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파란
니아 프레슬리가 눈을 떴을 때는, 아름드리나무 사이사이로 주황빛이 날카롭게 파고드는 황혼이었다. 어슴푸레 땅거미 진 시간에, 니아는 눈을 떠도 눈을 감은 듯 몽롱했다.
그녀는 따끔거리는 목을 매만졌다. 점차 정신이 들었다.
‘약을 먹은 거야. 잠드는 약.’
그가 굳이 약을 먹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곧 니아는 인정하듯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필릭스가 재우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레오를 찾아갔을 것이다.
‘구해 줄게.’
그렇게 말했던 그의 말을 뒤로한 채.
아무 힘도 없으면서, 도대체 어떻게 혼자 힘으로 레오를 구하겠다고.
니아는 허리를 일으켜 세웠다. 파스락 소리를 내는 이불을 들춰내고 바닥에서 신발을 찾았다.
침대 아래, 자로 잰 듯 신발이 놓여 있었다. 고이 놓인 두 짝을 하나하나 발에 맞춘 다음 니아는 몸을 일으켰다. 얼마나 잤는지는 알 수 없지만, 땅에 닿는 발의 감각이 가벼웠다.
“도련님.”
니아는 이 방의 주인을 불러 보았다. 그가 주위에 있기를 바라며. 그리고 단지, 방 안이 너무 넓은 까닭에 그를 단박에 찾지 못한 것이기를 소원하며.
니아는 빙빙 방 안을 돌았다. 아주 오랜만의 방문이라, 그리고 다음번은 없을지도 모르는 방문이라 한 걸음 한 걸음이 귀했다.
그녀가 기억하던 것과 크게 달라진 것이 없는 방 안. 그녀의 입에 힘겨운 미소가 걸렸다.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나 버린 것 같았다.
다시 침대로 돌아왔을 때에야 니아는 협탁에 놓인 종이를 보았다.
<레오 아리데오는 살아 있어. 곧 네게 데려다줄 거야. 안심하고 기다려. 걱정 마.>
짤막한 내용을 니아는 길게 읽었다. 천천히, 눈에 아로새기듯 몇 번이나 읽었다.
“그렇구나.”
그녀는 짤따랗게 감상을 내뱉었다.
“레오가 곧 내게 다시 오겠구나.”
니아의 세상이 다시 온전해지겠구나. 다행이다.
“정말 그럴까?”
니아는 도리질 쳤다. 완전한 세상은 이제 없다. 이제 그녀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니아 프레슬리에게는 평범한 것이 완전한 것이고, 가장 닿기 어려운 것이라 무던히 노력했다. 사람들 사이에서 어울려 사는 것, 가족인 레오를 지켜 주는 것, 남들이 그러하듯 꿈을 위해 노력하는 것. 달려가는 것. 포기하지 않고.
매일매일을 열심히 사는 것.
레오가 돌아오면 행복할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다행임을 알고 있었다. 레오 아리데오가 사람을 죽였고, 황제의 눈에 걸려들었고……. 풀어야 할 것이 산더미여도 그저 함께하기만 한다면 언젠가는 미소를 짓는 날이 올 것이다.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럴까?”
그럼 괜찮은 삶이 펼쳐질까? 니아가 애써 온 것처럼, 계속 노력하면.
그러나 한 사람이 없었다.
니아는 점점 간단하고 단순해져 갔다.
“보듬어 주면서 살 수는 없을까?”
정답처럼 말이 나갔다.
니아도 아팠다. 필릭스도 아팠다. 그러나 두 사람이 함께 다독여 주고, 상처를 안아 준다면 치유될 것 같았다.
과거를 되돌릴 수는 없어도…… 두 사람 사이의 장애물이 그렇게 넘지 못할 만큼 커다랗게 느껴지지가 않았다. 예전에는 태산 같았던 것이 이제는 조그만 돌멩이 정도로만 느껴졌다.
“더 이상 남은 것이 없어 그런가.”
이젠 필릭스 쿠아란에게 감출 비밀도, 숨길 감정도 없기 때문인 걸까. 아니면 니아를 지켜 주려는 필릭스에게서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봤기 때문인 걸까.
“그 사람은 내가 아니야.”
니아를 감싸 주는 손도, 레오를 살려 주겠다는 맹세도, 그리고 행동 하나하나에 담긴 애틋함도 있었지만 결코 예전과 같지 않았다. 이런 일이 또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러니까 니아를 지킬 상황이 오지 않는다면 그는 그녀 앞에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니아 프레슬리가 그에게 사랑한다고 말해도.
“왜…….”
십 년간 심장을 주고, 그의 팔 하나를 빼앗고.
필릭스는 니아에게 마음을 주고, 니아는 거부하고.
니아는 느리게 깨닫고, 필릭스는 도망치고.
주고받은 것들이 많기도 많았다.
어긋난 것들이 많기도 많았다.
니아에게 아이처럼, 소년처럼, 남자처럼 다가왔던 필릭스 쿠아란이었다. 그 세월을 오롯이 담은 방 안에 있는데도, 다시는 그에게 닿지 못할 곳에 있는 듯 허무했다.
그러다 니아는 협탁 밑, 살짝 열린 서랍을 보았다. 암적갈색 나무 서랍 가운데에는 열쇠 구멍이 있었다. 단단히 잠가 놓을 수 있도록.
그렇기에 저절로 손이 갔다. 마치 누군가 몰래 보기를 바라기라도 한다는 듯 삐죽, 서랍은 고개를 내밀고 있었으니까.
협탁 끝자락의 서랍을 열었고, 그 안에 놓인 종이를 발견했다. 때가 묻고, 핏방울로 적셔진, 종이라기보다는 천 쪼가리에 가까운 서신이었다. 그렇게 정신없는 편지였다.
<길리. 니아 프레슬리를 부탁한다.>
그렇게 정신없는 글씨였다.
마치 오른손잡이가 난생처음 왼손으로 쓴 것만 같은.
니아 프레슬리가 읽어 내려갈 수밖에 없는 것들이었다.
<길리. 니아 프레슬리를 부탁한다.
언제나 그랬듯이. 이번에도.
지난번 서신은 잘 받았다. 아버지께서 위태로우시다고.
그래, 이제 돌아갈 때가 되었지.
돌아가면 많은 것들이 뒤바뀔 거야.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면, 계획했던 것들을 실행에 옮길 거다. 서신에 모든 이야기를 담을 수 없는 것을 이해해라.
니아가 잘 지낸다는 이야기는 언제나 기뻐. 그래서 지난번 아버지의 생명이 촛불처럼 위태롭다는 글을 보고도 마음이 벅찼다.
잘 먹고, 잘 배우게 도와줘. 가장 중요한 것은, 네가 그 아이를 지켜 주는 것이다. 절대 다치는 일이 없도록 네가 그 아이를 봐 줘. 잘 자는지도 확인했으면 한다. 불면은 괴로운 것이니까. 그래, 불면은 지나치게 괴로운 것이다, 길리.
처음에는 모든 것이 힘들었다. 도망치듯 떠나왔고, 도망치듯 사는 것들이 전부였다. 니아 프레슬리의 얼굴을 다시는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만큼 죄책감이 컸어. 이렇게 전쟁터로 떠나오는 것만이 그 아이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인 듯 느껴졌고.
지금도 마찬가지야. 내가 그 아이에게 어떤 존재인가를 생각하면, 앞으로 내가 니아 프레슬리를 위해 무엇을 해도 용서받을 수 없다는 생각에 괴로워. 지금의 내 모든 걸음이 니아 프레슬리를 위해 움직이고 있는데, 그마저도 초라하게 느껴질 만큼.
너는 매번 니아 프레슬리가 잘 지내고 있다는 말을 하며 돌아오라고 말했지만, 난 그럴 수 없었어.
니아가 날 걱정하고, 심지어는 그리워한다고 말해도.
길리, 나는 도망치듯 떠나왔지만 분명히 목적을 가지고 온 것이다. 서신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반드시 그래.
이제 난 기사단과 함께 돌아갈 거다. 꽤 시끄러운 녀석들이니 준비를 단단히 해 놓는 게 좋을 거야.
길리, 내가 조금은 들뜬 것을 이해해라.
실은 돌아간다고 마음먹은 순간부터 이기적인 욕심이 돌고 있어. 얼굴이 보고 싶어. 다시 돌아가면, 니아 프레슬리를 보지 않고는 살 수 없을 것 같아.
니아를 보면 예전처럼 이기적인 욕심을 그 아이에게 부릴지도 모른다. 그럼 떠나올 때와 같은 표정으로 날 바라볼지도 모르는데, 그것마저 볼 수만 있다면 좋을 것 같아.
다시 돌아간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그렇다. 떨리고 설레. 마치 니아 프레슬리를 처음 만난 날처럼.
내가 속절없이 사랑에 빠졌던 그 순간처럼.>
커다란 벽이 무너지고 물살이 거침없이 쏟아져 내렸다. 니아는 그녀의 머리끝까지 차오르는 파란을 거부하지 못한 채 그대로 받아들였다.
레오 아리데오가 황제궁으로 들어간 순간, 그는 호위 무사들에게 둘러싸이게 되었다. 혹시라도 도망갈까 봐 단단한 밧줄에 묶인 채로. 눈빛에 색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패잔병처럼 늘어져 있던 몸이 움찔거리고, 눈에 조금씩 생기가 돌기 시작하자 그들은 레오의 몸에서 밧줄을 풀었다.
그러나 감시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그제야 감시가 제대로 시작된 듯했다.
‘네가 이겼다.’
머리통 하나 크기의 창이 있는 독방에 갇힌 이후에야 머릿속에 한 문장이 떠올랐고, 그제야 기억이 났다.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칼을 쥐지 못했다. 니아 프레슬리가 그를 부르는 것을 들었지만 결국 해내지 못한 채 무너져 내렸다.
그러나 패자가 되려던 그 순간, 학습된 기억이 몸을 움직였다. 쥔느 블루아르, 그의 양아버지에게서 배운 그대로. 다시 살인귀가 되고 만 것이다.
상대의 검을 빼앗아 목을 단번에 베고, 그 몸에 올라타 목을 조였다. 분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피가 얼굴, 목, 팔, 손, 그리고 심장 부근에 묻는 것을 즐기며. 검붉은 색에 취해, 마지막 가는 순간까지 고통스럽게 만들며.
‘똑같아.’
짙은 기억들이 올라왔다. 도망쳐 왔다고 생각했는데, 도망치지 못했다. 그는 여전히 제자리였다.
지난 과거에 얽매여 살지 않기 위해 애를 썼다. 그러나 실은 그 노력 하나하나가 과거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닌 미약한 발버둥에 불과했다는 것. 그 발버둥은 조금도 소용이 없었다는 것. 그것이 여실히 실감이 났다.
처음부터, 니아를 놓치지 않았더라면 모든 것이 달라졌을까?
부모의 죽음도, 백작의 개로 산 십 년의 시간도, 지난 모든 후회의 순간들을 만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어디서부터가 시작이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끝이 나지 않았음은 안다.
호위 무사들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고, 그 안에서 레오 아리데오는 모든 것을 읽었다.
귀가 지나치게 예민한 탓에 그들이 작게 기침하는 소리, 침을 넘기는 소리마저 무겁게 다가왔다. 마치 날카로운 면도날이 머릿속을 헤집고 다니는 기분이었다.
‘또 하나가 들어왔군. 황제의 놀잇감이 말이야.’
‘말조심해.’
‘이번엔 얼마나 갈지 궁금하지 않나. 저런 놈들을 얼마나 아끼시는지 자네도 잘 알고 있잖아.’
‘글쎄. 꽤나 마음에 들어 하셨다는 걸 보면, 몇 달은 가지 않겠어?’
‘석 달을 넘긴 적은 없으니 난 두 달쯤 보네만.’
또다시 장난감이 되었구나.
레오 아리데오는 자조했다. 황제 같은 자를 잘 알고 있다. 사냥개를 길들이는 것에 중독된 사람. 아니, 괴물.
쥔느 블루아르에게서도 도망치지 못했는데, 황제에게서는 어떻게 도망칠까. 포기도, 체념도, 좌절도, 그 어떤 단어도 지금의 무력감을 설명할 수 없었다.
손끝 하나 움직일 힘이 남아 있지 않았기에 그저 땅에 몸을 맡기고 있을 뿐이었다. 침잠하듯 온몸이 중력에 이끌렸다.
‘니아. 너도 이 달을 보고 있을까.’
같은 하늘 아래 있을 니아 프레슬리를 떠올렸다.
목이 터져라 자신의 이름을 부르던 니아 프레슬리가 떠올랐다. 떠오르자, 슬퍼졌다.
“미안해.”
그래서 레오 아리데오는 과연 무엇이 니아 프레슬리를 위한 것인지를 생각했다.
이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하는 것이 최선일까.
이번에야말로 깔끔히 니아의 삶에서 사라지는 것이 좋겠다고, 지긋지긋한 목숨을 버릴 만큼의 힘은 남아 있다고 결심하던 순간이었다.
“레오 아리데오.”
작은 창에 걸린 창살 너머, 누군가 레오 아리데오의 이름을 불렀다.
레오는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틀었다.
“일어나.”
낯설고 딱딱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레오는 목소리의 주인을 알 것 같았다. 그리고 그가 이곳에 온 이유까지도.
“빨리.”
상대는 레오를 독촉했다.
레오는 깊이 고여 있던 잡념들을 모두 털어 내듯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를 침잠시키던 중력을 거스르기 위해 애쓰며. 작은 방 안에서 일어서는 일이 지금의 그에게는 지구를 짊어지는 것보다도 어려웠다.
“시간이 얼마 없다.”
다시 한번 재촉하는 목소리가 들릴 즈음, 레오 아리데오는 완전히 일어섰다.
그는 작은 쇠창살 가까이 다가섰고, 거울을 마주하듯 그 너머를 바라보았다. 달빛에 비친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그래, 당신이구나. 필릭스 쿠아란.
레오 아리데오는 그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 작은 창은 결코 거울이 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세상과 레오를 단절시키듯, 그리고 그가 감히 넘볼 수 없는 그 무언가를 상기시키듯 놓인 창이었다. 그저 보라고, 보고 깨달으라고 놓인 창이었다.
그들 사이에 놓인 얇은 벽 하나가 그렇게 견고했다.
“니아가 부탁했군요.”
굳게 잠긴 목은 소리를 제대로 내지 못했다. 순간 다급함이 담겨 있던 얼굴에 주름이 갔다.
“정신 차려.”
명령이 익숙한 사람이었다. 필릭스 쿠아란은 레오 아리데오의 한마디에서 포기의 기색을 읽은 듯했다.
“여기 있다가는 죽어.”
필릭스 쿠아란은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댔다. 레오는 고개를 얌전히 끄덕였다.
“알아요. 잘 알고 있습니다, 공작님.”
한때는 그와 검을 겨루었다. 사 년 전, 니아를 다시 만나기 전에. 그때는 그가 두렵지 않았다. 비록 마지막 경합에서는 지고 말았지만, 비등했으니까.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그런데 지금은 어떻게 되었나.
사 년 후, 그는 황제의 장난감으로 전락했으며, 필릭스 쿠아란은 이 나라의 영웅이 되어 있었다.
사 년 동안, 그는 나약하게 무너져 내렸으며, 필릭스 쿠아란은 오른팔을 잃고도 성공을 거듭했다.
“이용당할 겁니다. 그러다 버려지겠죠. 아니, 버려지면 다행일까. 버려지지 못하는 게 더 끔찍합니다.”
“니아가 널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난 널 니아에게 다시 돌려줄 거야. 도망치게 해 주겠다는 말이다.”
레오 아리데오는 이제는 자신을 구하려고까지 드는 남자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니아에게, 미안하다고…….”
“레오 아리데오.”
동시에 낮은 울림이 방 안에 퍼졌다.
“니아가 널 구하기 위해 어떻게 했는지 안다면 그딴 말은 지껄이지 못할 거야. 니아 프레슬리가!”
필릭스 쿠아란은 잠시 숨을 들이쉬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다음 말을 뱉어 냈다.
“널 대신해서 칼을 맞으려 했다.”
“…….”
“그리고 난 그게 겁이 났어. 그래서 재우고야 말았어. 약을 먹여서라도 그 발을 멈추게 하고 싶었으니까.”
말을 마치며 필릭스 쿠아란은 마치 멱살을 잡는 것처럼 쇠창살을 잡았다. 쇠가 부르르 진동했다. 레오는 작은 방 안을 가득 채우는 그 울림이 꼭 제게 꽂는 비수 같아 눈을 감았다.
“네가 아직은 황제의 손에 죽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안심했어. 살아 있어야 살릴 수 있으니까!”
그러나 쇠창살은 흔들리되, 결코 부러지지는 않았다.
“도망치면?”
레오는 완전히 마음을 내려놓았다. 살고 싶던 마음, 살아 보려고 했던 마음, 그리고 니아와 함께하고 싶던 마음 전부.
“내가 도망치면, 그때는 어떻게 됩니까.”
“…….”
“황제가 날 가만히 두지 않을 겁니다. 나는 그런 사람을 잘 알아요. 죽지 않는 이상 절대 놔주지 않을 겁니다.”
필릭스 쿠아란은 창틀 가까이 얼굴을 내밀었다. 창문에 그의 얼굴이 가득 들어찼고, 흘러나온 목소리는 전에 없이 사나웠다.
“눈 떠.”
“…….”
“눈 뜨고 봐.”
그의 명령에 자물쇠처럼 굳게 닫혔던 눈이 열렸다. 하지만 달라진 것은 없었다. 그저 레오 아리데오에게 한 걸음 더 다가온 필릭스 쿠아란만이 있을 뿐. 벽은 여전히 견고하고 높았다.
레오 아리데오는 그를 직시했다. 그가 원하는 대로.
“원한다면 더 멀리 떠나게 해 줄 수 있다.”
“…….”
“니아는 네 곁에 있으려 할 거야. 함께 떠나. 하지만 곧…… 돌아올 수 있을 거다. 그러니 아주 잠시만이야. 내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
그의 마지막 말은 다짐보다는 확신에 가까웠다. 어둠 속에서도 필릭스 쿠아란의 눈은 빛났다.
“니아는 나와 함께 떠나지 않을 겁니다. 나는, 그 애를 잘 아니까. 니아는, 그 아이는 이 나라를, 우리를 그렇게나 내버리고 짓밟았던 이 나라를 좋아하니까.”
당신을 좋아하니까.
레오는 니아가 마음에 품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마치 마지막으로 확인하듯이.
니아가 좋아하는 사람이고, 니아를 위해 이렇게 찾아온 걸 보면 괜찮을 것 같았다. 두 사람은 잘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레오보다 훨씬 더 잘해 줄 것 같았다. 그럴 수 있는 사람 같았다…….
그래서 다행이었다.
레오 아리데오는 그보다도 솔직한 이야기를 꺼내야 함을 인정했다. 아무에게도 해 본 적 없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기까지 시간은 무척 더디게 흘러갔다.
레오는 필릭스가 그러했듯이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갔다. 두 남자의 이어진 시선은 한 뼘으로 압축되었고, 레오는 지난 세월을 속죄하듯 고백했다.
“난 완전히 고장 났습니다. 다시는, 다시는 고칠 수가 없어요. 노력해도 안 됐어요. 결국, 이렇게 되고 말았습니다. 사람을 너무 많이 죽였어요. 내 죄가 너무 깊습니다. 나 홀로 감당할 수 없어서 결국엔…….”
“…….”
“니아를 망가뜨리고 말 겁니다.”
말을 끝내고 한없이 고개를 떨구는 레오 아리데오를 필릭스는 바라보았다. 그리고 기다려 주었다. 그가 아래로, 아래로, 추락하고, 또 추락하고, 그래서 속이 텅 빈 나무처럼 안에 남은 것을 모두 비워 낼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쥔느 블루아르.”
그리고 레오 아리데오가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조각 나기 직전에야 다시 그를 끌어 올렸다.
“어떻게 그 이름을…….”
“레오 아리데오, 네 잘못이 아니다.”
“…….”
“블루아르 백작가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람이 한 명 있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