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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지킬 수만 있다면 (49/75)

4. 지킬 수만 있다면

황궁 한편에서 견습 기사들이 기세 좋게 대련을 시작하고 있을 때, 다른 한편에서는 비밀스러운 대화가 시작되고 있었다.

“아직도 내게 화가 났어?”

황녀 클라우디아 엘로이가 서책을 팍 덮었다. 가벼운 음성이었으나 신경질이 느껴졌다.

“화가 난 게 아니라, 네게 실망한 거다. 약속을 어겼으니까.”

책장을 등지고 서 있던 필릭스 쿠아란이 미간을 찌푸렸다.

클라우디아는 그를 지나쳐 걸었다. 그리고 책상에 기대앉으며 멀리 창밖을 바라보았다. 지금쯤 황궁 기사단에서 대회가 시작되고 있을 터였다.

“그래도 좋은 것을 알려 줬잖아, 쿠아란 공?”

지겨우니 그만하라는 뜻이었으나, 필릭스 쿠아란은 찌푸린 미간을 풀지 않았다.

“약속을 어기지 마, 황녀.”

물러섬 없는 태도에 클라우디아 엘로이는 그나마 띠고 있던 삐딱한 미소도 지웠다.

“내가 니아 프레슬리를 만난 게 화가 나는 거야?”

그들은 서로를 노려보았다.

클라우디아 엘로이와 필릭스 쿠아란은 분명 서로가 필요했으나, 최근 들어 조금 의견 충돌을 보였다. 필릭스 입장에서는 황녀가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이었고, 황녀 입장에서는 그가 별것도 아닌 일에 꽁한 것이었다.

‘이래서야 어디 일을 맡길 수가 있겠나.’

며칠 전 클라우디아 엘로이는 니아 프레슬리를 만났다. 밤이었고, 질 나쁜 골목에서 만났기에 필릭스 쿠아란이 모를 거라고 생각했다. 가볍게 니아 프레슬리의 얼굴을 한번 보려던 것이었는데.

“니아를 만나지 마. 혼란스럽게 하지 말란 말이다. 우리 계획에 그 애는 없어.”

그러나 아마도 뒤를 밟은 듯했다. 클라우디아는 계속해서 미행을 확인했으니 아마 뒤를 밟힌 쪽은 니아 프레슬리겠지. 다시는 보지 않겠다는 둥 헛소리를 지껄이더니 결국 마음을 누를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다시는 황궁에 니아를 초대하지도 마. 아는 척하지도 말고.”

클라우디아 엘로이의 입꼬리가 한쪽으로 기울었다. 그녀도 교수 간담회에 니아 프레슬리를 초대한 것은 조금 성급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애당초 약속은 니아 프레슬리를 그들의 계획에 끼우지 않는 것이었으니까.

필릭스 쿠아란이 이렇게나 툴툴댈 줄 알았더라면, 클라우디아도 대놓고 그의 앞에 니아 프레슬리를 데려오는 일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클라우디아는 기분과는 달리 깔끔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래도 덕분에 그 애를 만났잖아. 그날, 나름 대화도 나누고 회포를 좀 푼 줄 알았더니.”

간담회에 니아를 초대한 것이 마치 너를 위해서였다는 듯한 말에 필릭스 쿠아란이 얼굴을 구겼다.

안 그래도 후회 중이었다. 충동적으로 니아를 붙잡아서는 안 되는 거였다. 그는 니아 앞에서 죄인이었고, 하던 대로 그녀에게서 멀어졌어야만 했다.

“그건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야. 그 애가 일상을 살게 내버려 두라고 누누이 말했잖아. 내가 뭘 위해서 전쟁터를…….”

“…….”

“내 생각 읽지 마.”

“잘 읽히지도 않아, 넌.”

클라우디아 엘로이가 빤히 그의 눈을 들여다보는 것을 눈치챈 필릭스는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클라우디아는 어깨를 으쓱였다.

“지금 니아 프레슬리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

“아카데미에서 퇴근할 시간이야. 물론 오늘도 정시 퇴근은 하지 않겠지만.”

바로 답이 튀어 나왔다. 그러나 클라우디아는 그런 그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었기에 꽤나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답했다.

“아닌데.”

아니나 다를까, 순식간에 필릭스 쿠아란이 그녀를 잡아먹을 듯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뭔가를 깨달은 듯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견습 기사들의 대련, 오늘이군……. 정말 왔단 말이야?”

그의 탄식에 클라우디아는 싱긋 미소 지었다. 누군가 지금 그녀를 본다면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황녀라고 생각할 만큼.

“날짜 감각 좀 챙기고 사세요, 공작 각하.”

“……그렇게 오지 말라고 말했는데.”

필릭스 쿠아란은 지난번 만남을 또 한 번 되새김질했다.

황궁은 니아 프레슬리에게 위험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이 나라 전부가 그랬지만 그중에서도 특히나 더 위협적인 사람이 있었다. 바로 이 황궁의 주인.

“가 봐야겠어.”

참을 수 없어 발걸음을 옮겼다. 성큼성큼 입구로 향하는데, 황녀가 그를 막아섰다.

“가지 마.”

“가야 해.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니아 프레슬리는 네 생각만큼 연약하지 않아. 겨우 견습 기사 응원을 온 사람한테 무슨 위험한 일이 있겠어? 이건 과보호야.”

클라우디아 엘로이가 타이르듯 말했으나 필릭스 쿠아란은 서늘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날 선 기색이 클라우디아를 감쌌다.

“이 나라에서 가장 약자를 뽑으라면 니아 프레슬리 한 사람을 꼽아야 할 판에, 약하지가 않다고?”

“…….”

“난 그 애를 생각하면 하루에도 수백 번 심장이 조여드는 느낌이야.”

지금 뛰고 있는 이 심장이 니아의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 그는 그저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죄를 짓는 기분이었다.

“네가 그 애를 좋아하니까 지켜 주고 싶은 마음은 알겠고, 네가 니아 프레슬리 때문에 무슨 결심을 했는지도 알겠는데…….”

“알면 비켜.”

필릭스 쿠아란은 싸늘하게 그녀를 지나쳤다. 망설임 없이 멀어지는 커다란 등을 바라보며 클라우디아는 하얀 손가락으로 손바닥을 까드득 쥐었다.

“……어차피 제대로 앞에 서지도 못할 거면서.”

조그맣게 중얼거렸으나 필릭스 쿠아란은 소리를 들었는지 답했다. 여전히 돌아보지 않은 채로.

“지킬 수만 있다면 상관없어.”

견습 기사들의 대련은 생각보다도 더 흥미진진했다. 우승 상여금이 꽤 된다더니, 다들 열심인 모양이었다.

검과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불규칙하게 연무장에 흘렀다. 그 시간만큼은 관객석에 있는 사람들도 모두 숨을 죽이고 대련을 관망했다.

가끔 열정 넘치는 기사들이 관객석 가까이까지 다가와 대련을 펼치기도 했다. 그럴 때면 기사들뿐만 아니라 관객들도 모두 군기가 잡힌 채 주먹을 불끈 쥐었다.

가끔가다 나오는 탄성은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본능적으로 터져 나오는 것이었다.

“어, 우리 아들이에요!”

승자와 패자가 여러 번 나뉘고 잠시 휴식을 거쳤다. 다음 시합이 시작되는데, 니아 옆에 딱 달라붙어 앉아 있던 몰리 피아노트가 화들짝 놀라며 니아의 무릎을 두드렸다.

앳되어 보이는 소년이 품이 커 보이는 제복을 입은 채 앞으로 걸어 나왔다. 짙은 회색 머리의 소년은 아직은 꽤 호리호리했으나 눈빛만은 형형했다. 듬직한 어른으로 자랄 듯했다.

“아직 어려 보이는데, 정말 대단하네요. 벌써 기사단에 입단하다니.”

“그럼요, 그럼요. 저런 아들이 세상에 또 없죠.”

니아가 과장 없는 감탄을 보내자, 몰리 피아노트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배었다. 성장기에 아버지 없이 자랐음에도 불구하고 당당히 황궁 기사단에 입단까지 한 그녀의 아들이었다. 자랑스러워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아드님의 승리를 기원할게요.”

몰리의 마음이 충분히 공감되었기에 니아는 진심을 담아 속삭였다. 몰리는 긴장되는지 오른손으로 심장을 부여잡은 채 연신 고개를 끄덕거렸다. 니아는 남은 그녀의 왼손을 꼭 잡아 주었다.

그러나 시합의 시작을 외치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무슨 일인지 둘러보아도, 당황한 채 고개를 돌리는 기사들만 보일 뿐 별다른 일은 발견되지 않았다.

잠시 뒤, 시종으로 보이는 자가 뛰어 들어왔다. 그는 귓속말로 황궁 기사단 단장에게 속삭였고, 기사들은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자세를 정비했다.

“무슨 일이죠?”

니아가 붙들고 있던 몰리의 손을 꼭 누르며 중얼거렸다. 하필이면 아들 차례에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가, 몰리 피아노트도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곧 그들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황제 폐하께서 드십니다!”

일순간 관객석이 굳었고, 몰리 피아노트의 왼손을 잡고 있던 니아의 손이 축, 땅을 향해 꺼졌다. 몰리가 두 손으로 입을 가린 까닭이었다.

믿을 수 없다고 생각했으나 동시에 연무장 문이 열렸고, 날 선 공기 속으로 황제 후인 엘로이가 걸어 들어오기 시작했다. 뒤에 끝없는 시종들을 달고서.

시종들에 비해 한 뼘은 커 보이는 거대한 몸집이 바람을 거스르듯 연무장을 가로질렀다. 황가의 상징이자 오랜 전통인 길게 늘어뜨린 금빛 머리, 루비를 박아 놓은 듯한 붉은 눈동자. 그리고 위압감을 주는 서늘한 이목구비는 사람의 것이 아닌 듯했다.

황제는 그의 등 뒤로 기다랗게 달린 털 망토를 갈무리하고는 묵직하게 의자에 내려앉았다. 그에게서는 지배자만이 가질 수 있는 공포의 냄새가 풍겼다. 니아의 가슴 한편이 싸늘해졌다.

황제가 왜 여기에?

니아는 고개를 숙여 머리칼을 길게 늘어뜨렸다. 공손히 모으고 있는 두 손까지 길게 닿았다. 멀리서 보면 황제를 향해 예를 차리고 있는 모습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니아는 떨리는 손길로 긴 소매에서 망원경을 꺼내 눈앞에 가져다 대었다. 평소의 그녀답지 않은 무척 대담한 행동이었다.

니아는 감히 황제를 관찰하려 들어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망원경을 통해 황제의 입 모양을 읽고 있었다.

“내 기사단이…… 얼마나 강한지를…… 확인해 보지.”

“더할 나위 없는…… 영광입니다, 폐하…….”

함께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몰리 피아노트가 니아의 목소리에 귀를 세우는 것이 느껴졌다.

방금 황제가 한 말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그는 기사단의 실력을 확인하고자 시간을 내어 행차한 듯했다. 하필이면 레오가 대련을 펼치는 날.

니아는 멈추지 않고 황제의 입 모양을 따라 읽었다.

“……최고라는 것을 증명하라.”

순간 황제와 눈이 마주쳤다.

“……헉.”

파직. 바닥으로 망원경이 떨어졌다. 망원경 속 유리알에 금이 가는 날카로운 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자 니아는 저도 모르게 탄식을 내뱉었다.

아니, 실제로 눈이 마주친 것은 아니었다. 이렇게 먼 거리에서 그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단지 그녀가 있는 방향으로 황제가 잠시 시선을 두었을 뿐. 그러나 니아는 순간 놀란 나머지 망원경을 땅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빌려 온 건데…….’

오늘을 위해 천문학 조교에게 사정, 사정을 해 가져온 것이었는데. 니아는 애써 미련을 버리고 발끝으로 망원경을 구석으로 밀었다. 안타까워도, 망원경이야 물어 주면 될 일이었으니까.

지금은 황제가 있는 자리에서 레오가 대련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더 중요했다.

‘너무 떨면 안 될 텐데.’

혹시라도 레오가 황제 앞에서 실수를 할까 봐 걱정스러웠다.

심상치 않은 예감이 드는지 관객석 여기저기서 작게 신음이 새어 나왔다.

멀리서 시종장으로 보이는 사람이 손짓했다. 아마도 황제가 그만 예를 갖추어도 된다 명한 모양이었다.

서로의 눈치를 보던 사람들은 서서히 굽혔던 허리를 폈다.

자리에 다시 착석하면서도 니아의 시선은 레오에게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가 한쪽 팔을 이리저리 매만지는 게 보였다.

긴장했구나.

덩달아 그 기분에 동조되어 점차 심장이 오그라들었다. 그러다 니아는 그녀보다 더 깊은 한숨을 내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어휴, 어떡하면 좋아. 지금 긴장했어요, 우리 아들…….”

몰리 피아노트는 고개를 숙이느라 엉망이 된 두건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채 울먹였다. 그녀는 온몸을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떨었다.

확실한 것은 그녀가 니아보다 훨씬 더 겁을 먹었다는 사실이었다. 니아는 두려움을 품은 눈을 지그시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잘할 거예요. 어머니가 보고 있으니까.”

몰리 피아노트는 입술을 바르르 떨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황제의 눈에 들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금은 희망을 가져 보는 그녀였다.

니아도 조금쯤은 레오 아리데오가 이번 일을 기회로 삼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황제의 손짓과 함께 대회가 다시 재개되었다. 니아는 부디 그들이 황제의 눈 밖에 나지 않기를 바라며 맞부딪치는 두 견습 기사에게 시선을 주었다.

‘이런…….’

그러나 니아의 위로가 무색하게 경기 상황은 처참했다. 한 합을 겨루는 데도 한참이 걸렸다.

그저 더디게만 진행되었다면 니아가 입술을 깨무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난무하는 헛발질과 헛손질. 비등비등한 실력으로 인해 결판이 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두 견습 기사의 실력이 문제였다.

보고 있는 이들 모두가 눈치를 보았다. 황제의 눈치를.

견습 기사들은 어리숙하게 부딪치고, 깨지고, 무너졌다.

‘어떡하지? 저렇게 하면 안 될 텐데…….’

솔직하게 말하자면 장난으로 대련해도 이 정도 수준은 아닐 듯했다. 훌륭한 기사를 여럿 둔 황제의 눈에도 달리 보일 리가 없을 테고…….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이제 몰리 피아노트는 여린 신음조차 뱉지 못하고 있었다.

니아는 이런 장면을 참아 내는 데 면역력이 없었다. 결국 그녀는 눈을 감았다. 부디 황제가 분노하지 않기만을 바라면서.

니아 프레슬리가 다시 눈을 떴을 때, 두 견습 기사는 모두 칼을 놓친 상태였다.

문제는 두 사람의 검이 호각을 다투다 날아간 것이 아니라, 긴장을 이기지 못하고 끝내 스스로 놓아 버렸다는 데 있었다. 연무장 바닥에 두 개의 검이 초라하게 나뒹굴었다.

‘차라리 중단하고 다음 경기를 시작하는 편이 낫겠어. 저걸 집어서 이런 모습을 반복하느니…….’

그러나 니아의 바람과 달리 몰리의 아들은 무릎을 꿇은 채 놓친 칼을 향해 엉금엉금 기어갔다. 다른 견습 기사는 절뚝이며 바로 앞에 놓인 검을 향해 손을 뻗었다.

두 사람 모두에게서 포기할 수 없다는 의지가 보였으나, 누가 더 빠를지는 불 보듯 뻔했다.

“……아주머니.”

니아는 창백하게 질려 있는 몰리 피아노트를 불렀다. 주의를 돌리기 위해서였으나, 그녀의 시선은 아들에게 고정된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포기한 니아는 그녀와 같은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당연히 몰리의 아들이 아닌 다른 기사가 먼저 검을 집어 들었으리라고 예상하며.

그러나 두 사람 모두 검을 집지 못했다.

황제가 또 한 번 손짓했기 때문이었다.

니아는 의아하게 황제를 바라보았다. 이제는 입 모양도 표정도 보이지 않으니 그의 몸짓으로만 의중을 읽는 수밖에 없었다.

손 한번 까딱.

그것은 잠시 시합을 중단하라는 이야기였다.

왜지?

황제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더니 옆의 기사 단장에게서 칼을 뺏어 들었다. 그리고 무릎을 땅에 댄 채 엉거주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는 소년과, 검에 손이 닿았으나 차마 줍지 못한 남자에게로 다가섰다.

니아는 또 한 번 스스로에게 물었다.

왜지?

감히 황제의 움직임을 저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기에 이 순간 유일하게 움직이는 것은 황제뿐이었다. 그 모습이 무척 기이해 니아는 빠르게 사고 회전을 할 수가 없었다.

황제의 걸음은 중력을 거스르는 듯 우아하고, 또 위압적이었다. 순간 그가 습격하듯 기사 한 명의 목을 베었다. 붉은 피가 공중에 널뛰듯 상승했다 곧장 하강했다. 땅에 검붉은 액체가 불규칙하게 흩뿌려졌다.

생명이 꺼지는 건 너무나 순식간이었다. 눈동자가 눈꺼풀에 의해 딱 한 번, 암흑을 맛본 순간 세상은 변했다.

“내 아들……!!”

내 아들, 내 손자, 내 동생, 내 남편……. 관객석에서 용수철처럼 튕겨 나온 비명이 정적을 깼다. 대회가 시작할 때는 분명 즐겁게 웃고 있던 그들인데. 불과 몇 시간 전까지는.

단 한 명의 부재로 남은 이들 모두를 망가뜨리는 형태의 집단은 가족만 한 것이 없었다.

다음. 황제는 검 끝을 질질 끌며 옆으로 걸음 하였다. 검에서 뚝뚝 흘러내리는 핏방울은 그의 그림자가 되어 땅을 적셨다.

황제의 발걸음은 몰리의 아들 앞에서 멈췄다. 그가 또다시 허공을 향해 검을 높이 쳐들었다.

연무장 가운데까지 온 황제의 모습은 이제 관객석에서도 충분히 선명했다. 니아는 그의 입술이 하는 말을 다시 읽었다.

‘약한 죄.’

그렇게 몰리의 아들은 단 한 차례도 저항하지 못한 채 목이 베였다. 소년의 목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았다.

그의 손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스스로의 목으로 향했다. 그렇게 하면 하늘로 치솟는 피를 막고, 스스로의 죽음 또한 막을 수 있다고 믿는 것처럼.

그러나 이내 쿨럭이며 입에서 걸쭉한 피를 뱉어 낸 그는 눈도 감지 못한 채로 땅바닥을 굴렀다. 또 한 명의 소년이 그렇게 삶을 끝냈다.

“아주머니!”

동시에 몰리 피아노트의 온몸이 차가운 바닥에 닿았다. 금이 간 그대로 구석에 두었던 망원경이 그대로 그녀의 몸과 부딪혀 산산이 부서졌다.

파르르, 조각들이 관객석을 굴러다녔다. 분해된 세편들은 끝도 없이 흩어졌다. 이상하게도 깨진 유리는 깨지기 전보다 더 찬란하게 빛났다. 니아는 잡을 수 없는 그것들을 아연히 바라보다 정말로 되돌릴 수 없는 생명들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죽은 이들이 옮겨지고 있었다.

“계속하라.”

더러운 것을 버리듯 황제는 칼을 허공에 내던지고 자리로 향했다. 그가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망토의 털끝이 피로 물들었다. 밝은 황금 털에 대비되어 더욱 붉었다. 아니, 더욱 참혹했다.

그렇게 큰 잘못을 저질렀던가? 죽을 만큼?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기사단에서 추방을 하면 될 것 아닌가.

니아는 혼란스러움 속에서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지금 느끼는 감정 때문에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 갔다.

니아는 제왕학도, 정치도, 황실의 섭리도, 무엇 하나 제대로 알지 못했다. 방금 일의 경중을 따지지도 못할 만큼 그녀는 무지했다.

그러나 감정의 잔재들이 계속해서 니아의 심장을 두드렸다. 조금씩 들끓으며.

‘나는……. 난, 나는…….’

혼란스러운 불꽃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들끓기 시작한 그것은 끝끝내 발화점을 넘기지 못했다. 그 말은 곧, 니아 프레슬리가 무엇도 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녀는 쓰러진 몰리 피아노트의 숨소리를 확인하고, 수면제가 가미된 안정제를 입에 넣어 준 뒤 다시 한번 숨소리를 확인하며 손을 잡아 주었다. 그러고는 입을 다물었다. 그다음으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황제의 검에 베이는 세 번째 기사가 레오 아리데오가 되게 할 수는 없었으니까.

그것은 비단 니아 프레슬리뿐만의 일은 아니었다. 슬프지만 현실이 그러했다. 침묵은 비겁함이 아니라, 힘없는 자들이 가진 유일한 방패였다.

슬픔으로 가득 찬 적막 가운데, 대회는 다시 시작되었다. 소리 없는 아우성으로.

약하면 죽는다.

이제 견습 기사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사랑하는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죽지 않으려면 강해야 했다.

상대를 죽이는 것으로 끝이 나는 게 아니다. 황제가 약한 두 명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보지 않았던가. 이기든 지든, 충분히 강함을 증명해야 했다. 적어도 황실 기사단을 욕보이지 않을 정도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레오 아리데오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충분히 강했다. 적어도 황제를 만족시키지 못할 일은 없을 것이다.

방금의 광경만 보지 않았더라면.

‘피. 피. 피…….’

눈앞에서 흩뿌려지던 피가 가시지 않았다. 여전히 그의 시야에는 피가 치솟던 장면이 계속 재생되었다.

그는 사람을 어떻게 찔러야 그런 형태로 피가 흘러나오는지 잘 알고 있다. 아주, 잘, 알고 있다.

근육과 연골을 베는 것은 지난 세월 동안 그가 습관처럼 연마하고, 또 실행했던 일이다.

역시나 자신은 안 될 놈이었다. 사 년이 걸린 결심이 하루 만에 돌아서는데, 이런 비겁함을 가지고는 무엇도 될 수 없었다.

니아 프레슬리가 보인다. 그녀는 오지 말았어야 했다. 누군가의 처참한 죽음도, 레오 아리데오의 추저분한 떨림도 목도하지 말았어야 했다.

니아 프레슬리가 창백한 표정으로 고개를 젓는다. 순간 그는 도망칠 곳이 없음을 깨닫는다.

팔이 뻐근하게 아파 오기 시작했다. 아침부터 손에 쥐고 있던 칼이건만, 어째서 지금에서야 이런 무게감이 느껴지는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실은 알고 있었다.

그가 검을 잡은 것이 아니라, 검이 그를 집어삼켰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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