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 보이지 않는 균열 (39/75)

9. 보이지 않는 균열

그날 오후 늦게, 니아는 집으로 향했다. 그러나 집에 도착하니 레오가 없었다.

니아는 시간을 확인했다. 레오가 잠시 어디를 나갔다고 생각하기엔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말도 안 하고 어딜 갔지?”

레오는 보통 집에 있었고, 가끔 집을 나갔다. 가끔 집에 있고 보통 집에 없는 니아와는 꼭 정반대인 생활이었다. 그러나 그는 집을 비워야 하는 일이 생기면 꼭 니아에게 이야기해 주곤 했다.

니아는 가방과 손에 든 짐을 내려놓고 외투를 벗었다. 몇 번이나 레오를 불렀지만 역시나 어디에서도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집에 아무도 없으니 모든 것이 다 생기를 잃은 듯 싸늘했다. 어둑한 집 안에 혼자 있는 것이 어색해 니아는 모든 방에 불을 켰다. 그래도 찬기는 해결되지 않았다.

“……이러지 말지.”

혼자 있는 집은 좋지 않았다. 혼자 있으면 언제나 불길한 예감은 배가 되었다.

“나가 봐야겠어.”

니아는 의자에 걸어 놓은 외투를 다시 집었다.

머리로는 어디로 갔는지도 모를 레오를 찾아 무작정 나가는 것이 비합리적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멍하니 그를 기다리며 걱정하느니 비합리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 나았다.

봄인데도 손끝이 시렸다. 양쪽 손이 서로를 붙잡아 깍지를 꼈다. 그렇게 니아는 온 방 안의 불을 켜 놓은 채로, 문고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덜컹 하고 문이 열렸다. 그러나 그 문은 니아 프레슬리가 연 것이 아니었다.

“레오?”

“니아?”

두 사람이 동시에 서로의 이름을 불렀다.

“……어디 가게? 이 시간에?”

물어야 할 것은 니아인데 레오가 먼저 선수를 쳤다. 본인을 찾으러 나간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하…….”

니아는 안도감과 동시에 잔소리 폭격기가 꿈틀대는 것을 느꼈다.

“일단 들어가, 레오.”

화를 참는 목소리에 레오는 재빨리 집 안으로 들어갔다. 니아의 심기가 불편하다는 것을 눈치챈 것이다.

니아는 레오의 등을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우선 열려 있는 문을 닫으려는데, 불현듯 무언가 눈에 들어왔다.

니아 프레슬리는 고개를 빼꼼 내밀고 바깥쪽 문을 보았다.

‘또 비뚤어져 있네.’

문패가 또 비뚤어져 있었다.

니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다, 외투도 벗지 못한 채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레오를 향해 갔다.

“그래서, 기사단 입단 시험을 보고 온 거라고? 그것도 황실 기사단?”

“그래.”

“왜 말도 없이…….”

“떨어질 수도 있으니까.”

니아의 걱정스러운 낯빛에 레오는 민망한 듯 웃었다.

“이렇게 늦게 끝날 줄 몰랐어. 지원자가 많더라고.”

“그치만 넌…… 기사가 되지 않을 거라고 말했잖아.”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니아는 미간을 구겼다. 혼란스러웠다.

레오는 사 년 전, 모든 것을 버리고 왔다. 그는 버리고 온 게 아니라 선택을 한 거라 말했지만, 니아는 그가 버리고 왔다고 생각할 수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귀족의 지위, 양아버지, 약혼녀, 재산, 모든 것을 두고 니아 프레슬리에게 온 것이다.

아카데미를 수료하는 날, 레오 아리데오는 니아 프레슬리에게 꽃을 내밀었다.

‘같이 살자. 다시.’

‘우리…… 같이 살 수 있어?’

‘그럼, 가족이잖아.’

그의 결혼 소식을 기다리던 니아의 예상과는 무척 달랐으나, 정작 레오의 얼굴에는 미련이 없어 보였다.

‘여기서 기사가 되려고 하는 거야?’

‘기사?’

‘레오 네가 원한다면…… 황궁 기사단에서도 사람을 구할 거고, 아니면 귀족의 사병으로 들어갈 수도 있을 거야.’

길리가 집을 구해 주었을 때, 함께 집을 정리하며 니아는 그의 계획을 물었다. 펠링턴 같은 작은 마을에 있다가 수도로 온 것이니 적응이 필요할 터였다. 하지만 지난 대회에서 그의 검술 실력을 확인한 니아는 별 걱정이 없었다.

그러나 레오 아리데오는 생각지도 못한 말을 했다.

‘……기사는 되지 않아.’

‘뭐?’

‘더 이상 검을 쓰고 싶지 않아졌어.’

부드러운 목소리였으나 표정이 서늘했다. 니아는 레오가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마치 더 다가오면 공격하겠다고 경고하는 어린 짐승처럼 보였다.

물을 것이 많았는데, 니아는 차마 더 질문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다음에도, 그다음에도.

그렇게 몇 번 서늘한 눈을 마주하기에 이르자 니아는 결국 그런 결론에 다다르게 되었다.

‘그래, 살아 있는 게 어디야.’

십 년간 죽은 줄 알고도 살았는데, 그가 살아 있는 지금 뭐가 문제일까 싶었다. 그가 건강하기만 하다면, 그리고 그들이 함께 살 수만 있다면 다른 문제는 모두 사소하기만 했다. 니아의 호기심 따위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다.

게다가 따지고 보면 비밀이 더 많은 것은 니아 프레슬리 쪽이었다.

“레오, 갑자기 생각을 바꾼 이유가 뭐야?”

그녀는 그렇게 결론지었는데, 그가 왜 이제 와서 갑자기 생각을 바꿨는지 알 수 없었다.

가볍게 웃어넘기려는 레오와 달리 니아는 진지했다. 심각한 눈빛의 그녀를 향해 레오가 손을 뻗었다. 그리고 가볍게 머리를 헝클였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수는 없잖아.”

“이렇게?”

니아가 그의 말을 따라 중얼거렸다. 그가 말하는 삶이 어떤 것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지금 넌 어떻게 살고 있는데?”

그래도 그들은 나름대로 행복하게 살고 있지 않았던가? 오히려 문제가 있는 것은 언제나 니아 쪽…….

레오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

“열심히 살아 보려고.”

니아는 그를 생경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여전히 타는 듯한 붉은 머리칼, 예전의 장난기가 남아 있는 눈가, 웃을 때면 보는 이를 기분 좋게 만드는 입꼬리, 그리고 퍼시를 빼다 닮은 날렵한 코.

그러나 그에게도 똑같이 사 년이라는 시간이 지나 있었다. 니아에게 그러했고, 필릭스 쿠아란에게도 그러했듯이.

갑작스러운 낯선 느낌을 애써 지워 보며, 니아는 고개를 저었다.

“검을 쓰기 싫다고 말했었잖아.”

“그랬었지?”

레오 아리데오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동안 니아가 어렵게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보였던 서늘함은 어디다 버린 것인지…….

“너도 내가 기사가 되기를 바랐잖아.”

그는 니아의 구겨진 미간에 손을 갖다 대었다. 그리고 커다란 엄지로 그녀의 미간을 꾹 눌렀다.

그녀가 답을 하지 않자 레오는 동의를 구하듯 부드럽게 물었다.

“아니야?”

“그렇지만…… 네가 하고 싶은 걸 해야지.”

니아의 미간과 눈썹에 머물던 손이 툭 하고 떨어졌다.

“기사가 되지 못해도 상관없다고?”

“아니, 그게 아니라.”

기사든 뭐든 상관없이 네가 원하는 일을 했으면 좋겠어. 재빨리 답을 하려 했지만 레오에 의해 가로막혔다.

“……그럼 난 뭘 해야 하지.”

그는 한순간에 어두워졌다. 손바닥 뒤집듯 순식간에. 벼랑 끝에 내몰리기라도 한 듯 목소리가 형편없었다.

“……레오.”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던 니아가 레오의 손을 잡았다.

자그마한 손가락인데도 레오는 니아의 손이 닿자마자 크게 움찔거렸다. 마치 한구석에 덧난 상처를 숨겨 놓은 사람처럼.

“아니야. 내가 잘못 말했어. 나도 네가 퍼시처럼 멋진 기사가 되면 좋을 것 같아.”

“…….”

“네가 얼마나 검술이 뛰어난지 내 눈으로도 확인했는걸.”

“……그래?”

나직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러나 아까보다는 밝아진 투였다. 니아는 조금 마음이 놓였다.

“응. 그럼 오늘 어땠는지 얘기해 봐. 사 년 만에 검을 잡은 소감은?”

니아는 그를 식탁으로 잡아끌었다. 종알종알 그가 오늘 어땠는지 물어보기 시작하자, 어두웠던 레오의 얼굴도 점차 펴졌다.

“응, 응. 하긴, 제국의 전력이 강해지니 그만큼 사람들도 몰리겠지. 최근 몇 년간 군대의 지원자들도 많이 늘었잖아.”

니아는 레오의 이야기에 하나하나 열심히 반응하며 슬쩍 그의 표정을 살폈다. 어느새 그는 즐거운 듯 이야기에 몰두해 있었다.

‘신이 났구나.’

“아무튼 모든 시험은 잘 본 것 같아, 니아.”

“……그래. 이제 결과만 기다리면 되는 거라고?”

“응. 그래서 그게 언제냐면…….”

시간이 빠르게 흐르고 밤에 별이 반짝일 때쯤, 그들의 이야기가 끝났다. 자신감이 넘치는 것으로 보아, 레오는 곧 황실 기사단에 입단하게 될 것 같았다. 안나와 퍼시가 살아 있었다면 무척이나 자랑스러워할 일이었다.

“아, 니아 너 피곤할 텐데. 내가 너무 오랫동안 얘기했지. 나도 너무 오랜만이라……. 좀 들떴나 봐.”

“아니야, 나도 좋았어.”

니아는 눈을 곱게 접었다.

“저기, 레오.”

니아는 일어서는 그를 불렀다. 애꿎은 손이 꼼지락댔다.

“네가 혼자 집에 있는 시간이 힘들었을 거라는 생각은 못 했어. 오늘 집에 왔는데 네가 없어서 너무 쓸쓸했거든. 그 짧은 순간에도…….”

레오 아리데오는 가만히 니아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표정이 묘했다.

“네가 나 말고 다른 일을 하는 게 좋아.”

니아는 레오의 인생에 니아 프레슬리 말고 다른 것들이 생겨나는 것이 기꺼웠다.

레오가 잘 자고, 잘 먹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즐겁게 일을 하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니아 프레슬리가 그런 것처럼. 그리고 그러기 위해 노력하는 것처럼.

“잘 자, 레오.”

그들은 행복해야 하니까.

니아 프레슬리는 딕시 댁스터 바로 뒤편에 앉았다. 교수들을 따라온 몇몇 조교들은 작은 간이의자에 앉아 무언가를 열심히 적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도 질 수 없지.’

니아도 손목이 뻐근해질 마음의 준비를 하며 노트를 펼쳤다. 그런데 펜을 잡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긴장했다는 증거였다. 결국 펜을 내려놓고 손에 묻은 땀을 무릎에 문질렀다.

오늘 이 자리는 황궁에서 열리는 교수 초청 간담회였다. 그냥 교수들의 소모임 정도가 아니었으니 니아가 긴장하는 것은 당연했다.

딕시 댁스터는 평소처럼 평온했지만, 니아는 그녀가 속으로는 자신처럼 긴장하고 있을 거라 믿었다.

“교수님, 저희가 너무 일찍 온 건 아닐까요? 빈자리가 반이나 남아 있어요.”

니아가 허리를 기울여 딕시 댁스터의 귓가에 속삭였다.

서른 명 남짓한 교수들이 초청을 받았고, 열 명 정도의 조교들이 함께 초청을 받은 교수 간담회였다. 그들이 황족보다 일찍 와야 하는 건 당연했지만, 앉은 지 꽤 시간이 지났는데 교수들 중 반이 도착하지 않은 채인 건 좀 불안했다.

“니아.”

“네?”

“네 할 일이나 잘해.”

딕시 댁스터가 단호히 말했다.

“넵.”

순식간에 머쓱해진 니아는 다시 자세를 정돈했다.

“저, 교수님……!”

그러나 몇 초 지나지 않아 그녀는 다시 딕시 댁스터의 귓가에 속삭였다.

“또 뭐지, 니아 프레슬리?”

짜증스러운 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니아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교수님이 제일 어리신 것 같아요. 아직 안 오신 분들도 많지만, 이런 자리에 교수님께서 초청받으시다니, 저는 조교로서 너무…….”

“…….”

“감격스러워요.”

말하며 두어 번 고개를 끄덕인 니아 프레슬리의 입꼬리는 살짝 말려 올라가 있었다.

“아, 그리고 교수님. 제가 어제 교수 초청 간담회의 역사에 대해 알아봤는데요, 보통은 황자님과 황녀님만 참석하시지만 아주 가끔은 지나가던 황제 폐하께서 우연히 참석하시기도 한다는 이야기를…….”

“니아 프레슬리.”

또 한 번 낮은 목소리가 니아를 을렀다.

“네?”

“나가서 바람 한번 쐬고 와.”

니아는 커다란 창문을 바라보았다. 봄바람이 솔솔 불어오고 있었다.

“바람은 여기도 부는데요?”

딕시 댁스터가 휙 니아를 돌아보았다.

“……정신 차리고 오라고. ”

“넵.”

니아가 기계적인 미소를 지으며 일어섰다. 온몸이 뻣뻣했다. 그제야 자신이 긴장하다 못해 지나치게 흥분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교수님. 다녀올게요.”

니아가 의자에 펜과 노트를 놓으며 말했다.

딕시 댁스터는 무심히 덧붙였다.

“십 분 내로 돌아와.”

고개를 끄덕인 니아는 일어섰다. 정신을 차리자고 되뇌며 볼을 찰싹찰싹 때리며 나가는데, 어디선가 가벼운 바람 소리가 났다.

짜증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으리라 생각했던 딕시 댁스터의 눈이 의외로 희미하게 휘어져 있었다.

‘즐거우신가?’

어찌 되었건 전혀 긴장하지 않은 듯한 모습에 니아는 역시 딕시 댁스터 교수님이라고 중얼거리며 멀어졌다.

니아는 두 손으로 밀어도 무게감이 느껴지는 두툼한 황궁의 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묵직한 움직임과 함께 문이 여닫혔고, 그다음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기다란 복도였다. 니아는 천천히 걸어 바깥으로 나갔다.

‘정말 온통 황금색뿐이야.’

황궁은 외부뿐만 아니라 내부도 모두 황금색이었다. 회의장으로 안내를 받아 들어오는 내내 니아는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감탄했었다.

“아, 바보.”

그러다 오늘 내내 딕시 댁스터 옆에서 귀찮게 쫑알댔던 것이 기억났다. 교수님, 저 황금색 건물은 정말 황금으로 지었을까요? 교수님, 열 번쯤 오면 저도 황궁에 익숙해질 수 있을까요? 교수님, 어떤 분들이 오는지 들으신 바 없으세요? 교수님, 교수님, 교수님…….

“왜 바람 쐬고 오라고 하셨는지 알겠다.”

니아는 민망해 얼굴을 한번 쓸었다.

“이게 어떤 자리인데. 잘해야 해.”

니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쭉 폈다. 심호흡을 몇 번 내쉬고, 볼을 세 번 정도 착착 때려 주고, 목도 짧게 몇 번 돌렸다.

“교수님께 폐를 끼치면 안 되지.”

니아는 다시 건물로 들어가기 위해 돌아섰다. 그런데 등 뒤에서 어디선가 들어 본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니아 프레슬리?”

“누구……. 아!”

무표정하게 돌아본 니아는 그녀를 부른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하고 황급히 머리를 숙였다.

제국의 1황자 아론 엘로이였다. 백색에 가까운 머리칼, 초승달 모양으로 감기는 눈, 해사한 미소와 목소리. 그러나 니아와는 몇 년 전 아카데미에서 한번 인사를 나눈 것이 다인 사이.

그런 황자가 니아를 알아볼 줄은 몰랐다. 니아가 황자를 기억하는 것은 당연해도, 황자가 한낱 아카데미생을 기억할 리가 만무했으니까.

“……제국의 안녕이 어쩌고저쩌고, 이런 건 됐어. 고개도 좀 들어 봐. 땅으로 꺼지려는 게 아니면.”

“그래도 황자님께 어떻게…….”

니아가 쭈뼛대자 그는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돌연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소리가 잦아들 때쯤 아론 엘로이는 흥미롭다는 듯 중얼거렸다.

“초대했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그게 정말일 줄이야. 역시 행동력 하나는 최고라니까.”

니아는 말의 주어가 궁금해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초승달 모양의 눈과 마주치자 황공한 마음에 재빨리 다시 눈을 깔았다.

“자, 이 정도면 충분히 공손했어. 그러니까 고개 좀 들어 봐, 공작가 하녀…… 아니지. 남작? 조교?”

그는 니아가 공작가의 하녀였다는 것도 기억하고 있었다. 심지어 몇 년 전 남작의 지위를 받은 사실도.

니아는 작위를 선물받았으나 구태여 그 사실을 드러내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았다.

니아뿐만 아니라, 그녀가 작위를 받은 것이 세상에서 가장 큰일인 양 떠들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시간이 지나니 그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시들해졌다. 어쩌면 니아가 공작가를 나와, 필릭스 쿠아란과의 인연이 끊어졌다고 여겨서일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니아는 아론 엘로이가 그녀의 지위까지 알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러고 보니 조교인 사실도 알고 있네?

“……절 어떻게 기억하십니까?”

순수하게 묻는 니아 프레슬리를 향해 돌아온 것은 어처구니없다는 목소리였다.

“그럼 널 어떻게 까먹어?”

“……네?”

니아는 바보가 아니었으니, 황자가 자신의 기억력을 자랑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어떻게 말을 해야 예를 어기지 않는 범위 내에서 원하는 답을 들을 수 있을지 고민스러웠다.

니아가 할 말을 찾지 못해 우물쭈물하자 그는 또 소리 내 웃었다.

“하하! 하하하……. 어떻게 기억하냐니. 바보 같은 질문이야.”

니아는 황자의 해사한 미소를 힐끔 바라보았다. 계속 웃기만 하니 왠지 놀리는 것만 같았다. 그냥 알려 주면 될 것을 왜 질문에 질문으로 답하는지. 황족이란 분들은 원래 저런가?

“그건 제가 할 말인데요…….”

니아는 조심스럽게 꿍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도 아론 황자는 보기와는 달리 음흉한 구석이 있었다. 앞에 사람을 세워 둔 채 알 수 없는 말들을 하고 혼자 웃는다든지.

“물론 날 잊지 못했겠지. 나는 황자고, 황자가 아니라도 이 정도 미남은 흔치 않잖아.”

“제 말뜻은 그게 아닌……. 헉! 죄송합니다, 황자님.”

니아는 저도 모르게 반박하려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눈을 질끈 감고 입술을 악물었다. 그가 아무리 거리감 없이 굴어도, 그는 황자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는 거였다.

“또, 또.”

그러나 그는 니아의 태도가 지긋지긋한지 혀를 찼다.

혹시라도 황자의 심기를 거스른 건가 싶어 슬쩍 올려다보니 그의 입꼬리는 여전히 휘어져 있었다. 바라본 눈빛이 묘했다.

“솔직하게 말할게.”

“네.”

아론 엘로이가 웃음기 걷힌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네가 뭐가 그렇게 특별하지?”

또 한 번 예상치 못한 말에 니아는 천천히 고개를 올렸다. 아론의 고개가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었다.

“난 모르겠는데.”

“…….”

“곧 알 수 있으려나?”

아론 엘로이는 마지막 말을 힘주어 중얼거렸다. 마주친 눈빛이 조금 서늘했다. 그 시선이 콕 하고 박히자 니아는 더 이상 질문을 참을 수가 없었다.

“송구하지만 황자님, 마치 저한테 무언가…… 있다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응. 맞는데?”

“하지만 말씀하셨듯이 저는 그저 조교일 뿐이고, 비루하지만 남작 지위를 가지고 있는 것이 전부입니다.”

“맞다고.”

“그것 말고는 저한테 없는데요.”

“정말 그래?”

“네.”

그가 한 걸음 다가왔다.

“정말로?”

니아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그녀가 대답을 찾지 못해 입술을 달싹이는 사이, 아론 엘로이가 피식 하고 웃음소리를 내었다. 그리고 니아의 흰 뺨을 톡톡 하고 두드렸다.

“이상하네. 내 주변 사람들은 너한테 참 관심이 많던데.”

“…….”

“너도 모른단 말이지.”

아론 엘로이가 급기야 허리를 숙여 니아에게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그리고 은밀하게 속삭였다.

“그럼 이건 아나?”

“무엇을요?”

니아는 침을 꿀꺽 삼켰다.

“오늘 필릭스 쿠아란도 온다는 사실.”

“…….”

“이것도 몰랐나 보네.”

니아의 입은 대답을 하지 못한 채 작게 벌어져 있었고, 긴 소맷단 아래 숨긴 손은 둥글게 주먹을 쥐고 있었다.

그녀는 눈앞에 있는 사람이 황자라는 사실을 잊지 않기 위해 애를 썼다. 아무리 당황해도 그의 앞에서 책 잡힐 짓을 해서는 안 된다.

니아는 천천히, 또박또박 답했다.

“몰랐습니다. 공작님께서 오시는 줄.”

“이리 와 봐.”

황자가 갑작스럽게 그녀의 팔을 잡고 이끌었다. 니아는 건물 뒤편으로 맥없이 따라가다 정신을 차렸다.

“어디를…….”

그는 비좁은 옥내 계단을 올라섰다. 좁고 동그란 계단을 그의 속도에 맞춰 따라 올라가려니 숨이 찼다. 그러나 그렇게 어지러운 가운데에서도 오늘 필릭스 쿠아란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이 머리 한가운데 박혀 떠나지 않았다.

“저길 봐.”

아론 엘로이가 멈췄다. 니아는 숨을 들이쉬었다. 그의 손가락 끝은 작은 창문 너머를 가리켰다.

“너도 눈이 두 개 달렸으니 누군지 알겠지. 자, 어떻게 보여?”

조금쯤 예상했을지도 모른다. 그의 손끝이 가리키는 곳에 누가 있을지를.

그러나 그곳엔 예상치 못한 사람도 있었다.

필릭스 쿠아란과 금발의 여자. 두 사람이 함께 회의장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푸른 잔디를 당당히 밟으며.

두 사람 뒤를 여러 명의 시녀들이 따르고 있었고, 앞선 필릭스 쿠아란과 여자의 발걸음은 나란했다. 그리고 그의 오른팔은 여전히 어깨에 걸린 로브에 의해 보이지 않았다.

“공작님과…….”

황녀님이시군요.

니아는 목소리 끝이 갈라질 것 같아 말을 끝맺지 못했다.

“그래. 공작이 된 필릭스 쿠아란과 내 동생 클라우디아 엘로이다.”

니아는 입술을 잘근거렸다.

아론 엘로이는 재미있는 건지 신기한 건지 모를 이상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저 둘이 요새 붙어 다니거든. 어떻게 생각해?”

그 물음에 니아는 속으로 또 한 번, ‘모르겠습니다’를 중얼거릴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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