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감정의 잔재
니아는 딕시 댁스터를 따라나섰다. 머리가 과부하를 맞이하였음이 분명했다. 회의장 건물을 빠져나가는 내내, 땅을 밟고 걷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땅이 움직이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을 만큼 백지상태였다.
“어땠지?”
앞장서 걷는 딕시 댁스터가 물었다. 니아는 물끄러미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학계의 이야기를 나누는 곳이라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던 것 같아요.”
“그래.”
딕시 댁스터는 부정하지 않았다.
“황궁이란, 아니 황족이란 생각보다 더 무서운 존재인가 봐요. 모든 교수님들이 다 당황하셨잖아요. 황녀님의 장난에.”
니아는 속으로 과연 장난이 맞을까 중얼거렸다. 장난치고는 너무 살벌하지 않았던가.
“그거 하나를 알게 되었다면 배울 것은 모두 배운 거지. 하루 종일 바보같이 굴더니, 정신은 제대로 붙들고 있었나 보군.”
니아는 맥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해결되지 않는 호기심을 물었다.
“왜 신성에 대해 말씀하셨어요? 그것 때문에 분위기가…….”
분위기가 엉망이 되었잖아요.
니아는 뒷말을 삼켰다. 딕시 댁스터를 탓하는 것처럼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질문은 이미 해 버렸지만.
“글쎄. 나도 조금 충동적이 되었던 모양이야.”
충동적. 딕시 댁스터와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니아는 또 한 번 참지 못하고 물었다.
“황녀님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으셨다고요? 왜요?”
딕시 댁스터는 뚜벅뚜벅 걸음을 옮길 뿐 답이 없었다. 길어지는 침묵에도 니아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딕시 댁스터는 두 번 묻는다고 대답해 주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건물을 완전히 빠져나간 순간, 딕시 댁스터가 갑작스레 걸음을 멈추었다. 얼굴에는 묘한 미소를 띤 채. 그것은 이상한 기시감이었다.
“너만 알고 있어라.”
“……네?”
“황족이란 작자들.”
“…….”
“내가 별로 안 좋아하거든.”
딕시 댁스터의 이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유치한 속내를 드러내는 행위 따위, 그녀는 한 적이 없었다.
니아는 무어라 답해야 할지 몰라 눈을 굴렸다. 그러나 곧 딕시 댁스터는 다시 걷기 시작했고, 니아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따랐다. 그러다 목에 걸리는 사실 하나를 결국 목소리로 내고 말았다.
“……그런데 교수님, 곧 결혼 발표가 날 것 같죠. 아무래도.”
학계의 내로라하는 교수들 앞에서 황녀가 한 말이다. 장난스레 중얼거렸으나 실상은 공식적인 예고나 다를 바 없었다. 니아도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황녀와 필릭스 쿠아란?”
“네. 그래서 왔나 봐요. 공작님도.”
“그럴지도 모르겠더군. 너랑은, 아니 우리랑은 상관없는 일이야.”
황실과 공작가의 결혼 여부 따위, 니아에게는 상관없는 일이 맞았다. 하지만 그 공작이 필릭스 쿠아란이라는 것이 니아에게는 문제였다.
“황녀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황권은 더 단단해지겠어요. 어마어마한 권력을 손에 쥐게 되시는 거잖아요.”
니아는 댁스터의 말처럼 아무렇지 않은 듯 어깨를 들썩였다. 마음 한구석의 씁쓸함을 다스리며.
멀어졌다, 멀어졌다 했지만 정말로 멀어진 그를 떠올렸다. 가까이 있어도 이제 그는 너무 먼 사람이었다.
“글쎄. 위협적이라는 말이 너에겐 그렇게 들렸나?”
“강력한 황권……으로 알아들었는데요. 아닌가요?”
“황녀가 필릭스 쿠아란과 결혼하면 가장 위태로운 자가 누구겠어.”
니아의 머릿속에 몇몇 귀족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안 그래도 거대한 권력을 가진 필릭스 쿠아란이 황녀와 결혼까지 하게 된다면, 그럼 가장 반발이 심한 것은 귀족들일 게 뻔하지 않은가.
그러나 딕시 댁스터는 주위를 살핀 후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것은 니아가 차마 도달하지 못한 사고의 흐름이었다.
“현 황제겠지.”
“…….”
“필릭스 쿠아란이 필요 이상의 공을 세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아?”
“그게 무슨…….”
“니아 프레슬리, 우리는 정치에 관여하지 않는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할 뿐이야. 그렇지만 이것 하나는 알고 있는 게 좋겠다.”
니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직 그들은 황궁 안이었다. 그러나 딕시 댁스터의 말은 황궁과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황제의 가장 큰 역할은.”
“…….”
“의심하는 것이다.”
황궁에 들어왔을 때 아이처럼 황궁의 외관에 대해 재잘거리던 니아는 불과 몇 시간 만에 어두운 늪에 발을 내딛게 된 듯했다.
“어째서요?”
“위협적인 세력을 무너뜨려 권력의 균형을 유지하고, 반란의 씨앗을 초장에 잠재우기 위해서.”
“…….”
“황제의 자리에 위협이 된다면 아들마저 죽여야 하는 것이 황제다. 네가 황제라 해도, 위험 세력은 없애고 싶지 않겠어?”
니아는 순간 해사하게 웃는 아론 엘로이의 목이 날아가는 상상을 했다.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께름칙한 사람이었으나 아버지의 손에 목이 날아갈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니아는 쭈뼛거리다 중얼거렸다.
“에슬란 제국은 황권이 강한 나라잖아요.”
그러나 그렇게 말하면서도 스스로 설득력이 부족함을 느꼈다.
황권은 언제나 절대적인 것이라 배웠다. 그러니 그 이상의 것은 알지 못했고, 황권은 그저 당연하게 느껴지는 것 중 하나였다. 귀족이 귀족이고, 평민이 평민이듯이, 황족은 황족이라 생각했으니까.
황실에 대해 진지하게 고려해 본 적 없는 니아는 이 대화를 반전시킬 만한 힘이 없었다. 딕시 댁스터는 그런 니아를 다 안다는 듯 부드럽게 을렀다.
“평화라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평화가 깨지기 전의 상태라고도 할 수 있지. 폭풍 전의 바다가 가장 고요한 것처럼. 언제 폭풍이 들이닥칠지 모르는데, 그 평화가 진정한 평화라고 볼 수 있을까.”
“에슬란 제국이 위험하다고 말씀하고 계신 건가요?”
“아닐지도 모르지만. 또 그럴지도 모르지.”
니아는 할 수 있는 한 목소리를 작게 내어 중얼거렸다.
“……반란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요?”
“내 대답은 방금과 똑같다.”
딕시 댁스터는 니아를 뚫어져라 보았다. 마치 눈빛으로 대답을 대신 하는 것처럼. 필릭스 쿠아란이 필요 이상의 공을 세웠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녀의 답이었다.
니아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필릭스 쿠아란 공작님은 반란을 일으키실 분이 아니에요. 나라를 위해 그렇게나 공을 많이 세우셨는데……. 반란이라니, 말도 안 돼요.”
“확실해?”
“…….”
“필릭스 쿠아란에 대해 무엇이든 확신할 수 있냐고.”
“저는…….”
사 년 전이라면 그럴 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말했겠지만, 이제 니아는 필릭스 쿠아란에 대해 확답을 내릴 수 없는 처지였다. 무엇도. 무엇 하나도.
결국 니아 프레슬리는 다시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우습게도 패배감을 느꼈다.
“댁스터 교수님, 그럼 황녀님과 쿠아란 공작님은…… 결혼하지 못할까요? 황제 폐하께 두 사람의 결혼이 너무 큰 위협이어서요.”
그러나 니아의 패배감은 곧장 기대감으로 전환되었다. 초라하고, 참으로 무의미한 기대감이었으나.
필릭스 쿠아란이 황녀와 결혼하지 않는 게 뭐 그렇게 기쁜 일이라고. 어차피 남의 것이 될 사람을.
딕시 댁스터는 빙긋이 웃었다.
“그래서 오히려 내 눈엔 오늘 황녀가…… 너무 어리숙하게 보이더군. 무엇에 쫓기는 사람처럼.”
니아는 다른 대답을 찾지 못했다. 그녀는 황녀에게서 조급함 대신 위압감을 느꼈지만 그것은 그저 일차원적인 니아의 감상일 뿐이었다.
딕시 댁스터는 니아보다 훨씬 더 지혜롭고 많이 배운 사람이다. 적어도 니아는 그녀가 틀리는 걸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결국 수긍하고 말았다.
“……그러셨군요.”
딕시 댁스터는 무표정으로 답했다.
“그래. 알아들었다니 다행이구나.”
“네.”
적어도 필릭스 쿠아란과 관련해서 댁스터의 말은 반박할 여지가 없었다. 황제가 아닌 다른 존재를 향한 백성들의 사랑은 독이 될 수 있다. 니아는 그 점에 동의했다.
“많은 생각이 드네요.”
댁스터의 말을 곱씹고 있는 니아 프레슬리의 눈앞에서, 딕시 댁스터가 엄지와 검지를 딱 부딪쳤다. 니아는 불현듯 고개를 들었다.
“니아, 넌 더 깊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러니 그만.”
부드럽게 흘러나오는 그 말에 니아는 오히려 떼를 쓰는 아이처럼 물었다.
“무엇을요? 이미 교수님께서 생각하시는 바를 제게 전달하셨잖아요.”
“네가 신경 쓸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다. 어차피 너와는 상관없는 일이니까. 필릭스 쿠아란 정도는 돼야 정치판의 장기말로 설 수가 있는 거야.”
“…….”
“괜히 장기말이 되었다가 죽지 말고. 끼지 말고 네 자리를 지켜.”
쭉 혼란스럽던 니아는 이번에야말로 명료하게 답했다.
“제가 관련될 일이 뭐가 있겠어요?”
한낱 조교에, 별 볼 일 없는 작위에, 뒷배도 없는 여자 하나가 무슨 장기말씩이나.
그러나 딕시 댁스터는 니아의 태도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래. 사람은 분수에 맞게 살아야 하는 거다.”
“네?”
“들었잖아.”
순간 싸늘했다.
딕시 댁스터의 입에서 나온 말은 모두 정답이었으니 지금의 말도 정답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니아의 마음에 들지 않는 말이었다. 적어도 그녀의 입에서는 나오지 않을 거라 믿었던 말이었기에.
그 이후에 니아가 입을 꾹 다문 나머지, 황궁 밖으로 나설 때까지 그녀와 댁스터 사이에 더 이상 대화는 없었다.
“자, 이제 황궁 밖이다. 난 일이 남아서 아카데미로 돌아갈 생각이야. 넌 알아서 들어가도록 해라.”
댁스터가 깔끔한 인사로 오늘을 마무리했다. 그러고는 니아가 대답할 시간도 주지 않고 멀어졌다.
니아는 그녀의 뒷모습을 향해 ‘조심히 들어가세요’, 외치려고 했다. 그러나 결국 아무런 말도 꺼낼 수 없었다.
누군가 그녀가 황궁 밖으로 나오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휙 끌어안듯 이끌었기 때문이었다. 니아는 놀라 소리를 치려 했지만, 그녀를 붙잡은 손이 누구의 것인지를 알게 되자 묵묵히 입술을 다물었다.
반쯤 포기했으나, 결국 반쯤은 포기하지 못하고 기다리던 사람이었다.
낯설어졌을 거라 생각했으나 익숙함이 느껴지는 손길이었다.
그는 니아를 황궁의 바깥, 구석진 담벼락으로 이끌었다.
필릭스 쿠아란은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사람이 오지 않는 그늘진 구석에 그의 숨소리만 울려 퍼졌다.
황궁의 담벼락에 기댄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만 볼 뿐 누구 하나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니아는 고통스러운 듯 일그러진 그의 얼굴을 천천히 관찰했다. 바다 깊은 곳을 담은 듯한 눈동자, 이마에서부터 코까지 조각상을 떠올리게 하는 매끈함. 선이 많이 굵어진 얼굴이었다.
드디어 가까워졌다. 망토로 가린 오른팔과 깔끔하게 드러난 왼팔. 니아는 그의 망토를 잡아 오른팔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을 꾹 눌렀다.
문득 그의 키가 더 커졌음을 깨달았다. 예전에도 니아는 그를 올려다봐야 했는데. 그의 몸집은 그의 명성만큼 더 커다래져 있었다. 지난 사 년간 동안 그가 홀로 채워 온, 그리고 변화시켜 온 흔적들이 낱낱이 보였다.
필릭스 쿠아란의 시선이 니아에게 오래 머물렀다. 그러다 그는 겨우 신음처럼 목소리를 뱉었다.
“니아…… 프레슬리.”
그렇게 힘겹게 나온 말이 이름뿐이라니. 그가 너무 뜸을 들인 나머지 니아는 더 좋은 것을 기대했다. 가령, 그녀가 줄곧 듣고 싶어 했던 이야기라든지.
왜 이제야. 왜 오늘에야.
왜 떠났어요?
왜 찾아오지 않았어요.
‘왜’로 점철된 질문들이 니아의 혀 속에 맴돌았다. 그중 무엇 하나를 꺼내 뱉으려는 순간, 필릭스 쿠아란은 그의 표정만큼이나 일그러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네가 날 싫어하는 것 알고 있어. 아니, 싫어할 수밖에 없다는 것도.”
“…….”
“끔찍하게 여길 테지.”
그는 돌연 초연해졌다.
“나도 네 눈앞에 다시 나타날 생각은 없었어.”
“…….”
“네가 여기 오지만 않았더라면…….”
초연해진 지 십 초도 지나지 않아, 그는 돌연 화를 내었다.
“도대체 왜 황궁에 온 거야?”
그건 니아가 묻고 싶은 말이었다. 왜 공작씩이나 되는 그가 교수 간담회에 왔는지. 정말 황녀의 부탁 한마디에 냉큼 온 것인지. 정말로 황녀와 결혼을 할 것인지 아닌지.
“도련님은 왜…… 오셨어요?”
니아는 한마디를 뱉고 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그제야 조금 전의 필릭스 쿠아란이 이해가 되었기 때문이다. 고작 말 한마디를 꺼내기가 그렇게 힘에 겨웠다.
필릭스 쿠아란은 니아가 말을 하자 충격을 먹은 듯 얼어붙었다. 그는 쭈뼛대다 거칠게 얼굴을 쓸었다.
니아의 시선이 절로 그의 손을 따라 그의 얼굴을 훑었다. 말을 하고 싶어 입술이 달싹거렸다.
“……저는 초대를 받아서 온 거예요. 댁스터 교수님의 조교라서요.”
“초대? 누가?”
“황궁에서요. 댁스터 교수님께서 젊으시긴 해도 능력이 있으시거든요.”
그가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탄식을 내뱉었다.
“황녀가 초대했군.”
그는 짓씹듯 문장을 중얼거렸다.
이런 시시콜콜한 말을 하려던 게 아닌데. 그들은 왜 이런 대화를 나누고 있는 걸까? 풀어야 할 이야기가 산더미인 이 와중에.
“……다신 오지 마.”
필릭스 쿠아란이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니아는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동시에 그의 가슴이 거칠게 들썩거렸다.
“오지 말라고요?”
겨우 그 말을 하려고 그녀를 붙잡았단 말인가? 니아는 기가 차다 못해 허망함을 느꼈다.
저도 모르게 원망스러운 낯을 한 채 필릭스 쿠아란을 바라보는데, 그는 불길을 피하듯 황급히 마주쳐 오는 눈을 피했다.
“그 말을 하려고 한 것뿐이야. 황궁에 오지 않겠다고 약속해. 그러면 앞으로는 내가 네 앞에 설 일은 없을 거야. 약속할게.”
“…….”
“황궁은 위험한 곳이야. 게다가 넌…….”
그는 니아의 침묵을 어떻게 해석한 것인지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여전히 얼굴을 외면한 채로.
“그냥 일상을 살아, 니아 프레슬리. 황궁 같은 곳엔 오지 말고.”
“……이것도 제 일상에 포함되는 일이에요. 제 일이라고요.”
순간 그의 입에서 나직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니아는 살짝 경악했다. 사 년 만에 만난 필릭스 쿠아란은 도저히 예측할 수가 없었다. 고통스러워했다가 침착했다가, 화를 내다가 웃었다. 사람이 이상했다.
“그래도 황궁엔 오지 마. 너한테는 이 나라 자체가 위협인데, 황궁이라니. 안 돼.”
안 돼. 마지막 말은 무척 단호했다.
“넌 언제나 위험에 노출되어 있잖아. 조금만 더 자각하고 지내.”
니아는 그의 말뜻을 곧장 이해했다. 니아 프레슬리는 언제나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존재가 맞았다. 언제, 어디서든.
그러나 니아는 이제 모든 사람이 그렇지는 않음을 알고 있었다. 지금 눈앞에 서 있는 사람도 그러지 않았던가. 그는 니아를 떠났을지언정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았다. 그것이 불행인지 다행인지는 아직도 알지 못했지만.
니아는 오래도록 묵은 이야기를 꺼냈다.
“……제가 괴물로는 보이지 않으시나 봐요.”
말을 뱉자마자 목구멍이 곧장 한계를 맞이한 듯 울대가 일렁였다.
드디어 한 가지를 끝냈다!
괴물.
니아는 그 말이 여전히 아팠지만 더 이상 그런 단어 하나에 무너지는 일은 없었다. 무척이나 많이, 그리고 오래도록 생각한 덕분이었다.
‘괴물만 아니면 되는 것 아니겠어.’
니아는 지난 사 년간 그때, 그 자리에서 솔직하게 묻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그 말에 상처받고 도망칠 게 아니라 이야기를 했어야 했다고. 니아의 그 짧은 판단이 그들의 모든 것을 망쳤다고.
후회는 새로운 자아를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 그 순간을 너무나 후회한 나머지, 니아는 ‘괴물’이란 단어가 무섭다기보다는 미워졌고, 미워지기보다는 진절머리가 나게 되었다.
니아가 내린 결론은 ‘고작 단어 두 글자에’였다.
그때는 너무도 두려웠다. 필릭스 쿠아란이 그의 아버지처럼 변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매일을 살얼음판 걷듯 살다 보니까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지 못해서. 너무 오랫동안 그의 아버지에게서 괴물 취급을 받고 괴물 대우를 받은 탓이었다.
필릭스 쿠아란은 그의 아버지가 아니다.
그 사실은 뒤늦게 니아에게 깨달음의 형태로 찾아왔다.
니아는 필릭스 쿠아란 한 사람이 아닌 스스로의 과거와 주위를 둘러싼 것들에만 눈이 멀었음을 인정하고, 후회하고, 반성했다. 니아는 어렸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을 즈음에는 그는 이미 너무 먼 곳에 있는 사람이었다. 어쩌면 다시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를.
“저를 괴물 같다고 생각해 본 적 없으세요? 지난 사 년 동안.”
“뭐? 괴물?”
그가 듣지 못할 말을 들은 사람처럼 되물었다.
“제가 누군지 아시잖아요.”
“난 한 번도 널 괴물이라고……. 아니, 어떻게 그렇게 생각할 수 있어? 난 널…….”
필릭스 쿠아란이 더듬거렸다. 꾸며 내는 거짓이 아니었다. 니아는 그 속에서 진심을 읽었다.
나는 괴물이 아니다.
그에게 나는 괴물이 아니다.
다시, 나는 괴물이 아니다.
“그러실 줄…….”
니아는 덤덤하고자 노력했다.
필릭스 쿠아란이 그녀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을지는 몰라도, 혐오하지도 않을 거라고.
지난 사 년 동안 그는 니아를 천천히 잊었을지 몰라도, 적어도 그는 그의 아버지 같은 사람은 아니라고 오랫동안 생각하지 않았던가.
그래도 너무 기뻐서…… 기쁜 나머지 목이 메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지난 사 년간의 설움이, 그리고 그들이 산속에서 보냈던 마지막 순간에 대한 후회가 녹아내렸다.
“그러실 줄 알았어요.”
한참 뒤에야 니아는 완성된 문장을 말했다.
“어디 아픈 건 아니지.”
필릭스 쿠아란이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그는 니아가 알던 사람 같았다. 니아를 사랑한다던 그 사람 같았다. 아프면 걱정해 주고, 문제가 있으면 해결해 주고, 철은 없었어도 애정은 많았던 그 사람 같았다.
니아는 참을 수가 없어 그에게로 손을 뻗었다. 천천히 그에게로 향하던 손은 그의 오른 어깨에 내려앉았다.
“팔은, 어때요?”
또다시 목이 메었다. 너무나 묻고 싶은 말이었다. 그리고 너무도 하고 싶은 말이었다.
“미안해요. 항상 미안했어요. 나는 정말…….”
미안할 뿐이었어요.
니아는 다른 말을 찾지 못했다.
이것은 영영 그의 팔을 잃게 만든 니아 프레슬리가 가진 두 번째 묵은 이야기였다. 그에게 미안했다.
니아를 가만 내려다보던 필릭스 쿠아란이 입술을 열었다.
“괜찮아.”
그는 괜찮다고 답했다. 니아가 무슨 말을 원하는지 알고 있는 것처럼.
필릭스 쿠아란은 그의 어깨에 닿은 니아의 손이 신경 쓰이는 듯 움찔거렸다. 니아의 손이 떨어지지 않자 그는 한 번 더 말해 주었다.
“나는 언제나 괜찮아.”
그가 망설이다 덧붙였다.
“덕분에.”
“그래도…… 미안해요.”
니아는 애달프게 그의 어깨를 쓸었다. 단단함이 느껴졌지만 사용할 수 없게 되어 버린 어깨와 팔이다. 괜찮을 리가 없다.
필릭스 쿠아란은 니아의 미안하다는 말을 몇 번 곱씹는 듯하다가, 자조했다.
“팔 같은 건 알 게 뭐야. 넌 내 목숨을 몇 번이나 살려 줬는데.”
“어…….”
니아의 손이 덴 듯 갑작스레 필릭스 쿠아란의 어깨에서 떨어졌다. 그의 눈은 그의 몸에서 멀어지는 니아의 손을 좇았다. 진득하게 머물던 그의 시선은 니아의 물음에 다시 그녀의 얼굴로 향했다.
“알고 있었어요?”
“뭘?”
“내가 십 년 동안 공작가에서 도련님을……. 모르는 줄 알았는데 어떻게…….”
말을 다 끝마치기도 전에 그의 얼굴은 엉망이 된 채로 구겨졌다. 마치 묘지에서처럼, 그리고 방금 니아를 이곳으로 데려와 한숨만 내쉬던 때처럼. 또다시 두려움에 먹힌 자가 무너지기 직전에 짓는 표정이었다.
“……알아. 십 년이나 내게, 심장을 나눠 주었지.”
심장?
니아는 낯선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많이도 생경했다.
십 년간 니아가 그에게 심장을 주었다는 사실도, 그가 이미 그 비밀을 모두 알고 있었다는 사실도. 심지어 그는 니아가 모르는 것까지 모두 알고 있었다.
니아는 더 이상 공간이 남지 않은 벽면으로 뒷걸음질했다. 역시나 제자리걸음으로 끝나고 말았지만. 그러나 머릿속은 점차 명확해지고 있었다.
심장.
열 번이나 그에게 심장을 주었던 것이다.
니아는 약을 먹고, 눈을 감고, 몸을 내주고, 들끓는 열 속에서 다시 눈을 떴었다. 몸 안의 어딘가가 사라진 줄은 알았지만, 그것이 심장인 줄은 미처 몰랐다.
니아의 머리에 새로운 가설이 생겼다.
‘죄책감인가?’
그는 혹시 죄책감으로 인해 떠나간 것이었던 걸까?
그렇게 생각하면 어쩐지…… 어쩐지 모든 것이 설명되는 것도 같았다. 말없이 떠난 이유도, 아무런 소식을 전하지 않았던 이유도,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았던 이유도…….
그가 사 년 만에 만나 니아에게 한 말들이 무엇인지를 떠올렸다.
‘네가 날 싫어하는 것 알고 있어.’
‘끔찍하게 여길 테지.’
멍한 니아 프레슬리 앞에서 필릭스 쿠아란은 초조하게 중얼거렸다.
“알고 있다고. 그래서 네가 왜 날 좋아할 수 없었는지, 그리고 내가 얼마나 끔찍하게 여겨질지…….”
그가 니아의 가설에 신빙성을 더했다.
“내가 너한테 어떤 존재인지를 알아.”
니아는 입술을 달싹였다.
어떤 말을 해야 지금의 기분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을까. 지난 몇 년간 그를 다시 만나면 해야 할 말을 고르고 골랐던 니아에게 지금 이 순간은 너무도 짧았다.
“하지만 걱정 마.”
“…….”
“더 이상 널 좋아하는 일은 없어. 그래서 널 힘들게 만드는 일도 없을 테고.”
“…….”
“네 앞에 다시 나타나는 일은 없을 거야. 그러니까…… 걱정 말라고.”
니아는 지난날에 대한 이해와 함께 한 가지를 더 알게 되었다.
걱정 말라던 말의 의미.
더 이상 널 좋아하지 않으니까 걱정 마.
니아의 오랜 가설 중 하나는 맞고, 하나는 틀린 셈이었다.
그에게 죄책감과 사랑은 동의어가 아니었다.
니아 프레슬리도 지난 시간 죄책감을 앓았다. 그러나 애정의 형태를 띤 감정 또한 동반하였고 또 그리워하였으니, 오로지 죄책감뿐이었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렇게 필릭스 쿠아란을 마주 보니, 그에게 남은 것은 사랑보다는 죄책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말 한마디 없이 저 먼 전쟁터로 도망갈 만큼의 커다란 죄책감 하나. 다신 니아를 찾아오지 못할 만큼의 죄책감 둘.
그리고 그의 눈빛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사랑이 다시 죄책감을 이기기에는 이미 늦어 버린 듯했다.
니아 프레슬리와는 다르게.
필릭스 쿠아란은 마지막 말을 니아의 귓가에 속삭이고 다시 황궁으로 돌아갔다.
“안녕.”
그가 힘겹게 뱉은 끝인사였다.
니아는 바로 답하지 못했다. 그와 똑같이 ‘안녕히 가세요’라고 말하면 정말 그들은 끝이 날 것만 같아서.
그녀는 결국 말없이 필릭스 쿠아란의 뒷모습을 보았는데, 울컥하는 감정을 막을 수 없었다. 어색한 모양으로 숨을 들이 삼키며 그녀도 아슬아슬한 걸음을 떼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무척 길었다. 황궁에서 집까지는 걸어서 가기엔 꽤나 먼 거리였고, 낯선 길들을 가늠하며 걷는 것도 방향치인 니아에겐 힘들었다.
반복되는 나무들의 그림자를 지르밟으며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내내, 니아는 봄바람에도 차디찬 감각을 느꼈다.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 한 가지 사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둘 다 서로에게 상처받는 관계다.
아무리 과거가 되었다고 한들 니아가 그의 아버지에 의해 착취당했으며, 필릭스 쿠아란을 위해 심장을 열 번이나 주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의 오른팔을 잃게 만든 사람이 니아라는 사실 또한.
필릭스 쿠아란 또한 마찬가지다. 그는 열 번이나 니아에게서 심장을 받아 살아났다. 그에게는 잘못이 없을지도 모르나 그는 당사자였다. 십 년간 스스로 무지했다는 사실은 그의 죄책감을 야금야금 좀먹을 터였다.
두 사람에겐 답이 없다.
서로가 서로를 아무렇지 않은 눈으로 볼 수 있는 날은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다시는 눈앞에 나타나지 않겠다는 필릭스 쿠아란의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한 가지.
니아는 심장이 위치한 자리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뛰고 있었다. 살아 있었다. 번뜩이는 칼날이 선혈을 뿜어내는 심장을 앗아 갔을 때도 뛰고 있던 심장은, 오늘따라 거세게 뛰고 있다.
그녀도 앞으로 자신이 어떻게 될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지금 당장은 이 떨림을 멈추는 방법을 알지 못했으니까.
니아는 더 길어지는 그림자를 성큼성큼 밟아 앞으로 나아갔다. 그녀의 심장 박동과 똑같은 속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