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핏빛 기억
때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레오 아리데오는 열 살이었다. 그 해는 부모를 잃고 니아 프레슬리를 잃은 해였다. 부모를 지키지 못하고 니아 프레슬리를 지키지 못한 채 홀로 살아남은 해였다. 더 이상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라 망설이던 해였다.
절망을 한순간에 복수로 뒤집던 해이기도 했다.
니아와 레오가 도망치려던 그날, 그리고 붙잡힌 날, 원장은 레오 아리데오를 매질했다. 니아를 대신해 맞았으나 소용없었다. 정신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눈을 떠 보니 니아 프레슬리가 사라지고 없었다.
하지만 그때는 그래도 희망이란 것이 있었다. 어딘가로 니아를 데려간 것이라면 찾아가면 되니까. 어디에 있든 찾을 자신이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고아원의 규칙을 잘 지키고, 비굴해질지언정 매일 용서를 빌어 독방에서 나가야 했다.
그렇게 반항 없이 며칠이 지났다. 독방에서 나오게 된 날, 레오 아리데오는 원장에게 물었다.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무릎을 꿇은 채. 그렇게 묻지 않으면 절대 대답해 주지 않을 것 같았기에 창피함을 내던지고 물었다.
“니아가 어디에 있는지 말해 줘요.”
그러자 원장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답했다.
“재미있는 사실을 하나 알려 주지. 그 계집애가 어디 있는지 알고 싶니?”
레오는 또 한 번 수치도 모르는 충직한 개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그토록 지키고 싶어 했던 그 계집애는 이미 차가운 시체가 되었을 거야. 죽을 때까지 네 이름을 불렀겠지, 고통 속에서……. 그리고 그건, 다 네 탓이야.”
레오 아리데오는 공손함을 집어치우고 원장에게 침을 뱉었다.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저 그녀의 간악함이 지긋지긋하고 끔찍했다.
그렇게 또다시 독방에 갇혔다.
그러나 이번에는 길지 않았다. 독방이 부족했던 모양인지 원장은 피투성이가 된 아이를 던져 넣고 레오를 끄집어냈다. 레오는 실험실의 쥐처럼 고아원의 아이들이 모여 있는 커다란 방으로 향했다.
그 이후에 며칠이 흘렀다. 니아가 사라진 지 열흘도 지나지 않았는데 십 년은 지난 것처럼 그녀가 그리웠다.
그러다 몇몇 아이들이 속닥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무릎에 얼굴을 묻고 있던 레오 아리데오는 그들에게 다가가 살벌하게 추궁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여자애들이 다 어디로 갔다고?”
“나, 나도 몰래 엿들은 거야! 새벽에 원장한테 끌려간 여자애들끼리 말하는 걸 들은 것뿐이라고. 중간에 도망쳐야 살 수 있다고 했어. 안 그러면…….”
말끝을 흐리는 아이의 멱살을 잡아끌었다. 이미 열흘 동안 인내심이 바닥났던 탓이다. 아이는 부어터진 입술로 답했다.
“간을 파 먹혀 죽는다고.”
레오 아리데오는 사납게 멱살을 놓고 그 길로 원장실로 향했다.
원장실에 들어간 걸 들키면 매 맞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알지만 어쩔 수 없었다. 확인해야만 했다.
원장실의 창문을 주먹으로 깼다. 고아원에서 가장 공고해 보이던 유리창은 레오의 피 몇 방울과 함께 산산조각 났다.
레오 아리데오는 그 조각들을 잘근잘근 내리밟으며 방 안 곳곳을 뒤졌다. 자물쇠가 걸린 곳은 부수고, 밟고 깨뜨리며 열었다.
그 과정에서 레오는 고아원이 블루아르 백작가에게 후원금을 받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후원금을 어디로 빼돌리는지는 알 바 아니었으나, 곧 그것이 아주 중요한 단서라는 것을 깨달았다.
<니아 프레슬리. 쥔느 블루아르 백작가로 입양.>
니아가 입양되었다는 걸 알게 된 순간 안도했으나 점차 얼굴은 굳어만 갔다.
<피투아 에트르, 쥔느 블루아르 백작가로 입양.>
<아만다 왓슨, 쥔느 블루아르 백작가로 입양.>
<안젤리카 버디, 쥔느 블루아르 백작가로 입양.>
새벽에 사라진 여자아이들 모두 쥔느 블루아르 백작가로 입양되었다고 적혀 있었다.
‘간을 파 먹혀 죽는다고.’
떨리는 손길을 누군가 저지했다. 원장이 들이닥친 것이다. 그녀는 레오에게 소리를 질렀고, 때렸고, 레오가 들고 있는 서류들을 보고는 급기야 그를 죽이려 들었다.
레오는 그녀가 욕을 뱉는 소리를 들었고, 맞았고, 그를 죽이려 드는 것을 보았다. 그저 보고만 있었다.
그러나 막상 죽어 버린 것은 원장이었다.
장식장에 놓인 트로피가 레오가 방을 엉망으로 만든 탓에 위태롭게 걸쳐 있었고, 원장이 흥분해 장식장을 여러 번 친 탓에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럼 그게 누구의 탓일까?
원장이 트로피에 머리를 맞아 피를 철철 흘리게 된 일은.
후에 레오는 이것을 그의 첫 살인으로 쳐야 하는지, 아니면 그저 사고로 여겨야 하는지 고민하곤 했다. 이미 죽어 버린 사람이기에 의미 없는 걱정이었지만.
그러나 그 순간의 판단만은 빨랐다. 레오 아리데오는 고아원의 아이들을 모두 내보내고는 선생들이 잠들어 있는 방의 문을 밖에서 걸어 잠갔다. 그리고 비리 서류들을 품에 넣은 채 고아원에 불을 질렀다.
원장의 시체가 화염 안에 갇히는 것을 바라보며 그도 그렇게 고아원을 빠져나왔다.
고아원의 아이들은 사육장을 빠져나온 짐승들처럼 내달렸다. 고아원의 학대에서 벗어나 첫 자유를 맞는 몸이었다. 그러나 아마 대부분은 잘 살지 못했을 것이다. 떠돌다 죽거나, 이용당하거나, 나쁜 길로 빠져들었겠지.
그러나 한 가지 다행인 것은, 적어도 그들을 뒤쫓을 어른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다 불에 타 버렸으니까.
그 사건 이후에 레오는 쥔느 블루아르를 만나게 되었다.
너무도 긴, 그리고 너무나 외로운, 그리고 잔인한 세월의 시작을 알리는 만남이었다. 오로지 검은 마음으로 가득 찬.
이런 것을 불행 중 다행이라 하던가.
앞서 벌어진 일을 목격한 기사들은 모두 죽을힘을 다했다. 죽지 않기 위해서. 덕분에 더 이상 목숨을 잃은 기사는 없었다. 아직까지는.
니아 프레슬리는 계속 앉은 자리에서 사내들의 경합을 지켜보았다. 장내가 너무도 고요한 나머지 새의 지저귐만이 허공을 채웠다.
오색 빛의 새 다섯 마리가 연무장 위를 활보하며 울음소리를 내었다. 그 소리가 너무도 구슬퍼 꼭 비탄 같았다. 새의 긴 꼬리가 펄럭일 때마다 니아의 눈꼬리에도 눈물방울이 맺혔다.
레오의 차례가 다가오기 시작하자 황제의 눈빛, 혹은 발짓, 혹은 들리지 않는 숨소리에도 니아의 심장이 한도 끝도 없이 쿵 내려앉았다.
‘레오……. 제발 무사하기만 해. 살아 주기만 해.’
시간이 지나 레오 아리데오가 터벅터벅 연무장의 중심을 향해 걸어 나왔다. 손에는 검을 단단히 쥐고서. 어쩐지 발걸음에는 미련이 없어 보였다.
괜찮을 거야. 괜찮을 거야.
니아는 스스로를 다독였다.
무사할 거야. 다치지 않을 거야. 죽지 않을 거야. 다 지나갈 거야. 함께 집으로 돌아갈 거야.
작은 두 손을 모았다.
모래바람과 함께 경기가 시작되었다.
두 개의 검이 한 합을 겨루었다. 동시에 새가 울었다. 또 동시에 니아는 숨을 삼켰다.
“레오?”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검과 함께 레오 아리데오가 뒤틀린 것이다. 겨우 한 합 만에 온몸을 휘청거리다니? 아무리 긴장했다 하더라도, 생사가 걸린 와중에 이렇게 무기력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의 상체가 땅바닥에 닿을 듯 가까웠다. 붉은 머리의 끝자락은 이미 실처럼 땅에 쏟아져 모래를 휘젓고 있었다. 곧 무너질 자세였다.
‘일어나. 일어나. 제발 일어나.’
레오 아리데오는 겨우 허리에 반동을 주어 일어섰다. 그러나 다행이라고 생각하기도 전에 또 한 번 두 개의 검이 서로를 겨누었다.
그리고 또다시 온 힘을 다하여 두 합.
레오 아리데오의 칼이 허공을 날아갔다. 아니, 레오 스스로가 집어던진 것이다. 마치 환영이라도 본 듯 팔과 다리를 움찔거리며.
그렇게 레오 아리데오는 완전히 비틀거리며 쓰러졌다. 겨우 두 합 만에.
니아는 그가 이기기를 기대하지 않았다. 단지, 황제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을 정도만 해 주기를 바랐다. 그녀의 품으로 무사히 돌아올 수 있을 정도로만 해 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지금 니아에게 레오 아리데오의 모습은 어쩔 수 없이 진 것이 아니라 포기한 것으로 보였다. 스스로 자신을 내던진 것으로 보였다.
“레오, 왜…….”
니아는 난간으로 달려가 얇은 쇳덩어리에 몸을 맡겼다. 떨어질 듯 휘청거리면서도 결코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먼지 섞인 바람이 입속으로 들어와 텁텁했으나 그녀를 막을 수는 없었다.
“레오! 안 돼! 정신 차려!”
니아 프레슬리는 목구멍이 얼얼하도록 외쳤다.
“레오! 레오 아리데오!”
대체 몇 번을 불렀을까. 모두가 숨죽이고 있는 가운데 그의 이름을 홀로 미친 듯이 불렀으니 관객도, 저 멀리 앉아 있는 기사들도 다 니아를 쳐다보는 것은 당연했다.
“레오……!”
목소리 끝이 갈기갈기 찢겨 나갔다. 얼굴에 너무 힘을 주고 악을 쓴 나머지 광대 부근이 얼룩덜룩하게 멍이 들어 갔다.
레오 아리데오가 힘없이 소리 나는 쪽을 응시했다. 니아에게 닿은 눈빛은 꿈을 꾸는 듯 몽롱했다.
니아는 그를 깨우기 위해 쉬지 않고 외쳤다. 곧 아무것도 담지 않은 듯했던 눈빛에 슬픔이 차올랐다. 니아는 계속 소리쳤다.
“레오, 일어나! 넌, 넌……!”
죽으면 안 돼.
“살아야 돼!”
피 토하듯 부른 목소리는 분명 그에게 닿았을 것이다. 그가 놓쳤던 검을 다시 손에 잡았던 것이다.
“그래…….”
니아는 안도했다.
‘하지만…….’
그녀는 체념하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황제가 고개를 삐딱하게 세운 채 그녀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난간에 홀로 매달려 있으니 멀리서도 눈에 띄었을 것이다. 게다가 시끄러운 소리로 대회를 방해하기까지 했다.
니아 프레슬리는 급히 고개를 내렸으나, 황제의 시선은 그녀에게 오래 머물렀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황제의 집중을 방해한 죄로 다음 타자는 견습 기사들 중 한 명이 아니라 니아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난간을 단단히 붙잡고 있던 두 손이 힘없이 툭 떨어졌다. 새가 낙하하듯.
‘하지만 너만 살릴 수 있다면…….’
레오 아리데오는 힘겨운 몸을 이끌고 일어섰다. 니아를 지켜 주기 위해 몸을 내던졌던 그때처럼. 기꺼이 오뚝이가 되어 주었던 그 어린 시절처럼.
니아는 저도 모르게, 일어선 레오를 눈길로 쓰다듬었다. 이겨 내 주어 고마웠다. 비록 니아는 무사하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벌컥, 레오의 입에서 괴성이 터져 나왔다. 기합이라기에는 너무 처절했고 울음이라기엔 물기 하나 없이 메마른 소리였다. 그것은 스스로를 몰아세우기 위한 악에 받친 비명이었다.
겨우 그렇게 세 합.
챙, 검의 부딪침과 함께 쇳소리가 귀를 짧게 긁고 달아났다.
“왜…….”
숨이 멎었다. 레오 아리데오는 또다시 칼을 잃었다. 어떻게 일어섰는데 이렇게 맥없이.
세 합. 이제는 정말 한계였다. 니아는 본능적으로 레오 아리데오가 다시는 칼을 쥘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니아 프레슬리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땅으로 고개를 푹 꺾은 레오 아리데오를 향해 상대 기사는 돌진하기 시작했다.
저대로 두면 죽는다.
저 기사에게든, 황제에게든.
순간이 영원처럼 느껴지는 때가 있다. 살다 보면 그런 때를 종종 마주치곤 했다.
지금 또한 그런 순간이었다.
니아는 레오 아리데오를 대신해 저 칼을 맞아 주기로 결심했다. 언젠가 그가 니아를 위해 그러했듯.
망설일 시간이 없었기에 니아는 곧장 난간 위로 몸을 내던졌다. 달려가려고 했다.
순간 뜨거운 손길이 니아의 시야를 가렸다.
“가지 마.”
커다란 손이 니아를 덮었기에 세상은 암전이었다. 그러나 까만 어둠 속에서도 니아의 시야는 계속해서 흐릿해져 갔다. 끊임없이 눈물이 차올랐기 때문에.
흐느낌을 아는 손바닥은 젖은 눈꺼풀을 애달피 어루만져 주었다.
째깍째깍. 머릿속 초침이 울렸다. 시간이 가고 있었다. 잠시 머뭇대는 이 순간에도 시간은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단단한 품 안에 갇힌 채, 니아는 흐르는 눈물을 참지 않고 그대로 흘려보냈다.
‘보내 주세요’라고 말해야 한다. ‘레오에게로 보내 주세요, 가게 해 주세요’라고 말해야 한다.
그러나 정작 니아의 입에서 나온 것은 다른 이야기였다.
“도와주세요, 도련님…….”
눈을 가린 손바닥이 덴 듯 움찔거렸다.
니아는 뒤돌아 그에게 안긴 채 엉엉 울고 싶은 마음을 억눌렀다. 대신 그의 손에 기대어 머리를 이리저리 흔들었다.
겨우 이마, 눈가, 그리고 코가 닿았을 뿐인데 몸 전체를 그에게 기댄 듯 느껴졌다. 그가 손을 놓아줬으면 하는 마음과 영영 이대로 니아의 시야를 가려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충돌했다.
이미 너무 늦어 버린 것 같아 두려웠다. 필릭스 쿠아란이 붙잡아도 뛰쳐나갔어야 했는데 망설인 자신이 미웠다. 순간의 망설임 때문에 레오가 혹시라도 이미 많이 다쳤거나, 혹은, 혹은 또다시 니아의 곁을 떠났다면.
흐느낌을 목구멍 뒤로 넘기느라 울대가 멍이 든 것처럼 아렸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온통 세상이 멍투성이였다.
그러나 곧 그 멍을 어루만져 주듯 따듯하고 보드라운 음성이 정수리 위로 내려앉았다.
“……괜찮아.”
서서히 눈을 가렸던 온기가 걷혔다. 주위가 밝아졌다. 마치 비 갠 뒤처럼.
여전히 눈물로 시야는 흐릿했으나 니아는 눈에 다시 레오 아리데오를 담을 수 있었다.
“아, 레오…….”
살아 있구나. 다행이다.
일순간 니아의 몸이 휘청였고, 필릭스 쿠아란이 자신의 품에 가두듯 그녀를 지탱했다. 그의 뜨거운 숨이 니아의 귓가에 닿았다.
“어…….”
니아는 늦지 않았다. 레오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그러나 레오 아리데오는 늦었을지도 모르겠다.
니아는 다시 한번 말했다.
“도와주세요, 도련님.”
레오 아리데오가 사람을 죽였다.
레오 아리데오는 상대의 몸에 올라타 목을 쥐고 흔들었다. 이미 그가 깊은 상흔을 남긴, 피가 철철 흐르는 목을.
그리고 황제는 웃었다.
“네가 이겼다.”
황제의 말에 시합은 종료되었다.
그는 즐거워하며, 기꺼워하며 명령했다.
“따라오라.”
시종장 두 명이 잰걸음으로 레오 아리데오에게 다가가 그를 일으켜 세웠다. 광기 어린 눈으로 살점을 집어 뜯던 레오 아리데오는 마치 수명을 다한 짐승처럼 축 늘어졌다.
레오가 양쪽 팔이 붙들려 질질 끌려가는 모습을 본 니아 프레슬리는, 혼자의 힘으로는 차마 감당할 수 없는 무언가가 시작되었음을 깨달았다.
레오 아리데오를 데려가는 황제를 쫓아가기 위해 필릭스 쿠아란의 품에서 몸을 비틀었지만, 그가 놓아주지 않았다.
“괜찮아. 괜찮아.”
니아는 계속해서 빠져나가기 위해 애썼다. 멀어지는 레오 아리데오에게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서. 아이 잃은 부모와 같은 두려움이 전신을 지배했다.
“가야 할 것 같아요. 가야 해요. 레오가, 레오가 잘못될 것 같아. 아니 잘못된 것 같아요. 레오를 데려가고 있어…….”
지금 시야에서 그를 놓치면 모든 것이 끝나 버릴 것 같았다. 그런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다시는 레오 아리데오와 함께할 수 없을 것 같은 불길하고 강렬한 예감이.
“내가 있잖아.”
처음에는 니아의 귀에, 마음에 전혀 닿지 못했던 그 목소리는 레오 아리데오가 시야에서 모두 사라진 다음, 그리고 주위의 사람들이 모두 사라진 이후에야 들려왔다.
니아는 애원하듯 그를 올려다보았다.
“레오는, 레오는 내 가족이에요. 그 애가 잘못되면 난…….”
“구해 줄게.”
필릭스 쿠아란이 니아에게 속삭였다.
“구할 수 있어요? 정말?”
“응.”
필릭스는 맹세하듯 답했다. 니아 프레슬리를 향한 그의 눈이 깊었다.
“가자, 니아 프레슬리.”
니아는 그가 어디로 가자고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든 상관이 없었으니까.
필릭스 쿠아란 옆에 달려 있는 여자를 보고선 모두가 입을 다물고 눈을 커다랗게 떴다.
마침 정문에서 마차를 수리 중이던 마부 휴도, 배불리 저녁을 먹고 다시 연무장으로 향하던 리바론 기사단의 기사들도 낯선 장면에 입을 벌린 채였다.
“단장? 누구예요?”
사이먼 캐치가 목검을 바닥에 내팽개치고 달려왔다. 심각한 분위기를 눈치챈 포말라드 웨이가 저지하려 했지만 날다람쥐처럼 빠른 사이먼을 막을 수는 없었다.
“단장이 여자를 데려오다니! 여자를!”
“사이먼!”
포말라드 웨이가 사이먼의 귀를 잡았다.
“아아, 왜 그래요, 부단장!”
사이먼은 엄살을 피우며 벗어나려 애썼다. 그사이 필릭스 쿠아란은 이미 공작가 내부로 들어간 후였다.
“니아? 정말 니아야?”
응접실에 들어가자마자 에보니 레인즈가 튀어 나왔다. 창문을 통해 필릭스와 니아가 함께 걸어 들어오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에보니는 차마 믿을 수 없다는 것처럼 두 사람을 바라보다 번뜩 정신을 차렸다.
“집무실, 아니 내 방으로 가지.”
니아는 여전히 말이 없었고, 필릭스 쿠아란의 얼굴엔 짙은 피로가 가득했다.
“차를 올릴까요?”
“아니. 알아서 할 테니 소란스럽지 않게만.”
단호한 말투에 에보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벌컥, 방문을 연 필릭스 쿠아란은 황색 소파에 니아를 눕히듯 앉혔다. 부드러운 손길로 등을 받쳐 주었으나, 니아는 앉자마자 무릎을 쪼그려 몸을 말았다. 무릎을 심장으로 가져다 댄 채 소파에 파묻힌 모습은, 마치 비 맞은 솜처럼 작아 보였다.
“미안해.”
필릭스 쿠아란이 사과했다. 니아는 그가 무엇을 사과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고개를 저었다. 힘이 없었다.
“레오가 사람을 죽였어요.”
고저 없는 목소리였다. 그것이 겨우 정신을 붙들고 있기 위한 것임을 알았기에, 필릭스 쿠아란은 애처롭게 눈빛으로 그녀를 쓸었다.
“그리고…… 황제가 레오를 데려갔어요.”
순간 니아는 몸을 일으켰다. 솜처럼 축 늘어졌던 몸이 단번에 쭉 펴졌고, 그 앞을 필릭스 쿠아란이 막아섰다. 니아의 몸에 기다란 그림자가 졌다.
“니아, 마셔.”
필릭스가 언제 가져온 것인지 마실 것을 건넸다. 유리잔에 탁한 색의 액체가 비쳤다.
“저는, 저는 괜찮아요. 그냥 보내 주세요.”
“마셔.”
그가 또 한 번 말했다. 니아는 천천히 그것을 받아 들고, 단번에 목구멍으로 넘겼다.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기에.
“도련님, 레오가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레오를 보러 가야, 그래야 할 것 같아요.”
필릭스는 니아의 흐트러진 머리칼을 보더니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저 데려간 것뿐이야. 황제의 마음에 들었으니까.”
“황제가 기사들을 어떻게 죽이는지 봤어요. 그냥, 한순간에, 빠르게…….”
“니아.”
그가 이름을 불렀다. 타이르듯이.
니아는 그 음성을 잘 알고 있었고, 아주 그리워했었다. 이런 상황만 아니었더라면 니아는 그의 부름에 마음이 떨렸을지도 모른다.
“니아 프레슬리, 괜찮아.”
필릭스 쿠아란이 다시 그녀를 소파에 앉혔다. 니아는 다시 그 안에 파묻혔다. 속절없이.
“내가 알아볼게. 네 가족을, 네게 돌려줄게. 꼭. 안전하게.”
그는 니아가 알아듣기 쉽게 중간중간 끊어서, 천천히 말했다. 그가 말 사이사이 여백을 둘 때마다, 그 공간에 알 수 없는 믿음이 차올랐다.
필릭스 쿠아란이 무엇이든 다 해 줄 것만 같았다. 니아 프레슬리를 위해. 그런 여백이었다.
“다 괜찮아질 거라고요?”
“그래. 전부 다.”
“저도? 레오도?”
“그래.”
니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하얗게 번진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사라졌다.
“우리도?”
마지막 질문에 필릭스는 답 없이 니아를 바라만 보았다. 니아는 그 눈빛이, 우리가 괜찮아지기에는 너무 많은 일이, 너무 긴 시간이 있지 않았냐는 뜻으로 읽혔다.
“미안해요.”
사과를 하기 위해 입을 벌리자, 창백해졌던 입술은 순식간에 다시 색을 찾았다. 그 입술을 천천히 훑던 필릭스 쿠아란은 허탈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언제나, 내가 더.”
필릭스 쿠아란이 자신의 심장 부근으로 손을 가져다 대었다. 고통을 참아 내려는 듯이.
그 행동은 무척이나 자연스러웠다. 오래된 습관처럼. 언제나 그렇게 살아온 사람처럼.
니아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팔. 오른팔.’
필릭스 쿠아란과 니아 프레슬리가 만나면 그러했다. 그는 심장에 그의 죄책감을 묻었고, 니아는 필릭스의 왼팔에 그녀의 죄책감을 묻었다.
누구 하나 일부러 그런 적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도련님, 잠이 와요.”
마음이 소란스럽고, 목이 탔다. 미안하고 또 미안한 그인데, 레오 아리데오의 일을 부탁해야 한다는 사실이 자꾸만 니아의 입을 텁텁하게 했다.
현실을 부정하려는 듯 잠이 쏟아져 내렸다. 니아에게 도피처가 그곳밖에 없기에 그런 것일까.
“자. 자고 일어나면 다 괜찮아질 테니까.”
졸음과 필릭스 쿠아란의 목소리가 조화롭게 뒤섞였다. 그의 깊은 눈이 바다처럼 일렁거렸고, 살짝씩 움직이는 입매가 그리움을 자극했다.
필릭스 쿠아란이 앞에 있는 게, 새삼 꿈같았다.
“웃는 게 보고 싶어요.”
저도 모르게 말이 나갔다.
필릭스 쿠아란은 웃음 대신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당황스러움이 그의 미간에 담겼다.
“웃어 봐요.”
한 번 더, 니아는 언젠가 그가 그녀에게 했던 말을 곧이곧대로 돌려주었다.
그는 이번에도 웃지 않았다. 그러나 미세하게 움찔거리는 그의 입매를 본 순간, 니아의 얼굴에 오늘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이 떠올랐다. 미소였다.
힘겹게 피어난 그것은, 진흙에서 피어난 연꽃처럼 방 안을 밝혔다. 시간을 멈췄다. 순간 필릭스 쿠아란의 심장이 그러했듯이.
잠결 섞인 미소는 일시적이었으나, 두 사람 마음의 장애물을 지웠다.
“보고 싶었어요.”
칭얼거리듯 니아는 말했다.
슬퍼서 어쩔 줄 모르겠다고, 걱정되어 어쩔 줄 모르겠다고, 힘든 일을 수도 없이 겪고 태산 같은 걱정들을 넘어왔는데 또 힘이 든다고. 그런 속마음을 모두 털어놓았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이 술술 뿜어져 나왔다.
“돌아오기를 바랐어요. 많이 기다렸는데, 도련님이 오지를 않았어요. 내가 도련님한테 보여 줬던 마지막이 너무 싫어서 다시 만난다면 웃어 주고 싶었고, 도련님의 못쓰게 된 팔이 미안해서 꼭 사과하고 싶었고, 쓰다듬어 주고 싶었고……. 그리고 다시 만났을 때 도련님이 많이 힘들어하는 게 보여서 괴로웠지만 그래도 나는…….”
“…….”
“그리워했어요.”
“…….”
“도련님이 돌아온 이후에 더 많이.”
니아의 마음이 사 년 전을 거슬러, 더 깊고 깊은 시간을 향해 갔다.
“십 년 동안, 공작가에서 많이 힘들었어요. 공작님 때문에, 그리고 모르트 독테 때문에. 그리고 몸이 너무 아파서. 심장을 주는 일이 너무 아파서, 열이 오르고 마음이 아려서.”
“…….”
“내가 이런 사람이라 두려웠어요. 도련님이 좋아지는 만큼, 비밀을 들킬까 봐. 괴물이라고 부를까 봐요.”
니아는 그 말을 고백하며 방 안에 넘실거리게 미소를 뿌렸다. 그가 없이 보낸 시간 동안, 필릭스에게 주고 싶었던 만큼의 크기로, 언젠가 그를 보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던 모양으로. 방 안에 니아의 미소가 빽빽하게 차올랐다.
“사 년 동안 많이 생각했어요. 내가 왜 그랬을까, 그러지 말걸. 도련님은 그럴 사람이 아닌데. 내 비밀이, 내가 이런 사람이라는 게 나도 도련님도, 그 누구도 해치지 못했을 텐데.”
“…….”
“도련님, 아카데미에 다니게 해 줘서 고마워요.”
점점 니아의 시야에서 필릭스 쿠아란이 흐릿해져 갔다.
“그 기억이 없었으면, 지금까지 살지 못했을 거예요.”
입 밖으로 모든 것을 꺼내 놓으니 모든 것이 빨랐다. 기다린 시간은 그토록 길고, 힘들었던 시간은 그보다 더 길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 분명한데 숨통이 트였다.
숨이, 쉬어졌다.
“저는 다 끝났어요. 남은 게 없어요. 도련님은요?”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묻는 것이었다.
그도 그랬으면 좋으련만.
니아의 기대를 품은 빛은, 케케묵은 감정이 덕지덕지 묻어 있는 필릭스 쿠아란에게 닿자마자 반사되어 부서졌다. 그 벽을 통과하지 못한 채 사라져 내렸다. 그러자 눈이 저절로 감겼다.
혼미해져 가는 세상을 앞에 두고, 니아는 쓰라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레오를 부탁해요.”
그리고 완전히 깊은 잠에 빠져든 니아 프레슬리는, 허공으로 붕 뜨는 감각도 전혀 느끼지 못했다. 등에 닿는 푹신함도, 위를 덮는 따듯한 온기도.
환영을 쫓듯 허공에서 니아가 남기고 간 미소 조각을 되뇌는 눈길도 알아챌 수 없었다. 그만큼 수면제를 섞은 물의 약효는 빠르고 깊었다.
“니아 프레슬리.”
그녀를 침대에 눕혀 놓은 뒤, 필릭스 쿠아란은 죄를 고백하듯 그녀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깊이 잠든 니아였으나 혹여라도 그녀에게 닿을까 두려움이 담긴, 그리고 그 누구도 들어 보지 못한 울먹거리는 음색이었다.
순간, 작고 도톰한 입술에 무언가 내려앉았다.
“니아 프레슬리.”
그것은 또 한 번 닿지 못한 목소리와 함께 부식되어 먼지처럼 흩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