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오랜 동맹
구구, 우는 소리와 함께 비둘기 한 마리가 황금빛 황궁 위를 날았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황궁은 고고한 금빛으로 빛났다. 노란 광택으로 빛나는 창문에 새가 펄럭이는 모습이 비쳤고, 한 마리가 날자 여러 마리가 따라서 하늘로 치솟았다.
황제 탄신일이 이틀 앞으로 다가왔다.
“비가 올지도 몰라.”
“탄신일에?”
“그래.”
거사가 있기 전, 필릭스 쿠아란과 클라우디아 황녀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그들의 대화는 여느 때와 같이 단조로웠으나 두 사람 모두 은근한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진흙 속에 숨어 있는 진주처럼 눈빛이 형형했다.
“어쩌면 해가 뜰지도 모르고.”
필릭스 쿠아란은 가볍게 덧붙이는 황녀를 향해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머리를 매만지는 황녀를 삐딱한 자세로 응시했다.
“미래를 본다는 거, 혹시 거짓말이었나.”
클라우디아 엘로이가 웃음을 참지 못하고 어깨를 들썩거렸다.
“내가 모든 것을 알면, 신이게?”
황녀는 우아한 몸짓으로 등을 돌렸다. 그리고 시녀가 가져다 놓은 드레스 중 하나를 골라 들었다.
“하지만 니아 프레슬리에 대해 알았잖아.”
“계시나 마찬가지였어. 정말 신이 있다면, 내게 정답을 알려 준 것으로 봐야겠지. 누가 내게 도움이 될 사람인지를 알게 되었으니까 말이야. 흐릿한 잔상이었지만…….”
“그날부터 벅 프릴리의 후손을 찾아다녔군.”
“그래.”
클라우디아는 사뿐사뿐 걸어 거울 앞에 섰다. 빛나는 붉은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보였다. 숨 쉬듯 자연스러운 미소가 입가에 올랐다.
“난 생각이란 것을 할 수 있게 된 그 순간부터 황제가 되고 싶었어. 욕심이 아주 많았거든.”
“…….”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몰라. 황제가 악행을 많이 저질렀던 게.”
클라우디아 엘로이가 손으로 자신의 머리에 왕관을 만들어 보였다. 여황제. 그녀가 입으로 중얼거리자 필릭스는 우습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모든 게 운명 같지 않아? 황제가 알아서 추락의 길을 걸어 준 것도, 내 오빠인 아론 엘로이가 황제의 자리에 욕심이 없는 것도, 그리고…….”
클라우디아 엘로이가 싱긋 웃었다.
“이 나라 최고의 권력가가 내 편에 선 것도.”
필릭스 쿠아란이 고개를 저으며 지그시 눈을 내리깔았다. 그의 속눈썹이 긴 그림자를 만들었다.
“황녀. 당신은 황제가 되고 싶은 거야, 아니면 백성들을 구하고 싶은 거야?”
클라우디아가 의외라는 듯 눈을 떴다. 적색 눈이 아로새기듯 그를 낱낱이 살폈다. 그러나 필릭스 쿠아란의 눈동자는 이미 눈꺼풀로 덮인 후였다.
“왜 그런 걸 물어봐? 단 한 번도, 내가 왜 황제가 되고 싶은지를 묻지 않았잖아.”
“…….”
“아, 마음에 여유가 생기신 거로군.”
“…….”
“니아 프레슬리와 잘돼서.”
필릭스 쿠아란이 번뜩 눈을 떴다. 그의 생각을 살피려고 필릭스가 눈을 뜨기만 기다리고 있던 황녀는 중얼거리더니 먼저 고개를 돌렸다. 혀를 내두르며.
“그래서, 답은?”
쓸데없는 말이 많아진 필릭스 쿠아란이었다.
눈빛 속에 숨긴 기쁨은 이미 그가 걸어 들어온 순간 읽었다.
클라우디아 엘로이는 적당히 생각한 끝에 답했다.
“그게 중요한가? 백성을 위해 황제가 되었든, 황제가 되고 싶어 황제가 되었든, 결과가 중요한 거 아니겠어?”
“…….”
“필릭스 쿠아란 당신이, 여자 하나를 위해 한 일에 이 나라 백성들이 구원받았듯이.”
필릭스 쿠아란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황녀의 목적은 그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성공 여부가 중요했지.
“실패하면 어떡하지?”
황녀가 진지하게 물어 왔다.
마음에 들지 않는 단어에 필릭스가 인상을 팍 쓰고 황녀의 얼굴을 바라보는데, 그제야 그녀가 장난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 생각을 읽힌 것이다.
“실패하면, 니아 프레슬리를 데리고 도망이라도 칠 건가? 다른 나라로. 응? 공작님.”
“실패는 없어.”
필릭스 쿠아란이 황녀의 장난에 단 한순간도 놀아나 줄 수 없다는 듯 묵직하게 답했다.
“니아가 이 나라를 좋아하니까. 다른 나라에서 살게 하지 않아.”
“어련하시겠어.”
클라우디아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러다 지기 싫다는 듯 한마디를 중얼거렸다.
“얼빠진 놈.”
필릭스 쿠아란이 동요하지 않자 클라우디아는 미간을 찌푸렸다. 빚어 놓은 듯한 그녀의 얼굴에 미묘한 광기가 어렸다. 그녀는 말을 정정했다.
“팔 빠진 놈.”
“맞아.”
아무렇지 않게 인정하는 필릭스 쿠아란을 보며 클라우디아 엘로이는 결국 신경질적으로 웃고 말았다. 저 사랑에 빠진 눈을 하고 있는 남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고, 그 모습이 괜히 짜증 나는 자신은 더더욱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오랫동안 준비한 일이 막을 내리려고 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그녀도 조금쯤 긴장한 걸지도 모른다.
“실수만 하지 마, 공작. 아니, 당신은 걱정하지 않지만 아랫사람들 관리 잘해.”
“내 부하들도 모두 나만큼이나 간절해. 정의로운 놈들이거든. 황제 기사단이 어떤 대우를 받고, 어떤 명령들을 수행했는지 듣더니 말이야. 같은 기사의 명예를 들먹이며.”
“귀엽네. 혹시 리바론 기사단에는 모두 당신 같은 사람뿐이야?”
“무슨 의미지?”
“다 우락부락, 거인 같은 사람들뿐이냐고.”
“…….”
“예쁜 남자는 없어? 뭐랄까, 좀 여리여리한…….”
필릭스 쿠아란은 단번에 고개를 돌렸다. 순간, 덩치는 컸지만 얼굴만은 미소년인 사이먼 캐치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니아와 함께 있을 그가 왜 지금 스치는지 알 수 없었다.
“없어.”
“그래. 그거야 나중에 직접 확인해 보면 되겠지.”
“…….”
“황제 탄신일, 황제가 축배를 들 때 나는 황제의 목을 노릴 거야.”
“죽일 수 있겠어?”
“죽여야지. 내가 직접 죽여야, 내가 직접 황제가 되지.”
“한 번에 잘해.”
“별걱정을.”
오래 준비해 온 만큼, 날이 다가오자 모든 것이 수월하게 풀려 가고 있었다.
필릭스 쿠아란이 돌아온 이후, 황제는 불안으로 많은 실수를 저질렀다. 백성들이 황제에게서 돌아서게 만드는 이러저러한 일들. 잘 숨겨 왔던 과오를 드러낸 것이다.
와중에는 클라우디아가 손을 쓴 일도 있었지만, 황제가 알아서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그녀도 쉽지 않았을 일이었다.
결국 황제 스스로, 아버지를 죽이고 새로운 황제가 되려는 클라우디아의 패륜을 정당화시킨 것이다.
‘황자와 필릭스 쿠아란만을 견제한 것. 그게 황제 폐하, 아버지 당신의 가장 큰 패인이야. 겨우 공작과의 결혼이라니, 어림도 없지.’
황궁은 소문의 근원지다. 시종들은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입을 가지라 교육받지만, 그들도 사람인 이상 비밀이 유지되기 어려웠다.
클라우디아는 그것을 이용했다. 소문을 막지는 못해도 얼마든지 부풀릴 수는 있으니까. 그리하여 클라우디아 엘로이는 금기시되었던 신성에 관한 이야기를 퍼뜨렸다.
최초의 여황제. 클라우디아 엘로이를 뒷받침할 군사적 세력은 필릭스 쿠아란이었으며, 사상적 세력은 에슬란 제국이 단 한 번도 가져 보지 못한 신성이었다.
클라우디아는 머릿속에 펼쳐지는 황금길에 대한 잔상을 웃으며 지워 냈다.
“필릭스 쿠아란, 가장 빠른 방법이 뭔지 알아?”
클라우디아는 마지막으로, 진심으로 진지한 얼굴을 하고 물었다. 필릭스 쿠아란에게는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이야기였다.
“뭘 말이지?”
“니아 프레슬리 말이야.”
필릭스 쿠아란이 한 박자 쉬고 여유를 둔 채 답했다.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마자, 당신이 벅 프릴리에 대한 이야기를 백성들 사이에서 반전시켜야겠지. 제국이 백성들을 어떻게 속이고 있었는지 낱낱이 밝히고, 치유 능력 또한 괴물의 것이 아닌 신성한 것으로. 그리고 꾸준히, 새롭게 교육을 하고.”
왼팔로 입술을 매만지며 필릭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머지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세상이 온다면, 니아는 두려워하며 살 필요가 없었다. 그것이 니아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알기에, 언제나 상상만으로도 벅찼던 일이다.
“정말 그걸로 될까?”
“이제 와서 다른 소리를 하는 거야?”
순식간에 험악하게 돌변하려는 필릭스 쿠아란에게 클라우디아 엘로이는 손가락을 저어 보였다.
“니아 프레슬리를 가장 귀한 자리에 세우는 거야. 사원의 꼭대기. 거기까지는 생각해 본 적 없어?”
싱그럽게 웃음을 날린 클라우디아가 중얼거렸다.
“단, 니아 프레슬리가 선택을 해야겠지.”
필릭스 쿠아란은 황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챘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눈을 감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니아는 원하지 않을 거야.”
“두고 봐야지, 그건.”
클라우디아 엘로이는 기대와 피로가 모두 담긴 필릭스 쿠아란의 얼굴을 찬찬히 훑었다. 그녀로서는 마지막 점검이었고, 또 마지막 결심이었다.
“이제 가, 공작.”
“…….”
“다음번 만남은 웃으며.”
올려다보고 있었으나 마치 내려다보기라도 하는 듯 턱을 반듯이 든 클라우디아 엘로이였다.
답도 없이 쾅, 하고 문이 닫혔다. 필릭스 쿠아란이 일을 시작하기 위해 떠난 것이다. 시작. 드디어 시작이었다.
클라우디아 엘로이는 마지막의 마지막으로 중얼거렸다. 웃음 섞인 한숨과 함께.
“저 남자가 직접 황제가 되겠다고 하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