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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꽃밭 (57/75)

12. 꽃밭

학생들이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가 창 하나를 건너오니 백색 소음이 되었다. 날이 무척이나 좋았다. 오늘만은 학생들의 소란이 이해될 만큼.

“어디로 간 거지?”

그러나 마음이 복잡스러운 날, 밝은 날씨는 오히려 여자의 짜증을 더욱 불러일으킬 뿐이었다. 자신 말고는 모두가 행복한 듯 웃음을 터뜨리니까. 신경에 거슬렸다.

오는 길 내내 왠지 모를 불안감이 들어 걸음이 빨라졌다.

쾅, 하고 닫힌 문이 열렸다.

“도대체…….”

니아 프레슬리는 집에도 없었다.

며칠 동안 그녀는 아카데미에 나오지 않았고, 결국 집에까지 찾아오게 만들었다.

그럴 아이가 아니었다. 아니었는데, 이미 그런 일이 벌어져 있었다.

불길함이 온몸을 감쌌다. 기시감이었다. 이런 식으로 떠나간 여자를 한 명 알고 있었다.

“설마, 황제가.”

여자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었다. 자신도 들키지 않게 잘 살아오지 않았던가. 니아도 마찬가지였다. 니아는 아카데미 시절부터 정체를 잘 숨긴 채 지금껏 살아왔다. 숨기는 일에는 도가 튼 아이였다.

“같이 사는 남자…….”

니아는 레오 아리데오에 대해 자주 이야기하곤 했다. 그러나 니아 곁에서 문제가 될 것 같은 남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둘 다 집에 없다. 집 안 곳곳을 뒤졌지만 남아 있는 것이라곤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가구들뿐이었다.

한동안 그녀가 너무 안일했던 걸까?

“니아 프레슬리, 넌 지금 어디에 있지?”

가쁜 숨이 빈집 안을 채웠다가 흩어졌다.

밥을 먹다 말고 니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돌아가면 딕시 댁스터 교수님께 혼나겠다. 그렇지, 레오?”

“그게 걱정이야? 이 상황에서?”

“네가 교수님을 몰라서 그래.”

니아는 화가 나면 오히려 차가워지는 딕시 댁스터를 생각하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냉정하게 책상에서 자신의 명패를 치워 버렸을 딕시 댁스터를 상상하니 입맛이 뚝 떨어졌다.

“아베쎄 아카데미는 어떻고. 아이들이 발표 준비를 열심히 해 왔을 텐데. 난 이제 잘리겠지?”

“어쩔 수 없는 상황이잖아.”

레오 아리데오는 차분한 목소리로 니아를 다독였다.

“이 상황이 무슨 상황인데요?”

옆에서 잔반 처리반이라도 되는 듯 싹싹 음식을 긁어 먹던 사이먼 캐치가 물었다.

“네가 알 거 없는 상황.”

레오 아리데오는 깔끔하게 사이먼 캐치의 질문을 차단했다.

“아, 네.”

사이먼은 놀랍게도 수긍했다. ‘교수’, ‘아카데미’라는 단어는 그와 거리가 먼 것이었기 때문이다.

사이먼은 다시 잔반 처리에 집중했다. 빵에서 떨어진 치즈 가루가 그의 입에 덕지덕지 묻었다.

“이틀 남았네, 니아.”

걱정스레 손톱을 쓸고 있던 니아는 레오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무릎 위에 내려놓은 손이 긴장으로 점점 축축해져 갔다.

“걱정 마. 모든 게 잘될 걸 알고 있잖아.”

레오가 위로를 건넸다. 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실은 실감이 나지 않았다. 많은 일이 있었고, 또 많은 일이 해결되었다. 그리고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평화롭고 한적한 곳에만 있다 보니 현실감이 사라지는 듯했다.

아니면 너무 커다란 변화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어서인가?

“그래도 나는 나야.”

“응?”

“내 주변이 변해도, 나는 니아 프레슬리라고.”

다짐하듯 중얼거리는 그녀를 보며 레오 아리데오는 웃었다. 만약 죽었더라면 삶을 다짐하는 니아 프레슬리의 모습은 보지 못했을 거라 생각하며.

그 가정은 아찔하다기보다는 다행스러웠다. 이것이 얼마나 소중한 순간인지를 다시금 깨닫게 해 주었다.

“나는 사이먼 캐치인데요!”

그리고 이번에도 산통을 깨는 사이먼 캐치였다.

“단장만큼 훌륭한 기사가 될 거예요! 이미 기사지만, 나라에서 제일가는 기사.”

때 하나 묻지 않은 다짐에 분위기가 순식간에 밝아졌다. 전쟁터는 소년을 어른으로 만들기에 충분한 곳이었을 텐데도 그는 아직 순수했다.

니아가 멍하니 사이먼을 보다가 피식 웃었다. 그러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다 쓱, 손에 묻은 땀을 옷에 문질렀다.

“정말인데!”

“어디 볼까?”

철없는 다짐에 니아가 또 한 번 웃으려는 찰나, 레오 아리데오가 짐짓 엄숙한 척하며 일어섰다.

“네?”

“네 실력 한번 확인해 보자고.”

사이먼 캐치의 얼굴에 어이없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진심이에요?”

레오 아리데오는 사이먼을 여유롭게 내려다보았다. 순간 사이먼은 흥분을 감추지 못해 식탁을 쾅 내리치며 일어섰다.

“난 리바론 기사단의……!”

“…….”

“ㅅ 기사예요.”

“무슨 기사?”

“습……기사예요.”

“견습 기사? 정식 기사? 사이먼, 말을 똑바로 해.”

우물쭈물 입술을 달싹이던 사이먼 캐치가 불끈 주먹을 쥐었다.

“견습 기사예요. 그래요! 난 아직 견습 기사고!”

“…….”

“하지만 난 부끄럽지 않아! 난 아직 어리니까!”

고함을 내지르듯 소리친 사이먼 캐치가 떠난 자리는 정적만이 감돌았다. 강렬한 인상만 남기고 사이먼 캐치가 뛰쳐나갔던 것이다. 그를 향한 두 사람의 반응은 확인하지도 않고서.

니아와 레오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동시에 웃음을 터뜨리려고 할 때, 다시 빼꼼하고 사이먼이 얼굴을 내밀었다. 두 사람은 재빨리 입술을 앙다물었다.

“하지만 우리는 함께 전쟁을 치렀고, 견습이나 정식이나 모두 같은…… 똑같이 훌륭한 기사고…….”

“그리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니아가 물었다. 그러나 얼굴만은 즐거움을 참지 못하고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리바론 기사단은 세계 최강의 기사단이에요. 증명해 줄게요! 좋다고요! 나와요, 아저씨!”

또 한 번 더없이 강렬한 인상을 남긴 채 사이먼은 문짝을 부술 듯 닫았다.

레오 아리데오는 큭큭거리며 웃다가 돌연 정색을 했다.

“들었어? 나보고 아저씨래.”

니아는 웃음으로 그 정색을 받았다. 그리고 깨달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네가 아저씨면, 나는 아줌마겠다.”

“봐주면 안 되겠네. 네가 모욕을 당한 거나 마찬가지잖아, 니아.”

레오가 불끈 주먹을 쥐는 시늉을 해 보였다. 그 모습을 보고 깔깔 웃음을 터뜨리던 니아는 레오가 정말 나가려고 준비하자 그의 팔을 잡았다.

레오 아리데오의 눈 가득, 웃음기가 사라진 니아의 얼굴이 들어왔다. 그녀는 어느새 근심 어린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레오, 진심이었어? 사이먼이랑 대련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안 될까?”

“레오, 하지 마. 또 나쁜 기억들이 떠오르면 어떡해.”

자신을 향한 걱정이 담뿍 담긴 그 얼굴을 보며 레오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내가 혹시라도, 저 아이를 다치게 만들까?”

장난스러웠던 그의 눈동자에 조금씩 침울함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그저 어린 소년과 하는 대결이었지만 만에 하나라는 가정이 그를 멈추게 만들었다. 진심이 변명처럼 나갔다.

“니아 나는, 그러니까 그런 대결을 하려고 했던 게 아니라, 적당히 져 주고 사이먼을 기분 좋게 해 주려고…….”

그의 작은 용기가 다른 사람에게는 비극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지난번 황궁에서처럼.

툭 하고 니아에게 잡혔던 손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래, 니아. 아직은 아닌 것 같아. 아니, 평생 누구와도 대련 같은 건 하지 않는 게 좋겠어. 아무리 장난일지라도.”

“…….”

“내가 어떻게, 다시 누군가와 이럴 생각을 했지? 잠깐 정신이 나갔었나 봐.”

레오 아리데오가 힘겹게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 앉으려 할 때였다. 그를 바라보는 니아의 표정이 이상했다. 그녀는 혼란스러운 듯 눈을 굴리다가 중얼거렸다.

“나는 네 마음이 다칠까 봐……. 사이먼이 아니라, 혹시라도 네가 아픈 기억 때문에 힘들까 봐.”

“…….”

“너는 사람을 다치게 하지 않을 거야. 앞으로, 다시는.”

망설이며 뱉던 문장이 끝에 가서는 단단해졌다. 힘이 들어간 말은 무척 믿음직스러웠다.

“우리 다시 시작하기로 했잖아. 숨지 말자. 내가 널 증명해 줄게.”

“어떻게?”

고저 없이 묻는 레오 아리데오에게 니아 프레슬리는 말했다.

“내가 지켜봐 주고, 지켜 주는 방식으로.”

“아니! 왜 또 내가 반칙인데요?”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사이먼 캐치가 분개해서 물었다.

“방금 손톱으로 할퀴려고 했지? 그리고 얼굴 쪽으로 손이 가면 안 된다고 말했잖아. 사이먼, 십 점 감점.”

삐쭉 세운 손가락을 등 뒤로 숨기며 사이먼은 발을 굴렀다.

“이건 남자들의 싸움이 아니야!! 이런 게 아니라, 막막 휘두르고 밟고 올라타고! 그런 게 대련이라고요! 칼 휙휙! 몰라요?”

“심판에게 무례한 언사는 이십 점 감점이야.”

니아 프레슬리가 종이에 차분히 마이너스 이십 점을 사각사각 적었다. 사이먼 캐치는 콧김을 씨익씨익 내뿜었다.

“내 생에 감점이 있는 대련은 처음이야! 정말 처음!”

“그럼 네가 진 걸로 하고 마무리할까? 아까부터 허공만 때리던데, 사이먼.”

순간 사이먼의 눈이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져요? 누가? 내가? 리바론 기사단의 슥…… 기사인 내가? 으아아아아!”

사이먼이 허공을 향해 비명을 질렀다. 거친 들판에서 레오와 니아는 평화로운데 그 혼자 정신이 없었다. 사이먼은 방방 뛰다가 고개를 저었다.

“다시!”

사이먼이 레오 아리데오의 허리춤을 향해 손을 뻗고, 레오는 가볍게 피했다. 나름의 기습 공격이었으나 전혀 소용이 없음을 깨달은 사이먼은 기합을 지르며 레오 아리데오의 안다리를 노렸다.

이미 사이먼 캐치의 온몸은 소나기를 맞은 듯 땀에 젖어 있었다.

“어? 성공이다.”

순간 사이먼의 다리가 레오의 다리 사이로 쑥 들어갔고, 레오 아리데오는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졌다.

“와, 대단한 걸 사이먼?”

레오는 머리를 끌쩍거리며 ‘하하, 네가 이겼어! 정말 대단하다, 사이먼…….’을 중얼거렸다.

사이먼은 잠시 놀란 표정이었다가, 티가 나게 눈살을 찌푸렸다.

“일어나요.”

“응?”

“일어나라고요! 방금 져 준 거죠?”

“…….”

“다 안다고요!”

“아…….”

“다시!”

주문처럼 ‘다시’, 그 기합을 외치는 사이먼 캐치를 보고 니아와 레오는 뭔가가 잘못되었음을 그제야 깨달았다.

“다시!”

열여섯의 철없는 소년 사이먼 캐치는.

“다시!”

실은 엄청난 끈기와 열정, 그리고 무시무시한 승부욕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해요!”

분명 이른 오후쯤에 시작된 그들의 대련 아닌 대련은, 저녁노을이 질 때까지 계속되고 말았다. 놀 때는 한없이 놀지만 할 때는 또 끝도 없이 하는 사이먼 캐치 덕에.

“사이먼, 진심이야 진심. 이제 그만하자. 네가 이겼어. 정말이야. 아저씨가 잘못했다.”

이대로라면 사이먼도 쓰러지고 자신도 쓰러질 것 같아 레오 아리데오가 백기를 들었다.

몇 번이나 시도했지만 사이먼 캐치는 레오의 연기를 귀신처럼 눈치챘다. 그러나 이번에는 정말이지 순도 백 프로의 항복이었다. 레오는 두 팔을 들어 올려 보였다.

“입으로 받는…… 승리는 진짜 승리가…… 헉, 아니라고요!”

“…….”

“다……시!”

사이먼 캐치가 힘겹게 허리를 굽히고, 사이먼에게로 날듯이 자신의 몸을 던졌다. 황소가 돌진하듯 사이먼의 머리가 레오의 배로 향했다.

그 순간이었다.

“이겼다!”

사이먼에게서 순수한 감탄이 터져 나왔다.

“내가 이겼다! 견습 기사인 내가 이겼어!”

갑자기 또 기운이 샘솟는 것인지 사이먼은 벌떡 일어나 두 팔을 위로 올렸다. 기뻐서 어쩔 줄 모르며 그는 니아 프레슬리에게 말했다.

“봤죠, 심판! 내가 이겼……. 어?”

사이먼 캐치가 두리번두리번 니아 프레슬리를 찾았다. 아무리 저보다 작은 여자라고 한들, 아무것도 없는 황야에서 안 보일 정도는 아닌데.

이 여자, 혹시 내 승리를 못 본 척하려고 일부러 숨은 거 아니야? 눈을 치켜뜨려는데 비명 소리가 아래에서부터 들렸다.

“……사이먼, 너 진짜 돌머리다.”

넘어진 레오 아리데오 위에 니아 프레슬리가 드러누운 채 배를 살살 문지르고 있었다. 많이 아픈지 입은 웃으면서도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어, 어……!”

당황으로 물든 사이먼의 얼굴이 곧 시뻘겋게 물들었다.

“미안해요! 괜찮아요? 아, 나 진짜 세게 달려들었는데! 괜찮을 리가 없지! 일어날 수 있겠어요? 아, 진짜 미안해요. 진짜 미안요……!”

머리를 박박 긁으며 자책한 사이먼은 니아 프레슬리에게 손을 내밀었다. 니아 프레슬리가 슬쩍, 장난스러운 미소를 띤 것은 발견하지 못한 채로.

“어……!”

니아를 일으켜 주려던 사이먼이 바닥을 향해 고꾸라졌다. 니아 프레슬리가 있는 힘껏 당겼기 때문이다.

평소라면 꿈쩍도 하지 않았을 사이먼은 예상치 못한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넘어졌다.

“레오는 너한테 졌고, 너는 나한테 졌어, 사이먼.”

“…….”

“이 셋 중에 내가 최강이다.”

니아 프레슬리가 웃으며 확실히 말을 매듭지었다.

“니아 프레슬리 최강.”

말도 안 되는 그 말에 온몸에 힘이 빠져 버린 사이먼은 에라 모르겠다 하고 바닥에 대자로 누웠다. 땅바닥을 휘휘 저으며 ‘그래요! 그런 걸로 해요! 이거 참패구먼!’ 소리를 질렀다.

심판을 보며 함께 지친 니아도, 반쯤 걸쳐 있던 레오의 몸에서 벗어나 땅바닥에 몸을 맡겼다. 그러고는 힘을 쭉 뺀 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넓은 들판 위의 뻥 뚫린 하늘에서는 별이 쏟아져 내릴 듯했다.

“하하하!”

잠시 고요가 흐르다 레오 아리데오 쪽에서 웃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공격을 대신 맞아 준 니아 프레슬리를 지탱한 이후부터 쭉 말이 없던 그였다.

뒤로 넘어지는 순간에도 신음 하나 내지 않았고, 그러고는 계속 미동도 없이 깊은 잠이라도 든 사람처럼……. 그런 레오 아리데오가 웃고 있었다.

“아, 재밌었다…….”

살아 있음을 알리는 일정한 심장 소리, 그리고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하, 하하하……. 그럼 내가 최약체인 거지?”

세 사람의 건강한 땀방울을 바람이 치고 지나갔다. 하하, 레오는 몸 안의 모든 소리를 뱉어 내려는 사람처럼 웃고 또 웃었다. 급기야는 토하듯 쿨럭이기까지 했다.

“아저씨 미쳤나 봐.”

사이먼이 작게 중얼거렸다. 입술을 비죽이며 말했지만 결국 그도 한계를 견디지 못하고 입꼬리를 길게 찢었다.

즐거움이 담긴 얼굴로 사이먼이 레오를 향해 고개를 돌리던 때였다.

“우와…….”

갑작스레 그의 입에서 감탄이 흘러나왔다.

“이게 뭐지? 꿈인가?”

얼떨떨하게 중얼거리는 말을 듣고 니아는 하늘에서 시선을 떼었다. 그리고 사이먼이 왜 놀랐는지 바로 깨달았다.

니아에게도 놀라운 일이었다. 황야에 온 이후로 며칠 동안 연구한 것이 이렇게 좋은 타이밍에 결과를 내줄 줄이야.

“꽃밭.”

니아가 사르르 웃었다.

나비 모양으로 핀 흰색의 완두콩 꽃들이 세 사람을 가득 둘러싸고 있었다. 마치 미래가 기쁨으로 가득 차 있을 것을 예고하듯이.

잠든 두 사람 위에 얇은 이불을 겹쳐 덮어 준 니아는 살짝 미소 지었다. 침대 바깥으로 두 사람의 발이 삐죽 튀어나온 모습이 절로 웃음을 자아냈다.

그녀는 갈색 모포를 하나 더 가져와 두 사람의 발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그림을 감상하려는 사람처럼 두 사람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깊은 잠에 빠져 색색거리는 숨을 뱉어 내는 모습이 영락없는 아기였다.

“둘 다 기절했네.”

심판을 본 니아도 피곤하기는 매한가지였지만, 투닥투닥 치고받은 그들에 비하면야 아무것도 아니었다.

철이 없어 보여도 니아를 지켜야 한다며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던 사이먼 캐치.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해도 밤에 쉬이 잠들지 못했던 레오 아리데오.

니아는 그들의 깊은 잠이 반가웠고, 그들의 평화로움에 흡족했다.

“좋은 꿈 꾸길.”

허공에 입맞춤을 흩뿌리고 니아는 돌아섰다. 그리고 끼익 소리를 내며 문을 열었다. 낡은 오두막의 문이 슬며시 열렸다가 닫혔다.

“예쁘다.”

니아는 묘한 눈빛으로 오두막 앞에 펼쳐진 꽃밭을 바라보았다. 낯섦과 환희가 공존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이 외려 괴로워서 시작한 일이었다. 허허벌판인 이곳에 꽃이 피어날 거라 기대하지 않았고, 그저 마음 가는 대로, 몸 가는 대로 움직였을 뿐인데.

수백 마리 나비가 날아 앉은 듯한 황홀함.

니아가 좋아하는 모두에게 꼭 보여 주고 싶은 풍경이었다. 이 먼 곳까지 데리고 오지 못하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라…….

“하루.”

오늘이 정신없이 지나갔으니, 이제 남은 것은 하루였다.

“조심해요.”

니아는 눈을 감은 채 두 손을 모았다.

황제 탄신일.

클라우디아 엘로이는 핏빛 미소를 지었다.

‘이겼다.’

그녀의 발아래에는 아버지 후인 엘로이의 목이 떨어져 구르고 있었다. 눈을 감지 못한 채로.

클라우디아는 한 손으로 검을 높이 세우며 전 황제의 머리를 밟았다. 황제가 들고 있던 술은 바닥에서 그의 피와 섞여 검붉었다.

그녀를 제대로 봐 주지 않던 아버지는 발밑에, 그리고 그녀가 가지고 싶던 세상은 눈앞에 있었다.

에슬란 제국의 새로운 황제, 클라우디아 엘로이.

이것을 혁명, 반란, 혹은 패륜, 아니면 그저 욕망, 그 어떤 이름으로 불러도 상관없었다.

앞으로 그녀에게 부딪쳐 올 반발, 어려움, 무시, 경멸, 공포, 다 차근차근 이겨 낼 자신이 있었다. 결국에는 세상이 그녀를 경외하게 만들리라.

끝이 아니었다.

“이제 시작이야.”

저 아래, 황제의 군사들을 제압한 필릭스 쿠아란과 눈이 마주친 클라우디아 엘로이는 웃었다. 저 대단한 남자조차 자신의 밑에 있다는 것이 만족스러웠다.

“결국 해냈구나, 클라우디아.”

오늘이 오래도록 역사서에 기록될 날임을 알기에 클라우디아는 당당한 미소를 멈추지 않았다. 저 아래 당황으로 물든 백성들의 입에서 환호가 뿜어져 나올 때까지, 클라우디아는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도 고개를 돌릴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듣고는 있었다. 그녀의 오빠인 아론 엘로이가 기둥 뒤에서 하는 이야기를.

“처음부터 말해 주었더라면, 어렸을 적 군주론 122조를 외우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말이야. 네가 왜 그토록 니아 프레슬리에게 집착하는지 알아내려 애쓸 필요도 없었고.”

“…….”

“아니, 넌 황제가 되기 싫어하는 날 보며 재밌어했겠구나. 짓궂게도.”

보지 않아도, 이쯤에서 그가 어깨를 으쓱거렸을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

“아무튼 축하해, 황제 폐하.”

이제 그는 예의 그 장난스럽고 해사한 미소를 짓고 있을 것이다.

“잘해 보라고. 쉽지는 않겠지만.”

발소리가 멀어짐과 동시에 조금씩, 아래에서 환호성이 올라왔다. 그것이 제국의 하늘마저 가득 채울 때에야 클라우디아는 미소를 지웠다.

“이제 일을 시작해 볼까.”

클라우디아 엘로이는 다시, 니아 프레슬리라는 여자에 대해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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