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필릭스 쿠아란
필릭스 쿠아란이 이미 비밀리에 제국에 당도했다는 이야기가 퍼진 지 이틀이었다. 그사이 공작은 죽음을 맞이했다. 겨우 외아들의 모습을 보고 갔다는 소문은 길거리에 파다했다. 소문의 진위 여부는 알 수 없었지만.
필릭스 쿠아란과 관련된 소문은 지난 사 년간 그랬다. 진실보다는 거짓이 더 많았고, 그 진실마저 부풀려지고 이리저리 왜곡되기 일쑤였다. 그마저도 니아에게는 모두 귀했으나.
“니아 프레슬리, 왜 이렇게 집중을 못 하지?”
딕시 댁스터가 낮은 목소리로 니아를 을렀다.
“아, 죄송합니다, 교수님.”
“온 제국이 들떴다고 너마저 들뜨면, 네가 다른 사람들이랑 다를 게 뭐야.”
“죄송합니다.”
니아는 다시 집중을 하기 위해 애썼다. 정신을 놓더라도 딕시 댁스터와의 실험은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후에 놓고 싶었다.
“아……!”
살리고자 했던 나무가 결국 죽고 말았다. 딕시 댁스터가 고글 너머로 니아를 찬찬히 내려다보았다. 고글의 유리를 뚫고 닿은 눈빛이 시렸다.
“그러고 보니 넌 공작가의 하녀였지.”
“……다시 해 보겠습니다.”
“게다가 공작가에서 작위도 받았고. 높은 작위는 아니었지만.”
“…….”
“공작은 죽었고, 그 아들이 공작이 되어 돌아왔다. 그런데 넌 그사이 공작가를 나왔고. 네 사생활이니 묻지는 않았지만, 일에 지장이 생긴다면 이야기는 달라져.”
“……죄송합니다, 교수님.”
“혹시 전 주인이 돌아와 두려운 건 아닌가?”
“네?”
니아는 예상치 못한, 그러나 정곡을 찌르는 그녀의 물음에 고개를 들었다.
“두렵지 않다면, 이런 태도는 뭐야.”
필릭스 쿠아란의 귀환 소식으로 에슬란 제국이 들썩이고 있었다. 공작의 죽음을 애도하는 이보다, 새 공작을 맞이하는 일을 기대하는 자들이 더 많았으니.
어차피 공작은 몇 년째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한, 이름뿐인 공작이었다. 이 모든 건 예상된 일이었다.
니아는 결국 긍정했다.
“맞아요. 두렵나 봐요.”
드디어 그가 돌아왔다는데, 혹은 돌아온다는데 좋은 동시에 두렵기도 했다.
“……모르겠어요. 정말 모르겠어요, 교수님.”
평소처럼 명랑하고 밝게 말하고 싶었는데 스스로 듣기에도 무척 울적한 목소리였다.
공작이 죽었다는 사실도 피부로 와닿지 않았으며, 필릭스 쿠아란이 건강하게 살아 돌아오는 날이 왔다는 것도 이상했다. 이상하리만큼 현실감이 없었다.
“오늘은 휴가야.”
“네?”
“못 들었어? 휴가라고. 계속 정신 나간 듯 굴잖아. 이틀 휴가를 줄 테니 정신 똑바로 챙겨서 와.”
더 이상 할 말 없다는 듯 딕시 댁스터는 쓰고 있던 고글을 벗어 던졌다. 통, 소리를 내며 고글은 의자에 튕기듯 안착했다.
니아는 그렇게 쫓겨나듯 댁스터 교수의 사무실을 벗어났다. 밝은 오후에 아카데미를 나선 니아의 발걸음은, 이리저리 헤매다 결국 어느 곳을 향했다. 현실감을 찾아서.
검은 옷을 입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검은 옷. 공작의 묘소에 온 수많은 귀족과 그 하인들이었다. 그들과 동떨어진 채 바라보고 있는 니아에게도 익숙하고 또 반가운 얼굴들이 몇 보였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설 수는 없었다.
공작이 죽은 지 며칠 지났는데도 여전히 그의 주변은 산 사람들로 북적였다. 그들이 둘러싼 한가운데 있는 것은 죽은 육신이 묻힌 땅, 그리고 꼿꼿이 세워진 커다란 묘비였다.
명복을 비는 찬송가가 주변에 울려 퍼졌다.
검은 망토를 입고 있어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눈에 띄지도 않고, 고개를 숙인 채 가만히 있으면 적절하게 공작의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처럼 보일 수 있어서.
니아 프레슬리는 망토를 뒤집어쓰고 얼굴을 모두 가렸다. 스스로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기에.
‘여기까지 왜 왔지.’
필릭스 쿠아란을 혹시라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로 온 것인지, 아니면 그저 공작의 죽음을 두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온 것인지 헷갈렸다. 둘 중 어느 현실을 쫓아온 것일까.
당장 눈앞에 놓인 것은 죽은 공작의 묘비였다.
‘사람은 죽어.’
니아는 당연한 사실을 속으로 되뇌었다.
공작은 지난 사 년간 많이 아팠다고 들었다. 길리에게서도 간간이 듣긴 했지만 쿠렐 공작은 지금껏 죽음의 고비를 넘긴 적이 수없이 많았고, 오히려 이만치 버틴 게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 만큼 그는 길게 앓았다. 제정신도 아니라고 했다.
그는 아들이 영웅이 되었다는 것도 몰랐을 수도 있다. 너무 늙고, 병들고, 아픈 나머지.
‘돌아가자.’
사람들이 흩어지고 있었다. 날이 점점 어둑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훌륭한 분이셨지. 아팠던 몇 년을 제외하고는 나라를 위해 사셨잖아.”
누군가 묘지를 떠나며 말했다.
“그럼. 오늘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 보니, 따듯한 분이셨다는 말이 많더라고. 여기저기 남모르게 좋은 일을 많이 하셨던 모양이야. 마지막엔 이렇게 가시니 참, 그렇긴 하지만 말이야.”
“그런 귀족들이 많아져야 할 텐데.”
훌륭한 분, 따듯한 분, 좋은 일…….
“……아니에요.”
니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네?”
“좋은 사람 아니라고요.”
“누가……. 설마 돌아가신 분을 모욕하는 건…….”
“따듯하지 않았어요. 아주 못되고, 잔인한 사람이었어요.”
“…….”
“누군가에겐 아니었을까요?”
나에게만 그렇게 모질었던 걸까요?
그는 니아를 그의 아들을 구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살려 놔야 하는 물건, 혹은 괴물쯤으로 여겼으니 그녀만은 예외였던 걸까. 그에게 니아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가, 가자…….”
떠나가는 그녀들을 붙잡지 못하고 니아는 중얼거렸다. 정제되지 못한 속마음이 툭 하고 튀어 나왔다.
“미운 사람.”
얼마나 그를 미워했던가. 괴물이라 부르고, 십 년간 니아를 가둬 두고, 협박하고, 가끔 보는 날은 혐오 어린 눈을 하고. 고맙다는 말 한마디 없이.
그것 때문에 니아는 누구라도 그녀의 정체를 알면 그녀를 공작과 같이 대하리라 생각했었다. 공작처럼, 그리고 그의 부하였던 모르트 독테처럼.
혐오의 눈길로 무시하거나, 아니면 짐승처럼 여겨 때리거나.
‘지금도 쉽지는 않아.’
아주 오래도록 그 생각에 잡혀 살았고, 스스로를 아끼기 위해 노력하는 지금도 가끔은 겁이 나곤 했다. 십 년간 그에게 받았던 혐오가 너무도 강렬했기에.
그는 니아를 괴물이라고 불렀지만, 니아에겐 그가 괴물이었다.
“미운 사람이야.”
니아는 한 번 더 중얼거렸다. 그렇게 말하고 나니 픽, 하고 짧은 웃음이 돌아왔다. 예전에 공작가에서 살 때는 밉다는 말조차 입 밖으로 내기가 쉽지 않았었다.
“사람은 죽어.”
니아의 영혼을 몇 번이나 죽인 사람이 떠나갔다. 사과 한마디 없이.
“공작은 죽었어.”
지난 사 년간 공작을 만나러 가지 않았던 건 여전히 겁이 났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요양을 끝내고 공작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에게 따져야 한다고, 꼭 사과를 받아 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도 쉽지 않았다. 그가 아주 병약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도 무언가 겁이 났던 것 같다.
막상 만났는데 처음처럼 거대하게 니아를 내려다볼까 봐, 혹은 그 아들의 팔을 잃게 만들었다며 원망할까 봐. 그게 다 뭐라고.
니아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잘 가라는 말은 못 해. 내가 너무 아팠으니까.’
니아는 숨을 내쉬었다. 고요한 공기에 그녀의 낮은 숨이 무심히 얹어졌다.
‘그래도……’
돌아서며 차분하게 눈을 감았다.
‘미움은 보내야지.’
미워하던 사람이 죽었다. 그러니 니아의 미움도 갈 곳을 잃었다. 이제 그것은 하늘로 날아갈 것이다. 멀리멀리.
미움에서 해방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니아는 이제 더 잘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는 마음이 들었다.
“쉬는 날이라고 하지 않았어?”
“쉬는 날이지. 일 년에 한두 번 있을까 말까 한.”
“쉬는 걸로 보이지 않는데.”
온 집 안에 종이를 펼쳐 놓고 무언가를 끄적이는 니아 프레슬리를 향해 레오가 여상히 말했다.
“잠이라도 더 자지 그래?”
레오가 좋은 아이디어라는 듯 눈을 반짝였다. 니아는 획, 그를 돌아보고 무심히 말했다.
“죽으면 평생 자.”
“……오늘은 졸리지 않구나.”
펜을 집어 던지고 마정석을 열심히 만지던 니아가 아예 바닥에 드러누웠다. 바닥 위를 뒹굴뒹굴 굴러다니던 그녀는 갑작스레 바닥에 머리를 콩 찧었다. 그리고 레오가 그 모습에 놀라기도 전에 외쳤다.
“레오, 나랑 어디 갈래?”
“어디?”
“좋은 곳은 아니야.”
“음, 비가 올 것 같은데. 우산을 챙겨 나갈 거면 미리 말해 줘. 꺼내 올게.”
“아니, 비가 올 것 같으니까 넌 집에 있어.”
“어디 가자며?”
“넌 안 돼.”
니아 프레슬리가 횡설수설했다. 그것도 단호한 목소리로.
레오 아리데오는 이랬다저랬다 하는 니아에게 화를 내는 대신 부드럽게 말했다.
“우산을 챙겨 줄게. 갔다 올 곳이 있으면 갔다 와.”
마치 그 말만을 기다린 사람처럼 니아 프레슬리는 벌떡 일어섰다.
막 망토를 챙겨 나서려다, 그녀는 조용히 레오를 불렀다. 목소리에서 들뜬 기색을 읽은 레오는 말해도 된다는 듯 눈짓했다.
“레오, 실은 말이야, 그러니까 필릭스 도련님이 돌아온 게 맞대.”
“아, 그래.”
낮은 목소리로 대답하는 레오를 향해 니아는 비장한 얼굴로 힘주어 말했다.
“이번엔 정말이야. 이상한 데서 들은 소식 아니고, 로망 아저씨한테서 들은 거야. 분명 황궁에서 봤다고 했어. 공을 치하받으려고.”
“……좋아?”
니아의 가슴이 거칠게 들썩였다. 행동으로 한 대답이었다.
“우산을 가져가, 니아. 비를 맞으면 안 되니까.”
“우산은 됐어. 레오, 좀 있다가 맛있는 저녁 먹자. 금방 돌아올게.”
고개를 몇 번 도리도리 저은 니아는 문을 박차고 나갔다. 우중충한 하늘을 눈에 담고 미간을 찌푸렸으나, 우산은 챙기지도 않고서. 그녀의 손에 들린 것은 오직 검은 망토 하나뿐이었다.
그렇게 공작의 묘비를 찾았던 다음 날, 니아는 미움 말고 다른 마음으로 다시 한번 그곳을 찾았다.
정말이지 어제와는 달리 날이 좋지 않았다.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고 바람도 날카로웠다. 니아의 마음과 딱 반대였다. 니아의 마음엔 어제 먹구름이 끼어 있었고, 오늘은 해가 뜰락 말락 했다. 작은 기대감으로 인해.
“……오늘도 없나? 역시 아직은 아닌가.”
애꿎은 흙을 차며 니아는 애타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두운 옷을 입은 사람들이 몇몇 보였지만 역시나 찾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눈동자는 열심히 그를 찾아 이리저리 움직였다.
“……황실에 있나. 거기 며칠이나 있는 건가.”
짙은 피로가 니아의 얼굴에 뱄다.
“그래, 못 만날 거야. 참, 이게 뭐람. 도대체 무슨 기대를 한 거야.”
스스로도 목소리에 묻어 있는 서운함을 느꼈지만 니아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등을 돌렸다.
애초에 공작의 장례가 다 끝난 마당에 그의 묘지에서 필릭스 쿠아란을 찾는 것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런 우연이 니아에게 찾아올 리 없었다.
“나도 가야지.”
앞으로 이곳에 오는 일은 더 이상 없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이곳에는 니아가 찾는 것이 무엇도 남아 있지 않았으니까. 더 이상 쿠렐 쿠아란 공작의 묘소에 헛걸음하는 일은 없어야 했다.
날씨가 끄무레한 탓인지, 얼마 남지 않았던 사람들도 돌아가는 모양새였다.
“어, 비……. 이런, 레오가 옳았어.”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다. 올려다본 하늘의 색이 무척 우울했다. 니아는 망토의 모자를 더 푹 눌러썼다.
빗방울이 더 거세졌다. 조금씩 빗방울이 스며드는 망토와 함께 회색빛의 묘비도 점차 검은색으로 어둑해져 갔다. 어제는 하얀색이었던 구름이 오늘은 먹구름인 것처럼 그렇게.
비가 천천히 무게감을 더해 가기 시작할 때, 니아는 비 사이로 한 인영을 보았다.
너무 멀리 서 있는데, 그래도.
“……도련님?”
얼굴도 확인하기 전에 말이 먼저 나갔다.
“필릭스 도련님?”
꽤나 먼 거리였다. 그러나 남자는 니아의 부름을 듣고 멈춰 섰다.
묘비를 찾은 그 남자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 사이에 거리가 꽤 있었고, 비가 내렸기에 그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필릭스 쿠아란이 맞았다. 니아가 그를 모를 리 없었으며, 그도 니아를 모를 리 없었다. 알아보지 못할 일 따위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얼마를 기다려 왔건, 두 사람 모두 순간의 당황은 피할 수가 없었다.
니아는 정적을 참아 냈다. 그를 기다린 사 년처럼 긴, 아주 긴 침묵을. 그러다 문득 그녀가 가장 애달파했던 것이 생각났다.
‘팔.’
니아는 홀린 듯이 그의 오른팔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의 어깨에 걸린 로브가 대각선으로 상체를 가리고 있어 제대로 확인할 수가 없었다. 홈이 파인 미간부터 시작해 얼굴 전체가 일그러졌다. 애가 타는 마음에.
“저, 팔은…….”
필릭스 쿠아란이 그곳에 서 있다는 것 외에 무엇도 확신할 수 없었다. 비가 시야를 가린 탓에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팔은 괜찮으세요?”
그러니 목소리도 닿지 않을 것이 뻔했다.
“팔은 괜찮…….”
한 번 더 말을 꺼내려다, 순간 목소리가 닿지 않아 오히려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팔이 괜찮을 리 없었다. 그가 왼팔의 기사가 되었건 얼마나 강하건 상관없이 그는 오른팔을 잃었다.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팔. 그게 어떻게 괜찮을 수가 있을까. 망토로 가린 것도 일부러일까?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서.
걱정이 비처럼 추적추적 쌓였다.
역시나 거리가 너무 멀었다. 그러나 지난 사 년간의 그들의 거리를 생각하면, 지금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것일지도 모른다.
니아는 비를 헤치고 한 발씩 걸어가기 시작했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발을 내디디며 솔직한 심정을 토해 냈다. 정말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머리가 뒤죽박죽이었다. 그녀의 이야기를 해야 할지, 그의 말을 들어야 할지,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얽히고설켜 머리통이 지끈 울렸다.
비를 헤치고 나아가니 점점 그의 얼굴이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잔상처럼 흐릿하기만 했던 필릭스 쿠아란의 얼굴이 조금씩 드러났다.
“여기 오면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다섯 걸음. 그와의 거리가 다섯 걸음 정도 남아 있었다.
얼굴이 보였다. 사 년 만에.
“아, 도련님이 아니구나.”
니아는 무심코 혼잣말을 했다. 그저 입술을 달싹이는 것 이상으로는 보이지 않았을 작은 목소리로.
“이제 공작님이신가요?”
소년미가 완전히 사라진 그의 얼굴은 남자의 것이었다.
오랜만에 보아 머리가 착란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그는 실로 달라져 있었다. 필릭스 쿠아란은 이제 도련님이 아니라 공작님이었고, 소년이 아니라 한 나라의 영웅이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마치 머리에 번개를 맞은 것처럼.
세 걸음.
그에게 닿기까지 남은 것은 단 세 걸음이었다.
문득 니아가 그를 향해 걸어가고, 횡설수설 말을 하는 동안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굳게 언 채로.
“……공작님은, 제게 하실 말씀이 없나요?”
두 걸음.
그는 답하지 않았다.
한 걸음이 남은 순간, 니아는 그의 얼굴을 읽었다. 그리고 그가 굳은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필릭스 쿠아란은 그녀를 마치 귀신 보듯 쳐다보고 있었다.
니아는 저 표정을 잘 알았다.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표정이다, 저것은.
그리고 필릭스 쿠아란은, 이 나라의 영웅은 그 길로 도망쳤다.
아무런 말도 없이.
“……그래서 이번에는 글로키시니아에 대한 연구를 더 해 볼까 해. 만약 그 별에 내가 생각하는 대로 외계 생명체가 존재한다면 천문학계에 길이길이 남을 업적을 세우는 셈이지. 에슬란 제국이 뒤집힐 거야.”
“…….”
“실은, 내 생각은 가설이라기보다는 확신에 가까워. 사실 학부 때부터 이 생각을 품고 살았는데, 사 년간 끊임없이 관찰한 결과 정말로 움직이는 물체들을 망원경으로 몇 번 확인했거든. 학계에 내로라하는 교수님들께 살짝 내 생각을 흘렸더니, 날 칭찬하기는커녕 탐을 내시더군. 너도 알겠지만 그 반응이야말로 최고의 칭찬이지.”
“…….”
“듣고 있어?”
“응.”
“내가 무슨 말을 했는데, 니아 프레슬리?”
니아는 시저 카르만을 힐끔 보고는 눈을 천천히 깜빡거렸다. 그러고는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느릿하게 답했다.
“대충 너 잘났다는 내용.”
“……제대로 들었네.”
시저 카르만이 손톱으로 식탁을 탁탁 치다가 남은 주스를 모두 한입에 털어 넣었다. 물기가 남은 입술을 쓸며 시저는 니아를 곁눈질로 살폈다.
슬며시 살펴보니 니아 프레슬리가 조명에 물컵을 이리저리 비춰 보고 있었다. 무지하게 심심하다는 증거였다.
쯧, 마땅찮다는 티를 한번 내고 시저는 고개를 털었다.
“내 얘기는 이쯤 할 테니까 네 얘기를 해 봐. 최근에 별일 없었어?”
니아 프레슬리는 대답은 않고 물컵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손을 들어 종업원을 불렀다.
“방금 먹은 본 요리 한 번 더 추가할게요. 아, 마늘을 곁들인 가재구이도 하나 더 주시겠어요?”
니아가 메뉴판을 종업원에게 건넸다. 종업원은 처음엔 살짝 당황했지만 곧 표정을 지우고 상냥하게 대답했다.
“다 먹은 거 아니었어? 방금 후식까지 끝냈는데, 우리.”
갑작스러운 추가 주문에 시저가 떨떠름하게 물었다. 그들은 지금 본 요리를 모두 먹고 후식으로 푸딩까지 먹은 참이었다. 그러나 니아 프레슬리는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무심하게 고개를 저었다.
“네가 산다며.”
“내가?”
“그랬잖아.”
“내가 언제?”
이런저런 이야기를 떠들었지만 그런 기억은 없었다. 따지려고 입을 벌리는 시저 카르만을 향해 니아 프레슬리가 낮게 중얼거렸다.
“넉 달 전 에스트리아 제국으로 답사를 가면서 그랬잖아. 돌아와서 밥 한번 살게.”
사 개월 전에 정말 그런 말을 했던가 곰곰이 생각하던 시저는 포기한 채 고개를 저었다.
“평범한 인사치레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모양이지?”
“응. 전혀.”
말을 말자. 시저 카르만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음식이 나오는 동안 네 얘기를 해 봐. 내키지는 않지만 오늘은 내가 사는 걸로 할게.”
“원래부터 네가 사는 거였다니까.”
“아, 쫌!”
시저 카르만이 벌컥 성을 내자 그제야 니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러고는 가볍게 말했다.
“돌아왔어.”
“누가?”
“아무리 오랫동안 제국에서 나가 있었더라도 그 정도는 알 거 아니야.”
니아 프레슬리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녀의 머리가 벽에 콩, 소리를 내며 닿았다 떨어졌다. 입은 웃고 있지만 눈빛은 침울했다.
시저 카르만은 옆 테이블을 살핀 후 낮게 속삭였다.
“필릭스 쿠아란?”
그의 이름을 말하자 니아의 입술이 비틀렸다.
“그래. 도련님이…… 아니, 새로운 공작님이지. 아무튼 돌아왔어.”
“안 그래도 물어보고 싶었는데 참고 있었어.”
시저는 니아가 먼저 필릭스 얘기를 꺼낸 것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동안 필릭스 쿠아란 말만 꺼내면 다른 데로 주제를 돌렸잖아.”
사 년간 니아와 시저는 꾸준히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서로가 어떤 진로를 향해 가는지, 어떤 꿈을 꾸는지, 그리고 어떤 교수가 가장 질이 나쁜지와 같은 시시콜콜한 얘기를 했지만 정작 필릭스 쿠아란의 이야기는 쉽게 하지 못했다. 말만 꺼내면 니아 프레슬리가 과장되게 밝은 척하며 주제를 돌렸기 때문이다.
“한동안은 말도 못 꺼내게 하더니. 왜, 이젠 돌아왔으니까 더 이상 필릭스 쿠아란의 이름이 금지어가 아닌 거야?”
“그래. 더 이상은 아니야.”
“놀라운 발전이군. 솔직히 묻고 싶은 게 엄청 많았는데, 그럼 하나하나 다 물어봐도 될까?”
“일단 해 봐.”
시저는 눈을 굴린 다음 천천히 입을 열었다.
“팔 얘기 꺼내도 돼?”
“……이미 해 놓고 뭘 물어봐, 시저 카르만.”
“그래. 그럼…… 필릭스 쿠아란의 팔이 너 때문에 그렇게 됐다는 소문이 있던데 진짜야?”
기대감에 찬 눈에 니아 프레슬리가 콧등을 잠시 찡그렸다가 폈다. 그러나 그녀는 금세 평정을 되찾곤 시저를 향해 빈정거렸다.
“그 소문은 사 년 전에 모두 끝난 거잖아. 아카데미에서 잠깐 떠돈 소문일 뿐인 거 너도 잘 알 거 아니야. 필릭스 도련님의 팔에 관련해서 소문이 얼마나 많았는데.”
“다른 소문보다 그게 제일 설득력 있어 보여서. 너도 알겠지만 난 평범한 소문에 휩쓸리는 타입이 아니지.”
“……말 안 할래.”
“솔직히 필릭스 쿠아란 팔을 잃게 한 일로 둘 사이가 틀어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어?”
“방금 내가 말 안 한다고 했잖아?”
니아 프레슬리가 싸늘하게 쏘아붙였다.
시저 카르만은 그대로 입을 벌렸다. 그는 물을 꿀꺽꿀꺽 마시고 고개를 몇 번 내젓고 나서야 다시 니아 프레슬리 쪽을 바라보았다.
“성질머리 하고는. 어떻게 성격이 매년 나빠져, 매년.”
“다른 거 물어봐.”
“첫 질문부터 대답하지 않을 거면 뭐 하러 물어보라고 했어?”
투덜대던 시저 카르만이 다음 질문을 이었다.
“왜 전쟁터로 떠났대? 그때, 사냥 대회가 무산되고 며칠 지나지 않아 갑자기 전쟁터로 갔잖아. 너도 꽤 오랫동안 보이지 않았고.”
“그건 정말 솔직하게 말할 수 있어.”
“오, 드디어! 의문이 여기서 풀리나?”
긴 앞머리 안의 시저 카르만의 눈이 기대감으로 빛났다.
“몰라. 전혀 몰라. 왜 떠났는지 몰라.”
“…….”
“진심이야.”
“대충 예상은 해 봤을 거 아냐?”
잠시 고민을 하는 듯하던 니아 프레슬리는 감정이 담기지 않은 목소리로 답했다.
“글쎄. 영웅이 되고 싶었던 걸까?”
“……굳이?”
공작가 아들씩이나 되면서 굳이? 그 시기에?
시저의 ‘굳이’에는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니아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애매하게 감도는 웃음을 지워 내려는 듯 냅킨으로 입가를 톡톡 두드려 닦았다.
시저 카르만의 시선이 그녀가 내려놓은 냅킨 쪽으로 향했다 다시 니아 프레슬리에게로 향했다.
그녀는 여전히 아무것도 제대로 답해 주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오히려 정답 없는 대답으로 무언가를 시저에게 털어놓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시저가 여전히 미궁 속에 빠져 있는 것과는 별개로.
잠시 니아 프레슬리를 보며 그런 생각을 하다가, 시저는 부드럽게 말했다.
“……널 좋아했잖아.”
“그랬지.”
“그러니까 넌…….”
“주문하신 요리가 나왔습니다. 마늘을 곁들인 구운 가재 요리도 금방 더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음식을 가져온 종업원 때문에 잠시 말이 끊겼다.
먹기 위해 다시 자세를 바로잡은 니아 프레슬리가 양손에 포크와 나이프를 쥐었다. 더 이상 배에 공간이 남지 않은 시저는 니아가 음식을 입에 넣자마자 다시 말을 이었다.
“다시 물어볼게. 필릭스 쿠아란이 공작이 되어 돌아왔잖아.”
“…….”
“돌아온 지 거의 한 달이 다 되어 가고. 맞지?”
입안에 음식을 가득 집어넣은 니아는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정리해 보면, 너는 필릭스 쿠아란이 왜 떠났는지 사 년이 지난 지금도 모르고, 그가 에슬란에 돌아온 지 한 달이 다 되어 가는데도 몰라.”
“…….”
“팔에 대한 이야기는 아직도 말해 주기를 꺼리는 걸로 보아 뭔가 있긴 한데. 아무튼.”
니아 프레슬리가 힘없이 포크를 내려놓았다. 그러나 여전히 한쪽 손에는 칼이 들려 있었다.
혹시 말을 잘못했다간 저걸 나한테 던질까? 시저는 잠시 그런 상상을 하다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럴 가능성은 현저히 낮았으며, 만약 그렇다 하더라도 할 말은 해야 했다.
“그럼 만나서 말을 해 보면 되잖아? 오해가 있다면 풀고, 사과할 게 있다면 사과하고. 내가 볼 때 넌 필릭스한테 악감정이 없고, 필릭스도 내 기억으론 널 엄청나게 좋아했으니까…….”
무심한 듯한 말투였지만 꼭 니아를 걱정하는 것 같았다. 어떠한 해답을 니아에게 꼭 주어야 한다는 듯이.
“다 괜찮지 않을까?”
힘이 없는 줄 알았는데. 니아 프레슬리가 손에 쥐고 있던 나이프로 가재의 머리를 푹 찔렀다. 이미 죽은 가재의 머리통은 두 갈래로 쩍 하고 찢어졌다.
“찾아오지를 않아.”
“뭐?”
“그렇게 가 놓고…… 날 보러 오지 않는다고.”
“아, 그게 문제구나.”
시저 카르만이 짧게 중얼거렸다.
필릭스 쿠아란은 귀신을 본 듯한 얼굴로 도망쳐 놓고는 다시는 니아 프레슬리를 보러 오지 않았다. 그가 제국에 머문 지 한 달이 지났는데도.
그러니 그는 말도 없이 두 번이나 니아를 떠난 셈이다. 물음표만 한가득 찍어 두고서.
“네가 보러 갈 생각은 하지 않는 거야?”
“보러 갔었어. 할 말이 너무 많았거든.”
니아는 공작의 묘지에 이틀이나 갔었다. 하루는 공작 때문에, 하루는 필릭스 때문에. 그리고 정말 그를 만나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런데?”
“……안 보느니만 못했던 것 같아.”
그런 두려운 표정 따위, 안 보느니만 못했다.
“그래도 넌…….”
기다리고 있는 거잖아.
시저는 그 말을 입안으로 삼켰다.
“내가 말했잖아. 난 보러 갔다고.”
“……바쁘겠지. 곧 보러 올 거야. 너만 봐도 할 말이 많아 보이는데.”
시저는 위로를 건넸다.
“잘 모르겠어, 이젠.”
니아는 다시 입속으로 음식을 욱여넣었다. 우물거리며 씹고 있으니 긴 시선이 느껴졌지만, 다시 고개를 들지는 않았다.
니아는 필릭스 쿠아란이 못 오는 게 아니라, 안 오는 걸까 봐 두려웠다.
“잘 들어가.”
시저 카르만이 손을 흔들었다. 니아도 희미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다음엔 네가 밥 사고!”
장난스럽게 마지막 인사를 나누며, 그들은 각자 돌아섰다.
한 달이 지났다.
니아는 그 사실을 다시 머릿속에 떠올렸다.
필릭스 쿠아란은 돌아왔다. 그러나 니아는 여전히 그를 만날 수 없었다. 이제 그녀는 공작가에서 살지 않았으니까. 그와 아카데미를 함께 다니는 것도 아니니 더 이상의 접점도 없었다.
사실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정말 두려운 것은, 필릭스 쿠아란이 정말로 니아를 안중에도 두지 않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걱정 말라고 했던 그 말, 그 말로 필릭스 쿠아란은 사 년 전 모든 것을 끝내고 떠났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십 년 동안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알아야 할 거 아니야…….”
그 일은 모르고 니아 프레슬리의 정체만 알게 되다니, 너무 억울했다. 게다가 겨우 걱정하지 말란 말을 끝으로 이렇게 그녀와 다시는 보지 않겠다고?
니아는 정말 대화를 하고 싶었다. 아니, 실은 그가 한 번 더 보고 싶었다. 비 오는 날 말고 맑은 햇빛 아래에서.
힘없이 걷는 걸음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니아는 일부러 다리에 있는 힘껏 힘을 주었다. 그렇게 꾹꾹 땅과 대결하듯 걷다 보니 어느새 집 앞이었다.
“어, 비뚤어져 있다.”
문 앞에 선 니아는 비뚤어진 문패를 바라보았다. 언젠가 레오가 집에는 문패가 있어야 하는 법이라며 달아 놓은 것이었다.
굳이 필요는 없었지만, 어쩐지 집을 꾸미는 레오가 무척 즐거워 보여 아무런 토도 달지 않았다. 그렇게 몇 년째 니아와 레오의 집에 달려 있는 문패였다. 그들의 이름이 차례로 각인되어 있는.
그런데 문패의 위치가 이상했다. 언제나 중앙에 평평하게 위치해 있던 것이 티가 나게 기울어 있었다.
“바람 때문인가.”
니아는 두 손으로 문패를 제 위치로 옮겨 두었다. 그리고 레오가 잘까 싶어,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다음 날, 니아는 평소보다 훨씬 일찍 사무실로 향했다. 그런데 딕시 댁스터 교수는 그녀보다 더 일찍 온 것인지, 아니면 퇴근을 하지 않은 것인지 이미 의자에 앉아 있었다. 아니, 누워 있었다고 해야 하나.
흐트러짐 없는 딕시 댁스터는 아주 가끔, 이렇게 멍한 얼굴을 보여 주곤 했다.
“여기서 주무셨어요?”
“응.”
어쩐지 그녀의 얼굴에 깊게 내린 다크서클이 며칠 전의 니아와 비슷해 보였다.
“창문 좀 열게요.”
니아는 대답도 듣지 않은 채 사무실의 창문이란 창문은 모두 열었다. 새가 지저귀는 소리와 함께 햇빛이 부서져 내렸다. 딕시 댁스터는 잠시 인상을 찌푸렸지만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아침의 향기를 거하게 한번 맡고 자리로 돌아온 니아는 조교 책상에 놓여 있는 고급 종이를 보고 의아해졌다.
“교수님, 초대장이 왔어요. 근데 왜 제 자리에 있죠? 아…… 제 이름으로 되어 있네요?”
“네가 초대를 받았으니까.”
빠르게 대답이 돌아왔다.
“……제가요?”
니아 프레슬리가 초대장의 탄탄한 모서리를 매만졌다. 교수 초청 간담회. 심지어 황궁에서 온 초대장이었다. 수려한 글씨체로 니아의 이름이 각인되어 있었다.
이름이 적혀 있으니 잘못 온 것은 아닌 것 같은데…….
“그래. 황궁에서 초대장이 날아왔어. 내 몫과 너의 몫.”
“왜요?”
“황자와 황녀, 그리고 교수들이 한자리에 모여 이런저런 잡다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그러니까 그 자리에 저도 간다고요?”
딕시 댁스터는 아무렇지 않은 듯 가볍게 이야기했지만 니아의 귀에는 심상치 않게 들렸다.
속에 있던 생각이 툭 튀어 나갔다.
“그치만 전 일개 조교인데요?”
“가끔 조교들도 초대를 받곤 하지. 젊은 인재들의 신선함을 바라는 시각이 존재하니까. 물론 어디까지나 겉치레일 뿐이지만.”
“……와.”
가끔 딕시 댁스터는 교수들과 함께 황궁에 가는 일이 있었다. 그러나 지난 몇 년간 니아가 그 모습을 본 것은 손에 꼽았다. 즉, 딕시 댁스터에게도 쉽게 오는 기회가 아니라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그녀의 조교인 니아까지 초대를 받다니.
“저, 교수님. 꼭 가야 하는 건가요?”
무심하게 말하던 딕시 댁스터가 이번엔 니아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자세를 바로 했다. 그러고는 의외라는 듯 중얼거렸다.
“거절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는데. 왜, 가고 싶지 않나?”
니아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좀 믿기지가 않아서…….”
우물쭈물 대답하는 니아를 향해 딕시 댁스터는 기지개를 가볍게 켜며 다가왔다.
“나도 황실에서 열리는 교수 간담회에 가는 건 처음이야. 그러나 뭐, 별다를 건 없겠지.”
“…….”
“그러니까, 갔다 와서는 정신 좀 차리고 제대로 생활해. 네가 거기를 갔다 와서 좀…… 자극을 받았으면 좋겠군.”
니아는 한 달 내내 무척 열심히 일하고, 할 일을 단 하나도 빼놓지 않았는데도 딕시 댁스터의 눈에는 차지 않았던 모양이다. 무서운 사람이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몇 년을 지켜보니 이것이 딕시 댁스터만의 애정 표현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대답?”
퍼뜩 집 나갔던 정신이 돌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네, 교수님! 저 꼭 데려가 주세요.”
니아 프레슬리는 명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나 딕시 댁스터가 움직이지도, 시선을 떼지도 않자 뻘쭘해진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뭐 필요하신 거 있으세요? 차라도 타 드릴까요?”
옆 방 조교의 말이 떠올랐던 것이다. 교수님들은 절대로 원하는 바를 입으로 말하지 않고 오직 눈빛으로 이야기하시며, 눈으로 하는 이야기를 듣는 것이 조교의 가장 큰 임무라고 말했던 그녀.
대개는 ‘차를 타 드릴까요’, 혹은 ‘허기지시면 음식을 좀 가져올까요’가 정답률 구 할에 육박하며, 그 외에는 교수님의 논문을 대신 쓰기부터 시작해 가족의 경조사를 챙기기까지 무척 다양했다.
“차?”
딕시 댁스터는 못 들을 얘기를 들은 것처럼 미간을 구겼다.
“아, 아니면 음식이라도 좀 가져올까요? 허기지시면요.”
니아가 재빨리 다른 대안을 말하자 그녀는 또다시 눈을 부릅떴다.
“혹시 내 손발이 부러진 걸로 보여?”
“네? 아니요.”
재빨리 대답했으나 그녀의 표정은 펴지지 않았다.
“네가 내 차나 타 올 만큼 한가하냐고. 일이 적어?”
아, 언제나 예외 사항은 있는 법이었다. 딕시 댁스터는 단 한 번도 그런 부탁을 한 적이 없었다. 그녀는 그녀의 일을 누군가 대신 해 주는 것을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행위라고 여기는 사람이었다.
“아뇨. 아니죠. 죄송해요.”
“네 할 일이나 잘해.”
누군가는 딕시 댁스터의 차가운 말투에 상처받을지도 모르지만, 곁에서 오랫동안 그녀를 지켜본 니아에겐 너무도 익숙한 말이었다. 네 할 일이나 잘해.
니아는 웃으며 초대장을 손에 쥐고 흔들었다.
“그럼요, 댁스터 교수님. 걱정 마세요!”