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동이 트면
“펠링턴에 대한 조사는 길었다. 하지만 꽤나 비슷한 간격으로 죽은 사람들이 존재하더군.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했어. 결국 백작가까지 도달했고.”
“그러셨군요.”
레오는 더 이상 나오지 않는 눈물을 닦으며 답했다. 대신 기억들이 쏟아져 내렸다. 레오는 얼룩을 지워 내려는 사람처럼 연신 닦고 또 닦았다.
“니아가 어떤 일을 당했는지도 알았어. 십몇 년 전에 제국을 떠돌던, 여자아이의 간을 먹으면 늙지 않는다는 소문. 펠링턴에서부터 나온 것이더군.”
“쥔느 블루아르가 맞습니다. 고아원과 결탁해 아이의 간을 받았어요.”
“실제로 노화가 방지되는 일시적인 효과가 있지만, 섭취를 끊는 순간 평균보다 두 배 빠르게 노화가 진행된다. 최근에 밝혀진 연구 결과야.”
“…….”
“정신도 그만큼 노쇠한다더군.”
그래서 내게 그토록 집착했나.
레오는 끝까지 자신을 포기하지 못했던 쥔느 블루아르를 떠올렸다.
쥔느 블루아르는 마차에서 하염없이 레오 아리데오를 기다리고 있었다.
레오가 오늘 그를 죽이려고 했던 것을 몰랐듯이, 레오가 어떤 마음으로 다시 돌아왔는지 그는 몰랐다. 레오의 기분도 마음도, 그 무엇도 그는 제대로 알지 못했다.
레오가 그가 없는 새 삶을 다시 찾았다는 것도 모른 채, 우습게도 그는 레오를 위로했다.
“괜찮다, 아들아. 잘했어.”
어리석게도 인간의 마음을 상상하고 흉내 내는 모습이 딱 그러했다.
“집으로 돌아가자.”
“…….”
“그리고 다시는 이런 곳에 오지 말자.”
레오는 그를 무시한 채 말을 몰았다. 말 한마디 섞기 싫다는 그 태도에 쥔느 블루아르는 초조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백작에게는 여전히 집이었으나, 레오에게는 더 이상 무엇도 아닌 공간에 도착했다.
쥔느 블루아르는 피로한 몸을 가지고 쓰러지듯 이층으로 올랐다. 힘겨운 발걸음을 겨우 한 걸음씩 떼었다. 그러다가 그는 정말로 쓰러지고 말았다. 계단에서 굴러떨어진 것이다.
백작은 계단 구석에 기이하게 비틀린 형태로 멈췄다.
“아들아…….”
그는 다리를 감싸 쥐고 고통스러운 목소리로 레오를 불렀다.
“날 잡아라…….”
쥔느 블루아르는 나약했다.
레오는 언제나처럼 그를 지나쳐 걸었다.
아들아, 아들아, 아들아……. 그림자처럼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하지만 레오는 그 그림자를 결코 뒤돌아보지 않았다.
도시까지의 여정이 그에게 힘겨웠기 때문인지, 아니면 너무 오래 햇빛을 쐬어서인지, 그것도 아니면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뼈를 다쳐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세 가지 다일지도 모르지만.
백작은 나날이 약해졌다.
약해지고, 버려질까 두려워했다.
치매에 걸린 노인처럼 어린아이가 되어 갔다.
그를 죽이고 니아에게로 가야 하는 레오 아리데오는 매번 칼을 손에 쥐었다. 그리고 매번 손에서 칼을 놓았다.
‘왜 이러는 거야, 레오 아리데오. 니아가 기다리고 있어. 니아한테 가야 하는데, 뭘 망설이고 있는 거야.’
레오는 니아와의 재회, 그 찬란했던 순간을 떠올렸다.
어린 시절과 똑같이 자신을 향해 웃는, 그리고 싱그러운 꽃다발 같던 눈빛과 순수한 걱정과 눈물. 그 기적 같은 만남에 레오 아리데오는 운명을 느꼈다. 삶의 끝자락에서 구원을 만났다.
그러나 다행스럽기만 해야 될 마음은 불안함으로 떨고 있었다. 그제야 레오는 자신이 무엇을 두려워하는지를 알았다.
‘왜 이제서야?’
운명은 너무도 고약했다.
‘내가 이렇게 망가지고 나서야. 고장 나고, 부서지고, 되돌릴 수 없게 되고 나서야.’
구원은 너무 늦었다.
사흘 밤을 내리 달리면 니아가 살고 있다는 쿠아란 공작가에 도착할 수 있다. 그러나 레오 아리데오는 그 사흘 동안 그가 모든 과거를 다 표백할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었다.
오랜 시간 찌든 때가 온몸에 묻은 자신이 탈색될 수 있을까.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십 년의 세월을 지우고 니아 곁에서 살 수 있을까. 평범하게. 그저 평범하게.
‘내가, 니아를 망치면 어떡하지?’
새하얀 니아 프레슬리에게 검은 물을 묻히게 될까 봐 두려웠다.
시간이 그렇게 또 흘러가고 있었다.
“아들아, 이리 와 보거라. 이리 와서 앉아 봐.”
백작이 잠들기 전 창백한 목소리로 레오를 불렀다.
레오는 그가 권한 의자에 앉지 않고 집어 들었다. 그리고 창가를 향해 던졌다.
와장창 소리를 내며 오래된 유리가 무너져 내렸고, 새벽빛이 넌지시 방 안으로 들어왔다. 백작은 성급히 이불을 끌어 올려 얼굴을 가렸다.
레오는 그것을 시작으로 백작의 방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부쉈다.
끼익거리는 흔들의자가 협탁과 부딪혀 나뒹굴었다. 바닥이 꺼졌고, 격자무늬 벽에 달려 있던 시계 안의 내용물이 전부 쏟아져 내렸다. 시계 한가운데 달려 있던 새가 땅에 부딪혀 목이 꺾였다. 시계가 멈췄다. 시간이 멈췄다.
마지막으로 레오는 백작의 이불을 험악하게 끌어 내렸다. 그리고 그가, 그라는 남자가 자신의 삶을 어떻게 진창으로 만들었는지 보여 주었다.
“보여?”
“…….”
“어떤 꼴인지. 내가, 그리고 당신이.”
“…….”
“이 결말이!”
니아를 만나고도 그녀에게 갈 수 없는 자신의 심정이 어떤지를.
“당신은 모르겠지. 이해할 수 없을 테니까. 그런 거 할 줄 모르니까, 당신은.”
그렇게 온통 망가진 것뿐인 방 안에서 백작은 물었다.
“뭐가 필요해?”
“…….”
“뭐를 원해?”
“…….”
“뭐가 있어야 나를 떠나지 않을…….”
레오 아리데오는 반사적으로 답했다.
“가족.”
“가족?”
그가 또다시 네 가족은 나라는 말을 지껄이기 전에 레오는 돌아섰다.
“당신이 내게서 앗아 간 것들. 그걸 원해.”
당신이 망쳐 버린 내 시간, 되돌리기를 원해.
당신을 만나기 전으로, 그리고 당신이 내 가족을 죽이지 않았던 그날로 돌아가기를 원해.
서늘한 목소리로 뱉고 돌아선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백작이 말한 것은 황당한 것이었다. 몇 번의 바깥출입을 하는 것을 보았지만 이런 짓을 하고 다녔을 줄은 예상치 못해서다.
“결혼해.”
“뭐?”
“아들아, 결혼해.”
드물게 모습을 드러낸 시종이 레오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오랜 시간 백작가에 머무르던 시종이었다. 언젠가부터 늘 거기에 있던, 그러나 언제고 투명 인간처럼 몸을 사리던. 눈치가 빠르던.
레오는 가늘게 뜬 눈으로 내용을 읽었다. 자작가 사생아와의 결혼 서약서였다. 게다가 그의 동의도 없이 백작은 이미 레오 아리데오와 반쪽 귀족의 약혼을 진행시킨 후였다.
레오는 화를 낼 기력도 없어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자작가……. 자작가의 여식과 약혼을 맺었다는 말이야, 지금?”
“가족이 필요하다고 말했잖아.”
“내 가족은…….”
어떻게 이 남자는 이런 사고밖에 하지 못할까. 도무지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에 도달할 수가 없는 건가.
“여자를 줄게. 그리고 여기서 살아. 그럼 안 떠날 거지?”
레오 아리데오는 그가 내민 결혼 서약서를 찢었다.
“여자를 이곳에 데려와서 살라고? 이 지옥에서?”
“…….”
“또 누구 인생을 망치려고!”
돌연 백작은 미소 지었다. 그의 주름 깊숙이 환희가 박혔다.
“필요 없어?”
“…….”
“다른 가족은 필요 없어?”
레오 아리데오는 울고 싶은 마음을 억눌렀다. 그도 죽이고 자신도 죽여 편해지고 싶은 마음을 억눌렀다. 계속해서 그를 기다리고 있을 니아 프레슬리를 떠올리면서.
“왜 그랬어?”
레오는 물었다.
“더 이상 간을 먹지 않았잖아. 왜 그랬냐고.”
“응?”
“내가 고아원을 불태웠어도, 얼마든지 다른 여자아이들을 구할 수 있었을 텐데 왜 그만뒀어?”
백작이 말했던, 여자아이의 간을 먹으면 늙지 않는다는 말. 그 말을 믿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그가 왜 멈추었는지가 궁금해졌다.
아주 문득, 그게 시작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너를 키우는 게 더 재미있어서. 다른 건 전부 시시해졌어.”
그 말을 듣자 주르륵, 참지 못하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백작의 마지막 순간.
여느 때처럼 초라한 저녁이었다. 이제는 일어설 힘조차 없어 침대에서 앓던 백작이 레오의 눈앞에 서 있었다.
“레오.”
“…….”
“아들아.”
“…….”
“한 번만 더 불러 줘.”
그는 비틀거리며 레오에게로 걸어왔다.
레오는 그가 다가오는 걸음만큼 뒷걸음질 쳤다.
“아버지라고 해 줘.”
걸음마를 뗀 아이처럼 서투른 걸음을 내딛던 그를 내버리고 레오는 나갔다. 심장이 아프게 뛰었다.
그리고 다음 날, 백작은 레오의 방 안에서 숨을 거둔 채 발견되었다.
레오는 이제야 오랜 기다림이 끝났음을 알았다. 차마 직접 끝을 내지 못해 질질 끌어왔던 지옥의 종말이었다.
레오 아리데오는 기다렸다는 듯 저택 안의 암막 커튼을 치우고 창문을 열었다. 마지막으로는 방으로 돌아가, 굳게 잠겨 있던 창을 부숴 버리듯 온 힘을 다해 열었다.
햇살이 부서져 내렸다.
새 삶이 부서져 내렸다.
놀라웠다. 백작이 죽으니 레오는, 레오 아리데오는 놀랍게도…….
“살 수 있을 것 같아.”
그 빛에 전날 백작이 보여 줬던 눈빛이 아른거렸다. 아버지라고 부르기를 강조하던 창백하고 늙은 입도.
점점 살아 있는 환영처럼 레오에게 뚜렷해졌다. 그러다 햇살 속 선명한 먼지가 파, 소리를 내며 흩어졌다.
“이제 끝났어.”
니아를 망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니아에게 향하는 걸음에 제동을 걸었던 과거의 기억들이 시린 바람을 타고 흘러갔다.
그렇게 레오 아리데오는 백작가를 나와 니아 프레슬리에게로 한 걸음을 내디뎠다.
사흘 밤낮을 쉬지 않고 달렸다. 그리고 수도에 도착한 그날, 바로 그날이 니아가 다니는 아카데미의 마지막 날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한 해의 마지막. 눈 날리는 겨울. 하지만 레오에게만은 봄의 절정.
니아와 말했던, 그들이 다시 같이 살 것을 약속한 날.
“니아, 졸업 축하해.”
“수료거든, 바보야.”
새롭게 뛰는 심장은 사랑이었다.
무척이나 찬란한 시작이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정말 시간이 없어.”
다급함을 이야기하는 필릭스 쿠아란의 눈은 형형하게 빛났다.
“다 알면서도 저를 구하겠다고요? 보시지 않았습니까, 제가 어떻게 사람을 죽이는지. 저는 언제고 다시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나 자신을 통제하지 못할 거예요. 이번에 처절히 깨달았습니다.”
“봤지. 그리고 네가 끌려가는 걸 보는 니아 프레슬리도 봤어. 널 살리고 싶어 하는 모습을.”
“…….”
“상황이 널 그렇게 만든 거다.”
레오 아리데오는 끝끝내 고개를 저었다.
“항상 죽을 고비를 겨우 넘어왔다고 생각했습니다.”
“…….”
“하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번번이 죽을 기회를 놓친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저 살고자 하는 욕망 때문에…….”
레오는 지난날들을 회상하는 듯 창틀 너머 먼 곳을 바라보았다.
“이번만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게 도와주세요.”
“…….”
“니아에게 잘해 주세요. 당신을 많이…… 좋아하고 있습니다.”
필릭스 쿠아란은 움찔했지만 금세 이를 악물었다.
“또다시 그 아이한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주겠다는 말을 잘도 하는군.”
“내가, 내가 너무 지쳤습니다. 결국 실패했잖아요.”
필릭스 쿠아란은 어딘가에 손짓해 신호를 보냈다. 시간을 조금 더 끌어 달라는 의미였다. 작은 소음이 들리고, 그의 시선은 빠르게 레오에게로 돌아왔다.
“내 계획을 들어 봐라.”
필릭스 쿠아란이 덤덤히 말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는 묵묵하게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래된 이야기였다. 그리고 오래된 비밀이었다.
니아의 지난 십 년을 들었고, 필릭스 쿠아란의 지난 사 년을 들었다.
가끔 니아에게서 비치는 상처가 단지 어린 시절의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그녀가 레오 없이 어떤 세월을 보냈는지 알게 되자 충격으로 정신이 없었다. 이미 포기했던 마음이 조금씩 움직이는 것도 모를 만큼.
그리고 필릭스 쿠아란은 레오가 결코 니아에게 해 줄 수 없는 일을 말했다. 영원히 메말라 있을 것만 같던 레오의 눈동자가 놀라움으로 커졌다.
“……보고 싶지 않아?”
필릭스 쿠아란의 마지막 말에 레오는 망연히 중얼거렸다.
“보고 싶습니다.”
그가 말하는 니아 프레슬리의 모습이, 그런 세상이 레오 아리데오도 보고 싶었다.
“그럼 살아.”
레오 아리데오는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뱉은 숨에는 그 안에 있던 모든 것을 뿜어내는 듯 깊고 진했다.
그가 결국 해냈다. 필릭스는 모든 것을 포기했던 레오 아리데오가 미처 비워 내지 못한 유일한 것을 알고 있었다. 니아 프레슬리. 미소 짓는 니아 프레슬리.
필릭스 쿠아란은 뜸을 들이다가, 이 말까지 뱉게 될 줄은 몰랐다는 듯 말했다.
“너를 이해한다, 레오 아리데오.”
“…….”
“나도 끔찍하도록 간절히,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
레오 아리데오는 창살로 손을 뻗었다. 산화된 철의 피막이 만져졌다. 그리고 그 너머에는, 레오 아리데오와 비슷한 표정을 짓는 필릭스 쿠아란이 서 있었다.
“하지만 니아 프레슬리가 살아 있는 한 우리는 그럴 수 없어. 그 아이의 미소가 보고 싶어서, 죽을 수 없다는 의미야.”
켜켜이 쌓여 있던 벽이 온통 허물어졌다.
고개를 까딱인 필릭스 쿠아란이 창살 너머로 무언가를 던졌다.
“잠시 심장을 멈춰 주는 약이다. 딱 이틀 동안.”
레오 아리데오는 한 손으로 작은 주머니를 잡아챘다. 그리고 바로 입으로 털어 넣으려는 그를 필릭스 쿠아란이 저지했다.
“내일 동이 트면 먹어. 그럼 하루 내에 시체 운반인이 널 데리고 황궁 밖으로 나갈 거다. 널 중간에 가로챌 거야.”
“그다음은요?”
“그다음은…….”
필릭스 쿠아란은 잠시 허공을 응시했다.
“니아와 함께 멀리 떠나 있어. 국경에 거처를 마련해 두었다.”
“언제까지?”
필릭스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유성과 유성이 충돌하듯이.
“황제 탄신일.”
레오 아리데오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 소매에 약을 집어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