨다는 의미다.
어디서 꺾어 왔는지 모를 꽃다발을 손에 쥔 채로 인사하는 그는…….
“안녕, 니아 프레슬리?”
필릭스 쿠아란이었다.
“받아 줄래? 꽃다발인데.”
필릭스 쿠아란이 한 손으로 꽃다발을 내밀었다. 니아는 서둘러 그것을 받으려다 등 뒤로 손을 쏙 집어넣었다. 그리고 킁킁 냄새를 맡고 일부러 꽃다발을 샅샅이 살폈다.
“음, 못생겼다.”
“…….”
“그래도 향기는 좋네요? 어, 그것도 아닌가.”
니아는 뻣뻣해지려는 필릭스를 보고 입꼬리를 올렸다. 마음이 즐거우니 장난은 배로 즐거웠다.
“받아 주겠어요.”
마치 귀부인처럼 꽃다발을 받아 든 니아는 그의 왼손을 물끄러미 보았다.
‘흙이 묻어 있네.’
니아는 흙을 털어 줄까 하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대로 놔두고, 오늘 하루 두고두고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저기요, 빵은?”
니아가 보조개를 깊숙이 드러내며 필릭스 쿠아란과 마주하는데, 삐딱한 자세를 한 레오 아리데오가 그보다 더 삐딱한 말투로 물어 왔다.
“아, 빵!”
배고픈 것도 잊고 있었다. 꽃향기에.
니아는 민망한 눈빛으로 레오를 바라보다 배시시 웃었다. 레오의 입꼬리가 살짝 말려 들어가 있었다.
“레오, 입에 하나 넣어 줄래? 그리고 양손으로 두 개씩 들고 가는 거야. 네 생각은 어때? 난 좋은 것 같아.”
“그냥 먹고 가시지, 니아 프레슬리.”
반강요 말투에도 니아는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모든 것이 계획대로 착착 진행되어야 하는 날이거든. 난 오늘 정각에 집을 나서기로 마음먹었어. 첫 계획부터 어긋나면 안 되잖아?”
“어련하시겠어.”
레오가 종이에 빵을 싸 작은 가방에 넣어 주었다. 양손으로 직접 들고 갈 생각을 하고 있던 니아가 동그랗게 눈을 떴다.
“레오, 혹시 너 천재야? 내 가족이 천재인 거야?”
주접을 떨기 시작하던 니아는 레오 아리데오가 가방에서 빵 하나를 빼 입에 물리고 나서야 입을 다물었다.
“갈까요?”
거칠게 빵을 목구멍으로 밀어 넣고, 니아는 숨을 크게 한번 들이쉬었다. 온 세상을 따듯하게 덮는 햇살과 신선한 바람이 니아에게로 왔다.
이렇게 좋은 날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꼭 기적같이 느껴졌고, 이런 좋은 날에 살아 있다는 것이 꼭 축복같이 느껴졌다.
이런 하루라면 무엇인들 못 할까?
“가요!”
니아는 물음표를 지우고 느낌표를 던졌다.
“새로운 황제 폐하를 만나러!”
그들은 한참을 걸어갔다. 필릭스 쿠아란은 왼쪽에, 니아 프레슬리는 오른쪽에 서서 나란히 발을 내디뎠다. 필릭스는 니아의 걸음에 맞춰 주었고, 그걸 눈치챈 니아는 부러 더 천천히 걸었다.
길가는 이름 모를 풀꽃들로 넘쳐났다.
“저랑 자리를 바꾸실래요?”
도란도란 작은 이야기들을 나누던 니아가 물었다. 잔잔히 물었지만 심장은 조금씩 박동을 빨리하고 있었다.
“그래.”
이유를 묻지 않은 채 필릭스 쿠아란이 자연스럽게 니아의 오른편으로 갔다. 니아는 가방을 들고 있던 손으로 그가 주었던 꽃을 쥐었다. 그러자 오른손이 텅 비었다.
니아는 마찬가지로 비어 있는 필릭스 쿠아란의 왼손을 부드럽게 쥐었다. 그러자 완전해졌다.
“이걸 하려고요.”
자연스럽게 앞으로 나아가려던 니아는 끼익, 정지했다.
“아.”
니아보다 먼저 정지한 필릭스 쿠아란이 눈을 끔뻑거리고 있었다.
“이제 시작인데…….”
중얼거린 니아가 민망해져 손을 빼려던 찰나, 필릭스 쿠아란이 깍지를 꽉 쥐었다. 그리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걸음을 옮겼다.
가볍게 팔을 흔들며 가려고 했던 니아는 꾹 쥔 팔에 미동도 주지 못했다.
성공인가?
“대성공.”
니아는 혼자만 들리게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작게 웃는데, 문득 그도 웃고 있을까 궁금해졌다.
니아는 앞서 걷고 있던 필릭스 쿠아란을 뛰듯이 걸어 따라잡은 후 아예 앞질렀다. 물론 오른손은 여전히 그에게 있었지만.
그의 앞길을 가로막듯 섰을 때, 니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입꼬리를 쭉 올리고 있던 그녀의 웃음은 웃음도 아니었던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저렇게 햇살같이 웃을 수가 있지?
너무 놀라워 말문이 막힐 정도였다. 물론 입은 당황스러운 질문을 던지고 말았지만.
“왜 웃으세요?”
니아가 바보 같은 질문임을 깨닫고 나서야 그가 답했다.
“좋아서.”
“아.”
니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길을 비켜 주듯 다시 옆으로 갔다. 어지러움을 뒤로하고 니아는 계획에 집중하기 위해 입술을 물었다.
하지만 잘할 수 있을까? 가장 간단한 것마저 니아에겐 이렇게나 어려운데.
니아 프레슬리는 거친 숨을 들이쉬었다.
“저기 잠깐 앉았다가 가요.”
손을 맞잡은 지 십 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니아는 여유롭게 실행하려던 다음 계획을 훨씬 더 빨리 진행하고 말았다. 다행스러운 점은 그들 앞에 딱 쉬어 가기 좋은 분수대가 있다는 점이었다.
“그래.”
이번에도 그는 토를 달지 않았다. 그러나 꼼지락거리며 벗어나려 하는 니아의 손은 결코 놔주지 않았다.
자리에 앉는 것까지는 비교적 괜찮았는데, 앉자마자 니아와 필릭스 사이에는 침묵이 놓이고 말았다. 뒤에 있는 분수대에서 물이 오르고 내리는 소리만 몇 번이나 반복되었다. 니아는 퐁 소리가 들릴 때마다 움찔거렸다.
뼈가 고장 났나? 아침까지는 잘만 움직이던 목이 움직이지를 않았다.
‘아, 다음, 다음.’
니아는 어깨에 기대 보려던 계획을 취소하고 다음 계획을 먼저 실행하기로 마음먹었다.
“음, 도련님. 괜찮으시다면 손을 놔 볼까요?”
“왜?”
용기를 내 한 말은 마치 아이를 달래는 듯했다. 직업병이라는 것이 꽤 무서웠다.
그러나 필릭스 쿠아란은 니아의 말투는 전혀 개의치 않고, 의문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도련님이 잠시만 여기에 계시면 제가 곧 돌아올게요.”
“같이…….”
가늘게 뜬 눈으로 중얼거리던 필릭스가 돌연 말을 멈추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았어.”
“…….”
“기다리고 있을게.”
그가 보석처럼 소중히 쥐고 있던 손을 천천히 폈다. 사이사이 단단히 엮여 있던 니아의 손가락은 스르르 빠져나갔다.
‘휴.’
니아는 삐질삐질 흐르는 땀을 닦으며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나아갔다.
“어?”
니아 프레슬리는 뚫릴 만큼 거센 힘으로 주머니를 뒤졌다.
단박에 불안함을 느낀 상인은 ‘설마 그렇게 날 귀찮게 해 놓고 돈을 안 가져온 건 아니지?’라는 말을 한마디로 축약했다.
“손님?”
“어라……?”
니아는 주머니가 없는 치마까지 팡팡 때려 가며 돈을 찾았다. 겉옷은 이미 거꾸로 들고 몇 번이나 털어 본 이후였다. 땅바닥에 떨어져 데구루루 굴러간 것은, 언제 넣어 뒀는지 모를 키오네 세 개뿐이었다.
“망했다.”
니아는 멍청히 중얼거렸다.
“망했군.”
동시에 상인도 중얼거렸다.
니아 프레슬리의 고개가 땅바닥을 향해 툭 꺾였다. 필릭스 쿠아란에게 깜짝 선물을 주고 싶었다. 원래도 계획한 일이었지만, 오늘 그에게서 꽃다발을 받고 나서는 꼭 줘야겠다고 다짐했는데…….
니아는 처량하게 주저앉아, 저들끼리 빙글빙글 돌다 멈춘 키오네 세 개를 집어 들었다. 턱없는 금액임을 알고 있었지만, 니아는 혹시 모를 가능성을 믿고 체면을 구겨 보기로 했다.
“외…….”
“외상은 안 됩니다. ”
“후…….”
“후불도 안 됩니다.”
역시나 체면만 구겨지고 말았다.
“이 끈의 가죽은 어린 몽스터베리 열 마리를 한 땀 한 땀 장인의 손길로 짠 가죽이지요. 요즘 귀족분들도 많이 찾고 계시고요. 최근에 가장 인기가 좋은 물건인 만큼 외상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이게 마지막 상품이니, 이제 이 몽스터베리 가죽끈을 사려면 석 달은 기다리셔야겠군요. 말씀드렸다시피, 모든 게 수작업이라서요.”
니아는 망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선가 검 손잡이에 가죽끈을 두르는 게 유행이라는 말을 듣고, 필릭스 쿠아란의 힐트에 직접 감아 주고 싶었다. 부드러운 가죽을 감아 두면 칼을 잡을 때 손이 더 편하다고 해서.
역시나 급하게 나온 것이 화근이었다.
니아는 이 상인의 마음을 십분 이해했다. 거의 삼십 분을 이것저것 비교하고 따져 봤는데 이제 와서 돈이 없다니.
‘하지만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어.’
니아는 민망함을 무릅쓰고 한 번 더 상인에게 물었다.
“3키오네로 살 수 있는 게 있을까요? 검과 관련된 거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텐데…….”
너무도 간절하게 묻자, 상인은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도 사지 않아, 비싼 제품을 산 손님에게 거저 주려고 했던 물건이 떠올랐던 것이다.
“이거라도 괜찮다면야.”
상인이 턱짓했다. 니아의 시선이 낡은 유리창 너머로 향했는데, 거기에는 손톱만 한 자수가 새겨진 손수건이 있었다. 용도를 알 수 없는 얇고 긴 손수건.
“이건 어디에…… 쓰는 걸까요?”
너무 얇아 무언가를 닦는 데 쓸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고, 너무 밋밋한 나머지 그 어떤 사람도 저것을 몸 어딘가에 두르고 싶지 않을 것 같았다. 두르자마자 미라가 친구 하자고 덤빌 것 같은데, 도대체 어디에 쓰는…….
“용도는 직접 찾으셔야죠.”
“아, 직접. 그런 거구나.”
저거라도 사야 할까 고민하던 니아는 결국 상인에게 3키오네를 내밀었다.
“제가 한번…… 잘 찾아볼게요. 저것의 용도를.”
“아시겠지만 환불은 불가능하고, 교환 또한 불가능합니다. 저것과 교환해 드릴 물건이 우리 가게에는 없어서.”
“그럴 일 없어요.”
버리면 버렸지 저걸 바꾸겠다고 다시 이 가게에 올 것 같지는 않았다. 니아는 묵묵히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상인이 나름대로 예쁘게 접어 준 그대로 손수건을 들고서 가게를 나섰다.
시간을 너무 오래 지체했다는 걸 깨닫자마자 니아는 필릭스 쿠아란이 있는 곳을 향해 달렸다. 분명 지루한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을 거라 생각하며.
“헉, 허억…….”
도대체 이 손수건을 무엇이라 하며 전해 줘야 할까 답도 내리지 않은 채로 달리던 니아는 필릭스가 보이자 멈춰 섰다.
그는 그대로 앉아 있었다. 엉덩이 한번 떼지 않았다는 것에 니아는 방금 구입한 이 손수건을 걸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게 무슨 일일까?
필릭스 쿠아란 근처에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분수 근처에 옹기종기 앉아 있는 사람들도 꽤 있었고, 아예 바닥에 앉아 서로의 어깨를 기대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필릭스 쿠아란이 그의 앞에 서 있는 꼬마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잘했다 중얼거렸다.
“음유시인?”
꼬마의 등 뒤에는 작게 음유시인이라는 글씨가 적혀 있었다.
“아, 길거리 연주구나.”
니아는 멀리서 고개를 끄덕였다.
시를 읊는 꼬마들이 악기 연주를 곁들인 공연을 하며 돈을 받는다는 건 알고 있었다. 니아도 종종 보곤 했던 풍경이었고……. 단 한 번도 제대로 귀 기울여 본 적은 없었지만.
그러니 이상할 것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나직하게 웃고 있는 필릭스 쿠아란이 어찌나 거짓말 같은지, 니아는 앞으로 더 나아가야 한다는 것도 까먹어 버리고 말았다.
다음 연주가 시작되자 그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연주는 고요한 바다처럼 잔잔했고, 음유시인의 음색은 한낮에 부는 바람처럼 살랑거렸다. 연인들의 사랑에 대해 노래하는데, 가사가 지나치게 무난해 외려 졸음을 불러일으켰다.
‘사랑은 가랑비 적시듯, 그렇게 스며 와…….’
어쩌면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것일지도 모른다. 눈을 감고 귀는 연 채 음미하듯 듣고 있는 사람이 절반이 넘었으니까.
필릭스 쿠아란 역시 마치 어느 과거를 추억하는 모양새로 어깨를 조용히 흔들고 있었다.
‘세상에.’
처음으로 그가 평범해 보였다.
‘세상에나.’
하지만 이 많은 사람들 중 그만 보였다.
‘와…….’
이게 사랑인가?
니아의 심장 속을 한 사람이 걸어가고 있었다. 마치 그곳의 주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뚜벅뚜벅. 요동치는 심장에 평화가 꽂혔다.
그러자 놀랍게도 평온했다.
“니아?”
그가 눈을 뜨자, 그 앞에 서 있던 니아는 저도 모르게 그에게로 내려앉았다. 분수에서는 물방울이 소소하게 튀었다.
입술이 닿았다.
그 순간에 니아는 깨달았다.
첫사랑이었다.
아이에게 돈을 건네주고, 필릭스 쿠아란을 하나둘 알아보기 시작한 사람들에게서 도망쳐 나오듯 황궁 앞에 섰다.
손을 꼭 잡고 달리는 두 사람을 모두가 쳐다보고 있는 것 같기도 했고, 또 아무도 쳐다보고 있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사과처럼 붉어진 낯빛으로 필릭스는 말했다.
“너에 대해 떠올렸어.”
“…….”
“힘든 일이 훨씬 많았는데, 이상하게 좋은 것만 떠올랐어. 그래서 너무 좋았어.”
필릭스가 환하게 웃었다.
“순간으로 평생을 사는 사람도 있다잖아.”
“…….”
“아마도 너를 처음 만난 그날, 나는 그 아이로 영원히 사는 거 아니겠어.”
그럼 나는 오늘에 평생 머무를까, 니아는 막연히 그렇게 생각하며 웃었다.
응, 그럴지도 모르지. 마음속의 답은 평화로웠다.
“제국의 영광을. 황제 폐하를 뵙니다.”
니아는 준비한 말을 꺼냈다. 그녀가 세운 계획들 중 몇 안 되는 성공이었다. 떨지 않고 인사하기.
그러나 무릎을 굽히며 몸을 땅으로 향한 순간, 니아는 클라우디아 엘로이에 의해 허리를 펴게 되었다.
“쓸데없는 건 생략.”
니아 프레슬리가 주춤거리며 일어서는 동안, 옆에는 알아서 모든 과정을 생략한 필릭스 쿠아란이 서 있었다. 그는 황궁 앞에서 햇살처럼 웃었던 것과는 달리 예의 그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니아의 눈에는 귀여웠다.
“우웩.”
황제의 입에서 나온 상스러운 말에 니아가 토끼 눈을 뜨는데, 눈이 마주치자 토하는 시늉을 하고 있던 클라우디아 엘로이가 싱긋 웃었다.
“우리 둘만 이야기할까요? 남자는 빼고.”
니아는 필릭스 쿠아란 쪽을 돌아보았다. 혹시라도 그가 기분 상해한다면, 니아는 셋이서 이야기해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그도 다 알게 될 사실이니까.
“편할 대로 해.”
필릭스 쿠아란이 부드럽게 답했다.
“도련님, 제가 후회할 선택을 할지도 몰라요. 그래도요?”
아마도 필릭스 쿠아란은 예상하고 있을 터였다. 니아 프레슬리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으며, 무슨 결심을 했는지.
“후회 안 하게 해 줄게.”
참으로 든든한 조력자였다. 그리고 참으로 사랑스러운 남자였다. 니아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클라우디아 엘로이는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사람이었다. 분명 정적인 곳에서 차를 마실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녀가 데려간 곳은 작업실이었다. 물감 냄새가 자욱하고, 아무도 관리하지 않는지 시든 화초가 이리저리 늘어져 있는.
“와…….”
니아가 감탄 아닌 감탄을 내뱉는데, 클라우디아 엘로이가 양손을 펼쳐 공간을 소개했다.
“구경 좀 할래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공간이거든요.”
“그래 보여요, 황제 폐하.”
니아는 웃으며 대답했다. 친구 대하듯 자연스럽게 답했다는 것도 모른 채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오 분.”
클라우디아 엘로이가 장난스러운 말투로 구경 시간에 제약을 걸었다.
니아는 천천히 가장 크고, 가장 화려한 동시에 지저분한 그림 앞에 섰다. 한쪽 벽면을 다 채울 만큼 커다랗고 다채로운 그림이었다. 여러 색의 물감을 붓에 묻혀 아무렇게나 뿌린 듯했다.
니아 프레슬리는 단단히 굳어 있는 듯 보이는 노란색을 향해 손을 뻗었다. 순간 푹, 하고 손가락이 들어갔다.
“아직 안 굳었을 텐데?”
클라우디아 엘로이는 니아의 검지가 모두 노랗게 물들고 나서야 우아하게 경고했다. 니아는 민망한 듯 웃었다.
“삼 분.”
니아가 다른 세계에 온 듯 구경하는 동안, 클라우디아 엘로이는 책상에 걸터앉아 여유롭게 물감을 물에 풀었다.
적당히 물기를 머금은 붓이 하얀 여백 위에 닿았다. 치마를 길게 내려뜨리고 고고하게 자세를 잡은 것과 달리 그녀의 첫 손길은 무척이나 거칠었다. 반투명한 청록색은 날카로운 선을 종이에 파내듯 그렸다.
“일 분.”
동시에 마지막으로 일직선 하나를 그려 낸 클라우디아는 미련 없이 붓을 내려놓았다.
니아도 시간에 맞춰 깔끔히 그 앞에 섰다. 마주 본 두 사람의 표정은 여느 때보다 진지했다.
“벅 프릴리에 대한 기존 서적은 모두 불태우라고 명했어요. 황궁의 장서각은 이미 모든 처리가 다 끝났고요.”
“……힘드시겠어요. 꽤 고된 작업일 테니까요.”
“어쩔 수 없죠. 그런 약속이었으니까.”
“공작님과 말이죠?”
“그렇죠. 내가 이제 황제가 되었다고 딴소리를 하면 한 달 만에 또 황제가 바뀔지도 몰라요. 리바론 기사단은 그에게만 충성한답니다. 불행히도.”
니아에게는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 생각을 읽은 듯 황제가 눈썹을 들썩였다. 동시에 니아는 움찔했다.
“아.”
“맞아요. 대충은 보여요. 당신의 생각이 말이에요.”
“…….”
“당신처럼 나도 특별한 거죠.”
니아는 겸양의 기색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곧 있을 대화를 위해서라도 지금은 겸손하면 안 된다.
“이제 벅 프릴리에 대한 여론이 많이 바뀐 걸 당신도 알 거예요. 공작의 눈치가 얼마나 보이던지, 한동안 잠도 못 자고 소문을 이리저리 퍼뜨리고 다니는 데만 열중했죠.”
“알아요. 많이 실감하고 있습니다.”
니아는 긍정했다.
제국의 하나뿐인 공주를 납치해 두 눈을 파먹었다는 벅 프릴리의 전설은 완전히 뒤집혀 있었다. 벅 프릴리는 더 이상 괴물도 악인도 아니었고, 살인자는 더더욱 아니었다. 이제 그는 제국에 마정석을 가져다준 위인이자 신이었다.
반면, 그를 죽여 마정석을 최초로 발견하게 되었다는 초대 황제는 이제 선한 신을 죽인 악인이 되어 있었다.
세상이 그랬다. 손바닥 뒤집듯 뒤바뀌기도 했다.
“폐하, 제가 필요하시죠?”
“음?”
진지한 니아의 물음에 클라우디아가 노래하듯 중얼거렸다. 니아 프레슬리에게는 지금 이 순간이 너무도 중요한 선택의 순간이었기에, 그녀는 다시 클라우디아에게 물었다.
“제가, 필요하신 게 맞죠?”
“…….”
“증명 가능한 힘이요. 폐하께서는 처음부터 저를 염두에 두셨습니다.”
“…….”
“맞지요?”
니아가 뚫어져라 눈을 직시하자, 그제야 클라우디아는 자세를 바로 했다.
“당신은 참 빠르게 변하는군요.”
그러고는 진심으로 놀랍다는 듯 중얼거렸다.
“맞아요. 당신을 위해 비워 둔 공석이 있죠. 아니, 사실 당신이 아니면 안 되는 자리예요. 그러니 반쯤은 도박이었죠. 당신이 어떤 선택을 할지 모르니까.”
“아마도 원하시는 선택일 겁니다.”
클라우디아는 눈을 찡긋거렸고, 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필릭스 쿠아란 공작을 등에 업고 왕좌를 얻었어요. 내 아버지 후인 엘로이가 악행을 많이 저질렀다고 해도 내가 패륜을 저지른 것과, 최초의 여황제인 사실은 변하지 않죠. 그건 평생 내 꼬리표가 될 겁니다.”
“…….”
“벅 프릴리를 신으로 세웠대도 부족해요. 제국에 없던 신성이란 것을 새롭게 등장시켰지만, 사실 벅 프릴리는 이미 오래전에 죽은 사람이잖아요? 실체가 없죠. 그래서 내겐 당신이 반드시 필요해요.”
클라우디아 엘로이는 무섭도록 침착하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니아가 숨을 들이쉼과 동시에 그녀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당신이 이 나라의 성녀가 되어 주세요.”
“…….”
“치유 능력과, 마정석 없이도 마법을 하는 모습을 백성들에게 보여 줘요. 물론 표정 연기를 좀 요하겠죠. 뭐랄까, 더 신성한 느낌을 주려면은.”
“그리고요?”
“백성들이 당신을 통해 신에게 기도하기 시작하겠죠? 당신은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는…… 자애로운 신 같은 성녀가 되면 됩니다.”
자애로운. 그 말을 하고 클라우디아 엘로이는 입꼬리를 올렸다.
니아는 따라 웃지 않고 물었다.
“폐하께서는요?”
기다렸다는 듯 클라우디아는 답했다.
“나는 무서운 황제가 되겠습니다.”
그러고는 덧붙였다.
“물론 그 어떤 황제보다 능력은 있겠죠.”
클라우디아 엘로이의 붉은 눈이 니아를 형형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잡아먹기라도 할 듯 사납게도 보였으나, 또 어떻게 보면 친구 하자고 제안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니아 프레슬리는 클라우디아 엘로이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그녀가 니아에게 한 걸음 왔듯이.
“좋습니다.”
거래가 성립되었다.
니아가 먼저 방긋 웃었다. 친구 하자는 듯이 손도 내밀었다.
클라우디아 엘로이는 이건 예상치 못했다는 듯 니아의 손을 조금쯤 외롭게 놔두다가, 거센 힘으로 잡고 흔들었다.
“사원은 아주 화려하게, 황궁 근처에 지을 겁니다. 혹시 원하는 게 있다면 말해요. 취향을 반영해 줄게요.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으니까.”
“황금색만 아니면 됩니다.”
“아, 좋아요. 그건 나도 지긋지긋하죠. 앞으로도 지긋지긋할 테고.”
클라우디아는 진심으로 웃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 웃음에 다짐과 경고를 섞어 또박또박 말했다.
“만약 내가 초대 황제나 전대 황제처럼 누군가의 목숨을 가벼이 하고 권력에 눈이 멀거든, 신의 이름으로 날 벌해요.”
“…….”
“혹시 당신이 신의 힘을 핑계로 권력에 눈이 먼다면 내가 황제로서 당신을 벌할 테니.”
“…….”
“좋은 거래죠? 위대하고.”
최악의 경우를 상정하는 두려운 말이었다. 그런데 이상하리만큼 니아를 두근거리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니아 프레슬리는 답했다.
“좋은 거래네요. 근사하고.”
두 여자의 웃음소리가 장내에 흘렀다. 위대한 약속과는 달리 소박한 웃음소리가.
밖으로 향하려는 니아 프레슬리의 등 뒤로 클라우디아 엘로이는 중얼거렸다.
“이제 내가 왜 하대를 하지 않았는지 알겠어요?”
니아는 부드럽게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 클라우디아 엘로이는 장난스럽게 스스로 답했다.
“동등한 위치에 설 것을 이미 알았기 때문이죠.”
불과 몇 분 전 도박이었다고 말한 그녀가 이제는 운명이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니아는 그런 그녀가 무섭다기보다는 귀엽게 느껴져 웃었다.
가볍게 목례를 하고 작업실을 나온 니아는 기다리고 있을 필릭스 쿠아란에게로 향했다. 이 떨리는 이야기를 어서 그에게 전해 주고 싶었다.
“어머, 이게 다 뭐람.”
그리고 니아가 손자국을 남기고 간 클라우디아의 작업실에는, 시든 화초가 모두 갓 피어난 꽃으로 뒤바뀌어 있었다.
세상이 그랬다. 죽은 꽃이 살아나기도 했다.
5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