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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살아남은 소년 (52/75)

7. 살아남은 소년

쥔느 블루아르는 열 살의 레오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오랜만의 밤 산책은 좋은 것을 가져다주었다.

“눈빛.”

그는 레오의 눈이 마음에 든다고 말했다. 깊은 상처가 촘촘하게 박혀 있는 눈빛이. 그리고 아직은 어설퍼 살기를 완전히 감추지 못한 낯짝이.

“본능을 끌어 올리기에 아주 좋겠어.”

“……”

“난 쥔느 블루아르, 펠링턴의 백작이다.”

그가 하는 말을 전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 순간 레오 아리데오는 그의 반응이 무척이나 기꺼웠다. 적어도 레오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만은 확실했으니까.

“네가 불을 질렀느냐? 아니, 말하지 않아도 이미 알겠구나. 내 고아원을, 네가 불살랐어.”

‘이 사람한테 무언가 있어. 니아가 백작가에 입양되었다고 적혀 있었으니까.’

비밀스러운 펠링턴의 백작가.

낮에는 절대로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블루아르 백작.

“저를 받아주세요.”

“그래. 작업해 주마.”

그게 두 사람의 첫 만남이었다.

레오 아리데오는 블루아르 백작가에 첫발을 디뎠다. 산속 깊은 곳에 있는 백작가는 마치 유령의 집처럼 우울한 흑백의 색을 띠고 있었다.

마치 땅속으로 들어온 기분이 들었다고 하면 맞을 것이다. 지하 깊은 곳의 세계에 초대를 받은 듯 모든 것이 낯설고 현실감이 없었다.

뿌리들이 거대한 담을 촘촘히 에워싸고 있었고, 끼익 소리를 내며 문이 열리자 위로는 까마귀가 날았다. 까악까악 비명을 내지르며.

“환영 인사다.”

쥔느 블루아르가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는 탁하나 어딘가에 힘이 있었다. 그가 말하자 까마귀가 한 번 더 울었다.

정원이라고 할 것도 없이, 모든 생명체가 말라비틀어져 창백했다. 레오가 한 걸음씩 내딛는 내내 발에 죽은 나뭇잎이 달라붙었다 떨어지며 바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길목 사이사이 놓인 조각상들은 모두 어딘가 부서지거나 구멍이 뚫린 채, 그러나 시선만은 레오를 향하고 있었다. 낯선 이방인을 경계하듯.

레오 아리데오는 앞선 백작이 열어 둔 문으로 들어섰다. 결코 오면 안 될 곳에 왔다는 생각이 잠시 스쳤지만, 레오는 니아를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눈동자에 차가운 불꽃이 어렸다.

‘니아. 혹시 여기에 왔었어? 그런 거야?’

백작가의 내부로 한 발을 내딛는 순간, 쾅 하고 문이 닫혔다. 레오 아리데오는 본능적으로 자세를 낮추었다. 무언가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어디로 사라졌는지, 먼저 들어간 백작은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갔다. 왠지 험악한 짐승이나 유령이 튀어나올 것 같다는 예상과는 달리 숨소리조차 없었다.

공백은 길었다. 긴장이 서서히 풀려 감과 동시에 세상에 홀로 남은 두려움을 느꼈다.

‘이미, 혼자야.’

부모를 잃었고, 레오의 형제이자 사랑해 마지않은 존재인 니아 프레슬리를 잃었다. 그 홀로 남은 외로움을 다시 채우기 위해 레오 아리데오는 떠올렸다.

‘니아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야 해. 어떻게든 알아내서…….’

복수할 거야. 그게 누구든.

레오 아리데오는 자신의 두려움과 허무를 복수심으로 가득히 채워 올렸다.

그러자 놀랍게도 살아졌다.

백작가에는 사람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없는 척하는 것이었다.

사용인들이 몇 있었다. 그러나 모두가 백작가의 저택처럼 창백하고, 꺼지기 직전의 촛불처럼 나약해 보였다. 얼굴은 근심과 걱정, 그리고 두려움으로 가득 차서 새벽이 되어서야 청소를 하고 백작이 먹을 만한 음식을 만들었다.

세 명, 네 명, 다섯 명…….

다섯 명 정도 되는 사용인들은 어느 날 보면 네 명이 되어 있다가, 여섯 명이 되어 있다가, 오래도록 한 명이기도 했다.

그리고 백작은 아주 가끔 나타나 무언가를 시험하는 눈빛을 레오에게 건넸지만 다른 말은 없었다.

어느 날. 백작은 레오에게 칼을 드는 법을 가르치려 들었다.

“알아요.”

이미 퍼시가 어린 시절에 알려 주었다. 그의 아버지는 좋은 기사가 되고 싶다고 말하는 레오에게 웃으며 칼을 잡는 법을 알려 주었다. 검을 두 손으로 쥐고, 허공을 향해 깊게 휘두를 것.

손잡이를 잡는 부분에 굳은살이 박여 아파도 내색하지 않았던 것은 니아가 언제나 그의 옆에서 지켜봐 주었기 때문이다. 햇살 같은 기대를 그의 주변에 뿌려 주었기 때문이다.

“아니, 넌 모른다.”

쥔느 블루아르는 웃었다. 깊게 팬 주름과 막이 하나 씌어 있는 듯 탁한 눈, 찢어 놓은 듯 긴 입꼬리. 레오는 그의 웃는 모습에서 선인지 악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경계선을 느꼈다.

그때까지만 해도.

쥔느 블루아르는 말했다.

“한 손으로 검을 쥐어라. 그게 편해.”

레오는 그가 시키는 대로, 그가 명령한 각도로 검을 쥐었다.

한 손으로 검을 들자 무거워 어깨가 빠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찌르면, 단숨에 급소를 부숴 버릴 수 있겠다. 파괴할 수 있겠다. 끝장낼 수 있겠다.

그러나 무엇을?

백작은 레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는 듯 웃었다. 순간 레오는 그의 눈에서 애정을 보았다. 그러자 선악의 경계선이 흔들거렸다. 왠지 선, 그 가까이에 그가 있는 것 같다는 막연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니아를 떠올리자 경계선은 뚝 하고 끊겼다.

이 남자에게 반드시, 무언가가 있다.

백작이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가리켰다.

“저 시종을 죽여라.”

그리고 그는 덧붙였다.

“한 번에 하지 못하면, 네가 죽는 거야.”

그 순간 경계선은 다시 이어졌고, 추는 악으로 기울었다.

백작 손에 죽어 나가던 시종들은 이제 레오 아리데오의 차지가 되었다.

쥔느 블루아르는 시종을 죽이는 일보다, 레오가 시종을 죽이는 것을 바라보는 게 더 재미있는 듯 보였다.

레오는 한 손으로 검을 휘둘러 백작이 가리키는 시종의 목에 박아 넣었고, 백작이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입맛을 다시면 칼 대신 손으로 숨통을 끊었다.

“잘했다.”

어디선가 시종들은 자꾸만 나타났다.

왜 이런 곳에 오지? 왜 이런 곳에?

레오는 죽이며 그 사람들을 탓했다. 팔려 왔다는 것도,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어 백작가에 왔다는 생각은 하지 못하고. 자신처럼.

스스로가 제정신이 아니니, 시종들이 반쯤 넋을 놓은 자들이라는 것도 알지 못했다.

‘죽이지 않으면 다음은 내 차례야. 난 여기서 해야 할 일이 있어. 그러니까…… 어쩔 수 없어.’

“죽이고 오너라. 흔적이 남지 않게.”

처음 시종으로 시작된 살인 명령은 어느새 백작가를 벗어났다.

“사람을, 죽이라고요?”

그 말을 들었을 때, 레오는 저도 모르게 물었다. 백작은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네 질문의 의미를 알고 있느냐는 듯이.

“방금도 죽였잖니?”

그렇게 되묻고선 백작은 작은 종이를 내밀었다.

“이 남자를 죽이고 돌아오면, 상을 주마.”

“…….”

“지난번 밤에…… 내 얼굴을 본 것 같아. 눈이 마주쳤거든.”

레오는 그가 입을 열 때마다 턱가에 짙게 파이는 주름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저었다.

백작은 해가 있을 때는 활동하지 않았다. 언제나 이층, 자신의 방 안에만 있을 뿐. 정말 가끔 그는 밤 산책을 갔는데, 그것이 그의 유일한 외출이었다.

레오는 그 시간이 되면 조금씩 몰래 백작가를 살폈다. 별 수확이 없었고, 그래서 레오는 떠날 수가 없었다. 그가 시키는 대로 하면서 계속 다음을 기약하는 수밖에.

하지만 마을 사람을 죽이고 돌아오라는 말에 레오는 도무지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백작가가 아닌 곳에서, 그의 삶의 터전이었던 곳에서 살인은……. 그것은 레오의 마음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것만은 절대로.

“못 해요.”

그 순간 백작은 슬퍼서 견딜 수 없다는 듯 눈썹을 아래로 내렸다. 탁한 눈동자가 움찔거렸다.

“왜? 너도 좋아하잖아.”

그렇게 말하는 백작은 순간 죽기 직전의 늙은 노인처럼 보였다.

왠지 할 수 있을 것만 같다는 생각에 레오는 그에게 달려들었다. 주인을 물기로 작정한 개처럼.

달려들며, 백작가에 머무는 동안 꼬리에 꼬리를 물었던 의문을 퍼부었다.

“니아를 어떻게 했어? 고아원의 아이들, 여자아이들! 다 어디로 보낸 거야? 입양한 거야? 근데 왜 여기에 없어? 죽인 거야? 정말 죽인 거야? 니아가…… 정말 죽었어?!”

백작은 한 손으로 레오 아리데오를 저지했다.

온몸을 던졌던 레오는 벽에 쾅 하고 내리꽂혔고, 그가 시종들에게 그러했듯이 목이 조였다.

얼굴에 피가 몰렸다. 곧 목을 타고 붉은빛이 반점처럼 올라왔고, 레오의 머리칼보다 진한 색으로 몸 전체를 물들였다.

“지하실로 가자.”

쥔느 블루아르는 레오를 정말 죽이기로 결정 내린 것처럼 손톱을 레오의 살점에 파묻다가, 곧 갸우뚱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식은땀에 전 머리칼을 잡았다. 그는 레오를 바닥에 질질 끌며 새로운 공간으로 갔다.

“반성해 볼래?”

백작이 물었다.

“해 볼래?”

레오는 눈을 감았다. 복수. 그 감각이 다시 살아나기를 바라며. 그래야 살 수 있다. 그 감정만이 다시 나를 살릴 수 있다 되뇌며.

“기다려.”

지하실의 오래된 무기 창고 같은 곳에 갇힌 이후, 몸을 경련하며 시간을 보냈다. 컴컴하고 차갑고 외로웠다. 너무 힘들어 그의 부모도, 니아도 조금씩 멀어져 갔다.

도대체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왜 살아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이게 백작이 말하는 반성의 시간인가.

‘하겠다고 말해야 했어. 난 여기서 혼자 죽어 갈 거야…….’

그러다 어느 날 벌컥 문이 열렸고, 겁에 질린 남자 한 명이 굴러 들어왔다.

백작은 작은 초 하나를 촛대에 놓은 후 불을 피웠다. 방 안이 밝아지고,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며칠 전, 백작이 죽이라고 명령했던 남자였다.

“반성해 볼래?”

백작은 또 한 번 물었다.

레오 아리데오는 고개를 끄덕이고, 일말의 자비도 남기지 않은 채 남자를 죽였다.

피가 튀겼고, 백작은 웃었다.

레오 아리데오는 천천히, 그러나 그 순간의 쾌감만은 확실하게 깨달았다.

외로움이 잊힌다. 사람을 죽이면.

살아진다. 사람을 죽이면.

강렬한 유쾌감은 그의 눈과 귀를 가렸다. 레오 아리데오의 경계선이 무너져 내렸다.

“시종이, 살아 있었다고요?”

레오는 필릭스 쿠아란에게 묻다가 깨달았다. 마지막 한 명. 그 남자가 있었지.

“그래. 펠링턴을 조사하다가 그자를 만났어. 꽤 오랫동안 백작가에 머물렀던데.”

“그래요. 그런 사람이 있었습니다. 한 명. 백작의 일을 도와주는 사람이요. 그 사람은 다른 시종들과 달리 백작이 죽이라고 명령하지 않았어요.”

“…….”

“그 남자가, 저를 기억합니까.”

시린 바람 소리가 창살을 타고 들어오다가, 다시 사라졌다.

“그래. 기억하더군.”

“끔찍하게 기억할 겁니다. 나는 시종들을 죽이고, 마을 사람들을 죽였어요. 들었다면 아시겠군요. 나는 살인자입니다. 그냥 살인자가 아니에요. 살인귀. 그게 내 이름입니다.”

필릭스 쿠아란은 전혀 놀라는 기색 없이 시선을 돌렸다. 누군가 오지는 않았는지, 그리고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확인하는 듯했다.

그리고 다시 그의 눈빛이 레오에게로 향했을 때, 레오 아리데오는 그의 눈동자 속에서 자신을 보았다. 간절히 바랐던 한마디를 듣고 있는 레오 아리데오가 보였다.

점차 필릭스 쿠아란이 흐릿해졌다. 눈가에 물기가 어렸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너를…… 불쌍하다고 말하더군.”

레오 아리데오의 눈에서, 갈망했던 삶의 크기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말을 해 주는 사람이 필릭스 쿠아란이건, 시종이건, 혹은 모르는 사람이건 상관이 없었다. 그저 누군가 그 말을 해 주었다는 것이 중요했다.

실은 레오 아리데오는, 자신이 끔찍이도 불쌍했다.

느린 마차처럼 시간은 흘러갔다.

레오 아리데오는 여러 명의 사람을 죽였고, 백작 또한 사람을 죽였다. 사람을 죽이고 나면 그들은 함께 시종들이 만든 차가운 저녁밥을 먹었다. 낮에는 잠을 잤고, 밤에는 움직였다. 그런 반복이었다.

백작의 힘이 어디까지 뻗친 것인지, 그들이 죽인 사람들은 언제나 사고사로 위장되었다.

레오는 사람을 죽이는 순간에는 살아 있다고 느꼈으나 그 외의 모든 시간에는 태엽이 끊긴 인형 같다는 생각을 했다. 매 순간이 흐릿하고 몽롱했으며, 제정신이 들 찰나에는 사람을 다시 죽였다. 그렇게 보내고 있는 시간이었다.

키가 백작의 턱 끝에 닿을 정도가 되었을 때다. 블루아르 백작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너…… 컸다.”

당연한 것을. 백작가에 들어왔을 때 열 살 남짓했는데, 아무리 레오가 살인귀라고 한들 자라지 않을까.

그러나 그 당연한 것을 백작은 놀라워했다. 그는 레오의 몸을 돌려 보며 면밀히 살폈다. 색이 바랜 레오의 눈에도 놀라움이 번뜩 스쳤다.

백작이 웃고 있었다. 진심으로.

“신기하다.”

“…….”

“더 자랄까?”

그의 물음은 곧 변화의 시작이었다.

“레오 블루아르.”

이름이 바뀌었다. 키가 백작을 넘어서기 시작할 때에. 양자가 되었다는 뜻이다.

“아들아, 피곤해 보이는구나.”

몇 년간 레오를 시험해 보던 눈빛이 달라졌다. 레오는 몸만 자랄 뿐 모든 것이 멈춰 있는데 백작만이 그랬다.

레오는 백작이 왜 어느 순간부터 자신에게 의사를 묻고, 사소한 변화에도 관심을 보이고, 뿌듯한 손길로 그의 등을 두드리는지 알지 못했다. 어차피 레오는 그가 시키는 대로 할 텐데, 굳이 양자로 들이고, 허울을 씌우고, 관계를 맺었다.

해 오던 대로, 지난 몇 년처럼 그냥 사람이나 죽이며 그렇게 시간을 때우면 될 텐데.

그런 그가 너무 지겨워 처음으로 백작가를 나서야겠다고 생각했다. 정말이지 처음으로.

자고 있을 시간이 분명한데 백작이 레오 앞에 서 있었다.

“……어디 가니?”

“밖에요.”

“지금?”

“…….”

“아들아, 지금은 해가 떠 있어.”

단호함을 섞어 타이르는 그의 말을 무시하고 레오 아리데오는 밖으로 나갔다.

구 년……. 구 년 만에 백작의 말을 어기고 바깥세상으로 향했다. 어차피 백작은 해가 떠 있을 때는 절대 나오지 못하니까. 지금은 해가 중천에 떠 있는 오후였다.

레오는 아름드리나무들이 만든 그림자 대신 오직 햇빛이 내려진 곳만을 밟으며 산을 내려갔다. 짙은 어둠이 내린 밤, 수도 없이 내려갔던 길이지만 해 밝은 산길은 오히려 위험했다.

죽어 있던 심장이 걸음마다 녹아내렸다. 그리고 산을 완전히 내려와 마을을 바라보았다.

물레방아가 돌아가는 소리, 돌다리 아래 흐르는 푸른빛의 시냇물 소리, 그리고 그 위를 뛰어다니는 작은 아이들의 노랫소리.

마른 볏짚을 지게에 싣고 계단을 오르는 남자, 꽃을 꺾어 귀에다가 꽂는 여자, 추수하는 사람들과 하늘 높이 날기 시작하는 잔잎사귀.

“너무 밝아.”

결국 레오 아리데오는 돌아섰다. 도망치듯 다시 백작가로 향했다.

백작은 차마 햇살 밝은 곳으로는 나오지 못하고 귀신처럼 응접실 한가운데 서 있었다.

“돌아왔구나.”

그의 말을 어겼으니 벌을 받겠다고 생각했는데, 백작은 오히려 아무 말이 없었다.

“네가 왔구나.”

바보처럼 말을 반복하는 그를 지나쳐 레오는 계단을 올랐다. 지독히 피로했다.

그 이후가 레오 아리데오 변화의 시작이었다.

레오는 자꾸만 햇빛이 맞고 싶어졌다. 그래서 나갔고, 언제나 도망치듯 돌아왔다. 무언가를 그리워하듯 내려갔고, 죄책감에 사무치며 올라왔다.

백작은 언제나 그곳에 서 있었다. 유령처럼 홀로.

“죽이고 와.”

한동안 불안한 눈빛으로 레오를 좇던 백작이 명령했다. 실로 오랜만의 명령이었다.

레오는 답했다.

“싫어.”

또 한 번 레오는, 백작의 반응을 확인하지 않은 채 그를 지나쳤다.

해가 강렬히 내리쬐는 오후, 레오는 방 안에서 일어섰다.

하지만 문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멈춰 섰다. 문가를 맴도는 발소리를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발소리를 숨기는 법을 알려 주었으면서, 정작 본인은 초조하게 왔다 갔다, 온갖 티를 내고 있었다.

한참 뒤, 쿵 하고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문을 열자 그곳에는 웬 노인이 한 명 서 있었다.

쥔느 블루아르 백작이었다.

“잘못했어.”

쥔느 블루아르가 말했다. 레오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가 무엇을 고백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사람, 죽이지 말자. 앞으로 안 해.”

그는 노인의 얼굴을 하고 아이처럼 다짐했다.

“자꾸 밖에 나가지 마.”

그리고 또 명령했다. 그러나 처음 봤을 때의 강압적인 말투는 아니었다.

레오 아리데오는 귓가를 파고드는 목소리에 주먹을 쥐었다. 무엇을 위해 백작가에 왔는지가 생각났다.

‘니아.’

그 이름을 생각하다 보니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백작가에 온 지 십 년이 다 되어 가는 이때서야 기회가 온 것이다.

“안 나갈게요. 하나만 알려 주면…….”

백작이 눈을 빛냈다. 세월이 흘러 더 탁해진 그의 눈동자 속에 새삼 기쁨이란 것이 비쳤다.

“니아 프레슬리를 알아요? 고아원의 여자아이. 어떻게 했어요? 그냥, 궁금해서.”

레오는 웃으며 물었다.

인간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백작은 레오가 웃자 따라 웃었다. 순진하게. 그리고 답했다.

“죽였어!”

레오는 입꼬리 한번 흔들리지 않고 눈빛을 바로 했다.

“어떻게?”

나긋하게 묻자, 백작은 골똘히 고민하다가 레오의 손을 잡았다. 검버섯 핀 가죽이 레오의 손등을 쓰다듬었다.

“네게만 알려 주마.”

“…….”

“넌 내 아들이니까.”

레오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쥔느 블루아르는 레오의 귓가를 향해 다가왔다.

“여자아이의 간을 먹으면, 늙지 않아.”

천진함이 섞인 목소리로 그렇게 속삭이고는 작게 키득거렸다. 그러나 레오 아리데오의 표정을 살피고는 또다시 시무룩해졌다. 레오는 눈 한번 깜빡하지 않고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한참 후에야 레오가 다시 물었다.

“하지만 당신은 늙었잖아. 나이가…… 많잖아.”

이렇게나 나약해졌잖아.

하마터면 내뱉을 뻔한 말을 그는 겨우 삼켰다.

“네가 고아원을 불태웠으니까.”

백작이 입술을 비죽였다. 그의 말을 전혀 믿지 않는 레오 아리데오에게 서운한 듯이.

“여자아이의 간을 파서 먹고…… 그다음은? 여자아이들은 어떻게 했어?”

“몰라.”

“정말 몰라?”

“…….”

“정말로?”

점점 커지는 목소리에 쥔느 블루아르는 눈알을 굴렸다. 흰자 위의 회색 동공이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곰곰이 생각해 보는 듯하던 그는 아! 하고서 말했다.

“버렸을걸?”

날아갈 듯 가벼운 그 음성에 레오 아리데오의 눈에 경련하듯 불꽃이 일었다.

이번에야말로 레오 아리데오가 화가 난 것 같아, 백작은 묻지도 않은 말을 변명하듯 늘어놓았다.

“어차피 간을 떼어 내면 죽잖아. 네가 말하는 그 여자애는 이미 죽었고, 오래전 일인데 왜 화를 내는 거야. 네가 고아원을 불태운 이후로는 난 간을 먹지 않았어. 그러니까 내게 화내지 마.”

“…….”

“네게 사람을 죽이라고 시키지도 않을 거다. 이제 그건 재미없어.”

“…….”

“응? 아들아, 응?”

애걸하듯 레오 아리데오의 손을 잡고 흔들던 백작은 일순간 미소를 지었다. 해가 떨어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오늘은 레오가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그러니 돌아오지 않을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회로가 단순하게 돌아갔다.

“그 애는 내 가족이었어!”

그러나 우레와 같은 고함이 울리자 백작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겁에 질린 모습, 평온한 모습, 평온을 가장하는 모습. 많은 모습을 봐 왔지만 레오 아리데오가 우는 건 처음 봤다.

“하나밖에 남지 않은…… 내가, 꼭 지켜 주고 싶었던…….”

백작의 주름이 물줄기처럼 갈라졌다. 일그러진 얼굴로 백작은 고개를 저었다.

“아들아.”

“…….”

“내 아들아.”

순간 쥔느 블루아르의 몸이 땅바닥에 내리꽂혔다. 머리가 땅에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와 동시에 레오 아리데오는 백작의 목을 졸랐다.

“그 아들 소리 좀 집어치워!”

덜덜 떨리는 손을 백작은 움켜쥐었다. 그는 목이 조이는 와중에도 웃었다. 마치 레오가 따라 웃기를 바라듯이.

“아들아. 아직도 자라는 중이구나.”

“…….”

“왜 최선을 다하지 않니?”

“…….”

“이 정도로 사람은 죽지 않는단다. 많이 해 봤으면서도 이러는구나. 언제쯤 다 배울까, 내 아들은…….”

레오는 손을 놓치고 말았다.

그의 눈빛에서 여백 없이 차오른 애정을 보았기 때문이다. 마치 퍼시 아리데오가 레오를 바라보는 듯. 퍼시가 살아 돌아온 듯.

백작에게서 퍼시를 겹쳐 보다니, 미쳤구나.

어쩌다 이렇게 되었지?

도대체 내가 무슨 강을 건넜기에 이 지경에 이르렀지?

털썩 바닥에 주저앉아 레오 아리데오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컥컥, 목을 가다듬으며 쥔느 블루아르는 일어섰다.

“그래, 넌 날 죽일 수 없다. 내가 널 구해 줬잖아. 지켜봐 줬잖아. 키워 줬잖아. 그리고 지금도 널…… 기르고 있다. 앞으로도 쭉.”

그게 아니라는 말을 하지 못한 채, 레오는 블루아르가 하는 말을 듣고 또 들었다.

백작은 자신의 말이 레오 아리데오의 어떤 감각을 깨우고 있는지를 몰랐다.

“우리가 가족이야. 퍼시 아리데오와 안나 아리데오, 그들을 죽인 건.”

“…….”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이구나, 아들아.”

어쩌면 그와 살면서 이미 예상하고 있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백작 때문에 니아가 죽고, 레오의 부모도 백작이 죽였을지도 모른다는 건. 그의 곁에서 살다 보니 저절로 깨달아지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머리로는 알아도 마음으로는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 사실을 인정하면 더 이상 살 수 없을 것 같아서, 살기 위해 외면했던 진실이었다. 다른 무고한 목숨을 죽임으로써 연명하던 시간이었다.

“아들아, 잘 들어라.”

십 년 전 퍼시와 안나는 순찰을 하던 도중 백작이 사람을 죽이는 모습을 보았고, 백작 역시 그들을 보았다. 결과는 뻔했다. 퍼시와 안나는 시체가 되어 돌아왔고, 니아와 레오는 고아가 되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레오 아리데오가 웃었다.

또다시, 인간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쥔느 블루아르는 그를 따라 웃었다.

어떤 복수심이 다시 살아났는지도 모르고.

어떤 결심을 했는지도 모르고.

“황궁 검술 대회? 거긴 왜? 어디서 들었니? 낮에 나가서? 사람들한테? 사람들과 대화를 나눴어?”

며칠간 있는 대로 레오의 눈치를 보던 백작이 놀라 줄줄이 물었다.

“우승하고, 황궁 기사단에 들어갈 거야.”

레오 아리데오는 그의 질문을 무시하고 통보하듯 말했다.

이제 레오 아리데오는 쥔느 블루아르에게 존댓말을 하지 않았다.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언제나 그를 내려다보며 학습시키고 시험했던 백작이다. 그러나 십 년이 지나니 명령을 내리는 쪽은 레오 아리데오가 되어 있었다.

“그건…….”

“…….”

“그건, 떠날 거라는 말이잖아?”

쥔느 블루아르가 고개를 내저었다.

“안 돼.”

“내 마음이야.”

쥔느 블루아르는 두려움을 애써 가린 얼굴로 말했다.

“우리는 보통 사람과 달라. 세상과 어울려 살 수 없어.”

“당신이나 그렇지.”

쥔느 블루아르는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아들아, 나는 널 알아. 넌 돌아갈 수 없어.”

레오 아리데오는 새어 나오려는 비웃음을 참았다. 그는 레오를 몰라도 한참을 몰랐다.

사람들과 살기 위해, 이제라도 백작을 떠나 어떻게든 살아 보기 위해 가는 것이 아니었다. 햇빛이 강렬하게 내리쬘 때,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리고 나라의 주인이라는 황제가 보는 앞에서, 백작을 죽이고 싶었다.

그가 많은 이들 앞에서 처절하게 죽어 가기를 바랐다.

초라하게 끝내고 싶었다.

벌을 주고 싶었다.

“적당히 해. 아들아.”

오랜만에 백작의 입에서 경고가 나왔다.

레오 아리데오는 잠시 눈을 감고, 머릿속으로 원하는 표정을 상상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는 쥔느 블루아르를 보며 웃고 있었다.

백작은 레오의 미소를 보고 헤, 입을 벌렸다. 그가 난생처음 보는 아들의 따사로운 미소였던 것이다.

레오는 자신의 손바닥 안에 있는 백작을 보며 여유롭게 중얼거렸다.

“당신께 배운 것들을 시험해 보고 싶어요. 당신이 가르쳐서, 내가 최고가 되었다는 것을 증명해 보고 싶어요.”

“…….”

“당신이 날 지켜봐 줬으면 좋겠어요. 그러니까 우리 함께 수도로 가요.”

“…….”

“아버지.”

적당히 하라던 백작의 경고는 레오 아리데오의 아버지, 그 부름에 의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래, 좋다 아들아.”

쥔느 블루아르는 홀린 듯 되뇌었던 것이다.

황궁 검술 대회는 꽤나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백작에 의해 너무도 지독한 훈련들을 겪어 왔기 때문인지, 모든 상대가 쉽고 시시했다.

사실 시합을 더 빨리 끝낼 수도 있었다. 죽이면 단번에 결판이 나니까. 그러나 레오는 누구도 죽이지 않았다. 죽이러 온 것은 아니기에. 두 사람을 제외하고는.

많은 사람이 레오 아리데오를 거쳐 갔다. 밝은 햇빛 아래에서, 건강한 땀방울을 흘리며.

레오는 동요하지 않았다. 왜냐면 어차피 끝이 날 거니까, 오늘. 백작도, 그리고 레오 자신도.

두 사람 모두가 오늘이 마지막 날이었다.

레오 아리데오가 그렇게 정한 날이었다.

얼굴을 다 가리는 검은 모자를 쓴 백작이 보였다. 그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으나 보였다.

‘좋아하는군.’

그러나 동시에 레오는 느꼈다.

‘불안해하고 있어.’

좋은 동시에 혹시라도 레오가 정말 우승을 할까 봐, 그래서 그를 떠날까 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어차피 두 사람 모두 다시는 그 악몽 같은 백작가로 돌아가지 못할 텐데. 백작은 그의 계획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러나 잘 흘러가던 레오의 계획은 의외의 변수를 맞이하게 되었다.

필릭스 쿠아란, 공작의 외동아들, 검술의 천재.

햇살보다 더 강렬하고, 견고한 바위처럼 단단하고, 광풍처럼 검을 휘두르는 그 남자 앞에서 우승, 그 두 글자를 놓쳐 버리고 만 것이다.

그것이 아쉬웠다. 이길 수 있었는데. 그런 생각과 함께 모든 사람들이 주목하는 가운데서 쥔느 블루아르를 죽일 수가 없다는 게 무척이나 짜증스러웠다.

그러나 레오 아리데오는 다친 팔을 부여잡고 걸었다.

‘상을 받은 직후에 죽이지 못해도 상관없어. 사람들이 많으니까. 햇빛이 밝으니까. 그거면 돼.’

레오는 활과 화살을 챙겨 들었다. 날카로운 촉을 만지고 서툴게 미소 지었다.

‘이거면 돼.’

레오 아리데오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걸으면 걸을수록 마음이 급해졌다. 대회가 끝났으니 백작이 마차로 돌아갔을까 봐. 햇빛을 끔찍이도 싫어하는 그였으니까.

멀리서 따라오는 발걸음도 눈치채지 못했다.

레오 아리데오는 높은 원형 탑 안으로 쑥 들어가 동그란 계단을 성큼성큼 올랐다. 빙빙 도는 세상이 적잖이 마음에 들었다. 백작을 죽인 레오가 마찬가지로 빙빙 돌며 추락할 탑이기에.

레오 아리데오는 모든 감각이 발달되어 있는 사람이었다. 청각도, 후각도, 그리고 시각도.

그는 목표물을 발견했다. 이제 이 지긋지긋한 시간들을 끝낼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그의 뒷덜미를 노리는 손의 온기가 느껴졌다. 타고난 본능과 학습된 습관이 등 뒤를 주목했다.

‘누구지? 누가 미행했지? 설마, 백작이…….’

그러나 그는 미행자의 목에 손끝 하나 대지 못했다.

“……니아?”

레오 아리데오는 화살을 떨어뜨렸다. 내던지려던 자신의 몸 대신 화살이 탑 아래로 추락했다.

“맞잖아. 맞았잖아. 네가 맞잖아…….”

눈앞에 니아 프레슬리가 있었다. 엉엉 울고 있었다.

그래, 네가 맞았다.

그리고 내가 맞았다.

그는 레오 아리데오였다. 니아 앞에서만큼은, 레오 아리데오는 레오 아리데오가 될 수 있었다.

“니아.”

그는 이 지긋지긋한 삶을 끝내고자 했었다.

그러나 삶은 제멋대로 다시금 시작을 알렸다.

영원히 녹지 않을 것 같은 겨울이 녹아내렸다.

니아 하나로, 레오의 세상이 다시 봄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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