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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황실 기사단 (48/75)

3. 황실 기사단

레오 아리데오와 니아 프레슬리는 며칠 뒤 이른 새벽, 각자 찬물로 세수를 하고 정신을 차린 뒤 계단에 걸터앉았다.

두 사람이 한 계단 위에 나란히 앉자 여유 없이 꽉 찼다. 그러나 큰 불편함은 없었다. 오히려 익숙한 사람의 온기와 차가운 계단의 바닥이 합쳐져 잠이 더 달아나는 듯했다.

한동안 니아는 레오 아리데오에게 그녀의 비밀을 어떻게 꺼내야 하느냐에 대해 골머리를 앓았고, 레오는 니아를 볼 때마다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그냥 넘어가야 하는지 아니면 이 문제에 대해 다시 화두를 던져야 하는지 고민할 때 짓는 표정이었다.

“우리 얘기하자.”

그러던 도중 레오가 니아에게 어렵사리 대화를 요청했다. 니아도 얼추 생각을 정리했던 터라 그의 요청에 응했다.

따라서, 이제 그녀는 레오 아리데오와의 일만 해결하면 되는 것이었다.

니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레오, 난 여전히 결혼에는 뜻이 없어.”

“…….”

“그건 필릭스 쿠아란 공작님과는 상관없어. 내 문제야.”

니아는 잠시 머뭇거렸다. 퀭한 새벽의 기운이 그녀의 주위를 감돌았다.

“내 의견은 확고해. 지금이 좋거든. 결혼을 하는 그 과정이 내겐 너무 벅차고……. 하지만 넌 얼마든지 다를 수 있지. 그러니까 네가 결혼에 대해 생각하면서, 또 동시에 날 신경 써 굳이 내게 결혼을 하자느니 제안할 필요는 없어. 그러니까…….”

니아는 반쯤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조곤조곤 말하는데도 새벽인지라 그녀의 목소리가 집 안에 크게 울려 퍼졌다.

레오는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니아가 멈칫거리자 괜찮다는 듯 종용했다.

“……일단 계속 말해 봐.”

“네가 오랫동안 사람들과 함께하는 생활을 하지 않아서 두려울 수도 있지만, 좋은 사람들은 많아. 네가 결혼을 할 만한 여성이 말이야.”

“…….”

“게다가 우린 남매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잖아. 그걸 먼저 생각해 봤어야지.”

“이상하다고?”

레오 아리데오가 억울함이 묻은 목소리로 물었다. 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가족애와 이성적 감정은 다른 거야.”

“우리가 피가 섞인 건 아니잖아. 퍼시와 안나는 네 친부모님이 아니야.”

“가족이 아니라고?”

니아가 진심이냐는 듯 레오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웃음을 지운 채로.

레오 아리데오는 니아의 깊은 초록 눈을 응시하다 주절거렸다.

“아니, 맞지만 그래도 우리는 남이라는…….”

“…….”

“미안해. 실수했다. 우린 가족이 맞아.”

그제야 니아의 굳은 얼굴이 풀렸다. 그녀는 다시 말을 이었다.

“우선 내 할 말은 끝났어. 너는?”

니아는 결국 그녀의 비밀에 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겨우 결혼을 감당할 자신이 없다는, 반만 사실인 애매한 핑계를 댔을 뿐.

그러나 회피하고자 하는 것도, 혹시라도 레오가 그녀의 예상과 다르게 반응할까 봐 걱정되는 것도 아니었다. 단지 레오가 정말 결혼을 하게 되면 그때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뿐이었다.

혹여라도 그녀의 비밀이 그의 선택에 장애물이 되는 일은 피하고 싶었다. 그가 니아 때문에 자신도 결혼하지 않겠다거나 하는 것은 싫었기에.

“니아, 난…….”

“응.”

“난 결혼이 하고 싶었어.”

“그래. 좋은 생각이야.”

니아는 양쪽 입꼬리를 올리며 눈을 한번 깜빡였다. 그녀가 기다리던 대답이었다.

니아가 눈을 깜빡일 때 도톰한 애교 살에 긴 그림자가 졌다가 사라졌다. 레오는 그 모습을 어설프게 훑다가 가볍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더 시간을 두고 고민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뭐? 왜? 아직 마음에 드는 아가씨가 없어서? 그거야 얼마든지…….”

“기사단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더 직급이 올라갔을 때 결혼을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내가 성급했던 것 같아.”

“…….”

“우리 둘 다 아직은 시간이 필요한 거겠지.”

레오의 결론에 니아는 석연치 않은 기분을 느끼면서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음,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야. 그래. 천천히 생각하자.”

그렇다면 레오의 결혼도, 니아의 비밀을 밝히는 일도 조급하게 생각할 필요 없는 것이었다. 너무 오래 비밀을 숨기게 되는 건 아닐까 조금은 걱정스러운 마음도 들었지만.

그가 언제쯤 결혼을 할까 생각에 잠겨 있는데, 툭 하고 레오의 오른발이 니아의 발을 치고 갔다. 아주 가볍게 툭.

니아는 입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왼발로 그의 발을 쳤다. 그러자 다시 레오의 오른발이 그녀의 발을 건드렸다. 말없이 그렇게 흔들 그네처럼 작은 발과 큰 발이 계단 위를 왔다 갔다 했다.

속도가 빨라지기 시작했을 때, 공중에서 레오 아리데오와 니아 프레슬리의 눈빛이 딱 마주쳤다. 누가 뭐라 할 것도 없이 동시에 눈꼬리가 가늘게 접혔다.

“화해한 거지?”

“그래. 화해한 거야.”

니아는 순식간에 찜찜했던 마음이 녹아내리는 것을 느꼈다. 그가 웃고 있었다. 익숙하고도 따듯한 그 미소를.

“자, 여기. 화해 기념 선물.”

레오가 주머니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건넸다. 꼬깃꼬깃해진 종이 하나였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꾸깃꾸깃한 부분에 황궁 기사단의 표식이 박혀 있었다. 니아는 그것을 받아 들고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이게 뭐야?”

레오는 부끄러운 듯 작은 목소리로 설명했다.

“황궁 기사단에서 작게 대회가 열린대. 전통이라나 봐. 견습 기사끼리 붙여서 싸우게 하는 것 말이야. 사람들을 초대해도 된다고 해서. 와 줄래?”

“황궁에서?”

“응.”

“아, 그게…….”

니아가 초대장의 꾸깃꾸깃한 부분을 펴며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레오는 기대와는 다른 그녀의 반응에 조급해져 물었다.

“왜? 다들 가족들을 초대한다고 하던데…….”

니아는 계속해서 손가락 지문을 황궁 표식에 대고 빙빙 돌렸다. 필릭스 쿠아란이 다시는 황궁에 오지 말라고 했던 것이 기억났던 탓이다.

그는 황궁이 니아에게 아주 위험한 장소인 듯 말했고, 그 경고를 하기 위해 몇 년 만에 제대로 그녀 앞에 나타났었다.

그날의 기억이 머릿속에 가득 차올랐다. 그러나 곧 니아는 기억을 털어 내듯 머리를 이리저리 저었다. 그러고는 그녀를 걱정스레 내려다보고 있는 레오 아리데오를 바라보았다.

초록 망막 가득히 레오의 얼굴이 들어왔다. 니아는 손을 들어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니, 좋아. 가야지. 누구 초대인데.”

다른 견습 기사들은 모두 가족의 응원을 받을 텐데, 레오 아리데오 혼자 아무도 없는 것은 싫었다. 여기, 니아 프레슬리가 이렇게 떡하니 존재하는데 그가 서운할 만한 일을 만들 수는 없었다.

“시간 내기 어려운 거야?”

자상한 물음이 돌아왔으나, 니아는 씩 웃었다.

“걱정 마. 하루 정도야!”

하루 정도야 삼 일 밤낮을 새우면 시간을 만들 수 있었다. 사 년 만에 다시 기사가 되기로 결심한 레오를 위해서 그 정도는 일도 아니었다.

황실 기사단 위로 새가 푸드덕 날아갔다. 오색 빛의 꼬리를 눈으로 좇던 보리스 발디 단장이 턱짓하자 기사 중 한 명이 활시위를 당겼다. 순식간에 새가 발디 단장의 발 앞으로 맥없이 떨어졌다.

“훌륭하군.”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보리스 발디는 군기가 꽉 잡힌 견습 기사들을 쓱 둘러보았다. 검붉은 색의 제복 한가운데 새겨진 황궁의 표식은 햇빛이 비칠 때마다 태양처럼 번뜩였다.

“모두에게 건투를 비네.”

의미심장한 미소를 남기고 발디 단장은 오른발에 힘을 주어 단번에 몸을 돌렸다. 황실 기사단의 유구한 전통인 견습 기사들의 대결에서 누가 승리를 차지할지 기대가 되었다. 그는 은근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한편, 니아 프레슬리는 연무장의 관객석에 앉아 초조하게 레오의 등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잘 다듬어진 돌계단 가장자리와 연무장의 한가운데는 꽤나 가까웠다.

다른 견습 기사들의 가족들이 바글바글 자리를 차지한 가운데, 니아 혼자 덩그러니 앉아 있는 것이 내심 마음에 걸렸다.

‘대가족이 왔잖아.’

누가 봐도 같은 유전자를 공유하고 있는 것 같은 사람들이 여럿 보였다. 혹시라도 응원 소리가 묻히게 될까 봐 니아는 목을 풀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확성기라도 가져올 걸 그랬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러나 실은 니아 프레슬리는 누가 봐도 충분한 상태였다. 그녀가 덩그러니 홀로 앉아 있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그녀 주변에 놓인 물건들 때문이었다.

대포 망원경(운석을 관찰할 때 쓰는 망원경이다)부터 시작해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각종 의약품들, 레오 아리데오가 우승을 하게 되면 줄 커다란 꽃바구니와 박수갈채 기계를 낑낑거리며 가져왔다. 그리고 만약 레오가 일찍 패배할 것도 고려해, 시간이 남았을 때 읽을 여러 종류의 서적도 가져온 참이었다.

니아가 시험 삼아 박수갈채 기계를 작동시키자 순식간에 시선이 몰렸다. 기계에서 박수 소리와 함께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져 나왔다. 박수 소리에 함성 기능 탑재라니, 니아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저분은 뭐 하시는 분이래요?”

“글쎄요. 아무래도 친해지기는 어려울 듯싶죠? 같은 기사단 식구가 되었으니 가까워지면 좋을 듯했는데…….”

사람들이 쑤군덕거리는 소리는 박수갈채 기계 소리에 묻혀 니아에게 닿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뒤, 황실 기사단이 연무장에 등장하자 진짜 함성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중 견습 기사들은 서른 명에 지나지 않았으나 워낙 대가족들이 많이 몰려온 까닭에 연무장은 함성으로 가득 찼다.(니아의 박수갈채 기계는 레오 아리데오가 승리했을 시 사용 예정이었기에 지금은 켜지 않았다.)

“레오!!”

니아가 제복을 입은 레오 아리데오를 발견하고 소리를 질렀다. 차렷 자세를 한 채로 눈동자를 굴려 니아를 찾던 레오 아리데오는 그녀를 발견하자마자 눈으로 웃었다.

니아는 순간 감격해 손으로 입을 가렸다. 제복을 입은 레오 아리데오는 퍼시 아리데오 그 자체였다. 포근한 저 미소는 니아가 꿈에서 본 퍼시 아리데오와도 많이 닮아 있었다.

‘레오, 화이팅.’

어머니의 마음으로 그에게 불끈 주먹을 쥐어 보였다. 잠시 당황한 표정을 보였던 레오 아리데오는 피식 웃으며 입을 끔뻑이려 했지만 금세 보리스 발디 단장의 명령으로 인해 앞으로 행진했다.

‘간단한 대회라고 했으니 다칠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눈으로 레오 아리데오의 등을 쫓으며 니아는 곁의 약품 상자를 열어 하나하나 꺼내 놓기 시작했다. 아주 작은 생채기라도 난다면 당장 뛰어가 레오에게 약을 발라 줄 생각이었다.

“어머, 이게 다 뭐예요?”

“네?”

이제껏 아무도 니아에게 말을 걸지 않았는데, 머리에 두건을 두른 한 중년 여성이 훌쩍 다가왔다. 니아는 잠시 의아했으나 곧 미소를 띠고 답했다.

“의약품이에요. 저기, 제일 잘생긴 등 보이시죠?”

“잘생긴 등이요?”

“네. 제일 멋있는 등이요.”

“…….”

“쟤가 제 동생이거든요.”

누가 동생인지에 관해서는 레오와 니아 둘 사이에 항상 논란이 있어 왔으나, 니아는 분명 그녀가 연장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잘생긴 등이 무엇인지 고민하던 중년 여성은 동생이라는 말을 듣고 웃었다. 사람 좋은 미소였다. 그녀는 니아에게 장단을 맞추어 답했다.

“그러시구나. 저기 제일 귀여운 등도 보이시죠? 우리 아들도 이번에 기사단에 입단했거든요.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몰라요.”

“그러게요. 세월이 참 무상하죠? 어느새 저렇게 자랐다니.”

믿을 수 없다는 듯 감격스레 중얼거리자, 여자는 재밌다는 듯이 니아를 바라보았다.

“아가씨가 보기와 다르게 성숙하시네. 누가 보면 내 또래인 줄 알겠어요.”

“그런 말 자주 들어요.”

니아는 정갈한 목소리로 답했다. 몰리 피아노트는 그녀의 말이 진담인지 농담인지를 살피려는 듯 콧등을 들썩였다.

니아의 표정을 관찰하던 그녀가 작게 웃었다. 그리고 불쑥 손을 내밀었다. 주름이 많이 가 있는 손이었다.

니아도 손을 마주 뻗었다. 두 여자의 손이 몇 차례 공중에서 흔들렸다가 다시 멀어졌다.

“내 이름은 몰리 피아노트예요. 시장에서 과일 가게를 하고 있죠.”

그녀는 묻지도 않았는데 종알종알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무척 수다스러웠으나 아직 대회가 시작되기 전이라 니아도 싫지만은 않았다.

“아버지도 없이 혼자서 저렇게 잘 컸다니…….”

몰리 피아노트는 자신이 어떻게 과일 가게를 십 년간 망하지 않고 유지할 수 있었는지, 그리고 몇 년 전 남편이 죽었을 때 혼자 아이를 키워 내기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설명했다. 그 말을 할 때 그녀는 눈물을 훔치느라 코를 여러 번 훌쩍였다.

니아는 묵묵히 그녀에게 손수건을 건넸다. 혹여라도 레오가 우승했을 때, 눈물을 참지 못할까 봐 가져온 손수건이었다. 하지만 니아보다는 지금의 그녀에게 더 필요해 보였다.

“저는 니아 프레슬리예요. 보 아카데미에서 조교 일을 하고 있죠.”

“어머, 그럼 귀족이시군요. 죄송해요. 차림새만 보고 제가 실수를…….”

“저보다 훨씬 나이도 많으신데요. 편하게 하세요.”

축축하게 젖은 손수건을 다시 건네받은 니아는 다정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 이제 시작하나 봐요!”

몰리 피아노트가 감사 인사를 할 시간도 없이 대회가 시작되었다. 황실 기사단에 입단한 견습 기사들의 첫 싸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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