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그녀의 이야기
플라타너스가 흔들거리며 짙은 그림자를 만들었다. 유독 빽빽하게 자라난 나무 사이로 들어가서야 딕시 댁스터는 멈추었다.
“니아 프레슬리.”
어느덧 상처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니아 프레슬리는 몇 번이나 확인하듯 딕시 댁스터의 팔목을 쳐다보았다.
“니아, 떠나.”
결론부터 말하는 딕시 댁스터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교수님, 아니……. 당신 뭐예요?”
니아가 딕시 댁스터의 손을 뿌리쳤다.
“누구예요?”
부정하듯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니아는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제 비밀을 아시는군요. 언제부터?”
“…….”
“아니지……. 당신에 대해 말해요. 왜 날 속였어요? 이래서 날 곁에 둔 거예요?”
니아 프레슬리는 딕시 댁스터를 향해 고개를 들고 눈을 맞췄다. 그리고 뚜렷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우리가 같아서?”
딕시 댁스터가 움찔거렸다. 그녀의 머리칼이 정처 없이 흔들렸다. 니아가 처음 보는 딕시 댁스터의 당황한 모습이었다.
“그런 게 아니야.”
“왜 숨겼어요? 왜 다 알면서……. 나 같은 사람이 또 있다는 걸 알았다면, 그리고 그게 당신이라는 걸 알았다면 나는 훨씬 더 쉬웠을 텐데. 내게 왔던 불행들을 견디기가…….”
니아의 중얼거림을 들은 딕시 댁스터는 눈을 꾹 감았다. 감은 눈꺼풀에 고통이 서렸다.
“네게 큰일이 생긴 줄 알았어. 아카데미에 계속 오지 않아서. 넌 그럴 아이가 아니니까. 반드시, 무슨 일이 난 거라고 생각했다. 집에도 찾아갔었어.”
“…….”
“네가 없었다, 니아 프레슬리.”
“멀리 가 있었어요. 레오의 일도 있었고, 도련님이 내가 떠나 있기를 바라셔서……. 그게 가장 안전할 거라고.”
습관처럼 딕시 댁스터에게 변명을 늘어놓다 니아는 아차 싶어 입을 다물었다. 설명을 들을 쪽은 니아 프레슬리였다.
“반정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이후에야 정신이 들었어.”
딕시 댁스터가 두 손을 니아의 양쪽 어깨에 올렸다. 니아는 그녀의 미는 힘에 의해 나무에 거칠게 부딪혔다.
“새로운 황제가 지난 세월을 모두 뒤집고, 벅 프릴리를 신으로 만든다는 이야기를 듣고서야 정신이 들었다고!”
딕시 댁스터가 숨을 헐떡였다. 움푹 파인 눈이 괴로움으로 떨리고 있었다.
“니아, 내 얘기를 잘 들어라.”
“…….”
“우리는 벅 프릴리의 후손이야. 너와 나, 그리고 그들은.”
“그들?”
니아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단단히 붙든 딕시 댁스터의 손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이번만큼은 양보하지 않겠다는 듯 댁스터는 강한 힘으로 니아를 짓눌렀다.
“세상에 알려진 벅 프릴리에 대한 이야기, 그건 다 새빨간 거짓이다. 초대 황제가 만들어 낸 거짓말이지.”
“…….”
“네가, 니아 네가…….”
딕시 댁스터가 참을 수 없다는 듯 니아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순간 니아는 반사적으로 그녀의 머리칼을 매만지며 위로할 뻔했다.
“네 엄마와 너무 많이 닮아서, 그래서 힘들었다. 일이 이렇게 되고 나서야…….”
로즈 프릴리는 유독 손이 작은 소녀였다. 말라깽이인 로즈는 가족들에게 볼품없다는 말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으나 하나만큼은 만족스러웠다.
아름다운 녹안.
에메랄드처럼 빛나는 녹색 눈은 언제나 그녀의 자랑거리였다.
“설마 또 마을에 내려간 거니? 미쳤어, 로즈?”
“사고 좀 그만 쳐! 골칫덩어리야!”
그러나 아름다운 것은 오직 눈동자뿐, 어른들은 모두 그녀를 골칫거리 로즈라고 불렀다.
어머니는 로즈 프릴리만큼 호기심 많고 사고를 크게 치는 아이가 없다고 말했고, 아버지는 로즈가 바깥세상에 대해 물어볼 때마다 불같이 화를 냈다.
“황제한테 잡혀간다잖아! 제발 제자리에만 있어, 로즈 프릴리.”
세 살 터울의 남동생은 그녀의 이름을 찍찍 부르며 기어올랐다.
“세상에, 이 아기 좀 봐요! 방금 날 보며 웃은 것 같은데요?”
몇 년 만에 태어난 아기를 보며 주제를 다른 곳으로 돌리는 일은, 로즈 프릴리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일이었다.
그렇게 호기심 많던 소녀는 자라나 여자가 되었고, 숨기는 것이 능숙한 어른이 되었고, 사랑에 빠지면 다른 것은 보이지 않는 바보가 되었다.
“언니, 정말 간다고?”
어느덧 아기에서 꼬맹이가 된 딕시가 짐을 싸는 로즈를 향해 물었다. 로즈는 쉿, 중얼거리고 지난번 마을에 내려갔을 때 슬쩍해 온 사탕을 꼬맹이에게 물려 주었다.
“응. 다신 안 와.”
“하지만 바깥은 위험하다고 했는걸.”
딕시가 오물오물 사탕을 빨아 먹으며 중얼거렸다.
로즈 프릴리는 고개를 저었다.
“잘 숨기고 살면 돼. 그리고…… 그 사람이 날 지켜 줄 거야.”
“그 사람이 누군데?”
“내가 사랑하는 사람.”
그렇게 말하며 로즈 프릴리는 옅게 미소를 지었다.
어느새 사탕을 다 먹은 딕시는 로즈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흔들었다.
“언니, 가지 마. 로즈 언니밖에 책을 읽어 주는 사람이 없단 말이야. 다 무서운 어른들뿐이야. 제이드 오빠는 맨날 놀리기만 하고!”
로즈 프릴리는 난처한 얼굴로 딕시의 머리칼을 쓸었다. 어린 시절의 자신을 보는 것만 같았다.
“딕시, 나는 갈 수밖에 없어.”
“왜?”
“여기를 만져 봐.”
로즈는 딕시의 손을 자신의 배로 가져다 대었다.
“여기에 아기가 있거든.”
“아기?”
“그래, 아기. 난 여길 떠나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이 아기를 낳을 거야. 그리고 예쁘게 키울 거야. 사랑만 줄 거야.”
“나도 언니 아기가 보고 싶어!”
순수한 외침에 로즈는 아프게 고개를 저었다.
“마을로 내려와서는 안 돼. 정말로 위험하니까. 웅? 약속해, 딕시. 언니를 찾아 내려오지 않겠다고.”
“하지만…….”
“언니는 아주 멀리 갈 거야. 바깥은 네 생각보다 훨씬 크고 넓어. 나도 그렇게까지 멀리 가 본 적은 없지만……. 아마 우리가 다시 만나기는 힘들 거야. 영원히.”
중얼거리는 로즈 프릴리를 향해 딕시는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고 칭얼거렸다.
“나도 따라가면 안 돼? 따라가게 해 줘. 말도 잘 들을게!”
“안 돼.”
“거기에 사탕이 한가득이지? 책도 많지? 나도 따라갈래, 언니. 제발…….”
이번만큼은 냉정하게 딕시의 손을 놓은 로즈는 차갑게 답했다.
“딕시, 나도 네 나이 때는 그런 것들이 좋았어. 하지만 그건 아무것도 아니야. 입에 달콤하고 보기에 좋은 것들을 쫓지 마.”
“언니는 가잖아!”
“그런 건 없어도…….”
로즈 프릴리는 슬프게 중얼거렸다.
“사랑이 있으니까.”
배를 한 번 더 쓰다듬은 로즈 프릴리는 자신을 따라오려는 딕시를 약하게 밀었다.
어린아이는 그녀의 작은 힘에도 쉽게 내려앉았다. 딕시의 눈에 눈물방울이 차올랐다. 그리고 로즈의 눈에도.
“안녕, 딕시.”
로즈 프릴리는 밤길을 달렸다.
“산에서 조용히 사는 부족이 있다고는 들었지만, 정말 존재할 줄은 몰랐어. 정말 가족들과 헤어져 살아도 괜찮은 거야, 로즈?”
테리 라이손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로즈 프릴리를 바라보았다. 그의 손은 로즈의 배를 부드럽게 쓸고 있었다.
“수도로 가면 다시는 보지 못할 텐데.”
로즈는 그의 손을 자신의 손으로 덮었다.
“당신만 있으면 상관없어요.”
순간 테리 라이손의 눈이 반짝였다. 로즈는 그것이 사랑인 줄 알았다.
“아버지가 시골 영지로 쫓아내실 때 화를 냈던 게 후회돼. 여기 오지 않았다면 로즈 널 만나지 못했을 테니까.”
가벼운 말투에도, 로즈는 그것이 사랑인 줄 알았다.
“아이가 생겼다는 걸 알면 아버지도 다시는 날 여기에 처박아 두지는 못하시겠지.”
“도시는 어때요?”
“이곳보다야 훨씬 즐겁지.”
“걱정…… 아니, 기대돼요.”
로즈의 말에 테리 라이손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좋은 것들을 보여 줄게. 물론 넌…….”
테리는 그녀가 자신의 정식 부인이 되지는 못할 거라는 말을 삼켰다. 가는 길이 긴데, 굳이 출발부터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네가 너라서 좋아. 순수해.”
테리 라이손이 웃으며 로즈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그의 말은 그녀가 세상 물정 모르는 시골 처녀라 좋다는 뜻이었지만, 로즈의 눈은 사랑으로 물들었다.
보기 좋은 갈색 머리칼이 그녀의 이마에 닿았고, 부드러운 입술이 닿았다. 로즈에게 그건 전부 사랑이었다.
“뭐라고? 로즈, 방금 뭐라고 했어?”
“들었잖아요.”
“뭐, 벅 프릴리? 그 괴물이랑 네가 똑같다고?”
술을 먹고 돌아온 테리 라이손이 껄껄대며 웃었다.
지나치는 마을마다 조금씩 머무는 바람에 시간이 많이 지체되고 있었다. 몇 달이 지나니 로즈의 배가 불러 오기 시작했고, 그만큼 테리는 지루해졌다. 로즈 프릴리라는 여자가.
그런데 여관으로 돌아오자마자 테리 라이손의 눈치를 살피던 로즈가 바보 같은 농담을 했다. 이제 테리는 그녀의 순수가 권태를 넘어 짜증스러웠다.
“로즈, 제발 그 산부족 같은 농담은 그만둬. 도시에서 그런 식으로 대화하려고 했다가는 아무도 너와 어울려 주지 않을걸?”
“정말이에요, 테리. 믿어 줘요.”
지긋지긋하다는 눈빛으로 로즈를 바라본 테리 라이손은 팔짱을 꼈다.
“증명해 봐.”
“네?”
“상처가 한순간에 낫는다며. 나 원 참, 무슨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지금 내 몸에…… 상처를 내라는 말이에요?”
“네 말이 맞다면 상관없잖아.”
테리 라이손이 돌연 히죽댔다.
“상처가 바로 아물 테니까.”
로즈는 입술을 깨물고 부푼 배에 손을 올렸다. 배 속의 아이가 듣지 못하게 귀를 막으려는 듯이.
로즈 프릴리의 눈이 불안으로 가득 찼다가 점차 차분해졌다. 사랑이 한 꺼풀 씐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으니 그의 시선이 다르게 읽혔다.
“좋아요.”
그가 쉽게 믿을 수 없는 게 당연했다. 에슬란 제국은 벅 프릴리에 대한 증오가 뿌리박힌 나라였고, 그 시작은 무려 몇백 년 전이었다. 증오 섞인 전설.
‘우리는 숨어 살아야만 해. 로즈, 이 작은 숲을 제외하고 우리가 살 곳은 이 나라에 없어.’
‘애초에 이 정도 숫자도 유지해 온 게 기적이야! 딕시 다음으로 아이는 없을지도 몰라.’
‘우리 외에 네 편은 없어, 로즈 프릴리!’
‘로즈 언니, 가지 마. 응?’
로즈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내가 가족을 떠나겠다고 말했을 때 날 안아 줬던 당신이니까.”
진실을 보여 주면 그는 그녀를 더 사랑해 주겠지. 아껴 주겠지. 그가 그녀를 지켜 줄 거고, 태어날 아이에 대한 걱정도 더 깊이 나눌 수 있을 것이다.
“그래, 어디 한번 보여 줘 봐.”
로즈는 그가 첫 만남 때 주었던 머리핀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 앞에 하얀 팔목을 내밀었다.
날카로운 머리핀의 끝이 살을 깊숙이 스치고 지나갔고, 핏물이 맺혔다. 한 방울, 두 방울……. 그러다가 멈췄다.
“……테리, 이제 안아 줘요. 아파요.”
다시 머리핀을 머리에 꽂은 로즈는 두 팔을 벌렸다.
그러나 정작 증명해 보이라던 테리 라이손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정말이라고?”
그가 멍하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로즈는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그럼 네가 말한 네 가족들은?”
돌연 서늘한 목소리로 그가 물었다.
“거짓말이었어요. 가족은 없어요……. 당신 말고는.”
왠지 가족에 대해 말하면 안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어 로즈는 재빨리 답했다.
테리 라이손이 비스듬히 고개를 돌리고 목을 매만졌다.
“그래, 가족이 있을 리가 없지. 말도 안 되잖아. 괴물 가족이라니.”
그는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불안한 눈으로 그의 입술을 보고 있던 로즈는 얼음처럼 굳었다.
“하……. 어떻게 이런 일이.”
이제 그의 눈에서는 술기운이 완전히 사라진 채였다.
“테리.”
불안함을 견디지 못하고 로즈가 그에게로 한 걸음 다가갔다.
“오지 마.”
“네?”
“오지 말라고. 한 걸음도 내 쪽으로는 오지 마.”
“왜…….”
“생각 좀 하게.”
끓어오르는 화를 겨우 참는 듯 테리는 머리칼을 뒤로 넘겼다. 로즈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그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한참 후에야 그는 한마디를 물었다.
“네 배 속의 아이도 괴물인 거지?”
순간 불안함으로 떨고 있던 로즈의 눈에 광기가 비쳤다.
“당신 아이예요.”
잠시간의 정적 뒤, 테리 라이손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그럼, 내 아이지. 내 아이고말고. 그래, 당연히 내 아이지…….”
창백한 낯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는 로즈 프릴리를 향해 테리가 다가왔다.
“이리 와. 안아 줄 테니까.”
“…….”
“너무 놀라서 그랬어. 네가 사람이 아닐 거라고 내가 예상이나 했겠어?”
“난…… 사람이에요, 테리.”
처음처럼 따듯한 말투에 로즈는 안심했다. 그러나 그가 아무렇지 않게 뱉는 말들이 콕콕 심장을 찔렀다.
“아, 사람.”
“우리 아이도 마찬가지예요. 사람이고, 사람으로 키울 거예요. 우리가 잘 지켜 줘야 하겠지만…….”
“그래, 로즈 프릴리. 그러고 보니 네 성이……. 이름은 스스로 지은 거야? 아니야. 그게 무슨 상관이겠어. 이렇게 우리 둘이 함께 있는 게 중요하지.”
“……고마워요.”
“앞으로 내게 숨기는 게 있으면 안 돼. 알겠지?”
오래도록 안아 줄 줄 알았던 테리가 성급하게 로즈를 품에서 떼어 냈다. 로즈는 허전함에 팔을 쓸었다.
“알았어요.”
“내가 널 용서해 준 거야. 어? 날 속이고 내 애를 밴 너를. 두 번은 없어.”
“……고마워요, 테리.”
“뭐, 저주?”
“네.”
테리 라이손이 그녀를 용서해 준 이후, 로즈는 알고 있던 사실들을 털어놓았다. 물론 가족에 대한 이야기는 빼고. 그것은 로즈가 버리고 온 가족들에 대한 마지막 양심이었다.
“저주를 내릴 수가 있대요. 신기하죠?”
“어…… 신기하네. 무슨 저주인데?”
“그것까지는 몰라요. 하지만 강력한 저주일수록 수명이 단축된다고 들었어요.”
테리는 돌아가신 할머니에게서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리며 답했다.
“누구한테 들었는데?”
피식거리며 묻는 테리 라이손을 보고 로즈는 아차 했다.
“그냥, 그냥 알고 있는 거예요.”
또다시 자신을 속였다고 몰아붙일까 봐 로즈는 서둘러 변명했다. 그러나 아무렇게나 한 변명에도 그는 너무나 쉽게 이해했다.
“그래 뭐. 그렇겠지 당연히. 원래 괴물들이 그렇잖아.”
“또 괴물이라고…….”
“아, 미안 미안.”
“……자꾸 그러면 화낼 거예요.”
가볍게 투덜대자 테리 라이손의 눈빛이 바뀌었다.
“화낸다고? 네가, 나한테?”
“당신이 자꾸만 나를 괴물이라고…….”
“날 속인 너를 내가 받아 줬는데, 감사는 못 할망정?”
그가 험악하게 로즈를 내려다보았다. 로즈는 습관처럼 배를 부여잡았다. 이제 내려다보면 그녀의 발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부푼 배였다.
“미안해요.”
로즈는 눈을 꾹 감았다.
“도시에 혼자 갔다 온다고요?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아버지가 위독하시다잖아, 로즈. 그것도 이해 못 해 줘?”
“하지만 아이가 나올 날도 머지않았는데…….”
로즈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러다 결심한 듯 테리 라이손을 쳐다봤다. 오랜만에 그녀에게서 용기 가득했던 옛 모습이 비쳤다.
“같이 가요. 내가 빠르게 움직여 볼게요.”
“안 돼.”
그러나 테리 라이손이 뱉는 싸늘한 한마디에 그 모습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너 때문에 늦어져서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못하면, 네가 책임질 거야?”
“아버지…….”
로즈는 자신이 두고 온 가족들을 떠올렸다. 한번 보고 싶다고 생각하니 둑이 터진 듯 그리움이 차올랐다. 참고 참았던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래, 여기 있으라고. 다 너를 위해서야, 로즈.”
테리는 그녀의 눈물을 수긍으로 받아들인 건지 고개를 끄덕였다.
“도시로 가면 마차를 가져올게. 그럼 편안하게 도시까지 갈 수 있을 거야.”
“정말이에요?”
테리 라이손은 물기 어린 초록빛 눈동자를 진하게 바라봤다.
“당연하지.”
로즈는 멍하니 그 얼굴을 보다 배시시, 웃음을 지었다. 동시에 테리 라이손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그는 여과 없이 부딪쳐 오는 로즈의 눈길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테리.”
“응.”
짐을 챙기는 테리 라이손을 향해 로즈는 걸어갔다. 뒤뚱거리며 걷는 모습이 스스로도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다.
“아이의 이름을 지어 줘요.”
“응?”
“당신이 정해 줘요. 당신 아이니까.”
왜 그런 말을 던졌을까. 아마도 로즈는 이것이 마지막이 될 거라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달아나듯 짐을 챙기는 그의 뒷모습에서.
“이름?”
그는 단 한 번도 생각지 못했다는 듯 단어를 중얼거렸다. 고심 끝에 그는 답했다.
“알아서 정해.”
“…….”
“바쁜 사람 잡고 늘어지지 말고.”
아이의 이름을 지어 주고 가라고 징징댈까 겁이라도 나는 듯, 그는 가방을 등에 메고 밖으로 나섰다.
문이 닫히고, 로즈는 그가 떠난 자리만 몇 시간이고 바라보고 있었다.
“천치.”
로즈가 배 속 아이의 귀를 막고 중얼거렸다.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었다.
“돌아가자.”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이제 더 이상 사랑 같은 건 없으니.
“사라졌네.”
로즈는 망연히 중얼거렸다. 몇백 년을 이어 온 그들의 보금자리가 사라져 있었다.
“엄마? 아빠? 제이드? 딕시…….”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모두 로즈 프릴리 때문이었다.
바깥세상으로 나간 로즈가 이곳을 발설할지도 모르니까. 그런 위험이 있으니까.
배신자 로즈 프릴리.
“왜 돌아올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기어코 로즈는 주저앉고 말았다.
이런 몸으로 돌아오게 되어도, 가족들은 그녀를 받아 줄 거라고 생각했다. 결국엔 용서해 주고 옛날로 돌아갈 모습을 상상하며 여기까지 왔는데.
갈 때는 마음대로 갔지만, 올 때는 아니었다.
그녀가 모든 것들을 다 망쳐 버리고 말았다.
“어떻게 살지?”
잘 살아 보려고 갔는데. 살기 위해 갔던 것이었는데…….
그 순간 배 속에서 발이 튀어나왔다. 공을 차듯이.
“그래. 네가 있지.”
로즈는 울먹였다.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그녀에게 두려움으로, 그리고 희망으로 다가왔다. 생명의 무게가 그녀의 어깨를 짓눌렀지만 동시에 살려 냈다.
“아가.”
그러다 로즈는 문득 떠오른 듯 중얼거렸다.
“니아?”
다시 한번 배가 꿈틀거렸다. 아이가 즐겁게 헤엄치고 있었다.
“그래, 니아. 예쁜 이름이다.”
그리고 그녀는 맹세하듯 속삭였다.
“우리끼리 살아 나가 보자, 니아. 엄마를 지켜 줘.”
홀로 니아를 낳고 기른 지가 몇 년이 지나, 어느덧 니아는 다섯 살이 되어 있었다.
“엄마, 내가!”
요리를 하는 등 뒤에서 니아가 펄쩍펄쩍 뛰었다.
“내가 할래!”
“어허, 니아 프레슬리 그만.”
로즈는 튀어 오르는 니아의 머리를 가볍게 눌렀다. 어린아이의 여린 머리칼이 그녀의 손에 닿았다. 로즈는 부드럽게 니아의 정수리를 쓰다듬었다.
니아 프레슬리.
그녀의 아이는 사랑을 먹고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었다. 날이 갈수록 싱그러워졌다.
산속에서 니아를 낳았지만, 도저히 아이를 산속에서 홀로 키울 수 없음을 깨닫고 마을로 내려왔을 때였다.
“혼자요?”
마을의 초입에서 잠든 니아를 안고서 갈팡질팡하고 있을 때, 한 중년의 여인이 로즈에게 말을 걸었다.
“……아이와 함께예요.”
“아빠는 없고?”
“네.”
새근새근 숨을 쉬고 있는 니아를 물끄러미 본 여자는 로즈에게 물었다.
“이름은?”
“네?”
“아기 이름.”
“니아예요. 니아…… 프레슬리.”
프릴리라는 성을 듣고 멈칫하던 테리 라이손이 떠올랐다. 니아에게 이 위험한 성을 줄 수는 없었다.
“예쁜 이름이구먼. 따라와요.”
니아가 태어난 이후 처음 맞는 행운이었다. 그리고 니아와 함께 세상에서 도망치고 싶었던 순간마다 그런 작고 큰 행운들이 그녀를 살렸다. 이번만 넘겨 봐, 이번만 넘겨 봐, 이번만, 마지막으로 이번만……. 행운들은 그렇게 그녀에게 속삭였다.
“니아 프레슬리! 다섯 살!”
그렇게 살다 보니 어느새 이 꽃같이 싱그러운 아기가 걸음마를 하고, 말을 하고, 예쁜 짓을 하고, 떼를 쓰고, 고사리 같은 손으로 로즈의 부은 눈을 쓰다듬어 주는 어린이가 되어 있었다.
“엄마!”
니아가 꽃을 잔뜩 꺾어 로즈에게 건넸다.
“응, 예뻐. 너무 예뻐.”
너무 사랑스러워.
로즈는 니아를 품에 꼭 안았다.
“니아, 엄마가 뭐라고 말했지?”
“모르는 사람 따라가지 말기.”
“또?”
“음, 사람들 앞에서 뛰지 말고, 다치지 말고, 혹시라도 다치면…….”
“…….”
“무조건 숨기기!”
“잘했어, 우리 딸.”
쪽, 하고 입술이 니아의 볼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간지러운 듯 니아가 가동거리다 자지러지게 웃었다. 데구루루 바닥을 굴러다니던 니아는 벌떡 일어섰다.
“엄마, 우리 언제 또 산에 가?”
“가고 싶어?”
“응!”
“엄마는 힘든데. 니아 업어야 해서.”
“그래도…….”
로즈 프릴리가 흠, 중얼거리다 크게 웃었다.
“내일 갈까, 딸?”
“응! 좋아, 엄마!”
우연인지 운명인지, 니아는 로즈의 예전 보금자리를 참으로 좋아했다. 어쩌면 이 위험한 세상보다 산이 본능적으로 더 끌리는 건지도 모른다.
“딕시?”
“언니?”
두 사람이 동시에 서로를 불렀다.
“엄마, 누구야?”
낯선 여자를 보고 니아가 로즈의 치마 뒤로 숨었다. 고개를 빼꼼 내밀고 바라보니, 머리가 짧고 키가 큰 여자가 놀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엄마, 가자…….”
낯선 느낌에 니아는 로즈의 다리를 당겼다. 그러나 로즈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딕시, 정말 많이 컸다. 몰라보겠어. 머리도 짧게 자르고, 키도 크고……. 여기서 만난 게 아니었으면 그냥 지나쳤겠는걸.”
답이 없는 딕시 프릴리를 향해 로즈가 주절거렸다.
“아, 여기는 내 딸이야. 예쁘지?”
딕시의 시선이 니아에게로 향하자 로즈는 웃으며 소개했다. 그러고는 흥분과 설렘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그런데 어떻게 여기에 왔어? 설마, 가족들이 전부 돌아오는 건가? 그래?”
너무 놀라 말이 없던 딕시가 그제야 입을 열었다.
“나 혼자 도망쳐서 온 거야.”
“도망쳐 온 거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로즈 프릴리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딕시 프릴리를 바라봤다.
“언니처럼……. 바깥세상으로. 그곳엔 내가 원하는 게 없으니까.”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딕시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물었다.
“아이 아빠는 어딨어? 설마 하고 와 본 건데……. 도시로 가기 전에.”
“도시라니.”
로즈 프릴리가 정색했다. 심각한 분위기를 느낀 니아는 말없이 로즈의 치마를 만지작대기만 했다.
“세상이 얼마나 위험한데 네 발로 떠나와!”
로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에 따라 딕시의 얼굴도 험악해져 갔다.
“언니가 먼저 말해. 분명 도시로 간다고 했던 사람이 왜 여기에 있어? 난 언니가 적어도 행복은 할 줄 알았어.”
적어도 행복. 로즈는 갑작스레 말문을 잃었다.
“계속 아이랑 이 산에 있었던 거야? 언제 돌아온 건데?”
가지 말라고 붙잡던 어린 딕시가 떠올랐다. 분명 그녀는 딕시에게 따라오지 말라고 말했었다. 하지만 지금 보니 오히려 어린아이를 부추기는 꼴이 된 것 같았다. 이렇게 딕시가 그녀의 눈앞에 짐을 챙겨 나타난 것을 보면.
“우리는 저기 아랫마을에서 사는데…….”
콩알만 한 목소리로 니아가 중얼거렸다.
“산에는 놀러 온 건데…….”
딕시 프릴리의 시선이 치마 뒤의 니아에게로 향했다. 그녀는 화를 참는 목소리로 니아에게 물었다.
“네 아빠는 어딨어?”
“아빠는…… 없는데…….”
니아가 꼼지락대다 히, 웃었다. 동시에 딕시는 울고 싶은 듯 입술을 악물었다. 그녀는 원망이 짙게 묻은 목소리를 로즈에게 뱉었다.
“사랑을 찾아간다고 했잖아.”
입에 자물쇠를 채운 듯 답하지 않는 로즈에게서 딕시는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아득히 먼 하늘을 바라보다 그대로 중얼거렸다.
“난 언니 때문에 꿈을 꾸기 시작했는데. 언니가 떠난 이후, 내 머릿속에는 온통 바깥세상 생각뿐이었어. 사람들한테서 언니가 배신자 취급을 당하는 걸 알면서도 매일 꿈꿨다고.”
“…….”
“그런데 결국 언니는 제자리네. 지켜 줄 사람 하나 없이. 이러려고 떠났어? 몇 년도 못 갈 사랑 같은 것 때문에?”
커다란 가방을 짊어 메고 있는 딕시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당장 돌아가라고, 너는 늦지 않았다고 말하려던 로즈 프릴리가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딕시의 말을 곱씹는 듯하다가, 로즈는 슬프게 중얼거렸다. 딕시의 말에 틀린 곳이 딱 한 군데 있기 때문이었다.
“사랑이 왜 없어.”
“…….”
“여기 있잖아.”
로즈는 니아 프레슬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산에서 뛰어노느라 힘을 다 뺀 니아는 잠들어 있었고, 작은 집 안에서 로즈와 딕시는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딕시는 망설이다 로즈가 내준 차와 바게트를 조금씩 먹었다.
“엄마랑 아빠는? 제이드는?”
“다…… 잘 있어.”
“다행이다.”
중얼거린 로즈는 깊이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물었다.
“어디에 있는데?”
“레즈미 산. 큰 동굴이 있어. 몇 년간 거기서 지냈어. 이사를 할 때 난항을 겪기는 했지만 잘 자리 잡았거든.”
“레즈미 산…….”
“언니, 설마 가 보려는 건 아니지?”
“…….”
“이제 와서?”
로즈는 잠든 니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의 선택은 오로지 니아에게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그녀는 엄마였으니까.
“지금은 아이가 어려서 괜찮지만, 앞으로 어떤 일을 겪게 될지 몰라. 너무 위험해. 이 마을에 있는 것보다는 거기서 사는 게…….”
딕시는 헛웃음을 지었다. 사랑이 있긴 있는데, 그 사랑이 눈도 가리고 귀도 막는 모양이라고 생각하면서.
“늙은이들이 저 애를 받아 줄 것 같아? 언니 혼자 돌아간대도 쫓겨날 판이야. 배신자에 대해 얼마나 가차 없는지 잘 알잖아. 언니 가족들도 모두 떠난 거 보면 모르겠어?”
딕시는 정신 차리라는 듯 로즈를 향해 외쳤다.
“언니도, 나도, 모두 돌아갈 수 없어! 배신자니까! 그리고 이제 또 이사를 가야 하겠지, 나 때문에. 우리 둘 다 영영 돌아갈 수 없다는 얘기야.”
“……언제쯤 이사를 갈까?”
기어코 가 보겠다는 모양새에, 딕시는 테이블을 치며 벌떡 일어섰다. 다 먹지 못한 차와 간식이 흔들렸다.
“갈 거면 알아서 가. 난 계획대로 도시로 갈 거니까. 언니는 실패했어도 난 실패하지 않아. 난 사랑같이 무의미한 걸 찾아 떠나는 게 아니란 말이야.”
딕시는 울분이 차오르는 듯 가슴을 치다가 이내 냉정하게 중얼거렸다.
“딕시 댁스터. 그 이름으로 살 거야. 그리고 배우고 싶은 공부 마음껏 할 거야. 절대 정체를 들키지 않을 자신 있어.”
그러나 일어났으면서도 발을 떼지는 못하는 딕시 댁스터였다. 땅바닥에 발이 붙은 듯 몸이 움직이지를 않았다.
“그러지 마.”
로즈 프릴리가 꽉 쥔 딕시 댁스터의 손을 잡았다. 부드러운 손이 딕시의 주먹을 덮었다. 상처 없이 고운 손이었지만, 이 손에 얼마나 많은 상처가 났을지 딕시만은 알고 있었다.
딕시는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돌렸다.
“같이 가자, 딕시.”
“…….”
“응? 언니가 도와줄게. 우리 둘 다 같이 가서, 용서를 빌자.”
“난…….”
“네가 아직 어려서 그래. 딕시, 가족 없이 살아갈 수 없어. 나도 이젠 너무 힘들어. 돌아가고 싶어서 미칠 것 같아……. 응?”
딕시 댁스터는 울음을 삼켰다. 절대 울먹이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도록 한참을 기다린 다음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딱딱하고, 서리처럼 차가운 음성으로.
“말했잖아. 난 실패하지 않는다고.”
“그 언니 갔어? 무서운 언니. 심술궂게 생긴 언니!”
잠에서 깬 니아는 칭얼대지도 않고 딕시부터 찾았다.
“응. 갔어. 멀리 갔어.”
“웅…….”
너무 무서웠는데, 왠지 모르게 서운한 기분이 들어 니아는 입술을 비죽였다. 다시는 못 본다는 생각에 조금쯤은 아쉬웠다.
“니아, 우리 여행 갈까?”
“응?”
“니아는 산 좋아하잖아. 저기 산 말고, 더 큰 산에. 엄마랑 같이 가는 거야.”
“좋아!”
니아는 좀 전의 서운함은 잊고 신이 나 빙그르르 돌았다. 작은 치맛단이 풍선처럼 부풀었다가 가라앉았다. 일부러 크게 지었던 옷은 어느새 발목을 드러내고 있었다.
“우리 딸, 몇 살이지?”
“응? 니아 프레슬리, 다섯 살!”
니아가 주문처럼 외쳤다.
“다 컸네.”
로즈 프릴리는 있는 힘껏 니아를 껴안았다. 니아가 로즈의 품속에서 버둥거렸다.
“엄마, 갑갑해…….”
“미안해. 엄마가 부족해서.”
발버둥이 멈췄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간질간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응? 엄마 좋은데. 최곤데!”
감격에 압도되는 지금 이 순간, 로즈는 니아에게 달리 줄 것이 없어 사랑을 주었다.
“감사했어요, 그동안.”
“정말 떠나는 거야? 정들었는데.”
“가족들하고 연락이 닿아서요. 그쪽으로 가요.”
로즈가 작은 선물과 함께 작별 인사를 전했다. 이래저래 많은 도움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그, 언제 간다고 했지?”
“내일요.”
“아이고, 오늘이 다 갔으니 정말 마지막이네.”
로즈는 말갛게 웃었다. 그리고 데리고 온 니아도 꾸벅, 인사를 시켰다.
“그래, 잘 가고. 아기 예쁘게 잘 키우고!”
“그럼요. 그래야죠.”
하품을 하는 니아를 업고서, 로즈는 천천히 걸음을 걸었다. 마지막 밤을 보낼, 몇 년간 그녀를 지켜 주었던 집을 향해.
“로즈? 로즈 맞지?”
한 남자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
“나야, 테리 라이손!”
로즈의 표정이 시체처럼 창백해졌다.
로즈는 기대로 밤잠을 설치고 있는 니아를 결국 일으켜 세웠다.
“니아, 엄마가 또 물어봐서 미안해.”
“응, 뭐가?”
“아빠가 있었으면 좋겠어?”
“아빠?”
니아는 갸우뚱 고개를 기울였다. 아빠는 원래 없는 것이고, 원래 없으면 앞으로도 없는 건 줄 알았는데.
“아니야. 니아, 어서 자. 내일 일찍 떠나야 하잖아.”
“응. 난 엄마만 있으면 돼.”
달콤한 말을 사랑스럽게 뱉는 니아를 침대에 눕히고서, 로즈는 돌아서며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하…….”
더 매섭게 내쳤어야 했는데, 망설이는 모습을 보이고야 말았다.
‘우리 가문 영지가 여기에 있는 건 알지? 그, 상속에서 밀려나 이 영지만 겨우 받아 냈거든. 땅을 팔기 위해서 왔는데…….’
‘그래서요?’
‘다시 너를 만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어. 등 뒤에 아이는 설마, 내 아이야? 정말? 그때 그렇게 아이를 낳았어?’
‘당신과는 상관없는 일이에요.’
‘그때 돌아오지 못한 건 정말 미안해. 하지만 나도 이러저러한 문제가 있었다고. 한참 뒤에 가니 넌 떠났고. 정말 오랫동안 찾았어.’
로즈는 그 말이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가 정말 그녀를 찾고 싶었다면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지금만 봐도, 그녀는 그를 처음 만났던 이 마을에 살고 있지 않았던가.
‘네가 정말 아이를 낳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어. 그, 너랑 나랑은 다르잖아?’
‘땅 팔러 왔으면 땅만 팔고 가요. 쓸데없는 데 시간 쓰지 말고.’
‘로즈, 내 아이를 봤는데 내가 어떻게 그냥 가.’
‘…….’
‘오늘 말을 들어 보니까 땅값을 꽤 받을 수 있을 것 같아. 팔아서, 같이 도시로 가자. 이번엔 정말이야. 나, 결혼도 안 했다?’
‘…….’
‘제발 로즈, 일주일이면 충분해. 그만큼만 내게 시간을 줘. 응? 네가 나와 함께하기가 싫다면 땅값의 절반이라도 네게 줄 수 있도록 해 줘. 내 아이의 엄마인데, 그 정도 받아 줄 수는 있는 거잖아.’
저 말이 진실이라면 니아는 조금 더 좋은 집에서, 좋은 것들을 먹고 입으며 살 수 있다. 그 생각을 하니, 아버지가 있으면 니아가 얼마나 든든할까까지 생각이 이르렀다.
“네가 미쳤구나.”
로즈는 세게 자신의 뺨을 내리쳤다.
“어차피 우리는 내일 떠날 텐데.”
그러다 로즈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테리 라이손은 아이의 이름을 물어보지 않았다.
“죽여도 시원치 않을 놈.”
툭툭 털고 일어선 로즈는 싸 놓은 짐들을 더 단단히 묶었다.
“내가 함께 있었어야 했는데. 아니, 억지를 부려서라도 함께 도시로 가자고, 그렇게라도 해야 했어. 어떻게든 그곳을 떠나야 했는데…….”
딕시 댁스터가 괴로운 듯 몸을 떨었다.
“어떻게…… 됐는데요? 엄마가요.”
니아는 부정하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나는 도시로 가다 다시 돌아왔어. 도저히 네 엄마를 두고 떠날 수가 없어서.”
“…….”
“그런데 네 엄마는, 언니는, 로즈 프릴리는…….”
순간 단단히 니아를 붙들고 있던 딕시 댁스터의 손이 툭 하고 떨어졌다. 그보다 더 거센 힘에 의해.
과거를 쫓는 도중, 그녀의 과거이자 현재이자 미래일 사람이 니아에게로 왔다.
“니아, 괜찮아?”
두 사람 사이를 벽처럼 가로막은 필릭스 쿠아란은 왼손으로는 니아를 보호했고, 눈빛은 딕시 댁스터를 향해 서늘하게 내리깔았다.
“그럼요. 무슨 일이든 괜찮다고 말했잖아요.”
니아는 평온하게 답했다.
“니아 프레슬리, 가자.”
딕시 댁스터가 말했다. 필릭스 쿠아란이 시야를 막고 있어 얼굴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목소리의 간절함은 니아에게 또렷이 전해졌다.
“어디로요? 교수님과 함께?”
묻는 순간 필릭스의 몸에서 잔떨림이 일었다. 니아가 그녀에게 이런 질문을 하는 것만으로도 겁이 난다는 듯이.
니아는 부드럽게 그의 오른쪽 어깨를 다독이듯 쓸었다. 그러자 그의 떨림이 점차 잦아들었다.
“차라리 나와 함께 이 나라를 떠나자. 다른 곳으로 가면 된다. 그곳에서 잘 살면 돼.”
“니아가 살 곳은 여기야.”
필릭스가 성급히 답했다.
“도련님.”
니아는 조금씩 힘을 주어 앞을 가로막고 있는 필릭스를 옆으로 밀었다. 바위처럼 단단히 자리 잡았던 그가 조금씩 밀려났다. 달리 도리가 없다는 듯 서서히.
구름이 걷히듯 조금씩 딕시 댁스터의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다. 니아는 그녀의 초조한 눈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교수님, 아시잖아요. 나라가 많이 달라졌어요. 앞으로 더 바뀔 거고요.”
“……넌 황족을 믿어?”
딕시 댁스터가 돌연 울부짖었다. 목소리에서 그녀가 견뎌 왔을 시간의 아픔이 묻어 나왔다.
“네 어머니가 누구 손에 죽었는데!”
“…….”
“난 황족을 믿지 않아. 아니, 세상을 믿지 않는다. 믿을 것은 오직 나뿐이야. 그렇게 산 세월이야!”
“…….”
“괜찮아질 거라고? 아, 벅 프릴리를 신으로 만들어 준다니까? 과연 정말 그럴까? 차라리 숨어 산 이 시간을 돌려 달라고 빌게 될 거다!”
딕시 댁스터의 눈에 차가운 분노가 어렸다.
“딱 봐도 알겠더군. 새 황제가 널 이용할 거라는걸. 저놈도, 황녀도 다 네 정체를 알고 있지? 이제 널 세상 앞에 내세울 거다. 네 능력을 보이고, 신의 축복을 받았다며 널 정치판에 내세우겠지. 정말 모르겠나, 니아 프레슬리? 이용당하고 이용당할 거라고!”
“…….”
“넌 우리가 어떤 사람들인지 몰라! 어떤 식으로 이용당할 수 있는지 모른다고!”
필릭스가 반박하려는 순간, 니아가 그녀 앞에 가까이 섰다.
“지금보다는 낫잖아요!”
“…….”
“숨어 살지 않아도 되잖아요. 날 괴물이라고 부를 사람도 없는 거잖아요. 그 정도면 살 만한 세상 아니에요? 지금보다 훨씬 좋은 날들 아니에요?”
“또 세상이 바뀌면? 그때는 어떻게 할 거야? 이미 모든 사람들이 널 알게 되었는데.”
“…….”
“그럼 더 이상 숨어 살 수도 없다. 그때 도망치려 해 봤자, 너무 늦어.”
토해 내듯 말한 딕시 댁스터는, 놀랍게도 순식간에 안정을 찾았다. 니아가 오래도록 알고, 그렇게 봐 왔던 모습으로.
처음으로 니아는 그 안에서 다른 것을 보았다.
“……이렇게 겁이 많으신 분인 줄 몰랐어요.”
강한 사람이 아니었다.
“커다란 나무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믿고 의지할 것은 오로지 자신뿐이라, 스스로가 무너지면 온 세상이 무너지는…… 불쌍한 사람이었다.
“황족을 믿냐고 하셨죠? 교수님이 저라면 믿을 수 있겠어요? 앞으로도 믿을 수 없어요. 이용당할 거라고요? 이미 이용당했어요!”
니아의 눈동자에서 꽃이 피어났다. 뜨겁게 타오르는 불꽃 같은 눈은 창백한 딕시 댁스터에게로 향했다.
“필릭스 도련님이 절 위해 노력해 주셨죠. 세상을 뒤집는 큰일을 해 주셨죠. 하지만 그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것 또한 저예요. 나 말고 누가 내 삶을 대신 살아 줄 수 있죠? 내 마음을 누가 지킬 수 있죠?”
니아의 눈동자에 딕시 댁스터가 가득 들어섰다. 그러니 그녀의 눈에도 니아가 꼭 그럴 터였다.
“도망치는 건 답이 아니에요.”
니아 프레슬리는 자신 옆에 있어 주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도련님, 도련님이 말씀해 주세요. 제 어머니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도련님을 내내 괴롭혔던 그 죄책감이 뭔지.”
“…….”
“그리고 우리 모두 끝내요. 비밀 같은 건 이제.”
그 말은 필릭스 쿠아란에게 결코 거부할 수 없는 명령이었기에, 그는 그의 아버지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꺼냈다. 임종 직전, 쿠렐 쿠아란이 자신에게 해 주었던 이야기를.
“……그래, 떠났어야 했는데. 또 어리석었어. 어리석은 선택을 한 거야, 내가.”
로즈 프릴리는 무릎을 꿇었다. 곁에는 함께 도망치려다 구른 니아가 하늘이 떠나가라 울고 있었다. 로즈는 그런 니아를 안아 줄 수조차 없었다. 결박되어 있었으니까.
“여전히 순수하네, 로즈?”
테리 라이손이 묶여 있는 로즈를 발로 툭 건드렸다.
“공작님, 여기까지 오시느라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그러고는 상쾌한 얼굴로 쿠렐 쿠아란 공작을 향해 돌아섰다.
“저 괴물 년을 어디에 발고해야 할까 고민했는데……. 황제 폐하께서 비밀리에 저런 괴물을 찾고 계셨을지 누가 알았겠습니까. 공작님께서 황제 폐하의 명령을 받고 이렇게 제보를 기다리시는 줄 알았더라면, 더 먼저 신고를 했을 텐데요, 하하. 오 년 전쯤에 말입니다.”
테리 라이손이 진심으로 아쉽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황제 폐하께서 작위를 내려 주신다는 게 정말이지요, 쿠아란 공작님? 모함으로 인해 승계에서 밀려난 게 다 이렇게 좋은 일이 있으려고 그랬나 봅니다. 저년이 내 인생에 도움이 되는 날이 올 줄이야!”
쿠렐 쿠아란은 답을 하지 않은 채 모르트 독테를 향해 턱짓했다.
“모르트 독테, 확인해 봐라.”
순간 외마디 비명과 함께 로즈의 살에 검이 박혔다. 무릎을 꿇은 모양으로 뒤로 넘어간 로즈는 강한 악력에 의해 고꾸라지듯 다시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왔다. 깨끗하게 지워진 상처와 함께.
잠시 고요가 흘렀다. 황궁 의원인 모르트 독테의 킬킬거림으로 침묵은 끝이 났다.
“확실합니다요, 공작님. 몇십 년 전에 이런 괴물을 보았다는 말도 모두 헛소문인 줄 알았는데……. 황제 폐하께서 확신을 가지고 계셨던 이유가 있었군요.”
쿠렐 쿠아란은 말없이 다른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 중얼거린 모르트 독테가 씨익 웃었다.
“작은 괴물도 확인해 보라는 말씀이지요. 알겠습니다요…….”
“아이는 안 돼!!”
밧줄에 단단히 붙들린 로즈가 발버둥 쳤다. 거칠게 몸부림치며 그녀는 기어코 니아 곁으로 갔다.
“네 아이인가?”
무심한 쿠렐 쿠아란의 질문에 답한 것은 다름 아닌 테리 라이손이었다.
“제 아이가 아닙니다, 공작님! 저 괴물이 사특한 마법 같은 걸 쓴 게지요. 제 입으로 저주를 부릴 줄 안다고 했으니…….”
“네게 묻지 않았다.”
쿠렐 쿠아란은 니아 프레슬리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로즈는 본능적으로 니아 앞을 막아섰다. 너무 거세게 움직인 탓에 밧줄에 살갗이 다 벗겨졌다. 그마저도 금세 아물었지만.
“제 아이입니다. 제발 보내 주세요. 저는, 저희는 해를 끼치는 존재가 아닙니다. 잘못을 저지른 적도 없고, 무엇 하나 욕심낸 적도 없습니다. 그냥 살기만 했습니다. 그저 살기만…….”
“확인해 봐라.”
숨이 꺽꺽 넘어가면서도 간절히 빌던 로즈의 말을 쿠렐 쿠아란은 듣지 않았다.
“안 돼!”
모르트 독테가 니아를 향해 날카로운 칼을 또 한 번 높이 쳐든 순간, 로즈가 니아를 향해 온몸을 던졌다. 니아 대신 그녀의 등에 날카로운 검의 끝이 박혔다.
“이 괴물이!”
모르트 독테가 칼을 뽑아내며 욕을 지껄였다.
로즈는 그녀를 밀어내려는 모르트 독테의 발길질에도 절대 움직이지 않았다. 바닥과 자신 사이에 니아를 가둔 채 쉰 목소리로 신음을 쏟아 낼 뿐이었다.
로즈는 그 상태로 꺼이꺼이 울며 외쳤다.
“도망쳐서 살겠습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습니다! 죽은 듯이 살고, 누군가 괴물을 봤다는 소문 같은 것도 들리지 않게 우리 둘만, 둘만 살겠습니다. 아무리 먼 곳이라도 떠나겠습니다! 제발, 제발, 귀족 나리. 제발 살려 주세요…….”
“누가 죽인다고 하던가.”
순간 로즈가 고개를 하늘 높이 쳐들었다. 그러자 그녀의 품 안에 있던 니아의 얼굴이 함께 드러났다.
쿠렐 쿠아란은 똑 닮은 두 개의 녹색 눈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의 입가에 미묘한 모양으로 주름이 졌다.
그는 눈앞에 있는 여자와 아이에게 별다른 감정이 없었다. 괴물이라고 생각하니 꺼려지기는 했으나, 그보다는 신기했다.
괴물에게도 모성이 있던가.
그저 놀라웠고, 상처가 낫는 모습은 약간의 경악까지 가져다주었다. 해야 할 일 앞에서는 다 사그라드는 감정이었지만.
“황제 폐하께 데리고 간다.”
쿠렐 쿠아란은 함께 황제의 명을 받은 모르트 독테에게 명령했다. 모르트 독테는 지나치게 굽신거리다가 큭큭댔다. 내내 표정이 없던 쿠렐의 얼굴에 약간의 혐오가 서렸다.
쿠렐의 생각을 읽은 듯 모르트 독테는 여물어 가는 달처럼 입을 벌려 웃었다.
“이런 일을 하기엔, 저와 공작님이 제격이 아닙니까요…….”
감히 같은 취급을 하려 드는 황궁의 의원을 보며, 쿠렐 쿠아란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리고 욕망의 크기만큼이나 어리석은 자라는 판단을 내렸다.
자신은 황제의 충직한 번견이었지만, 모르트 독테는 한번 쓰이고 버려질 쓰레기였다.
상황을 지켜만 보고 있던 테리 라이손이 지금이야말로 자신이 끼어들 때라는 듯 말을 얹었다.
“이번 일로 아주 득이 많겠습니다. 저희 모두가 말입니다. 그렇지요, 공작님?”
“득?”
“함께 제국을 위해 세운 공이 아닙니까. 돌아가서도 이 인연을 유지할 수만 있다면, 저는…….”
쿠렐 쿠아란은 천천히 되뇌었다.
“득, 공……. 무언가를 잘못 생각하고 있는 듯하군.”
“……예?”
쿠렐 쿠아란이 모르트 독테를 무심히 바라보았다. 모르트 독테가 입을 씰룩거렸다.
“여기서 합니까요?”
“그래.”
“처리가 힘들 텐데요. 날도 아직은 밝습죠.”
쿠렐은 답하지 않았다. 더 묻는다면 어리석은 것을 넘어 우매였다. 쿠렐이 두 사람을 동시에 끝장낼 테니.
그들 없이도 여자와 아이 한 명을 끌고 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겨우 여자 하나, 겨우 아이 하나였다.
순간 유리가 박살 나듯 처절한 외침이 들렸다.
“니아! 도망가! 빨리!”
로즈 프릴리가 우는 니아를 겨우 일으켜 세우고선 다그치고 있었다. 세 사람이 잠시 시선을 돌린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한 것인가.
“빨리 가라니까!”
쿠렐 쿠아란은 피곤함에 한숨을 내쉬었다.
“제발, 니아. 제발 뛰어. 응? 뛸 줄 알잖아. 니아, 잘하잖아. 응? 제발…… 도망가라고! 엄마가 말하잖니!”
어미의 애원에 아이가 조금씩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저 몇 걸음. 뛰다가 돌아보고, 멈추고, 한 걸음 되돌아오고, 그러다 도망가라는 외침에 울먹였다가 또 달아나고, 멈추고.
그냥 얌전히 있지. 쿠렐 쿠아란은 뻐근한 목을 움직였다.
“모르트 독테, 너는 네 일을 해라.”
쿠렐이 성큼성큼 여자와 아이에게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나는 내 일을 하지.”
로즈 프릴리가 쿠렐 쿠아란을 막아섰다. 아니, 막아섰다고 말할 수조차 없었다. 그저 앞길을 방해했다. 누운 몸으로 발버둥을 치며 쿠렐의 걸음을 막고자 한 것이다.
“하…….”
눈앞의 작은 벌레에도 잠시 걸음을 멈추고 마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듯, 쿠렐 쿠아란은 그렇게 멈췄다.
“치워.”
바짓가랑이라도 붙잡으려는 그녀의 버둥거림을 가볍게 쳐 내고, 쿠렐은 저 멀리 서서 울고 있는 아이에게로 향했다.
“제발, 제발 저 아이만은 보내 주세요…….”
뒤에서 들리는 흐느낌은 그대로 흘려보냈다. 그저 한 손으로도 쥘 수 있을 것 같은 저 작은 아이를 응시할 뿐. 걸어갈 뿐.
더 이상 달아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던 아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름 아닌 쿠렐 쿠아란을 향해서. 아니, 차마 어미를 버리고 갈 수 없어 돌아오는 것이겠지만 모양새는 그러했다.
저 작은 괴물이, 아이가, 그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눈 한번 깜빡이지 않은 채로.
잡고자 할 때는 짧게 느껴지던 길이 저 아이가 걸어온다고 생각하자 한없이 길게 느껴졌다.
“넌 누구지?”
누군가 일부러 늘여 놓은 것만 같은 시간을 지나 아이가 자신의 눈앞에 섰을 때, 쿠렐 쿠아란은 물었다. 오래도록 그 질문을 준비한 사람처럼.
“니아 프레슬리, 다섯 살.”
아이는 웃지 않았다. 그건 당연했다.
“내 아들과 똑같구나.”
아이는 울지 않았다. 그게 이상했다.
순간, 서늘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황제에게 어미만 넘길까?
이곳에서 쓰레기 둘을 죽이고, 저 아이는 내가 데려간다면.
또 한 번 바짓가랑이를 붙드는 나약한 힘이 느껴졌다. 어찌한 것인지 로즈 프릴리의 팔 쪽의 밧줄이 흘러내려 있었다. 어미의 모성이란 것이 지독했다.
고개를 내저은 쿠렐 쿠아란은 손을 가볍게 떨치고 아이를 안아 올렸다. 발이 땅에서 떨어지고 나서야 아이의 눈에 불안이 담겼다.
울까?
웃을까?
자신의 아들과 또래라 이런 마음이 든다기에는 너무나 이상했다. 마치 저 높은 곳의 위대한 존재가 그에게 충동질을 하고 있는 듯 강한 이끌림.
쿠렐 쿠아란은 충동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황제와 관련된 일이라면 더더욱. 그러나 그가 그동안 충동에 지지 않은 것은, 넘어갈 만큼의 큰 충동이 그에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죽였습니다!”
멀리서 킬킬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쿠렐 쿠아란의 눈이 번뜩였다.
한 명은 처리했다.
“모르트 독테, 이리 와.”
쿠렐은 아이를 내려놓았다. 잠시, 어미의 곁에.
로즈 프릴리의 눈은 쿠렐이 니아를 해치지 않았다는 안심 반, 그리고 니아가 도망치지 못했다는 절망 반으로 초라했다.
모르트 독테가 어기적거리며 그를 향해 다가오는 동안, 쿠렐 쿠아란은 허리를 숙여 로즈에게 속삭였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러나 더없이 강렬하게.
“네 아이만은 지켜 주마. 내 결심을 바꾸게 하지 마라.”
종아리 쪽의 밧줄을 풀려고 하던 로즈 프릴리가 행동을 멈췄다. 그리고 서서히, 고개를 끄덕였다. 눈에 가득했던 반항기가 완전히 사라진 채로.
아이를 구해 주겠다는 말에 모든 저항을 멈추는 그녀를 보며, 쿠렐 쿠아란은 쓸데없는 사족을 붙이고만 싶어졌다. 자신이 진심이라는 것을 증명할 만한 한마디.
“나도…… 저만한 아들이 있다.”
말하는 순간 우습게도, 저 아이와 필릭스가 한곳에서 뛰어노는 모습이 그려졌다. 스스로도 참으로 어이가 없는, 실없는 그림이었다. 그러나 한 번쯤은 꼭 그려 보고 싶어지는…….
그사이 가까이 다가온 모르트 독테는 풀려 있는 로즈의 밧줄을 보고 얼굴을 사납게 구겼다.
“이게!”
그는 욕설을 지껄이며 품 안에서 남은 밧줄을 꺼냈다. 그리고 로즈의 손목을 거세게 잡아챘다. 그러나 로즈 프릴리는 단 한 차례도 저항하지 않았다.
처음보다 더 거칠고, 더 아프게 그녀를 묶던 모르트 독테가 갑작스레 행동을 멈췄다. 그리고 이제야 깨달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아, 맞다.”
그의 팔이 다른 곳으로 향했다. 작고, 순수한 영혼을 향해.
“안 돼!”
로즈 프릴리와 쿠렐 쿠아란이 동시에 외쳤다. 그러나 이미 아이는 칼에 베인 후였다.
니아는 자신의 배에서 흐르는 따듯하고 붉은 액체를 보고 눈물을 터뜨렸다. 아파서 우는 건지, 슬퍼서 우는 건지 알 수 없을 만큼 서럽게.
“맞습니다요, 괴물. 이 작은 쥐새끼 같은 것도.”
“어, 엄마…….”
숨넘어갈 듯 니아가 로즈를 불렀다.
“엄마, 나 아파, 살려 줘…….”
이렇게 큰 상처가 나 본 적 없는 니아는, 자신이 곧 죽을 거라 생각하는 듯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아이에게서 나온 피가 원피스를 붉게 적셨다.
“이것도 쓸모가 많겠군요. 황제 폐하께서 작은 것을 더 흡족해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어깨를 으쓱거리고 다시 로즈 프릴리의 몸을 묶으려던 모르트 독테는 멈칫거렸다.
로즈 프릴리의 얼굴이 ‘악’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거였구나.”
그리고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그녀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쿠렐 쿠아란과 딸을 찌른 모르트 독테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내가 또…… 속겠어? 내 딸을 두고, 도박을 하겠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그 말은 마치 주문처럼 섬뜩했다.
“사람을 믿겠어?”
로즈 프릴리는 숨이 가쁜 듯 큭큭거리다 이내 크게 웃었다. 웃음으로 하늘을 다 채우려는 듯이. 그러다가 뚝, 거짓말처럼 웃음을 멈췄다.
치유 능력을 누구에게서 배운 것이 아니었듯, 이 또한 본능이었다. 저주는 이렇게 내리는 것이라 온몸이 말하고 있었다. 온 하늘이 말하고 있었다. 존재할 리 없는 신이 말하고 있었다.
저주하라고.
네 딸을 지킬 길은, 이것뿐이라고.
“이, 이년이 미쳤나…….”
로즈는 누구도 알아듣지 못할 만큼 빠르게 중얼거렸다.
“당신의 아들은, 열 살이 되는 날 심장이 사라질 거야.”
“그게 무슨 말이야!”
그녀에게 압도되는 감각을 느끼면서도, 자신의 아들을 저주하는 말에 쿠렐 쿠아란이 거칠게 되받아쳤다.
“성인이 될 때까지, 한 살을 먹을 때마다 심장이 사라지고, 또 사라지고, 계속 사라질 거야. 네 아이는 결코 어른이 될 수 없고, 그 누구의 심장도 네 아들의 심장을 대신할 수 없으리라.”
“…….”
“내 딸을 제외하고.”
한마디, 한마디, 그녀의 증오가 쌓여 갔다.
“감히 내 아들에게…….”
쿠렐 쿠아란은 로즈의 입을 틀어막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그녀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그가 있는 곳은 회오리바람이요, 그녀가 있는 곳은 태풍의 눈 같았다. 옷깃이 떨어져 나갈 듯 강하게 흔들렸다.
쿠렐 쿠아란이 바람을 뚫고 소리쳤다.
“감히 내 아들에게 저주를 걸다니! 네 딸을, 구해 주겠다고 말했건만!”
“내 딸 없이, 네 아들은 살 수 없으리라!”
한마디, 한마디, 그녀의 수명이 깎여 나갔다.
“엄마…….”
작아진 상처를 부여잡고, 불안한 눈빛으로 로즈 프릴리를 보고 있던 니아가 엄마 하고 불렀다. 자신이 여기에 있다고 말해 주지 않으면 로즈가 영영 세상에서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아서.
부름을 들은 로즈는 슬픈 눈으로 니아를 바라보았다.
“니아, 이런 끔찍한 일들은 다 잊고 도망쳐.”
로즈의 말에 힘이 담겼다.
“그리고 꼭 살아서, 반드시 행복해지렴.”
순간 니아의 눈빛이 멍해졌다. 색을 잃은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니아는 천천히 일어서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절대 돌아보지 않았다.
로즈 프릴리는 눈을 감고, 마지막 수명으로 말했다.
“내 아이가 안전한 곳에 도착할 때까지, 이곳에 있는 그 누구도 걸음을 떼지 못하리라.”
“먼 길을 되돌아갔는데, 남은 것은 죽은 로즈 언니와 바닥에 떨어져 있는 황궁의 표식뿐이었다. 내가 그때, 함께 가자는 언니의 말을 들었더라면…….”
딕시 댁스터는 고개를 떨궜다.
“내 아버지가 네 어머니를 죽인 거야. 그날, 아버지가 그러지만 않으셨더라도…… 넌 네 어머니와 행복하게 살았을 거야. 아픈 기억들 없이. 난 그런 사람의 아들이야.”
필릭스 쿠아란도 고개를 떨궜다.
잘못 없는 사람들이, 자꾸만 니아에게 미안해했다.
니아는 중얼거렸다.
“마지막의 마지막으로요, 생각을 해도 되죠?”
니아는 애써 웃었다. 그들이 니아를 보며 그래 왔던 것처럼.
“정말 마지막으로, 저를 한 번만 더 기다려 주세요.”
단단한 벽에 가로막힌 것처럼 기억이 나지 않는 엄마를, 니아는 이제라도 온전한 시간을 다해 떠올려 보고 싶었다. 오롯한 마음으로.
“지켜봐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