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삶으로의 초대
연무장 문 앞에서 길리 포바즈는 사이먼 캐치와 한참 동안 말씨름 중이었다.
“아니, 그러니까…….”
평소의 길리 포바즈는 필릭스 쿠아란을 제외한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았다.
심지어 이제 철이 든 필릭스 쿠아란은 예전처럼 억지를 부리지도 않았다. 오히려 걱정스러울 만큼 묵묵했다. 그러니 길리가 뒷목을 잡을 일은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하지만 사이먼 캐치, 이놈은 달랐다. 논리보다는 소리로 압도하는 편이었고, 실패하면 귀를 막고 바로 ‘에에, 안 들려’를 시전했다. 그야말로 공포의 주둥아리였다.
“에에, 안 들려어어…… 어?”
“그래, 네가 생각해도 너무했지? 사이먼, 부탁이니 제발 그만 좀 하자. 안 그래도 할 일이 많은데, 네가 날마다 날 괴롭히니 머리가 다 뽑힐 지경이야.”
“그 여자다!”
“뭐?”
“그 여자요! 단장이 데리고 온 여자!”
길리는 사이먼이 가리키는 곳을 향해 몸을 돌렸다. 흰색의 얇은 원피스 위로 숄을 두른 니아가 길리 포바즈를 바라보고 있었다. 손에는 구겨진 편지 한 장을 들고서.
니아의 갈색 머리칼이 바람에 휘날렸다. 빛에 비친 머리칼은 문득문득 황금색이 되었다.
“오, 다시 보니 좀 다른데. 단장의 취향이 저런…….”
길리는 또다시 시작되려는 공포의 주둥아리를 손으로 막았다. 위아래로 잡힌 사이먼의 입술이 오리처럼 튀어나왔다. 사이먼이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려는 순간, 길리는 팍 손을 놓았다.
“아프잖아요!”
“아프라고 한 거야.”
꽤액 비명을 지르려는 사이먼을 뒤로한 채, 길리 포바즈는 니아에게로 걸어갔다.
“니아.”
“집사님, 어디 계신지 몰라서 한참을 헤맸어요.”
“손에 든 건…….”
길리가 니아가 꾹 쥐고 있는 종이를 향해 눈짓했다.
“집사님이 넣어 놓으신 거죠? 제가 보길 바라서.”
확신에 찬 목소리에 길리 포바즈는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
“시간이 참 빠르다.”
“…….”
“이렇게 똑똑해진 걸 보면.”
저 녀석은 아직 먼 것 같지만.
길리는 멀리서 팔다리를 마구 돌리며 소리를 지르고 있는 사이먼 캐치를 향해 작게 웃었다. 그러고서는 심각한 표정의 니아를 다시 저택 쪽으로 이끌었다.
길리는 사용인들을 모두 내보낸 후 직접 차를 타기 위해 찬장을 뒤적였다. 곧 마른 찻잎을 담은 유리병을 찾아낸 그는 찻잎을 뜨거운 물에 우렸다.
“도련님이 왜 전쟁터로 가셨는지 아시죠?”
“그래.”
말끝에 조급함이 묻어나는 니아와는 달리 길리는 여유로웠다.
“설탕은?”
니아가 답을 하지 않자 길리는 달그락 소리를 내며 설탕을 크게 두 스푼 넣었다. 분설처럼 내려앉은 하얀 가루는 물에 닿자마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집사님.”
참지 못한 니아가 다시 그를 부름과 동시에 그는 쪼르르, 우유를 첨가했다. 투명했던 홍차가 달달한 주홍빛을 띠었다.
“니아, 천천히 이야기해 보자.”
그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티를 니아에게 건넸다.
“너도, 나도, 숨김없이.”
니아의 녹색 눈이 도르르 굴러갔다. 길리 포바즈가 이렇게 따스한 목소리로 그녀를 추궁할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도련님이 너한테 뭘 잘못한 거니?”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어요!”
순간 버럭 화를 내듯 답하는 니아 프레슬리를 보고 길리는 고개를 저었다.
“솔직해지자고 말했지.”
손을 둘 곳을 찾지 못한 니아가 애꿎은 찻잔을 쓰다듬었다. 찻잔에 그려진 무늬를 드르륵 긁는 손톱을 길리가 저지했다.
“내가 먼저 얘기하마.”
“…….”
“도련님이 전쟁터로 떠나신 지 몇 주 지나지 않아 편지 한 통이 도착했어. 너도 알 거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너를 많이 원망하고 있었다는걸.”
“지금도 원망하고 계신 줄 알았어요.”
길리는 자신을 직시하듯 바라보는 니아 프레슬리를 보고는 멈칫했다. 그러나 곧 고개를 저었다. 숨을 깊게 들이쉰 그는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너를 위해 떠나신 거라고 했어. 도련님을 보는 것 자체가 너한테는 힘든 일이라고. 그러고는 널 부탁한다고 하셨지. 첫 편지에는 온통 자책뿐이었다.”
“…….”
“네게는 아무런 말도 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는 걸 그때의 나는 이해하지 못했어. 도대체 어떤 마음이어야 그런 결심이 가능한지 상상할 수도 없었고.”
“죄책감이 너무 컸던 거예요.”
“그래.”
두 사람은 잠시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고민 끝에 니아가 말을 얹었다.
“하지만 도련님 잘못이 아니에요. 그냥, 어쩔 수 없었던 문제예요. 나쁜 사람들은 따로 있고, 그리고…… 도련님이 떠나기 직전에 내가 너무 큰 상처를 줬어요. 그래서 떠나신 거예요.”
“…….”
“내가, 도망쳐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그렇게 말했어요. 내가 먼저 이별을 이야기했다고요.”
니아는 눈을 감고 그날의 자신이 얼마나 매서웠는지를 떠올렸다. 이제야 필릭스 쿠아란이 어땠을지가 여실히 실감이 났다.
말로 심장을 베고, 도망가고, 사라지고.
겨우 찾아냈을 니아는 배가 뚫려 피를 흘리고 있고.
그렇게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를 그녀를 위해 어깨를 다치고, 그녀가 살아나는 것을 보고.
그다음 공작가로 데려다주고, 지난 십 년 니아가 그를 위해 이용당했던 이야기를 알게 되고…….
전쟁터로 떠난 것이 이상하지 않았다. 떠나는 길 내내 혼자 어떤 어두운 생각들을 했을지 마음이 저릴 뿐이었다.
“도련님 잘못은 없어요.”
고개를 끄덕인 니아는 확실하게 말했다.
“내가 겪은 일들에 도련님은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어요. 정말로.”
길리 포바즈의 눈매가 살짝 휘어졌다. 그는 기특하다는 눈으로 니아를 보고 있었다.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어. 전대 공작님께서 도련님을 위해 널 이용했겠지. 언제나 의문을 품고 있기는 했다. 맡은 일이 아무것도 없는 하녀가 왜 이 집에 있는지를.”
“…….”
“하지만 실은 누구보다 큰일을 하고 있었던 거야. 그렇지?”
니아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진실에 접근해 있는 길리 포바즈를 보며 꿀꺽 침을 삼켰다. 그는 이미 많은 것을 예상한 채 니아에게 물었던 것이다.
목으로 채 넘어가지 못한 쌉쌀함이 잔상처럼 감돌았다.
“니아, 사 년은 무척 긴 시간이야.”
“알아요.”
“네가 변한 만큼, 도련님도 변하셨다. 난 사 년간의 도련님을 편지로나마 지켜봤어.”
“네.”
“처음에는 너를 다시 볼 생각조차 없으셨다. 네가 도련님을 끔찍하게 여길 거라고 하셨지. 하지만 시간은 지나잖니. 나는 언제나 네가 도련님을 그리워한다는 말을 전했어.”
니아는 입술을 꾹 물고 길리의 입에서 나올 말을 기다렸다.
“도련님은 믿지 않으시다가, 그래. 어느 날부터 네가 보고 싶다는 말을 하기 시작하셨다.”
아. 바늘로 풍선에 구멍을 내듯 니아에게서 탄성이 새어 나왔다.
“네가 기다리는 만큼, 도련님도 다시 널 만날 날을 기다려 왔단다. 두려워하시면서도.”
“…….”
“그런데 돌아온 도련님은 내 예상과는 너무도 다르더구나. 내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을 만큼. 널 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으셨고, 얼굴엔 온통 우울함뿐이었어.”
내내 잔잔했던 길리 포바즈의 얼굴에 짙은 피로가 깔렸다. 니아는 그가 왜 편지를 보게 했고, 또 이런 대화를 시작했는지 깨달았다. 그가 차마 풀지 못한 숙제를 그녀에게 넘겨준 것이다.
“알겠어요. 무슨 말씀인지 알겠어요.”
니아는 굳게 다짐한 눈으로 길리 포바즈를 바라보았다.
“분명히…… 도련님이 제국으로 돌아와서 또 무슨 일이 있었던 거군요. 그렇죠?”
다시금 길리 포바즈는 니아를 향해 기특하다는 미소를 지었다.
“그래. 또 한 번, 니아 너를 보지 못할 만큼 도련님의 죄책감을 자극하는 일이 말이야.”
그리고 그는 덧붙였다.
“혼자 감당하려 드는 내 공작님을 네가 좀 말려 봐, 니아.”
길리 포바즈와 니아는 마주 보며 아프게 웃었다.
니아는 필릭스 쿠아란의 방에서 그를 기다렸다. 하루가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는 그를 묵묵히, 그의 방 안에서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니아 프레슬리는 그를 다시 보면 질문보다 먼저 눈물을 쏟아 낼까 두려워 부러 미소를 짓고 있었다.
커다란 망토를 푹 눌러쓴 그가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니아는 기다렸던 웃음으로 그를 반겼다.
필릭스 쿠아란은 문 앞에 서 있는 그녀를 보고 멈췄다.
“니아.”
그 이름을 고백하듯 불렀다.
“도련님.”
니아 또한 마찬가지였다.
두 고백이 공중에서 만나자 단단한 기류가 두 사람 곁으로 응집되었다. 니아는 그것이 흩어지지 않도록 눈빛으로 단단히 묶었다. 필릭스 쿠아란은 피하려는 듯 눈을 내리깔았다.
“니아, 레오 아리데오는 곧 나오게 될 거야. 네 삶으로 돌아올 거야. 시간이 없으니 설명은 가면서…….”
“도련님도 오세요.”
“…….”
“내 삶으로.”
움푹 들어간 필릭스 쿠아란의 눈매가 흔들렸다. 그의 심장 소리가 쿵쿵 하고 울리는데, 눈빛만은 영문을 모르겠다며 니아에게 물음표를 던졌다.
니아의 미소를 견디지 못한 그는 딴소리를 했다. 다시 만난 이후 처음으로, 그는 그녀를 짝사랑했던 소년처럼 횡설수설했다.
“레오 아리데오가 많이 힘들어할지도 몰라. 하지만 네 곁에 있으면 곧 안정될 거고, 분명히……. 아, 다시 만나면 너무 놀라지 마. 약을 먹어서 좀 시체처럼 보일 텐데…….”
니아는 꾸준히 기다려 주었다.
“이미 황제는 네가 레오 아리데오의 가족이라는 걸 알았을 거야. 둘이 함께 있으려면 좀 멀리 떠나서……. 아, 일단 설명을 해 줘야지. 레오 아리데오 이야기를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어. 네가 울 텐데, 반드시 울 텐데, 그럼 나는…….”
“…….”
“나는 그걸 어떻게 보지. 네가 우는 모습을 어떻게.”
필릭스 쿠아란은 고개를 떨궜다. 좋아하는 소녀 앞에서 마음을 가누지 못하는 소년처럼 보였다.
시간이 조금 흐른 후에야 그는 다시 제 모습을 찾았다.
“가자.”
낮고 깊은 목소리가 울렸다.
니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발을 움직이지는 않았다. 대신 부드럽게 목소리를 내었다. 언젠가의 그가, 타이르듯 온기를 전해 주었던 것과 똑같이.
“도련님 덕분에 레오가 내게 돌아올 거예요. 그렇죠?”
“……응.”
“나는 행복해질 거고요.”
“응.”
답하는 필릭스 쿠아란의 목소리는 확신에 차 있었다. 그는 두 사람 주위를 맴도는 감정의 잔재들은 하나도 없애지 못하면서 니아의 행복에만은 마침표를 찍었다.
“같이 오세요.”
“니아.”
니아가 한 발짝 다가가 그의 온몸을 덮고 있는 짙은 망토를 벗겨 냈다. 툭 하고 힘없이 망토는 땅으로 떨어졌다. 니아의 눈에 그제야 필릭스 쿠아란의 오른팔이 보였다.
니아는 떨리는 손으로 그의 오른팔을 잡았다. 미동이 없었다. 생명을 다한 나무처럼. 니아는 부드럽게 단단한 피부를 쓸다가 꾹 눌렀다.
“아…….”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터져 나오는 감정을 참지 못한 필릭스 쿠아란은 신음을 내었다. 아니, 실은 가장 큰 고통이었다. 그러나 너무나도 달콤한.
니아 프레슬리는 천천히 그의 팔에서 어깨로 손을 옮겼다. 스르르 쓸어 올라가다가 한곳에서 멈췄다.
상처가 난 자리였다. 흉한 흉터가 박힌 자리였다.
“……니아.”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것 같아 흥분인지 울분인지 모를 음성으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을 때, 니아 프레슬리의 입술이 나비처럼 내려앉았다. 그의 상처에.
보드라운 살이 떨어지고 난 뒤에도 니아가 남기고 간 온기는 문신처럼 그의 상처를 떠나지 않았다.
니아는 차분히 그를 올려다보았다.
“다 괜찮아요. 무슨 일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니아는 사 년 전의 말을 돌려주었다. 계속해서 그들이 흘려보낸 시간의 간격을 메꾸었다.
“난 어떤 얘기라도 다 이해할 수 있으니까.”
“…….”
“당신이 내게 오기만 한다면.”
니아의 말에 필릭스 쿠아란은 홀린 듯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눈 속에서 목마른 사람이 사막에서 물을 찾듯 그렇게 진심을 찾아 헤맸다.
니아는 심각한 분위기를 풀어 보려고 노력하는 사람처럼 덧붙였다.
“그냥 안아 주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니겠어요?”
기어코 절망 속에서 희망이 피어났다.
“응.”
필릭스 쿠아란이 니아를 깊이 안았다. 매 순간 그러고 싶어 했던 만큼 깊숙이. 속절없이.
오래된 종이 향 같은 것이 그의 코끝을 파고들었다. 니아의 머리를 매만지는 손길은 애틋했다. 그게 다였다. 이게 다인데 그토록 어려웠다.
“니아.”
매분 매초 니아의 이름을 불렀다.
니아 프레슬리.
또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 되더라도, 오늘의 이 기억만으로 평생을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의 왼손은 니아 프레슬리의 오른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 급하게 달리는 와중에도 신경은 온통 그쪽으로 가 있었다.
영차, 하고 니아를 말에 먼저 태운 필릭스는 그 뒤에 올랐다. 말은 약속한 장소를 향해 달려갔다. 깊은 어둠을 송곳처럼 뚫으며.
얇은 나무 위에 하얀 천을 덮어 지붕을 세운 작은 짐마차에 오르고 나서야, 그들은 속삭이며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도련님, 레오의 일은 레오한테서 들을게요. 그게 맞는 거잖아요.”
달싹거리는 필릭스 쿠아란의 입술을 보고서 니아가 말했다. 그들의 마음은 닿았지만 아직 이야기는 해결되지 않았다.
“제가 도련님이 할 이야기를 정해 줄게요. 그럼 조금 더 쉽겠죠?”
빠르게 달려가는 마차의 바닥이 끝도 없이 덜컹거렸다. 엉덩이가 하늘로 날아가듯 뛰었다가 다시 내려앉는 순간 니아는 작게 웃었다. 웃고 싶었다.
“도대체 절 위해 뭘 준비하신 거예요?”
혹시 니아의 웃음 어딘가 원망이 섞여 있지는 않을까 불안한 눈빛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그러나 필릭스는 결국 힘겹게나마 미소 지었다. 니아의 눈이 어두운 밤 속에서도 반짝이고 있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그를 향해 니아가 똑 부러지게 말했다.
“사 년 전, 그날부터요.”
돌길에 올랐는지 마차가 더 거세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콰광콰광, 천둥처럼 울리는 소리와 동시에 니아는 필릭스 쿠아란에게로 몸을 기댔다. 조금은 부자연스럽게. 그렇게 니아의 무게중심이 필릭스에게로 갔다.
“처음에는 정말 도망이었어. 네 상처가 모두 낫는 것을 보고 아버지한테 갔거든. 분명 아버지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실 거라는 생각에.”
“…….”
“너한테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깨달았지. 그리고 그런 널 내가 내 욕심으로 붙잡았다는 것도. 그동안 네가 내게 보였던 모든 행동과 모든 말들이 전부 떠올랐고, 잊히지가 않았어. 좋은 건 없고 나쁜 것만 있을 뿐이었어……. 정말 죽고 싶을 만큼 끔찍했는데.”
“죽고 싶다는 말은 빼고요.”
필릭스 쿠아란이 희미하게 웃음소리를 내었다. 한숨과 함께 나는 소리인데도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도망쳤어. 처음은 정말 도망이었어. 네가 있는 공작가로 돌아갈 수가 없어서 그냥 길을 걷다가…… 군대를 모집하는 걸 봤지.”
필릭스는 니아를 힐긋 보다 어쩔 수 없다는 듯 덧붙였다.
“충동적이었어.”
니아의 끄덕거림과 동시에 필릭스는 더운 숨을 내쉬었다.
“떠나기 전날, 황녀를 만났다.”
“…….”
“황녀와 거래를 했어. 이상하게도 황녀는 많은 것을 알고 있더군. 황녀가 하는 말을 듣는데…….”
순간 필릭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미간 금이 가는가 싶더니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댔다. 왠지 그에게 동조를 해 줘야 할 것 같아 니아는 재빨리 말했다.
“클라우디아 황녀님은 이상하신 분이에요. 제게도. 어떤 분인지를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마찬가지야. 귀신처럼 사람 생각을 읽고, 정확하지는 않아도 미래를 보는 능력도 있어. 막상 본인 생각은 제대로 말하는 법이 없지만. 하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하게 알지. 무서운 여자라는 거.”
“무서운 분과 거래를 하셨다고요?”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으니까. 황녀는 내게 공을 세워 돌아오라고 했어. 그럼 자신이 새 세상을 만들겠다면서.”
곰곰이 생각하는 듯하다가 필릭스 쿠아란은 정정했다.
“널 위한 세상.”
그 모습이 귀여워 니아는 그의 어깨에 기댄 머리를 꼼지락거렸다. 쓰다듬어 달라는 의미가 아니었는데 그는 기다렸다는 듯 니아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그게 어떤 세상인데요?”
“네가 숨지 않아도 되는 세상.”
일순간 니아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필릭스는 그에게 의지하던 무게가 사라지자 허전해 입술을 축였다.
“그게 어떻게 가능해요?”
“나는 황녀에게 뒷배가 되어 주고, 황녀는 새로운 사상을 세울 것을 약속했지.”
“…….”
“황녀가 새로운 황제가 될 거야. 그리고 벅 프릴리에 관한 이야기를 뿌리 뽑을 거다. 확실하게.”
“…….”
“그런 거래였어.”
동시에 마차가 마지막으로 커다랗게 소음을 내지르며 멈췄다.
그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니아를 향해 필릭스가 손을 내밀었다. 두꺼운 왼손 하나에 니아의 작은 두 손이 올랐다.
그는 크게 힘들이지 않고 니아를 일으켜 세웠고, 잠시 망설이다가 그녀의 등에 묻은 지푸라기 조각들을 털어 냈다.
“황제 탄신일. 그날이 내 계획의 끝이야.”
“…….”
“나머지는 나중에 고백할게. 내가 사 년 만에 돌아와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았어요.”
“레오 아리데오와 함께 조심히 있어. 곧이니까. 네가 안전하게 있다가 돌아올 때쯤……. 네 눈에 아름다운 것들만 보였으면 좋겠다.”
마차에서 뛰어내리는 니아를 필릭스가 받았다. 그녀를 안전하게 내려놓은 후, 그는 옆에 세워진 작은 마차를 보았다.
니아가 국경까지 타고 갈 또 다른 짐마차였다. 그 안에는 아직 깨어나지 않았거나, 혹은 깨어났어도 몸을 움직일 상태는 아닌 레오 아리데오가 들어 있을 터였다.
그것을 아는 니아도 서둘러 움직였다. 하지만 다시 마차에 오르려다가 그녀는 무언가 남은 눈으로 필릭스를 바라보았다.
필릭스 쿠아란은 어두운 곳에서 더욱 빛나는 녹안을 바라보다, 결국 두려움을 감추지 못한 채 입을 열었다.
“니아, 네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야. 다시 만나는 날, 네가 들을 이야기.”
또 한 번 예상하지 못했던 이야기에 니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눈이 여러 번 깜빡였다.
하지만 예상은 못 했으나 마음의 준비는 단단히 해 둔 그녀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꼭 제게 들려주세요.”
“…….”
“그리고 같이 행복해져요, 우리.”
작은 웃음소리가 맞물렸다.
“자, 빨리 가. 내가 못 보내기 전에. 난…….”
순간 니아 프레슬리가 다 올랐던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그러고는 필릭스 쿠아란의 품으로 새처럼 날아들었다.
“도련님은요? 도련님은 위험하지 않은 거죠?”
“…….”
“다치면 안 돼요.”
필릭스 쿠아란은 더없이 다정한 목소리로 답했다. 오늘 중 가장 따사롭고, 극적인 한마디였다.
“이제 위험은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