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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한 사람을 위한 꽃 (55/75)

10. 한 사람을 위한 꽃

레오 아리데오는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사기그릇끼리 부딪히는 요란함이 익숙했다.

“아, 이게 아닌가. 허허.”

소음 속에 작게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아, 안 돼!”

조금 큰 목소리가 나왔을 때, 레오는 잠시 멈추었던 심장에 손을 올렸다. 그러고는 박동을 따라 손끝으로 타닥타닥 두드렸다.

어, 심장 살아 있네.

심장이 멈추었다가 뛰는 일은 놀라웠다. 눈을 감을 때는 감옥과 마찬가지인 독방이었는데, 눈을 뜨니 작은 오두막 안이었다.

‘죽으니 바로 버려졌구나.’

황제의 실망이 그대로 전해지는 듯했다. 동시에 안도감이 들었다. 레오는 미련 없이 심장에서 손을 치웠다.

“빛을 따라 따스한 작은 집으로 돌아오면 된단다. 헤매지 않길 나는 기도한단다. 아픔이 사라지길 나는 기도한단다, 나의 아가야…….”

매캐한 향기가 코를 찔렀다. 익숙한 것이었다.

익숙한 노랫소리가 귀에 들렸다. 그리운 것이었다.

레오 아리데오는 이 모든 것이 잘 짜인 운명 같기도 하고, 그저 신의 장난 같기도 하다는 생각을 하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허리를 들어 올리자 예상치 못한 고통이 척추를 타고 흘렀다. 그가 저도 모르게 신음을 뱉어 내는데, 동시에 요란한 소리가 멈추었다.

“일어났구나.”

혼잣말이 들렸다. 그리고 니아 프레슬리가 돌아섰을 때, 레오는 웃고 있었다. 니아를 볼 때 그가 언제나 그랬듯이.

“레오.”

니아가 다가왔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목이 휑하게 드러났다. 낡은 원피스의 길이는 짧았고, 어디서 났는지 그 위에 두른 앞치마는 때가 묻어 더러웠다. 머리는 산발에, 반쯤 구겨 신은 가죽 구두에는 재가 쌓여서…… 마치 안나에게 혼이 날 것만 같았다.

레오는 다시 진심으로 웃었다. 그러자 니아도 웃었다.

“먹을래? 계란이 있더라고. 얼마나 오래된 건지는 나도 모르지만. 저기 작은 화로가 있거든. 네가 영양소 높은 음식을 먹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에 있는 재료는 다 집어넣었는데…….”

“응.”

“보다시피 망했어.”

“또?”

“응. 그렇네. 또 실패했어.”

레오가 달라는 듯 손을 뻗었다.

“그래도 먹어 볼게. 전보다 나아졌을지 모르니까.”

니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레오의 무릎에 그릇을 놔 주었다. 음식의 온기가 사기그릇을 넘어 레오의 허벅지에 닿았다. 따듯했다.

“그래. 다음에는 더 잘할 수 있을 거야. 그다음에는 더 잘할 테고.”

“그래.”

레오 아리데오는 정체불명의 요리를 입에 넣었다.

“니아.”

“미안해.”

재빠르게 사과하는 니아 프레슬리를 향해 레오는 중얼거렸다.

“먹을 만하다.”

“…….”

“지난번보다 훨씬 더.”

“정말?”

의심의 빛을 지우지 못한 니아는 레오에게서 숟가락을 뺏어 음식을 가득 떴다. 냄새를 맡고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더니 반, 그리고 다시 반의반을 그릇에 덜어 냈다. 그러고 나서야 자신의 입으로 집어넣었다.

“정말이네! 먹고 죽지는 않겠어!”

입안 가득 미끄덩한, 고체도 액체도 아닌 것을 넣고 돌돌 굴리던 니아는 꿀꺽 삼키고서 외쳤다.

레오는 킥킥 웃으며 다시 니아에게서 숟가락을 가지고 왔다. 그리고 바닥이 보이게 싹싹 음식을 긁어모아 꿀꺽꿀꺽 넘겼다.

레오가 빈 그릇을 들이밀자 니아는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리고 그들은 솔직한 시간을 마주했다.

함께 살며 많은 이야기를 나눠 온 두 사람이었다. 그러나 오늘이 진짜 대화를 나누는 첫날이었다.

“레오. 난 너를 위해 여기에 왔어. 네가 눈을 떴을 때, 네 곁에 내가 있으려고. 단지 그것 하나 때문에.”

긴장된 표정의 니아 프레슬리가 먼저 입을 뗐다.

레오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그녀는 낡은 앞치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완두콩이었다. 아마도 방금 레오가 먹은 음식에도 들어 있었던 것 같은…….

“이거 봐, 레오.”

니아가 손바닥에 완두콩을 올려놓은 순간 작은 싹이 피어났다. 니아는 그 연둣빛 싹에 검지를 가져다 대었다.

“이건 싹.”

손톱만 했던 싹이 니아의 손가락을 받침 삼아 구불구불 위로 올라갔다. 막힘없이 자라나던 줄기는 초록으로 짙어졌다. 그것은 레오의 턱 아래서 멈췄다.

“이건 꽃.”

순백의 꽃이 피어났다.

“이건 선물.”

니아는 손에서 줄기를 빼내어 레오에게로 건넸다. 레오는 꽃이 하나만 있어도 꽃밭이 될 수 있음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나는 이런 사람이야.”

“…….”

“우리 둘 다, 빠짐없이 말하는 거야. 이제 비밀 같은 건 없어.”

레오가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자, 니아는 웃으며 꽃을 그의 귓가에 꽂았다. 붉은 머리에 흰 꽃잎이 묘하게 조화로웠다. 니아에게서 터져 나온 작은 웃음소리가 꽃잎을 간지럽혔다.

“누가 더 슬펐는지 한번 볼까?”

장난스럽게 말하는 니아의 눈꼬리에 기어이 물기가 맺혔다. 그러나 곧 씩씩하게 손으로 눈을 비벼 눈물을 닦아 냈다.

그들은 창문 밖으로 해가 질 동안, 새벽 별이 쏟아질 준비를 하는 시간까지도 대화를 멈추지 않았다.

니아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동안 영영 굳어 있을 것만 같던 레오의 입술은 몇 번씩이나 움직였다. 레오는 괜찮다고 말해 주었고, 그 말을 니아에게서 되돌려 받았다.

놀람과 속상함을 감추지 못하던 니아는 울먹이면서도 레오의 말을 끊지 않았다.

“그래서 백작이 죽었어. 그냥 어느 날 갑자기. 그게 끝인 줄 알았는데, 네 곁에 있으면서, 그리고 어떻게든 살아 보려고 하면 또 떠오르고……. 죽었는데 죽은 게 아닌 것처럼…….”

거의 끝났다 싶으면 자꾸만 새롭게 떠오르는 기억에 몇 번이나 다시 되돌아가 처음부터 시작했다. 시작하고 또 시작했다. 수도 없이 시작했더니 어느 순간 끝이 나 있었다. 진짜 끝이.

“괜찮아. 다시 시작할 수 있어.”

퉁퉁 부은 눈으로 니아가 말했다. 그녀의 눈물로 젖은 레오의 무릎에 니아는 고개를 묻었다.

“다시 시작할 수 있어. 다시 시작할 수 있어.”

“…….”

“그러니까 다시는, 내게서 널 뺏어 갈 생각은 하지 마. 알았지?”

“…….”

“나도 결국 살고 있잖아, 레오.”

레오 아리데오는 실패했다고 생각했다. 기적처럼 니아 프레슬리를 다시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두 번째 삶을 시작하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고.

그러니 자신은 안 될 놈이라고.

곁에 있다간 자신이 니아를 망쳐 버릴 거라고.

그러니 죽는 것이 답이라고.

이번에야말로 편해지고 싶었다. 죽을 기회를 다시는 놓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필릭스 쿠아란이 레오 아리데오를 설득하는 데 성공했을 때도 그러했다.

아름답게 빛나는 그녀의 세상에서 니아가 웃는 모습을 보면, 그때는 정말로 모든 것을 비운 채 그녀 곁을 떠나겠다고 홀로 생각했다. 그것만이 마지막의 마지막 미련이라고 생각했기에.

하지만 상처 입은 채 상처 입은 자신을 위로하는 니아 프레슬리를 보며 깨달았다. 살아 달라고 애원하는 니아 프레슬리를 보며 깨달았다.

삶에 대한 갈망은, 미련은, 아직까지도 차고 넘치고 있음을.

죽고 싶은 만큼 살고 싶었다.

도망치고 싶은 만큼 맞서고 싶었다.

이제야 봄이던가?

“살았다.”

레오 아리데오는 안녕, 하고 새로운 시작에게 인사를 했다. 너무 늦었는데, 늦은 만큼 반가웠다.

“자꾸 나오시면 안 된다니까요!”

오두막에 콕 박혀 있으라는 말을 번번이 무시하는 니아 프레슬리를 향해 사이먼이 툴툴댔다.

“아무도 없잖아? 허허벌판인데 뭘.”

안에 함께 있는 남자는 가만히 있는데, 이 말라깽이 여자만은 어찌나 호기심이 많은지. 잠시 볼일을 보고 와서 창문을 들여다볼 때마다 놀라 자빠지기 일쑤였다.

그리고 한참 뒤에 나타나거나, 혹은 벌판 한가운데서 쪼그려 앉은 채로 발견되곤 했다. 뭘 실험하는 건지, 흙장난을 치는 건지, 항상 머리는 산발이 된 채로.

“안 그래도 나만 여기 쏙 빼놓고 지들끼리 바빠서 짜증 나는데!”

사이먼 캐치는 이번 일로 자신이 왕따임을 알았다.

‘사이먼, 잘 부탁한다.’

언제나 진지한 단장이었지만 몇 번이고 당부하길래 이제야 내 진가를 알아봐 주는구나 생각했다.

‘단장! 날 믿어요! 내가 누구게요!’

마차를 몰아 국경까지 가라는 이야기도, 국경 부근에 다른 부하들을 배치해 놨음을 말해 줄 때도 정말 괜찮았다. 뭔가 멋진 일을 하는 것만 같았다.

‘여기까지는 별일 없겠지만, 단단히 지켜야 해. 오두막을 지키는 건 너 하나뿐이니까. 기사단은 수도에서 중요하게 할 일이 있다.’

부단장 포말라드 웨이가 명령을 내릴 때도 잠시 고개를 갸우뚱할 뿐 아무렇지 않았다. 그러나 점차 생각이 바뀌었다.

‘수도에서 중요하게 할 일? 나는 여기에 있는데?’

그리고 자기들끼리 말하는 것을 보니, 이미 사이먼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알고 있는 내용 같았다. 그것도 꽤나 오래되어 보이는…….

그리고 현재, 사이먼 캐치는 부글부글 끓어 괴성을 내지르고 있었다.

“이 여자 또 없네!”

문을 열어 살펴보니 남자 혼자 요리를 하고 있고 니아 프레슬리는 온데간데없었다. 또 한바탕 벌판을 뛰어다녀야 한다는 생각에 흑갈색 머리를 쥐어뜯으려는데…….

“안녕? 잘 잤니?”

불쑥 니아 프레슬리가 나타났다. 꽃인지 잡초인지 무언가를 한 아름 들고서. 콧잔등에 흙이 묻어 있었다.

“내가 말한 건 가지고 왔어? 종이가 좀 필요하다고 했잖아. 질이 좋지는 않더라도.”

“으아아아! 여기 있어요.”

사이먼이 품에서 꼬깃꼬깃한 종이를 내밀었다. 니아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종이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잘 진행되고 있으니 걱정 말라고 했어요. 전서구를 통해서요.”

사이먼 캐치는 비둘기 발에 달려 있던 작은 쪽지도 니아에게 건넸다.

니아는 눈으로 내용을 훑고는 안심 섞인 한숨을 내뱉었다.

“이제 아침을 먹어야겠네.”

중얼거리며 오두막 안으로 들어가려는 그녀를 사이먼이 잡아챘다.

“제발 어디 가면 간다고 말하면 안 돼요? 단장이 잘 지키라고 했단 말이에요!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나는 끼워 주지도 않고! 뭘 하는지 알려 주지도 않고!”

니아가 물끄러미 그를 쳐다보았다. 벌써 같이 지낸 지 닷새째였다. 하지만 필릭스의 부하가 아무것도 모를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내가 웃으라고 널 보냈구나.”

니아가 진심으로 활짝 웃었다.

사이먼 캐치가 머리를 벅벅 긁으며 왜 웃나며 투덜댔다. 미묘하게 간지러운 기분이 무엇인지 알아채지 못한 채로.

“들어와서 같이 아침 먹자. 레오가 음식을 정말 잘하거든.”

흙바닥을 발로 푹푹 차던 사이먼 캐치는 놀라 펄쩍 뛰었다.

“뭐요? 말도 안 되는 말 하지 말아요. 지키라고 명령받았으면 지켜야지, 같이 어울리면 안 되는 거예요. 단장한테 혼날 거라고요.”

“그래, 그럼.”

웃음을 참다 고개를 끄덕인 니아는 미련 없이 발걸음을 떼려고 했지만…… 실은 떼는 척이었다.

“한 번 더 물어보지도 않아요?”

덩치만 컸지, 십 대 아이들은 사실 니아의 손바닥 안이었던 것이다.

“들어와, 사이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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