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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비뚤어진 문패 (42/75)

12. 비뚤어진 문패

“또…….”

니아는 신경질적으로 문패를 쿵 하고 쳤다. 비뚤어진 문패는 미동이 없었고, 아픈 건 니아의 손뿐이었지만 달리 화풀이할 곳이 없었다.

“차라리 없애든가 해야지.”

도대체 며칠째인지 셀 수도 없었다. 어두운 고동빛 문에 걸린 녹색 문패. 그렇게 눈에 띄는 게 돌아가 있으면 얼마나 미감을 해치는지 모른다. 돌려놓는 것도 한두 번이지, 계속 이런다면 니아도 다른 수가 없었다. 부숴 버리는 수밖에.

예민한 손끝이 문패에 닿았다. 떼어 낼 요량이었다.

‘아, 레오 아리데오. 난리를 칠지도 몰라.’

그러다 또다시 레오가 이 문패를 만들 때 얼마나 즐거워했는지가 떠올랐다. 니아는 차마 문패를 잡아당기지는 못한 채 또 한 번 쾅 소리가 나게 문패를 쳤다.

이웃이 이 장면을 목격한다면 굉장히 폭력적이라 여길지도 모르겠으나, 오늘은 모든 것이 거슬렸다. 어쩔 수 없다는 의미였다.

“문패. 이놈의 문패.”

니아 프레슬리는 한숨을 푹푹 내쉬며 문고리를 잡았다. 괜한 곳에 화풀이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니아가 답답함을 풀 수 있는 곳이라곤 이런 나무판자뿐이었다.

“잠깐만.”

니아는 물끄러미 문패를 바라보았다. 너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 때 즈음, 손이 먼저 문패를 망설임 없이 뒤집었다.

니아 프레슬리의 오른손은 힘없이 바닥을 향해 떨어졌고, 왼손은 입을 틀어막았다. 표정이 이지러지고 머리에는 시끄러운 경보음이 울렸다.

“누가…….”

며칠간 계속해서 문패는 비뚤어져 있었다. 바람에 움직일 만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으나, 더 깊이 고민하지 못한 것이 잘못이었다.

바람이 아니면 사람이 한 것이라는 걸 알아야 했는데.

<나는 네 모든 비밀을 알고 있다.>

글씨가 깊게 파여 있었다. 날카로운 칼날이 한 자, 한 자 아로새기고 간 자리. 니아 프레슬리에게 전하는 말이었다.

“누가…….”

니아는 탄식과 함께 또 한 가지를 발견했다.

문패로 가려진 문 부분에 작은 구멍이 뚫려 있었다. 니아는 숨을 죽이고 그곳에 왼쪽 눈을 가져다 대었다.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였다. 누군가 감시를 하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이것은 경고였다.

니아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말 아래에 이어 적힌 문구를 읽었다.

<가장 환한 달이 뜨는 날. 루네플랑.>

힘이 전부 빠진 다리를 부여잡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내일이면, 꽉 찬 달이 에슬란 제국의 하늘에 떠오를 듯했다.

이른 새벽, 니아는 잠든 레오 아리데오를 우수에 찬 눈으로 바라보았다.

물끄러미 그를 내려다보다 붉은 머리칼을 살짝 쓰다듬었다. 아주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는데도 레오는 간지러운 듯 콧등을 찌푸렸다.

니아는 머리를 쓰다듬던 손길을 내려 보드라운 이불을 매만졌다. 그러고는 이불이 평평해지도록 주름을 펴고 레오의 어깨까지 이불을 끌어당겨 정돈해 주었다.

다시 평온한 표정을 한 채로 잠에 빠져 있는 그를 보며 니아는 생각했다.

레오 아리데오는 그녀가 가진 것 중 가장 온전한 것이다.

그녀를 둘러싼 많은 것들은 사라지거나 부서졌으며, 이가 빠진 접시처럼 이리저리 생채기가 났다. 오랜 시간 기다리던 필릭스 쿠아란도 결국에는 죄책감에 잡아먹히지 않았던가.

온전한 것이 어디에도 없는 세상에, 레오는 유일하게 그녀 곁에 있는 사람이었다. 가족. 그 울타리를 니아는 지켜야 했다.

“다녀올게.”

혹시나 레오가 깰까 싶어 허공에 입을 맞춘 니아는 눈빛으로 그를 부드럽게 쓸었다.

공중에 흩뿌린 입맞춤에는 맹세가 담겨 있었다. 레오의 평온 하나는 지켜 줘야 한다는 맹세. 늘 그래 왔듯이…… 홀로 모든 일을 감당해야 했다.

“……니아? 어디 가?”

“아, 미안. 깼구나.”

“으…….”

“더 자, 더 자.”

작게 속삭이는 니아를 무시한 채 레오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창밖을 확인한 그가 부은 두 눈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너무 이르지 않아? 사무실에 가기엔…….”

“오늘 할 일이 많아.”

니아는 혹여 그를 깨울까 조심스러웠던 손길을 다시 그에게로 뻗었다. 살아 있는 사람의 숨결이 손에 닿았다. 절로 미소가 새어 나왔다. 편안할 수 없는데도 편안했다. 강해지기 어려운 이 상황에서도 레오 덕분에 강인함이 니아를 채웠다.

“레오 넌…… 날 사랑하지? 우린 가족이고, 행복해야 하잖아. 난 정말 행복해. 이렇게 같이 살고 있는 게.”

내게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레오 아리데오는 진지한 니아를 향해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따뜻하게 웃었다.

“그럼. 나도 행복해.”

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어.”

지켜 줘야 할 존재가 여기 있는데, 니아가 무너질 수는 없는 일이었다.

니아는 함께 일어서려는 레오를 억지로 눕히고 돌아섰다. 약하게 버둥대던 레오 아리데오는 니아가 포기하지 않자 결국 온몸에 힘을 빼고 똑바른 자세로 누웠다. 시선은 니아에게서 떼지 않은 채로. 그러나 곧 포근한 침대의 부름에 서서히 몸을 적셔 갔다.

“늦어?”

레오는 잠에 젖은 목소리로 칭얼거렸다. 니아는 돌아보지 않은 채 답했다.

“많이 늦을지도 몰라.”

“쉬엄쉬엄하지…….”

졸린 와중에도 걱정이 듬뿍 담긴 레오의 말. 발걸음이 잠시 멈칫거렸으나 니아는 가벼이 답했다.

“쉴 수 없을 때도 있는 법이지.”

천천히 문을 열었다. 총총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가며 중얼거렸다. 혼잣말에 가까운 작은 목소리로.

“갔다 올게.”

니아는 레오의 방을 나서자마자 선득하게 달라붙는 냉기를 피하기 위해 몸을 두 팔로 감쌌다. 그렇게 니아는 밖으로 나갔다. 반드시, 갔다가 돌아올 다짐을 남기며.

그날 밤. 모두가 퇴근한 사무실.

텅텅 빈 아카데미에서 니아는 펜을 던지며 한숨을 쉬었다. 창밖에 커다란 보름달이 보였다. 이보다 더 동그랗고, 하늘을 꽉 채울 수는 없는 창백한 달이었다.

그녀의 자리에만 켜져 있는 불을 한 손으로 쥐어 껐다. 사방이 어두워지자 홀로 움직이던 그림자도 모습을 감추었다. 시간이 되었다.

‘가져가야 할까. 그렇게까지 할 일이 생길까.’

오늘 하루 내내 품고 있던 것을 니아는 오른손으로 단단히 쥐었다가 폈다. 단도였다.

사람을 해치는 이런 무기를 좋아해 본 적도, 써 본 적도 없었다. 그러나 써야만 한다면, 쓸 생각이었다.

‘가져가자.’

그리하여 니아는 오른쪽 주머니에는 단검을, 그리고 왼쪽 주머니에는 돈을 집어넣은 채 길을 나섰다. 짙은 회색의 로브로 온몸을 감싸고, 적색 모자를 깊숙이 눌러쓰고서.

루네플랑.

처음 들어 보는 이름이었으나, 새벽 일찍 신문 보급소의 윌리 로망을 만나 떠보니 곧장 알 수 있었다. 그는 에슬란 제국의 밝은 곳뿐만 아니라 음지의 소식에도 능한 자였다.

‘그런데 니아, 그런 곳은 왜 물어봐? 설마 찾아가려고 하는 건 아니겠지? 루네플랑은 사창가 한가운데 있는 마약 소굴이라고.’

역시나 루네플랑은 협박범이 만나자고 한 장소가 맞았다. 예상은 했으나, 니아는 그곳의 정체를 확인하자 불쾌감에 눈을 꽉 감았다.

사창가 뒷골목에 위치한 술집 주점.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 정한 장소라기엔 의도가 다분히 악질적이었다. 니아 프레슬리가 지옥처럼 여기는 곳이 바로 그런 뒷골목이었다.

이미 협박범의 정체를 눈치챘지만, 덕분에 니아는 확신하게 되었다.

그러나 협박범이 확실할 그가 모르는 것이 하나 있었다.

니아는 그때의 열 살 아이가 아니다.

그리고 십 년간 그의 학대를 견디던 그 소녀도 아니다.

니아는 이제 지켜야 할 것이 있다.

커다란 길을 걷고 있는데 조금씩 길가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더 직진해 들어가니 어느 순간 악취가 코를 찔렀다. 그늘지고, 냄새 나는 골목에 들어선 이후부터였다.

제국의 아침이 밝고 화려한 만큼, 그 밤은 무척 어둑하고 축축했다. 동전의 양면도 이만큼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흐릿하고 몽롱한 불빛들이 골목 사이사이, 은근하게 새어 나왔다. 가게 문 앞마다 마약인지 담배인지 모를 것을 들이켜는 남자들이 초점 없는 눈으로 킬킬댔고, 얼굴과 몸을 가렸으나 감출 수 없는 작은 체구 때문에 니아를 향해 불쾌한 추파를 던지는 남자들도 있었다.

그럴수록 니아는 더욱 걸음을 빨리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걸음이 느려지기도 했다. 차마 외면할 수 없는 것들을 발견하고 나서는.

니아는 골목에서 여러 명의 니아 프레슬리를 발견했다. 골목을 전전하는 떠돌이 아이들이 차디찬 바닥에 누워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빛을 잃은 눈빛으로 허공을 향해 멍한 입술을 벌린 채. 그렇게 버려진 아이들을 보면 쉬이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직 시체가 되지 않았으니 이 골목에라도 있을 수 있는 거겠지만, 곧 죽음에 먹힐 아이들이었다.

배고프겠다. 아프겠다. 슬프겠다. 너무 작다…….

어쩔 수 없이 한 명, 두 명 지나치면서도 스스로에 대한 회의감이 들었다. 당장 병원에 데려간다고 하더라도 살릴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금방 돌아올게. 돌아와서 최선을 다할게.’

니아는 협박범을 만나고 모든 것을 잘 해결한 뒤에,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꼭 그들에게 남은 돈을 다 나눠 주리라고 맹세했다.

니아는 다 떨어져 가는 간판 앞에서 발길을 멈췄다. 당장에 무너져 내린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어 보이는 낡은 간판이었다.

루네플랑. 술집을 가장한 마약 거래소.

신경질적으로 허름한 간판을 다시 한번 올려다본 니아는 문을 열었다.

삐그덕 소리를 내며 문이 열리자마자 악취와 싸구려 술냄새가 섞인 향이 코를 찔렀다. 골목에서 맡은 냄새보다 훨씬 더했다. 니아는 구역질이 났으나 티를 내지 않은 채 내부로 들어갔다.

“어서 오시오. 아…… 여자분이신가.”

앞니가 빠진 채 삐딱한 자세로 술을 들이켜고 있던 남자가 가까이 다가왔다. 뭘 믿고 혼자 이곳에 왔냐는 뉘앙스가 강했다. 그의 낯에는 주흥이 자욱했고 눈가엔 벌어진 상처 자국이 군데군데 나 있었다.

니아는 대답 없이 구석의 빈자리에 가서 앉았다. 그녀를 좇던 호기심 가득한 눈들은 그녀가 고개를 숙인 채 미동도 하지 않자 곧 뿔뿔이 흩어졌다. 이미 무언가에 취해 정신 나간 사람뿐이었다.

이가 빠진 남자가 다가와 킥킥거리며 물었다.

“뭐 드릴까. 술? 마약? 아니면 여자? 아, 남자를 드려야 하나.”

또다시 빈정거리는 어조였다.

니아는 일일이 반응하지 않았으나, 돈을 좀 쥐여 주는 게 나을지 고민스러웠다. 만약 준다면 어느 정도의 돈을 주어야 할지도. 그녀에게 돈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면 한순간 회까닥 눈이 돈 사람들이 그녀를 노릴지도 모른다.

고민하고 있는 사이, 남자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내 손님이다…… 밍크.”

말끝마다 질질 목소리를 끄는 사람. 구부정한 허리를 하고 니아를 내려다보던 사람. 화가 나면 언제나 그녀에게 분풀이를 하던 사람. 니아가 아주 잘 아는 사람이었다.

가게에 들어온 순간부터 시종일관 가면을 쓴 것처럼 무표정하던 니아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역시 당신이 맞았군요.”

“그래, 나야…….”

공작가의 의원이었던 모르트 독테가 킬킬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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