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 클라우디아 엘로이 황녀 (40/75)

10. 클라우디아 엘로이 황녀

다시 회의장에 들어서니, 이미 모든 교수들이 한 명도 빠짐없이 자리한 채였다.

원형 탁자에 둘러앉아 있는 사람들은 모두 학계에서 내로라하는 교수들이었다. 평소 니아가 꼭 한번 만나고 싶었지만 연구실에 틀어박혀 있어서 볼 수 없었던 유명한 교수들도 몇 보였다.

니아가 아는 정도면 제국의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자들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이 자리가 얼마나 중대한 자리인지 실감이 났다.

“분명 십 분이라고 말했을 텐데.”

조심스럽게 의자를 끌어다 앉는 니아를 향해 딕시 댁스터가 낮게 중얼거렸다.

“죄송합니다, 교수님.”

교수들이 둘러앉아 있는 동그란 테이블, 그리고 한 계단 위의 고위 귀족의 자리, 두 계단 위의 황족의 자리.

니아는 저 위에서 이 동그란 테이블이 얼마나 잘 보일지가 걱정되었다. 곧 누가 들어올지 알고 있었으니까.

“정신 똑바로 차리라고 말했어, 니아 프레슬리.”

“네.”

딕시 댁스터가 단단히 경고했다. 니아는 매서운 충고가 이어질 거라 생각했지만, 댁스터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한숨을 내쉴 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제1황자 아론 엘로이 황자님과 제1황녀 클라우디아 엘로이 황녀님께서 드십니다.”

쩍 하고 황금 문이 양쪽으로 열렸다.

아론 엘로이와 클라우디아 엘로이가 동시에 들어왔다. 그리고 한 걸음 뒤, 시간차를 조금 둔 뒤 필릭스 쿠아란이 그들을 따라 들어왔다.

필릭스 쿠아란 공작?

교수들과 조교들이 수군대는 소리가 들렸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황족들과 교수들의 간담회인데, 제국의 공작이자 영웅인 그가 왜 이 자리에 참석한 건지 누구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아론 엘로이 덕에 그가 올 것을 미리 알고 있던 니아마저도 그 이유는 몰랐다.

“아니, 공작께서 왜…….”

“쿠아란 공작이 황실에 자주 드나든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쉿. 너무 크게 떠들지 마시오.”

니아는 뒤편에서 걸어 들어오는 그를 보았다. 비 오는 날 말고, 맑은 햇살 아래서 그를 보고 싶다던 니아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밝은 곳에서 보아도 필릭스 쿠아란은 역시나 예전과 달랐다. 니아는 그를 알아볼 수밖에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낯선 사람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어색함이 존재했다.

‘정말 많이 달라지셨구나.’

예전의 다채로운 색과 표정을 띠었던 소년은 없었다. 모든 감정을 발화시켜 버린 것처럼. 문에서 반사된 황금빛을 받으며 걸어오는 필릭스 쿠아란은 세월에 중독된 사람처럼 무감각해 보였다.

묘지에서 그를 보았던 것이 꿈결같이 느껴졌다.

예전에도 그에겐 특유의 분위기가 있었다. 자신에게 이목을 집중시키고, 또 공기를 무겁게 가라앉히는.

그러나 니아의 눈에는 전에는 보이지 않던 무게감이 보였다. 보는 사람을 어렵게 만드는 종류의 무게감. 화사한 분위기의 황족 남매 뒤에 있어서 더욱 대비되었다.

“니아 프레슬리. 인사.”

딕시 댁스터가 니아의 다리를 툭 하고 쳤다. 니아는 화들짝 놀라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황족을 향해 예를 갖추어야 하는데, 필릭스 쿠아란을 보며 넋이 나가 있었다.

“모두 앉으세요.”

허리를 굽힌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론 엘로이의 가벼운 목소리가 들렸다. 교수들과 니아를 포함한 조교들은 모두 제자리에 앉아 그들을 올려다보았다.

그렇게 다시 고개를 올려 보니, 이미 아론과 클라우디아, 그리고 필릭스는 그들의 자리에 앉은 후였다.

필릭스가 니아 쪽은 관심도 두지 않아 오히려 니아는 그를 더 잘 관찰할 수 있었다. 한때는 선하다고 생각했던 그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지금의 그에게 어울리는 단어를 골라 보았다. 무표정, 무색채, 무감각.

그럼 니아도 그에게 무의미해졌을까.

지금의 무표정이 그에게는 당연한 것인 듯 그는 미동도 없었다. 니아는 왠지 입맛이 썼다. 알고 있었지만, 그가 너무 먼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에게 가졌던 다양한 감정들과 궁금증, 연민, 동경, 그리고 애정의 형태를 띠었던 모든 것들이 더 멀어져 가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오늘도 지켜보는 것으로 끝날지도 몰라.’

같은 공간에 있어도 이렇게 먼 사람이 되어 버렸는데, 또 언제 만날 수 있을지. 오늘 같은 우연이 또 니아를 찾아와 줄지. 그리고 필릭스 쿠아란은 이런 우연을 바랄지.

니아를 발견한 그를 보고 싶으면서도, 또 그가 그녀를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모순된 마음이 들었다.

니아가 고개를 푹 숙이고 펜을 온 힘을 주어 꽉 움켜쥔 순간, 간담회는 시작되었다.

“우선, 이 자리에 함께 참석해 주신 필릭스 쿠아란 공작께 감사 말씀을 드려야겠군요.”

황자인 아론 엘로이의 주도로 시작될 것이라 생각했던 것과 달리, 첫 포문을 연 것은 클라우디아 황녀였다.

“다들 아시겠죠. 이 나라의 영웅이지 않습니까.”

노래하듯 가벼운 목소리로, 황녀는 필릭스 쿠아란을 보며 싱긋 미소 짓고 있었다.

“공작께서 이 자리에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어디까지나 황자님과 황녀님의 배움을 위한 자리이니까요.”

황실에서 방어 마법을 가르치는 세크 이레이 교수가 의외라는 듯 중얼거렸다. 다른 교수들은 그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필릭스 쿠아란의 존재는 회의장의 나이 든 교수들에겐 부담이었다. 황족의 눈치를 보아야 할지, 아니면 그의 눈치를 보아야 할지 갈림길에 서게 만들었으니까.

“제가 부탁드렸습니다. 꼭 참석해 달라고.”

클라우디아 황녀는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더 이상 토를 달지 말라는 의미였다. 그녀보다 네 배는 더 나이 먹었을 세크 이레이는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필릭스 쿠아란이 황녀의 편에 있음을 깨달으며.

“아시다시피 역사와 전통이 있는 간담회지요. 벌써 몇백 년째 열리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자리에 쿠아란 공께서도 참석해 주신다면 영광일 겁니다.”

그녀는 아량을 베푼다는 듯 천천히 덧붙였다. 그리고 여유롭게 의자에 등을 기댔다.

니아는 그녀를 보았다. 클라우디아 엘로이.

그녀는 오빠인 아론 엘로이와 쌍둥이처럼 닮은 모습이었다. 말투, 표정, 머리 색깔, 하다못해 표정까지. 해사한 미소 속에 담긴 날카로움도 같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성별, 그리고 그로 인해 생기는 신체적 차이 정도일까.

고귀한 사람.

황녀여서가 아니라, 타고나기를 그렇게 태어난 사람처럼. 만약 신의 가호를 받는 자가 있다면 꼭 클라우디아 황녀일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자, 황자님. 그럼 우선 이 늙은이부터 여쭙지요.”

“말씀하세요.”

“제국의 부강함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지요.”

“매년 첫 질문이 똑같으십니다, 아락 교수님.”

아론 엘로이의 눈웃음과 함께 본격적으로 간담회가 시작되었다.

니아는 귀에 들리는 모든 것들을 적기 위해 노력했다. 이해는 하지 못할지언정, 나중에 보고 다시 확인할 수 있도록. 필릭스 쿠아란이 같은 공간에 있는 이상 니아가 대화에 완전히 집중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 정도도 나름의 최선이었다.

그러나 열심히 내용을 받아 적던 니아의 손은 결국 멈칫거렸다.

“이 모든 것은 제국의 평화와 안녕을 위한 것이지요. 결국 이 교수들의 연구도 모두 제국을 위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분야는 달랐지만 하나같이 마지막으로 하는 말은 똑같았다.

제국. 평화. 안녕. 영광.

간담회라는 이름보다는 제국의 아름다운 역사와 미래를 자랑하듯 떠벌리는 자리. 그런 이름이 더욱 어울리는 듯했다. 아니면 황족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한 자리인가?

니아는 어째서 모든 결론이 그렇게 나는지 의아했다. 물론 아닌 경우도 있었지만.

“……네. 괴생물체에 대한 연구가 그렇게 깊게 진행되어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후에 우리 전쟁에 활용할 수 있게 된다면 좋겠지요.”

“네, 황자님.”

“그런데 그보다 따님은 잘 계십니까?”

“네…… 네?”

“굉장한 미인이시지 않습니까. 제국 내에서도 유명하시더군요. 지난번 황궁에서 잠시 뵀는데…….”

아론 엘로이는 가끔 딴 길로 새기도 했다.

니아는 쩔쩔매는 교수와 즐거운 듯 그를 놀리는 아론 엘로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러다 힐끔힐끔 필릭스 쿠아란을 쳐다보기도 했다.

그때마다 필릭스 쿠아란은 미동도 없이 허공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 자리가 무척 지루한 사람처럼. 그 모습을 보고 니아는 그가 그녀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고 확신했다.

“다들 제게는 관심이 없으신가 봅니다.”

대부분의 질문들은 황자의 차지였다. 제국의 부강함을 논하고자 하는 교수들이 천지였으니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는 차기 황제였으니까.

그러나 황자와의 대화가 길어지면 황녀는 종종 무심한 듯 물었다. 제게는 관심이 없으신가 봅니다 하고. 그럼 교수들은 허둥대다 그녀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럴 리가요, 황녀님.”

클라우디아 엘로이는 그럼 어디 해 보라는 듯 고개를 까딱했다.

“황녀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최근에 귀부인들의 사치가 날로 늘어간다는 이야기가 돌고 있습니다.”

“이미르 교수님께서는 정치공학자시지요.”

“그렇습니다, 황녀님.”

“그런데 왜 저에겐 귀부인들의 사치 따위를 물으십니까? 그게 정치공학과 무슨 상관이 있다고.”

“아, 그것 또한 크게 보면 정치의 이면이라 볼 수…….”

“저는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이미르 경. 예를 들어…… 마정석, 혹은 마법. 언제나 회의장을 가장 뜨겁게 달구는 주제이지요.”

어느새 이미르 교수의 호칭이 바뀌어 있었다. 이미르 경. 황가의 남매는 쌍으로 교수들을 가지고 놀았다.

니아는 손을 더 움직일 생각을 하지 못하고 클라우디아 황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니아가 살면서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종류의 사람이었다.

“여기 마정석에 대해 연구하는 분이 많지 않습니까. 마정석만큼 연구가 깊이 진행된 분야도 없을 텐데요.”

“……그렇지요.”

“귀부인들의 사치를 정치와 연관시키시는 분이니 마정석 또한 정치와 잘 엮어 답하시리라 믿습니다. 마정석이란 제국에 어떤 존재입니까?”

짓궂게 반짝이는 눈에 이미르는 잠시 미간을 찌푸렸으나 곧 진지해졌다.

“마정석은 제국의 부강함의 기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귀부인들의 사치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되는 정치적 소재군요!”

클라우디아 엘로이가 이제야 알았다는 듯 손뼉을 쳤다. 장난스럽게 눈썹을 들썩거린 그녀는 까르르 소리를 내며 웃었다. 이미르 르웰린의 얼굴이 곧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눈꼬리를 반으로 접은 클라우디아 엘로이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치 다음 먹이를 찾아 헤매는 하이에나처럼.

“딕시 댁스터 교수님. 오늘 이 자리에 처음 오셨지요.”

“그렇습니다, 황녀님.”

“생명 분야의 마정석을 연구하신다 들었습니다. 오늘 더 깊이 있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제가 직접, 초대를 부탁드렸답니다.”

클라우디아 엘로이가 콕 집어 가리키자, 모두의 시선이 딕시 댁스터에게로 향했다. 그녀 바로 뒤에 있던 니아는 고개를 푹 숙였다. 숨을 이유가 없지 않나 생각했을 때는 이미 머리칼로 얼굴을 모두 가린 채였다.

“딕시 댁스터 교수님께서도 마정석이 제국의 기틀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니아는 땅굴을 파고든 사람처럼 고개를 숙이고 펜을 움직였다. 솔직히 이젠 무슨 말을 적고 있는지 그녀도 몰랐다. 그러나 이렇게 온몸을 숙이고 있으니 필릭스 쿠아란은 그녀를 알아보지 못할 터였다.

“……대답, 안 하십니까?”

클라우디아 엘로이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미소를 짓고 있었으나 그 안에 든 본질이 날카로웠다.

그러나 그녀가 한 번 더 묻기 전에 딕시 댁스터가 드르륵 의자를 끌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황녀님의 선대이신 초대 황제 폐하께서 벅 프릴리를 처리하시고, 그 죽은 자리에 마정석이 생겼습니다. 그 마정석으로 인해 에슬란 제국은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고, 그 어느 나라보다 부강해졌습니다. 그러나…….”

“그러나?”

“그러나 신성이 없지요.”

댁스터의 마지막 말에 회의장 내부의 분위기가 얼어붙은 듯 굳었다.

니아의 눈동자가 용수철처럼 튕기듯 올라가 딕시 댁스터의 뒤통수를 좇았다. 그러나 바라본 그녀의 등에선 어떤 미동도 발견할 수 없었다.

“지금 황족에게 신성이 없음을 지적하고 있는 겁니까, 댁스터 교수?”

돌아오는 클라우디아 엘로이의 목소리가 차가웠다. 니아는 황녀가 있는 쪽을 차마 올려다보지 못했지만, 그녀가 입꼬리는 웃고 있으되 눈은 웃지 않고 있을 것임을 확신했다.

‘교수님이 왜 그러셨지?’

니아는 언젠가 황족이 신성에 관한 이야기를 쉬쉬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이유는 단 하나, 황족 중 누구도 신성을 가진 자가 없기 때문이었다.

“어허, 댁스터 교수! 마정석으로 인해 우리 제국의 마법은 다른 어느 나라보다 발전되어 왔소. 다른 나라에서도 마법을 사용하기 위해선 우리 에슬란 제국의 마정석을 수입하는 수밖에 없지요. 신성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강한 것이 마정석입니다.”

누군가 진중한 목소리로 딕시 댁스터를 을렀다. 황녀의 심기가 더 불편해지기 전에 끝내려는 심산이었다.

“펠레 교수의 말이 옳습니다. 신성 따위 없어도 제국은 최근 몇 년 사이에 그 어디와도 비교할 수 없는 강대국으로 자리 잡지 않았습니까? 저기 앉아 계신 필릭스 쿠아란 공 덕분이지요.”

필릭스 쿠아란의 등장을 불편해하던 세크 이레이 교수도 순식간에 태도를 바꾸며 그를 언급했다.

“그러니 굳이 신성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가 없어요. 그렇지요, 댁스터 교수?”

모든 교수들이 당황하며 수습에 앞장서고 있는 꼴이었다. 그만큼 신성은 금기의 주제였다. 적어도 에슬란 제국에서만큼은.

“하하, 어린 친구라 그런지 실수도 하는 모양이구먼.”

또 한 번 모든 시선이 딕시 댁스터에게로 향했다. 모두가 그녀에게 정해진 답을 종용하고 있었다.

“맞습니다.”

딕시 댁스터는 천천히 답했다. 목소리가 평온했다.

“말씀해 주셨듯이, 마정석은 제국의 기틀이지요. 신성이 없는 것 따위,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니아는 그녀가 멋들어지게 반박할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순순히 수긍한 뒤 자리에 앉았다. 교수들의 안심한 표정이 한눈에 들어왔고, 그렇게 신성에 대한 언급은 마무리되는 듯했다.

“신성이라.”

“…….”

“역시 어린 사람이 총명한 모양입니다. 그렇지요?”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끝이 아닌 듯했다. 그러니까 클라우디아 황녀에게만큼은.

“아무도 꺼내지 않는 주제를 꺼내는 패기를 보니 이 황녀는 즐겁습니다, 댁스터 교수. 역시나, 젊은 피가 좋은 법이라니까.”

클라우디아가 피식 웃었다.

“그럼 여기 계신 모두에게 여쭙지요. 마정석이 신성을 대신한다 보아도 좋겠습니까?”

클라우디아 엘로이는 이 회의장에서 가장 어린 사람이었다. 그리고 아론 엘로이가 있으니 가장 높은 이도 아니었고, 필릭스 쿠아란이 있으니 가장 강한 자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가 한 자 한 자 뱉을 때마다 니아는 압도되는 감각을 느꼈다. 그리고 그건 비단 니아 한 사람만의 느낌도 아닌 듯했다.

“아무도 대답이 없으시군요.”

신성. 신의 선물이라 불리는 고귀하고 거룩한 것.

신성을 가진 자는 신의 선택을 받은 사람으로, 신과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대개 신성은 황족 안에서 발현되었다. 신의 가호를 받는 자가 곧 황족이 되었기에. 적어도 다른 나라에서는 그랬다.

“마정석도, 마법도, 신성에는 미치지 못하는 걸까요? 신성이 없는 황족은 자격 미달입니까?”

이어진 날카로운 음성에 니아는 입을 쩍 벌렸다.

“그것이 아니라……!”

황궁에서 열리는 교수 간담회가 이토록 서늘할 줄이야. 지식 교류의 장이 아니었던가. 니아는 속으로 놀란 가슴을 가라앉혔다.

침묵이 회의장을 지배하다 우물쭈물, 목소리가 기어 나왔다.

“황녀님, 신성을 가진 나라도 마정석 앞에는 그 힘을 제대로 쓰지 못하지 않습니까. 저희 백성들은 언제나 마정석의 기원 되시는 선대 폐하께 감사하며…….”

“기원 따위.”

날카로운 대답에 다시 침묵이 감돌았다.

그 누구도 다음 말을 잇지 않을 때, 놀랍게도 정적을 깬 것은 딕시 댁스터였다.

“황녀님, 부디 노여움을 푸시지요. 제가 실언을 하였습니다.”

“댁스터 교수, 지금 내가 화가 난 것으로 보입니까?”

날 선 표정을 짓고 있던 클라우디아 엘로이가 갑자기 만면에 미소를 띠었다. 그러나 그 모습이 어쩐지 더 섬뜩했다.

“아니.”

누군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황녀의 말을 끊을 수 있는 유일한 한 사람.

“내 눈엔 즐거워 보이는구나, 클라우디아.”

황녀와 비슷한 음색을 가졌으나 성별의 차이가 느껴지는 목소리. 황자 아론 엘로이였다.

“제가 즐거워 보인다고요?”

“그래.”

니아는 한참 만에 용기를 내 오른편을 올려다보았다. 지금 누구도 그녀에게는 시선을 주지 않을 거라 생각했으니까. 모든 이의 시선은 황족 남매에게로 향했을 터였다. 필릭스 쿠아란마저도.

“그렇다면 정확히 보셨습니다, 오라버니.”

바라본 아론 엘로이의 표정은 비교적 평화로웠고, 클라우디아 엘로이는 정말 즐거운 듯 눈을 번뜩이고 있었다.

“아주 즐거워요.”

말을 마친 클라우디아 엘로이는 마치 수줍은 소녀처럼 볼을 붉혔다. 참으로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아론 엘로이는 가볍게 쯧, 혀를 찼다.

“농담 한번에 다들 진지하기도 하십니다.”

클라우디아 엘로이는 산뜻하게 입술을 휘었다.

“에슬란 제국에는 신성이 없습니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요. 황실에 신성이 있었다면 더할 나위 없었겠습니다만…….”

그녀는 찬찬히 아래를 둘러보다 결론을 내렸다.

“황권이 위태로운 일은 없습니다.”

황녀인 그녀보다는 황자인 아론 엘로이가 할 법한 말이었다. 그러나 그 옆의 아론은 그저 못 말린다는 표정을 짓고 있을 뿐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어차피 황자는 본인이라는 자신감인지도 모르겠지만.

“아, 그런데 혹시.”

클라우디아 엘로이가 갑작스럽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오늘 그녀의 행동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아마도 계산된 행동이었을 것이다.

“제가 여기 계신 필릭스 쿠아란 공과 결혼을 하게 되면, 황권은 더 강해지려나요?”

“…….”

“아니면, 너무 위협적이려나?”

모두가 숨을 죽인 채 눈을 굴렸다. 황녀의 발언이 스쳐 지나가는 농담이 아님을 알고 있는 까닭이었다. 필릭스 쿠아란이 떡하니 이곳에 와 있는 이유도 어느 정도 가늠이 되었다.

작금의 필릭스 쿠아란이 제국에서 어떤 위치인지를 모르는 자는 이 자리에 없었다.

황녀가, 제국의 영웅과 결혼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클라우디아 엘로이는 매우 정치적이었다.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와 동시에 니아는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언제부터?’

필릭스 쿠아란의 시선이 니아 프레슬리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언제부터 보고 있었지?’

그의 표정은 니아 프레슬리를 또 비가 오던 사냥터, 죽은 공작의 묘지로 이끌었다.

상처를 받은 표정. 또 그 표정이었다.

굳은 표정의 필릭스 쿠아란은 니아 프레슬리를 뚫어지도록 바라보고 있었다.

니아는 그의 눈에서 남은 감정을 읽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