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편지
니아 프레슬리는 씩씩거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안 그래도 편치 않은 나날들이었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필릭스 쿠아란과 황녀의 결혼 소식이 못내 신경 쓰였고, 집에 가면 그녀를 피하려 드는 레오 아리데오가 신경 쓰였다.
그래도 니아는 아카데미의 일에 지장이 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 그런데 아카데미가 이런 식으로 그녀에게 똥을 줄 줄은 몰랐다.
“저 니아 프레슬리 조교인데요!!”
니아는 쾅쾅쾅, 있는 힘을 다해 사무실의 문을 두드렸다. 안에서 화들짝 놀라 넘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안에 있군.
니아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리고 더 기다리지 않고 문을 확 열어젖혔다.
거칠게 숨을 들이쉬며 내부를 살피다, 소파에 눕듯이 앉아 있는 아리갈리 버도네 교수를 찾아냈다. 니아는 그가 소파 뒤에 숨으려다가 실패한 것을 단번에 눈치챘다.
‘가만 안 둬.’
“오, 오랜만. 니아 프레슬리 조교.”
버도네가 통통한 손가락을 들어 인사했다. 그러나 그도 스스로의 죄를 알기에 곧장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였다.
“도대체 이게 뭐죠?”
“으, 응?”
“이게 다 뭐냐고요!!”
니아는 팍, 하고 종이를 집어 던졌다. 그것은 아리갈리 버도네 앞의 책상에 날카롭게 안착했고, 버도네 교수는 그와 비슷한 모양으로 한 번 튕겼다 소파 속으로 다시 파묻혔다.
<필릭스 쿠아란 공작님께.
안녕하세요. 보 아카데미의 조교 니아 프레슬리입니다. 딕시 댁스터 교수님의 생명술 수업의 보조를 맡고 있죠.
다름이 아니라, 공작님께서 저희 아카데미에 오셔서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어 주시면 어떠할까 하는 마음에 이렇게 연락을 드립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요청 드려요.
강의 요청 내용은 이러합니다. 그라나다 전투를 비롯해 다른 크고 작은 열 번의 전투 과정에 대해 짤막하게 소개해 주시고, 각 전투당 얻은 깨달음을 아카데미생들에게 가감 없이 공유해 주시면 됩니다.
…….
추신.
공작님, 아니 도련님! 실은…… 교수님들께 공작님을 꼭 모셔오라는 협박을 받고 있어요. 끝은 좋지 않았을지 몰라도 우리 좋았잖아요? 첫사랑의 간절한 부탁을 무시하진 않으실 거죠?
추신의 추신.
황녀님과 결혼이라니, 정말이에요? 어떻게 사랑이 변해요?
추신의 추신의 추신.
필릭스 도련님, 실은 보고 싶어요.>
“어, 어떻게 알았나? 모를 줄 알았는데…….”
아리갈리 버도네가 수줍게 허허 웃었다. 그러나 그의 이마에서는 이미 식은땀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지, 진정해…….”
머리를 쥐어뜯는 니아 프레슬리를 향해 아리갈리 버도네는 입 모양으로 워, 워 중얼거렸다.
그 입 닥치기라도 했으면 좋겠는데, 그는 슬금슬금 니아의 눈치를 보더니 물었다.
“어떻게 알았어? 몰래 보냈는데.”
“교수님의 조교가 어제 결코 빠질 수 없는 가족 내 행사가 있다면서 저한테 일을 떠넘기고 가서 알게 되었고요, 오늘 오전 중으로만 마무리하면 된다길래 마지막 서류 정리를 하다가 이 거지 같은 문장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이미 발송 완료를 한 이후더군요.”
“으응, 그랬구나……. 저기, 프레슬리 조교, 진정하고, 내 말을…….”
“으아아아!”
니아 프레슬리는 돌연 괴성을 내질렀다.
“제가 싫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으세요? 제가 그렇게 만만하세요?”
니아는 멱살을 잡듯 종이를 다시 손에 쥐었다. 차마 믿기지 않는 듯 몇 번이고 다시 요청서를 읽다가 입술을 바르르 떨었다.
“연애편지예요? 예? 연애편지냐고요. 추신은 뭐고 추신의 추신은 뭐예요. 우리 좋았잖아요? 보고 싶어요? 어떻게 사랑이 변해요?!”
“그, 한번 가볍게 보내 본 걸세. 이번에도 거절하면 정말 포기할 생각으로!”
“고소할 거예요. 조교 인권위가 가만있지 않을 거야! 악!!”
산발이 된 갈색 머리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 와중에 아리갈리 버도네는 ‘오잉?’ 하는 표정을 짓더니 슬금슬금 물었다.
“조교 인권위가 있었나? 언제 생겼지?”
니아가 광기 어린 눈을 부라렸다.
“조교한테 인권이 어딨겠어요? 거짓말이죠. 교수 인권위는 있으면서 조교 인권위는 없는 이 거지 같은 세상!”
“아…….”
아리갈리 버도네가 고개를 끄덕였다. 또 한 번 진정하라고 중얼거리면서.
니아는 저 입부터 꿰매 버리고 싶은 생각에 성큼성큼 그에게 다가갔다가 결국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공작님이 직접 보시지는 않겠죠?”
“음……. 직접 봤으면 좋겠는데.”
“뭐라고요?!”
주저앉은 니아 프레슬리가 앙칼지게 쏘아붙이자 아리갈리 버도네는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냐, 아냐. 말이 헛나왔네. 그러니까 나는…… 흠! 아마 집사가 먼저 확인을 하겠지.”
“그것도 싫다…….”
니아는 길리 포바즈가 이 말도 안 되는 요청서를 보게 된다는 생각에 까마득해졌다. 최근에는 바쁜지 만나지 못했으나, 언젠가 그가 집에 오는 그날부터 시작해 평생의 놀림거리 당첨인 셈이었다.
‘그래도 그게 낫지. 백번 나아.’
니아는 힘주어 노려보느라 눈물이 살짝 맺힌 눈가를 쓱쓱 닦았다.
“공작님만 보지 않으신다면, 그런다면 전 아리갈리 버도네 교수님을 죽이지는 않겠어요.”
“뭐? 자네 날 죽이려고 했어?”
니아가 해탈한 채로 답했다.
“반쯤?”
“…….”
“그래도 공작님이 보지 않으신다면……. 그럼 괜찮아요. 아니, 괜찮지 않은데 괜찮은 걸로 일단은…….”
힘없이 앉아 있는 니아 프레슬리는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리갈리 버도네는 번뜩 외쳤다.
“조교상 줄게! 올해의 조교상 꼭 자네에게…….”
“아, 그건 원래부터 내 거였다니까!”
“어…… 그래…….”
그러나 바로 실패했다.
포기하지 않은 아리갈리 버도네는 축 처진 니아의 어깨를 토도독 두드렸다. 위로의 의미로.
토도독. 토도독.
“……하지 마세요.”
니아가 거칠게 그의 손을 쳐 내는 바람에 버도네의 위로는 또 한 번 실패했으나, 니아 프레슬리는 화를 조금 누그러뜨린 듯싶었다.
“도련님만 보지 않으면 괜찮아, 괜찮아.”
연신 그렇게 혼자 중얼거리기만 할 뿐 더 이상 버도네에게 말을 걸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이먼, 뭘 그렇게 물끄러미 봐?”
“누구겠어, 단장이지.”
“그렇게 부르면 웨이 부단장한테서 또 한 소리 들을걸. 공작님이라고 부르라고 말이야.”
“너나 그렇게 불러, 짜샤.”
사이먼 캐치는 아이몬드의 말에 코웃음을 던지고는 계속해서 필릭스 쿠아란을 몰래 관찰했다.
“기분이 좋은 건가…….”
며칠 전처럼 우중충해 보이지는 않았으나, 또 막상 그의 기분이 좋다고 판단을 내리려니 애매했다.
왼팔로 목검을 휙휙 휘두르는 모습은 가히 신의 경지였으나 평소의 침착함이 부족했다. 그는 성급하게 곁의 바위들을 내리치더니 어느 순간 움직임을 멈췄다.
내리쬐는 햇빛을 그대로 맞으며 필릭스 쿠아란은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 짙은 머리칼에서부터 진한 얼굴선을 타고 땀이 뚝뚝 흘러내렸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넘긴 그는 부단장인 포말라드 웨이가 건네는 물수건을 무심히 받아 들었다. 땀을 닦는 그의 모습을 몇몇 시종들이 훔쳐보는 것은 신경 쓰지도 않은 채.
필릭스는 곧장 다시 단련을 시작했다.
“흠……. 뭔가 좀 다르긴 한데.”
사이먼이 중얼거렸다.
다시 시작된 필릭스의 손길은 여전히 성급했다. 오늘 안에 바위와 필릭스 쿠아란, 둘 중 하나는 끝장을 보려는 것처럼.
필릭스 쿠아란만큼은 아니어도, 사이먼은 타고난 재능이 있었다. 검술을 보는 눈이 조금은 있다는 말이다.
고민을 하고 있는 찰나, 누군가 뒤에서 턱 하고 사이먼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생각이 너무 많아서 저래.”
“누구세요?”
“나? 저놈의 친구.”
사이먼이 휙, 뒤를 돌아 낯선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했다. 굳이 분류하자면 미남에 속하겠으나, 묘하게 콧대가 높아 보이는 얼굴이 사이먼을 향해 빙긋 웃고 있었다.
그 해맑은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아 사이먼은 부러 부루퉁하게 중얼거렸다.
“엑? 단장 친구요? 친구 없는 줄 알았는데.”
“……있어. 이십 년에서 딱 일 년 뺀 십구 년 지기 친구지.”
“헉.”
사이먼 캐치는 흠칫 뒤로 물러섰다.
앨버트 브라이트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다시 한번 천천히 훑은 사이먼은 피식, 웃음을 흘리고는 앨버트에게 가까이 다가가 속닥거렸다.
“구라 치지 마.”
순식간에 앨버트의 얼굴이 구겨졌다.
“뭐, 임마?”
사이먼은 소용없다는 듯 손가락 하나를 들고 앨버트의 눈앞에서 흔들었다.
“……단장이랑 어떻게든 친해져 보려는 수작인가 본데, 소용없어요. 안 그래도 제국으로 돌아온 뒤로 단장이 얼마나 피곤해하는데요. 이곳저곳에서 귀찮게 해서. 괜히 큰일 당하지 말고 돌아가요.”
“허…….”
“……돌아가라니까!”
사이먼 캐치가 억지로 목소리를 긁으며 훠이훠이 손짓했다.
앨버트는 어른의 침착함을 발휘해 물었다.
“얘야, 내가 누군지 아니?”
“모르죠. 그럼 그쪽은 저를 아세요?”
앨버트는 천천히 되물었다.
“내가 널 어떻게 알아?”
“그럼 비겼네요.”
의미 없는 말장난에 앨버트 브라이트는 결국 ‘아이고, 두야’ 하고 머리를 잡았다. 필릭스 쿠아란은 어디서 이런 버르장머리 없는 꼬맹이를 부하로 길렀는지.
“네가 누군지는 몰라도, 네가 리바론 기사단의 견습 기사 정도는 될 거라는 사실은 안단다.”
“그럼 제가 짱 세다는 것도 아시겠네요?”
“아무리 세도 백작가보다 셀까?”
“네?”
“나도 왕년에 검 좀 다뤄 봤어. 하지만 검보다는 작위가 더 좋다는 것을 일찍이 깨닫고 관뒀지. 백작가의 막내아들이 굳이 기사가 되어 여기저기 아프고 치일 필요는 없는 일이니까. 이제 좀 알겠냐, 꼬맹아?”
중얼거리는 앨버트 브라이트에게 사이먼은 외려 눈을 흘겼다.
“왕년에? 그 정도 말을 할 나이로는 안 보이는데. 저랑 동년배 정도로 보여요.”
앨버트는 순간 기뻐해야 하나 고민했다. 자신이 동안이라는 사실에. 그러나 곧 다시 침착함을 발휘해 느긋하게 읊어 주었다.
“중요한 건 내가 백작가 막내아들이라는 말이야.”
“백작가? 우리 단장은 공작이에요! 더 세다고.”
“누가 그거 비교하래? 내가 진짜 친구가 아니라면 어떻게 여기에 와 있겠어? 시종이 장님이라 문을 열어 줬을까?”
“어? 듣고 보니 그렇네요.”
“어디서 이런 똥멍청이를……. 휴.”
괜히 말 걸었다고 생각하며 앨버트는 단련 중인 필릭스 쿠아란에게로 발걸음을 옮겼다.
“필릭스! 내 친우! 나 왔네!”
일부러 더 크게 외치며, 앨버트 브라이트는 과장되게 손을 흔들었다.
무시무시한 기세로 바위를 내려치고 있던 필릭스 쿠아란이 행동을 멈추고 앨버트 브라이트를 돌아보았다. 그러더니 말없이 저택 쪽을 턱짓했다.
서재에 앉아 땀을 닦는 필릭스 쿠아란을 향해 앨버트 브라이트의 투정이 시작되었다.
“저기 바깥에, 저 조무래기들한테 내 얘기 안 했어?”
“무슨 소리야.”
“어떻게 내가 자네 친구인 걸 모를 수 있냔 말이야! 우린 올해로 십구 년째고, 내년에 이십 년을 맞는 사이인데!”
누가 들으면 사귀기라도 했나 의심할 여지가 있는 말이었으나 필릭스는 묵묵히 고개를 저었다.
“부탁한 일이나 말해.”
“또 용건만이지, 용건만! 이대로면 우리 이십 주기가 없을지도 몰라.”
“쓸데없는 말 말고.”
몇 년 만에 나타난 필릭스 쿠아란은 더 무뚝뚝해져 있었다.
앨버트 브라이트는 사 년 전 말도 없이 떠난 것에 대해 서운함을 더 토로하고 싶었으나, 묻는다고 대답해 줄 위인도 아니거니와, 솔직하게 말해 앨버트는…… 돌아온 필릭스 쿠아란이 좀 무서웠다.
“도대체 얼마나 커진 거야? 아주 올려다봐야 할 판이야. 안 그래도 나빴던 인상은 더 나빠졌고. 우리 열다섯에는 그래도 엇비슷하지 않았나.”
앨버트 브라이트는 손으로 필릭스와의 키 차이를 재며 한숨을 내쉬었다. 예전에도 성격은 나빴으나 나름 장난치는 맛이 있었는데. 지금은 앨버트의 농담에 반응 하나 제대로 해 주지를 않았다.
“거, 뭐냐. 팔은 좀…… 괜찮고?”
“오른팔은 못 써. 그래도 사는 데 문제없어.”
조심조심 물었으나 돌아오는 답은 너무 막힘이 없었다. 빨리 부탁한 것이나 말하라는 의미였다.
훤칠해진 것은 인정하겠으나 사람이 너무 얼음송곳같이 변해 버렸다. 전쟁터를 휩쓸면 다 저렇게 변하는 거야, 뭐야. 입을 비죽이며 앨버트 브라이트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직도 다 네 얘기지. 너와 황녀의 결혼 이야기가 뜨거운 감자라고. 황제가 결혼을 대찬성한다는 이야기와 반대한다는 이야기가 함께 나오고 있고.”
앨버트는 필릭스의 눈치를 살피며 슬쩍 자신의 의견을 넣었다.
“난 솔직히 반대에 한 표. 난 친구로서 네가 이 결혼 하지 않았으면 좋겠거든. 황녀가 아니라도 아름다운 여성은 얼마든지 널렸어.”
“또.”
본인 이야기인데도 형식적인 보고를 받듯이 필릭스 쿠아란은 답했다. 앨버트는 그의 태도가 못내 불만스러우면서도 아는 바를 계속 줄줄 늘어놓았다.
“아론 엘로이 그 녀석도 한번 떠봤는데, 이 결혼이 내키는 눈치는 아니더군. 그럴 만도 하지. 그랬다가 네가 결혼 후에 황제라도 되겠다고 나설까 봐 불안할 테니까 말이야.”
“그거 말고, 또.”
“그리고 한 가지 더는……. 좀 위험한 이야기이긴 해.”
앨버트 브라이트는 아무도 없는 서재를 쓱 둘러보더니 장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고서는 다시 은근하게 입을 열었다.
“갑자기 제국에 왜 이런 이야기가 떠도는지는 모르겠지만, 신성에 관한 소문이 암암리에 떠돌고 있단 말이지.”
“신성?”
“그래. 무려 개국 이래 몇백년 만에! 이게 이런 식으로 수면 위에 떠오른 적은 없었는데 말이야.”
신성이란 말에 반응하는 듯싶던 필릭스 쿠아란은 다시 휙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이 자연스레 멈춘 곳은 창문 앞 테이블 가운데 즈음이었다.
그의 표정을 열심히 관찰하던 앨버트는 테이블 위에 뭐라도 있나 싶어 슬슬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별다른 문제는 아니야. 어차피 신성이 없어도 충분히 강대국이 되었는데, 뭐. 누구 덕분에.”
“음…….”
필릭스 쿠아란은 곰곰이 생각하는 듯하다 짧게 중얼거렸다.
“알았어.”
“…….”
“…….”
“필릭스? 자네?”
길어진 침묵 끝에 앨버트 브라이트가 눈을 끔뻑거렸다.
“왜.”
무심한 대답에 앨버트 브라이트는 더욱더 거세게 눈을 끔뻑거렸다. 열심히 사인을 보내도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결국 앨버트 브라이트는 당혹감을 숨기지 못한 채 물었다.
“너는 나한테 할 말이 없냐고. 정말 겨우, 장터에 떠도는 소문 따위 듣자고 날 보자고 한 거야?”
서운함이 가득한 얼굴에 필릭스 쿠아란은 미간을 찌푸렸다. 망설이던 그는 겨우 한마디를 뱉었다.
“수고했어.”
“그게 끝이야?”
“……잘 가.”
앨버트 브라이트가 두 손바닥을 높이 쳐들고 필릭스 쿠아란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사람을 여기까지 불러 놓고선 이대로 보내겠다고?
“아니, 저녁 대접도 안 하고?”
“먹고 가든지.”
혼자 먹고 가든지 말든지 하라는 이야기였다.
앨버트가 와 하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어이없음의 감탄사였다. 결국 그는 포기한 채 중얼거렸다.
“냉정함이 하늘을 찌르는구먼. 출세했다 이거야, 뭐야. 신도 깜짝 놀라 펄쩍 뛰실걸세.”
“이 나라에 신이 어딨어.”
괜스레 꼬투리를 잡고 싶어진 앨버트는 코웃음을 쳤다.
“나라를 대표하는 신은 없어도 작은 신들은 있지. 백성들이 임의로 만들어 낸 것뿐이라도.”
“증명 가능한 힘이 없잖아.”
한번을 져 주지 않는 필릭스 쿠아란의 뻣뻣함에 앨버트는 속으로 욕 비슷한 것을 지껄였다. 어떻게 사 년이 지났는데도 둘 중에 항상 져 주는 쪽은 앨버트 브라이트란 말인가.
“이런 소문이나 말하고 돌려보낼 거였으면 굳이 나일 필요도 없었잖은가. 자네 그 유명하다고 소문난 집사나 시키지.”
“오랜만에…… 보고 싶었나 보지.”
마지막을 작게 웅얼거렸으나 똑똑히 듣고 만 앨버트 브라이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야.”
중얼거린 앨버트의 입꼬리가 조금씩 씰룩였다.
“봐준다, 내가.”
그는 수없이 되뇌었던 절교 선언을 평소처럼 또 한 번 가슴에 묻었다. 그러고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서재 안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문득 책상 앞에서 멈춰 섰다. 필릭스 쿠아란이 저도 모르게 시선을 멈추었던 그곳이었다.
“이게 뭐야?”
다른 서류들과 달리 너무 곱게 놓여 있어서 앨버트도 눈길이 갔다. 날림으로 대충 종이 위에 쓰인 글을 술술 읽다가 앨버트는 눈을 찌푸렸다.
“강연 초청서? 강연을 하게?”
설마 네가 강연을 하려는 거냐는 의미였으나, 점차 앨버트의 동공이 확장되어 갔다.
“……보지 마.”
“…….”
“안 된다고!”
순간 어린 시절의 필릭스 쿠아란이 불쑥 튀어나왔다. 문 쪽으로 향하던 몸은 적의 목을 벨 때처럼 빠르게 움직였으나…….
그가 다급하게 손을 뻗었을 때는 이미 앨버트 브라이트가 모든 내용을 본 이후였다.
당황스러움 반, 장난기 반 섞인 목소리로 앨버트 브라이트는 보이는 것을 소리 내 읽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보 아카데미의 조교 니아 프레슬리입니다……. 끝은 좋지 않았을지 몰라도 우리 좋았잖아요…….”
앨버트 브라이트가 전문을 보지 못하게 만드는 데 실패한 필릭스 쿠아란은 어설프게 팔을 내렸다. 그 모습에 더 신이 난 앨버트 브라이트는 초청장을 마저 읽어 내려갔다.
“어떻게 사랑이 변해요, 도련님 실은 보고 싶어요…….”
“닥쳐.”
“이거 실화야? 혹시 자네가 막 술 먹고, 미쳐서 쓴 건 아니지?”
“닥치라고 했어.”
“아니, 그러니까 이걸 니아 프레슬리가 보냈다고? 너희 뭐야? 신파야?”
앨버트 브라이트가 초청서를 손에 쥐고 앞뒤로 흔들 때마다 필릭스 쿠아란의 얼굴이 시시각각 변했다. 처음에는 붉게, 그다음에는 더 붉게, 그러고는 끝내 괴롭게.
“나도 몰라.”
말을 하며 필릭스 쿠아란이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순간 앨버트 브라이트는 꼭 사 년 전, 그가 필릭스 쿠아란의 연애 상담을 해 주던 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다고 느꼈다. 앨버트는 기대 섞인 음성으로 물었다.
“끝난 거 아니었어?”
“…….”
“사 년 전에.”
자신도 모르게 들뜬 표정을 지은 앨버트 브라이트는 다시 한번 요청서를 눈으로 읽어 내렸다.
“끝났냐고?”
필릭스 쿠아란이 고통스러운 듯 되물었다.
앨버트는 으쓱, 어깨를 들썩였다.
“자네의 짝사랑 말이야.”
“끝났겠어?”
질문에 질문으로. 그러나 앨버트 브라이트는 충분히 알아들었다.
“그럼 결혼은 황녀랑 하고, 연애는 니아 프레슬리랑 하고? 내용만 보면 이미 연애를 하셨는데.”
“닥치라고 했지. 안 그래도 죽을 지경이니 이만 꺼져.”
“자네라면 이렇게 즐거운 상황에 꺼지고 싶겠어?”
앨버트 브라이트의 연애 세포가 드릉드릉 신호를 걸었다.
그는 졸업 후 바로 정략결혼을 했다. 사랑 없는 결혼이었으나,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그와 동시에 연애 문제를 상담하던 사람도 함께 증발해 버려 인생의 낙이 사라졌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난 네가 니아 프레슬리를 버리고 명예를 좇아 전쟁터로 갔다고 여겨서…… 나도 니아 프레슬리에게는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 네 관심이 사라지면 내 관심도 사라지는 거거든. 그런데 잘못된 판단이었군.”
앨버트 브라이트는 놀랍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돌연 주먹을 불끈 쥔 채로 ‘지난 4년간 완전히 감시해 줬어야 했는데!’ 외치면서 입술을 잔망스레 깨물었다.
“그동안 평생의 배필이라도 만난 건 아니겠지? 어느 놈이 확 채 갔다든지. 그러게 필릭스 자네가 나한테 편지 한 통만 했어도, 응? 편지 한 통…….”
“……너 아니어도 충분했어.”
어느새 초청장을 빼앗아 든 필릭스 쿠아란은 흠집 나지 않게 그대로 서랍 안에 초정장을 넣었다. 그도 앨버트 브라이트의 반짝거리는 눈을 본 이후였으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채 이내 먹구름 가득한 우중충한 표정을 지었다.
“난 그 애를 좋아하면 안 돼.”
다짐하듯 중얼거리는 필릭스 쿠아란은 사랑 앞에서 좌절하던 어린 시절보다 훨씬 더 먹먹해 보였다.
“왜? 그런 게 어딨어. 이것만 보면 니아 프레슬리도 널 좋아하는 것 같은데.”
“모르는 게 있어.”
“내가? 내가 뭘 모르지? 물론 자네가 왜 그렇게 서둘러 전쟁터로 가야 했는지는 아직도 모르네만. 적어도 아카데미에 다닐 때의 자네 연애 사업이라면 내가 아주 옆에서 물심양면…….”
“너 말고. 니아 프레슬리.”
필릭스 쿠아란은 그 이름을 말하고 또 한 번 고통스러운 듯 한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온몸을 의지할 수 있는 곳이 겨우 왼손밖에 없다는 듯.
얼굴을 파묻은 그는 놀랍게도 그 어느 때보다 약해 보였다. 수많은 전쟁을 승리로 이끈 영웅처럼 보이는 것이 아니라.
결국 앨버트 브라이트와 저녁을 함께 하고 그를 돌려보낸 후, 필릭스 쿠아란이 아카데미에 보낸 것은 거절의 답장이었다. 몇 번을 구기고 버리면서 직접 작성한 거절의 서신을.
니아는 텅 빈 교실에 앉아 빈 책상들을 바라보았다.
수업이 다 끝나고, 아이들이 모두 나간 강의실은 적막하고 허했다. 오늘따라 시끌벅적하게 떠들던 아이들 탓에 더욱.
빼곡히 판서를 채웠던 칠판을 모두 정리했고, 꾸물거리던 마지막 한 아이까지 나간 것이 꽤나 오래되었는데 니아는 여태 자리에 앉아 있었다.
몇 시간 전, 아리갈리 버도네 교수의 조교가 직접 구운 쿠키와 함께 전해 준 소식을 떠올리며.
‘지난번에 정말 감사했어요! 덕분에 가족 행사에 빠지지도 않고, 아주 푹 잘 쉬었답니다. 덕분에요!’
‘잘 먹을게요.’
‘그리고 버도네 교수님께서 이걸 갖다 드리라고 하시더군요. 정중한 거절이 돌아왔다고 하면 아실 거라고 하던데…….’
‘거절……. 역시나. 다행이네요. 버도네 교수님께 우리 둘 모두에게 다행이라고 전해 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니아는 조교가 건넨 종이를 받아 들었다. 황실에서 보낸 것만큼이나 아주 고급 종이였다.
니아는 후련한 마음에 후, 하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길리 집사님이 참 일 처리가 빠르시구나 생각하며.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조교의 인사를 뒤로한 채, 니아는 거절의 편지를 열었다.
그녀는 깔끔하게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정중하고 군더더기 없는 거절이었다. 필체도 유려하며 무척 정갈했다.
‘……그리하여, 유감스럽게도 강연 요청을 거절하는 바입니다.’
니아는 마지막 문장을 소리 내 읽었다. 말도 안 되는 니아 프레슬리의 이야기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것이 불과 몇 시간 전의 일이었다.
자꾸만 그 유려한 필체를 떠올리게 되는 건, 아마도 그녀가 며칠간 마음을 졸였기 때문이겠지.
니아 프레슬리는 표정 없이 눈을 깜빡였다. 깜빡, 깜빡. 그리고 또 한 번 깜빡.
“그래. 잘됐네.”
니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섰다. 왜 마음 한구석에 허탈함이 드는지 결국 알아내지 못한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