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권-1. 결혼 (46/75)

4권 차례

1. 결혼

2. 편지

3. 황실 기사단

4. 지킬 수만 있다면

5. 핏빛 기억

6. 파란

7. 살아남은 소년

8. 동이 트면

9. 삶으로의 초대

10. 한 사람을 위한 꽃

11. 오랜 동맹

12. 꽃밭

13. 끝의 시작

14. 그녀의 이야기

15. 시작의 시작

1. 결혼

“그래도 넌 옛날에 황궁 검술 대회에서 우승할 뻔했잖아. 널 기억하는 사람은 없었어?”

“안 그래도 몇몇 기사분들이 물어보시더라고. 왜 그때 황궁 기사단에 들어오지 않았냐면서.”

“그때 들어갔으면 지금쯤 견습 기사가 아니라 정식 기사가 되어 있었을 텐데. 잘만 했다면 부단장 정도의 직급은 받을 수 있지 않았을까?”

“과찬이야.”

손을 내저은 레오 아리데오는 작은 접시에 케이크 조각을 덜었다. 니아는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발을 동동 구르며 그가 접시를 주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드디어 한입 맛봤을 때, 니아는 스스로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았다. 니아 프레슬리의 손에서는 결코 탄생할 수 없는 맛의 향연이 펼쳐졌던 것이다. 앞으로도 열심히 돈 벌어 음식을 ‘사’ 먹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을 내리며, 니아는 그 자리에서 한 조각을 뚝딱 해치웠다.

니아 프레슬리는 입가의 아몬드 가루를 툭툭 털어 내며 레오에게 물었다.

“황실 기사단은 어때?”

“아직은 첫날이라 적응 중이지.”

“잘 적응할 거야. 널 괴롭히는 사람은 없겠지? 있으면 내가 손봐 줄게.”

니아는 진심 한가득이었는데, 레오 아리데오는 입을 가리고 큭큭거렸다. 케이크를 한 조각 더 접시로 옮기던 니아는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못 미더운가 보지, 레오 아리데오?”

“걱정 마. 동기들이 하는 말을 들었는데, 황실 기사단의 군기가 옛날 같지 않다고 하더라고. 옛날의 황실 기사단이 아니라고 하던데.”

“음, 그래? 그래도 내가 아카데미에 다닐 때는 황실 기사단이 최고였는데.”

레오 아리데오가 니아 프레슬리의 눈을 잠시 주시하다가 중얼거렸다.

“필릭스 쿠아란 공작이 이끄는 리바론 기사단이 워낙 커져서. 그쪽으로 인재가 많이 몰리는 모양이야.”

“…….”

“나도 리바론 기사단에 지원했어야 했나?”

니아는 크게 자른 케이크 한 덩이를 한입에 꿀꺽 넘겼다. 그리고 눈으로 도리도리, 부정의 의사를 밝혔다.

“왜?”

니아는 입술을 삐죽거리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또 언제 전쟁터로 갈지 모르는 기사단에 지원해서 뭐 해.”

레오는 니아의 대답이 마음에 드는 듯 눈을 작게 휘었다.

“하긴 그렇네. 황실 기사단은 황궁에서 황제 폐하를 지키는 데 주력하니까. 내가 네 곁을 떠날 수는 없잖아.”

니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눈동자가 레오 아리데오의 접시에서 멈췄다. 그녀가 세 번째 조각을 다 해치울 때까지 레오 아리데오는 아직 한 조각도 채 먹지 않은 상태였다.

“줘.”

단호하게 손을 내밀자 레오는 익숙하게 남은 조각을 입에 넣고는 접시를 그녀에게 건넸다.

니아는 남은 케이크를 모두 그의 접시에 덜었다. 레오는 황당해했으나 이내 미소 짓고는 포크를 푹, 케이크에 찔러 넣었다.

씩씩하게 음식을 먹기 시작하며, 그는 문득 생각난 듯 케이크를 입에 문 채 웅얼거렸다.

“아 참, 니아. 황궁에 재미있는 소문들이 있더라고.”

“무슨 소문?”

“황녀님과 필릭스 쿠아란 공께서 결혼한다는 소문.”

니아는 쿨럭 기침을 내뱉었다.

“아, 그 소문.”

“이미 황궁에는 그 소문이 파다하다던데.”

니아는 한 번 더 입가를 닦고 아무렇지 않은 척 종알종알 얘기했다.

“왜 그런지 알아. 지난번 황궁에서 열린 교수 간담회에서 황녀님이 결혼에 대해 잠깐 언급하셨거든. 워낙 유명한 교수님들이 오시고, 또 몇몇 조교들도 참석한 자리였는데……. 그날 있었던 이야기는 다 소문으로 퍼졌더라고.”

신문 보급소와 아카데미에서 돌아다니는 이런저런 소문들을 떠올리며 니아가 말하자, 레오 아리데오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그래서 정말 결혼을 하는 거야? 두 분 다 나이가 차긴 했는데…….”

“나야 모르지. 그보다 레오, 음 내가 오늘 딕시 댁스턱 교수님과…….”

“넌 어떻게 생각하는데? 두 분이 결혼을 한다면 말이야.”

주제를 돌리려 했으나 레오 아리데오가 말을 끊었다. 그건 무척 드문 일이었다.

레오는 니아의 답을 기다리며 묵묵히 남은 케이크를 입에 넣었다. 니아도 차라리 음식을 먹으며 시간을 벌고 싶었지만, 애석하게도 그녀의 접시에는 남은 케이크 조각이 없었다. 결국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하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해.”

음식을 먹던 레오 아리데오의 손길이 멈췄다. 그는 눈썹을 가볍게 위로 올렸다가 내렸다.

니아는 그의 눈치를 살피다 확신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많이 먹으니까 물리나? 표정이 좀 안 좋아졌는데.”

“아니, 괜찮아.”

걱정스레 물었으나 레오는 곧장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그는 말과는 달리 포크를 미련 없이 내려놓았다. 더 이상 먹을 생각이 없는 듯 그는 두 손을 테이블 아래로 툭 내리고선, 서늘해진 눈동자로 물었다.

“그보다 왜? 왜 결혼하지 않았으면 하는데?”

“그건…….”

니아는 적당한 대답을 찾으며 손가락을 빙빙 돌렸다. 말하기 어려운 진짜 답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첫 번째 이유는 혹시라도 그가 황제의 눈 밖에 나 미움을 살까 봐였다. 클라우디아 황녀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필릭스 쿠아란은 필요 이상으로 너무 커 버렸다고.

두 번째 이유는 그에게 약점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가 누구의 심장을 가졌는지 황녀가 알게 된다면 결혼을 무르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니아는 곧 그것은 기우라는 것을 깨달았다. 비밀을 폭로할 유일한 사람이 죽었으니까.

그렇다면 마지막 남은 세 번째 이유는…… 니아의 마음이었다. 그녀는 당장은 필릭스 쿠아란이 결혼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가 다른 이와 결혼한다는 사실을 떠올리니 누군가 심장 한구석을 쥐어짜는 듯 갑갑했다.

“나라가 너무 시끄러워질 것 같아서.”

결국 니아는 한 문장으로 짧게 요약했다. 거짓은 아니었으나, 마냥 솔직한 답 또한 아니었다.

레오 아리데오는 아, 하고 짧게 답했다.

“……이제 치울까?”

애매하게 웃은 니아는 깔끔하게 빈 접시 하나와 작은 조각이 남은 레오의 접시를 합쳐 두 손으로 들었다.

함께 테이블 위를 정리하는 동안, 레오 또한 생각에 골똘히 빠져든 듯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니아는 돌아서 주방으로 발을 옮겼다. 그러고는 부드럽게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레오, 우리 둘 다 이제 바빠지겠네. 못 보는 날이 더 많아질지도 몰라.”

니아야 언제나 바빴고 그는 이제야 막 황궁 기사단이 되었으니, 이제 두 사람이 함께 집에서 보내는 시간은 많이 사라질 터였다.

“그래도 레오, 일주일에 세 번은 함께 저녁을 먹을 수 있도록 하자. 나도 일을 빨리 끝낼 수 있도록 매일 노력해 볼게.”

당연히 알았다는 답이 돌아올 줄 알았는데 등 뒤에서 아무런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니아가 접시를 내려놓으며 뒤돌아서는데, 레오 아리데오가 주방 입구에 입을 꾹 다문 채 서 있었다.

“왜?”

레오 아리데오는 잠시 숨을 들이쉬곤 나직하게 말했다.

“그럼 두 분이 결혼을 하게 되면 니아.”

“응?”

“우리도 결혼하는 걸로 하자.”

“……뭐라고?”

“너랑 나. 결혼하자고.”

니아는 이해가 잘 되지 않아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야. 나랑 결혼하자, 니아.”

최대한 가볍게 말하려고 노력하는 듯했으나 끝에 가서는 목소리가 떨렸다.

니아는 레오 아리데오를 빤히 쳐다보다 이내 장난스럽게 답했다.

“레오 아리데오, 장난은 그만둬. 우린 가족인데 무슨 결혼을……. 재미없어.”

“어차피 가족이라면 난 너와 부부가 되고 싶어. 같은 성을 쓰고, 시간이 흐르면 아이도 낳고…….”

그러나 그가 진지하게 설득하려 들자 니아는 애써 지었던 웃음기를 지웠다. 그리고 싸늘한 표정으로 그를 향해 중얼거렸다.

“난 결혼 안 해.”

차가움과 단호함을 동시에 담은 말투에 레오 아리데오의 표정이 단번에 굳었다. 그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왜? 어렸을 때는 입버릇처럼 결혼하고 싶다고 말했잖아. 이제 와서 왜 생각이 바뀐 거야?”

“그건 어릴 때야.”

니아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 모습을 본 레오 아리데오는 아예 입을 다물어 버렸다.

한참 동안 그를 바라보던 니아가 힘들게 입을 뗐다.

“레오, 넌 결혼이 하고 싶어?”

“당연하지. 나도 어렸을 때부터 언제나…….”

“그렇다면 난 상관하지 않아도 돼. 그러니까…… 좋은 사람을 만나도 괜찮다고. 기사단에 들어갔으니 좋은 선 자리도 많이 들어올 거야.”

“내가 다른 여자와 결혼해도 괜찮다고?”

그는 니아를 멍하니 보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레오. 우리는 가족이고, 헤어져 있었던 시간이 길었던 만큼 서로에게 집착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있지. 나에게도 넌 유일한 사람이야. 영원히.”

니아는 조그마하게 중얼거렸다.

“그런데 넌 왜…….”

“하지만 세상에 우리 둘만 있는 것처럼 굴 필요는 없어.”

“…….”

“그러니까 난 신경 쓰지 말고 네 인생을 살아도 좋아. 우리가 떨어져 있어도 가족이란 사실이 변하는 건 아니니까.”

레오 아리데오는 입술을 잘근거리다 한참 뒤에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넌 결혼을 하지 않겠다면서. 넌 안 할 건데 왜 나보고는 하라는 거야?”

그것이 마치 투정처럼 들려 니아는 나직하게 웃었다. 레오에게 다가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입술을 작게 휘었다.

“그건…….”

예전에는 막연히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었다. 퍼시와 안나 같은 부부가 되고, 또 아이를 낳고 행복하게 지내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

그 생각은 그들 모두를 잃은 후에는 집착의 형태로 유일한 소망이 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었다.

남편 될 사람을 평생 속이며, 매일 들킬까 봐 안절부절못하며 살기는 싫다.

아이를 낳는 일도 현실적인 문제였다. 자신과 같은 아이들을 세상에 태어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건 니아가 스스로를 사랑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자식에게 그녀와 같은 힘든 길을 걷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 나라가 바뀌지 않는 한, 니아의 결심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난, 레오……. 나도 언젠간 너에게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왜 결혼을 할 수 없는지에 대해서…….”

때가 왔다고 느꼈다. 그녀가 어떤 비참한 일들을 겪었는지는 몰라도 괜찮았지만, 적어도 니아 프레슬리가 어떤 존재인지는 알려야 했다.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그러나 니아는 레오가 필릭스 쿠아란과 마찬가지로 그녀를 달리 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떨림을 최대한 감추고 부드럽게 레오와 눈을 맞추는데, 눈이 마주치려는 순간 그가 고개를 휙 돌렸다. 순간 벙찐 니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의 옆모습만 바라보았다.

낮은 목소리가 니아의 침묵을 깼다.

“……필릭스 쿠아란 때문이야?”

니아가 입을 벌린 채 바로 대답하지 못하자 레오 아리데오는 체념한 듯 웃었다.

“그런 거지?”

“…….”

“아직도 잊지 못한 거지?”

“레오, 그런 게 아니라…….”

체념한 얼굴과는 달리 그가 내뱉는 말들은 조금씩 격앙되어 갔다.

“네가 그렇게 기다렸는데 찾아오지도 않는 사람이잖아. 황녀와 결혼을 할지도 모른다는데, 근데도 넌 그 사람이 좋아? 아직도?”

니아가 오해를 풀기 위해 설명을 하려는 순간 바깥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와르르, 무언가 무너지는 소리에 니아는 시선을 휙 돌렸다. 동시에 레오 아리데오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당황한 손은 레오에게로 향했으나 시선은 창문 밖에 고정된 채 움직이지 않았다.

누구지?

이미 죽었으나, 모르트 독테가 니아의 집 주위를 맴돌았던 사실이 있었다. 또 누군가 그녀의 집을 감시하고 있는 거라면…….

“레오, 잠시만. 나 나가 볼게. 밖에 누가 있는 것 같아.”

열려 있는 창문을 흘깃거리다 겨우 레오를 보았을 때, 그는 상처받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레오…… 나중에,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

바깥을 확인해 봐야겠다는 생각 반, 마음을 더 정리해서 레오에게 말해야겠다는 생각 반으로 니아는 말했다.

결국 레오의 대답을 듣지 않은 채 그녀는 바깥으로 향했다.

“……아무도 없는데.”

그러나 바깥에서는 사람의 흔적이라고는 찾을 수 없었다. 단지 벽에 기대어 놓았던 나무판자들이 쓰러져 있을 뿐.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날짐승들의 짓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니아는 집으로 다시 들어왔으나, 어느새 레오는 방으로 향한 이후였다.

그날 저녁, 공작가.

“……헉, 허억!”

필릭스 쿠아란은 고통 속에 깨어났다. 하루 종일 뭉근하게 그를 들쑤셨던 고통은 밤이 되자 지독한 악몽이 되어 그를 쫓았다.

지긋지긋한 오른팔.

그보다 더 지긋지긋한 심장.

달뜬 신음을 내뱉는 창백한 얼굴에는 신경질적인 분위기가 감돌았다.

필릭스 쿠아란은 숨을 내쉬고 뱉을 때마다 스스로의 정신이 온전하지 않은 것만 같아 주먹으로 심장과 머리를 내리쳤다. 그래도 고통은 중화되지 않았다.

그는 지난 사 년간, 지독한 불면증을 앓았다. 쉽사리 잠들지 못했고, 잠이 들어도 언제나 선잠에 불과했으며, 작은 풀벌레 소리에도 기민하게 반응했다. 때로는 지독한 아픔 때문에 며칠 밤을 새운 적도 있었다.

전쟁터에서는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는 적 때문이라고 그 원인을 단정 지었으나, 이제 변명은 통하지 않았다.

에슬란 제국으로 돌아온 이후 그의 불면증을 더욱 악화되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니아 프레슬리를 본 이후부터.

안 보고도 살았는데, 한번 눈에 담고 나니 둑이 터져 버린 듯 심장이 뛰었다.

필릭스 쿠아란은 타는 듯한 목을 축이기 위해 몸을 완전히 일으켜 세웠다. 고통을 참아 내느라 일자로 앙다물고 있던 입술이 천천히 열리고, 그 사이로 그는 생명수처럼 미지근한 물을 받아 마셨다.

물 한 잔을 단숨에 다 비운 필릭스의 목울대가 울렁거렸다.

침대 모서리에 비스듬히 기댄 그는 중얼거렸다.

“……미치겠군.”

어깨부터 오른손까지 예고 없이, 그리고 끊임없이 그를 괴롭히는 고통에 이제는 익숙해질 만도 하건만. 필릭스 쿠아란은 도저히 새벽을 평안히 보내는 방법을 찾을 수가 없었다.

다행인 것은, 오직 밤에만 이런 고통이 찾아온다는 것이었다. 아침이 되면 사라지는 서리처럼 팔은 언제 그랬냐는 듯 감각을 잃었다.

유일하게 필릭스 쿠아란의 불면증을 아는 부단장 포말라드 웨이는 귀국 이후 심해진 심리적 압박 때문이 아니냐는 소견을 보였다. 백성들의 기대감, 젊은 공작으로서의 책임, 이웃 나라의 견제…….

다 개소리였다.

이것은 죄책감의 값이었다.

사 년. 필릭스 쿠아란은 지난 사 년간 그의 무수한 밤들의 수만큼 각각의 불면증의 이유를 댈 수 있었다. 전쟁터. 얼마나 핑곗거리가 좋은 곳이던가.

그러나 결국 한 가지를 말해야 한다면, 그것은 죄책감. 니아 프레슬리를 향한 죄책감일 것이다.

죄책감보다 빨리 도망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불행히도 그는 그것을 니아 프레슬리의 곁을 떠난 뒤에야 처절히 깨달았다. 그녀가 곁에 있어도 없어도 죄책감의 무게는 다르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것은…….

“이제는 정말 원수의 자식이군.”

니아 프레슬리가 그의 목에 칼을 들이민다고 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았다.

아니, 그의 계획이 잘만 마무리된다면 정말로 니아 프레슬리 손에 죽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어쩌면 사 년 만에 웃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일어나야겠어.”

동이 트려면 멀었으나 필릭스 쿠아란은 일어섰다. 맨발로 테라스로 나가 먼발치를 바라보며 아침이 오기를 기다렸다.

아직은 살아갈 이유가 있었으니까. 아직은. 아직까지는.

공작가의 집사 길리 포바즈는 필릭스 쿠아란 대공 앞으로 온 모든 서신을 정리 중이었다.

날이 밝자마자 종이 무더기에 몸을 던지듯 일을 시작한 그였으나, 처리해야 할 서신들은 오늘 안에 마무리하기도 버거울 만큼 양이 방대했다. 이미 질려 버린 그의 눈은 기운 없이 퀭하게 꺼진 채 색이 없었다.

피로가 짙게 밴 얼굴로 길리는 손을 휙휙 빠르게 움직였다. 쓸데없는 안부 인사 같은 것은 바로 옆으로 치웠으며, 이런저런 연회 초대장도 신속히 폐기 처리에 들어갔다.

그런 그를 신기하게 바라보던 하인 한 명이 조심스럽게 그의 일거리를 돕기 시작했다.

“집사님, 도자기 박람회 초대장인데요, 이것도 폐기 처리할까요?”

“당연하지. 공작님께서 도자기 박람회에 가실 것 같아? 서쪽에서 해가 떠도 불가능……. 이건 또 뭐야, 꽃꽂이 파티?”

길리 포바즈는 낮게 욕설을 지껄였다.

필릭스 쿠아란이 제국으로 돌아온 이후, 공작가에 할 일이 넘쳐나다 못해 활화산처럼 폭발하고 있었다.

꽃꽂이라니. 필릭스 쿠아란에게 꽃꽂이라니! 이런 쓸데없는 초대만 줄어도 길리 포바즈의 일거리가 삼분의 일은 줄어들 터였다.

“또 뭐야.”

“기사단을 연회에 초청하겠다는데요?”

“뭐? 그 식충이들을?”

“백작가에서요. 기사단 분들이 정말 좋아하겠는걸요? 연회라면 사족을 못 쓰잖아요.”

이런저런 외부 요청은 정중히 거절이라도 하겠으나, 특히나 리바론 기사단, 그 식충이들의 모임은 정말 참아 주기 힘들었다.

“하루라도 남의 집 가서 얻어먹었으면 싶지만…….”

길리 포바즈는 고민 끝에 고개를 내저었다.

“그 식충이들이 백작가에서 무슨 사고를 칠 줄 알고? 싸움박질이나 하지 않으면 다행이지.”

“……폐기 처리할게요.”

“당연하지.”

중얼거린 길리 포바즈는 표정과는 상반된 아주 유려한 필체로 정중한 거절 서신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그는 화가 가시지 않은 듯 구시렁댔다.

“백작가 이것들은 또 무슨 생각이래? 기사단 전체를 불렀다가 괜히 황실 눈 밖에 나려고. 안 그래도 미치겠는데, 백작가까지 합세해 봐. 내가 제 명에 못 죽지.”

시종은 무어라 대꾸하지 못한 채 하하, 웃어넘겼다.

한참 뒤, 그는 다른 서신들보다 훨씬 고급스러운 종이를 발견했다. 정갈한 필체를 만지작거리며 시종은 길리 포바즈에게 물었다.

“집사님, 혹시 이건요? 이것도 폐기해야 할까요?”

“뭔데?”

“보 아카데미에서 온 요청서입니다. 강연에 초대하고 싶다는데요.”

“아, 그거 벌써 열 통째야. 공작님이 돌아오신 다음 날부터 보내오더군. 그래도 공작님께서 다니셨던 아카데미니 정중히 거절의…….”

강연 요청서를 빼앗아 가볍게 훑어보던 길리 포바즈는 눈살을 찌푸렸다. 좁쌀처럼 가늘어졌던 그의 눈은 점차 확장되어 갔다.

“이게 뭐야?”

“네?”

“니아 프레슬리가 왜 공작님을 초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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